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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식(Sabbath) -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


“그러면 성스러움을 감지하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안식일 법규의 준수를 엄격히 고집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목표는 안식을 창조하여 낙원을 미리 맛보는 것이다. 안식일은 낙원을 암시하는 은유이며, 하나님의 현존하신다는 증언이다.


“안식일의 맛을 즐기는 법을 익히지 않으면 이 세상에 임하는 영원의 맛을 누리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세계에 영혼을 부여하신 날은 일곱째 날이었다. “이 세계의 생존은 일곱째 날의 거룩함에 달려 있다.” 우리의 과제는 시간을 영원으로 변화시키고 우리의 시간을 영을 가득 채우는 것이다. “우리는 한 주에 엿새 동안은 땅에서 이윤을 짜내며 이 세계와 씨름하지만 안식일에는 영혼 속에 심겨진 영원의 씨앗을 각별히 보살핀다. 우리의 손은 이 세계에 속해 있지만 우리의 영혼은 누군가 다른 분의 것이다.”


머리말- 시간의 건축술


공간의 세계에 대한 지배력을 획득하는 것은 확실히 우리의 과업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우리가 공간의 영역에서 능력을 획득하다가 시간의 영역에 있는 모든 열망을 상실할 때 위험이 시작된다. 시간의 영역에서는 소유가 아니라 존재가, 움켜쥠이 아니라 내줌이, 지배가 아니라 분배가, 정복이 아니라 조화가 목표다. 공간을 지배하고 공간의 사물을 획득하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관심사가 될 때 삶은 망가지고 만다.


공간의 사물에 사로잡힌 정신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모든 활동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심지어 종교까지도 신이 공간속에, 곧 산이나 숲이나 나무나 돌처럼 특정한 장소에 살고 있다는 생각의의 지배를 종종 받는다. 그 결과 그런 장소들이 성소로 선정된다. 그때부터 신은 특정한 장소에 매이게 되고 성스러움은 공간의 사물과 연관된 속성에 매이게 된다. (그분은 영이아닌 사물이라도 된다는 듯이 말이다)

신성한 것을 존속시키고 신의 현존을 영속화하기 위해 신상이 제작된다. 하지만 만들어진 신, 감금된 신은 인간의 그림자일 뿐이다.

우리는 너나없이 공간의 광채, 사물의 화려함에 현혹된다....


물성의 결과는 자신의 신원을 사물이라고 밝히지 않는 모든 실재를 깨닫지 못하게 한다. 그것은 우리의 시간 이해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시간은 비물질적이고 실체가 없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시간이 마치 실재를 갖고 있지 않는 것처럼 생각한다.


우리가 영성 생활을 하는 이유는 풍부한 지식을 축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거룩한 순간들을 마주하기 위해서다. 사람을 감복시키는 것은 사물이 아니라 영적인 현존이다. 영혼 속에 갈무리되는 것은 통찰의 순간이지 행위가 일어난 장소가 아니다. 통찰의 순간은 행운이다. 극서은 우리를 측정된 시간의 한계 너머로 데려간다. 시간 속에서 영원한 것의 위대함을 감지하지 못하면 영적인 삶은 쇠퇴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사물이 순간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이 사물에게 의미를 부여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유대교는 시간의 성화를 목표로 삼는 시간의 종교다.

유대교는 우리에게 시간 속의 거룩함, 신성한 사건들에 애착심을 가지라고, 한 해의 장엄한 흐름에서 솟구치는 성스러운 순간들을 성화하는 법을 배우라고 말한다. 매주 맞이하는 안식일이야말로 우리의 대사원이다. 우리의 지성소는 로마 사람들과 독일 사람들이 태워없애지 못한 성역, 배교라는 것이 쉽게 말살하지 못한 성역이다. 그 성역은 다름 아닌 속죄일이다. 고대 랍비들은 인간이 회개할 때 인간의 죄를 벗겨 주는 것은 속죄일의 준수가 아니라 속죄일의 정수인 속죄일 자체라고 말했다.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의미심장한 형식의 예술, 곧 시간의 건축술이야말로 유대교 전례의 특징이다. 안식일, 신월제, 축절들, 안식년과 희년 등 유대교의 전례 관습 대다수는 하루의 특정한 시간 내지 한 해의 특정한 계절과 관계가 있다. 예컨대 저녁과 아침, 혹은 오후가 되면 기도를 바쳐야 한다. 신아의 주요 주제는 시간의 영역에 있다. 우리는 이집트에서 탈출한 날을 기억하고, 이스라엘이 시내 광야에 섰던 날을 기억한다. 우리의 메시아 대망은 날들의 끝에 있는 한 날에 대한 대망이다.


카도쉬-qadosh "거룩한“


카도쉬라는 고귀한 단어는 창세기에 단 한 번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창조 이야기가 끝나는 대목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셨다”는 말씀에서 보듯이 이 단어가 시간에 적용되었다는 것은 실로 의미심장한 사실이다. 창조 기록 속에는 공간 속의 어떤 대상이 거룩함의 특성을 부여받았다고 언급하는 대목이 없다.

이것은 기존의 종교적 사고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신화적 사고방식은 하나니이 천지를 창조하신 뒤에 성전을 세울 만한 성스러운 장소-성스러운 산, 성스러운 우물-를 창조하실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성서에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은 시간 속의 거룩함, 곧 안식일이었다.


역사가 시작될 때, 이 세계에는 단 하나의 거룩함, 곧 시간 속의 거룩함만이 존재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은 시내 산에서 말씀하시면서 인간 속의 거룩함을 요구하셨다. “너희는 내게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공간 속의 거룩함, 곧 성막을 짓도록 명하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사물 숭배, 금송아지 숭배의 유혹에 굴복하고 난 뒤에 일어난 일이다. 시간의 성스러움이 가장 먼저 왔고, 그 다음으로 인간의 성스러움이 왔으며, 공간의 성스러움은 가장 나중에 왔다. 시간을 성화하신 분은 하나님이었고, 공간 곧 성막을 성별한 이는 모세였다.


1. 시간속의 궁전


안식일의 거룩함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속물근성, 곧 시끌시끌한 흥정과 수고의 멍에를 내려놓아야 한다. 불협화음으로 소란스런 날들, 신경질 부리며 맹렬히 타오르는 소유욕, 자신의 생명을 배반하고 야금야금 갉아먹는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손으로 하는 일에 작별을 고하고, 이 세계가 이미 창조되었으며 인간의 도움이 없어도 살아남으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한 주에 엿새 동안은 땅에서 이윤을 짜내며 이 세계와 씨름하지만, 안식일에는 영혼속에 심겨진 영원의 씨앗을 각별히 보살핀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 가운데 가장 마지막 작품이자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 가운데 가장 첫 번째 작품”인 안식일이야말로 “천지창조의 목적”이다.


안식일은 평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평일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다. 안식일은 삶의 막간이 아니라 삶의 절정이다.


하나님의 세 가지 행위야말로 일곱째 날의 의미였다. 그분은 이렛날에 쉬셨고, 이렛날을 복되게 하셨으며, 그날을 거룩한 날로 삼으셨다(창 2:2-3) 노동의 금지에 즐거운 강복과 거룩함의 강조가 추가되었다. 사람의 손만이 그날을 경축하는 것이 아니다. 혀와 영혼도 안식일을 축하한다.


노동이 하나의 기능이라면, 완전한 쉼은 하나의 예술이다. 완전한 쉼은 육체와 정신과 상상력의 조화로 이루어진다.


일곱째 날은 우리가 세우는 시간속의 궁전이다. 그것은 영혼과 기쁨과 과묵함으로 이루어진다.  일곱째 날의 분위기에서, 자제(abstentions)는 영원에 근접하고 있음을 상기시키는 자다. 시고 그날을 빛내는 것은 자제라는 덕목이다.


하나님을 닮은 것은 어디에서 발견되는가? 공간은 하나님과 공통되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하나님을 닮은 것은 시간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시간은 변장한 영원이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시간이라는 화폭 위에 신비하고 장엄한 장조의 절정을 그리는 것과 같다.


살아있는 사람안에서 육체와 영혼이 하나이듯이, 실제적인 것과 영적인 것도 하나다. 율법이 존재하는 것은 길을 깨끗이 하기 위함이고, 영혼이 존재하는 것은 영을 감지하기 위함이다.


“안식일은 두 세계, 곧 현세와 내세를 생각나게 한다. 안식일은 두 세계의 모범이다. 왜냐하면 안식일은 기쁨, 거룩함, 안식이기 때문이다. 기쁨은 현세의 일부이고, 거룩함과 안식은 내세와 관계가 있다. 


“안식일”(Sabbath)이라는 단어의 뜻은 무엇인가? 몇몇 사람은 안식일이라는 단어가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말한다.


안식일은 시간속의 궁전과 같다. 그것은 하나의 날짜가 아니라 하나의 분위기다.

그것은 특이한 의식상태가 아니라 색다른 분위기다. 안식일은 모든 사물의 모습이 다소 바뀐 것처럼 보이는 날이다. 가장 먼저 깨닫게 되는 사실은 안식일이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안식일 속에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창 2:2)라는 표현은 수수께끼 같아 보인다. ”일곱째 날에 쉬셨다“고 하지 않았는가? 또한 ”주께서 엿새 동안 천지를 창조하셨다“(출20:11)고 하시 않았는가? ..분명히 고대의 랍비들은 일곱째 날에 또 하나의 창조 행위가 있었다고 결론지었다. 엿새 동안 천지가 창조되었듯이, 일곱째 날에 메누하(menuha, 안식)가 창조되었다.

“엿새 동안 창조가 이루어진 뒤에 우주에 무엇이 엇었는가? 메누하가 없었다. 안식일이 되자 메누하가 왔다. 그리하여 우주가 완전해 졌다.”

보통 “휴식”으로 풀이되는 메누하에는 노동과 수고를 그만두는 것 이상의 의미, 힘든 일과 피로와 여하한 종류의 활동에서 벗어나는 것 이상의 의미가 들어 있다. 메누하는 부정적인 개념이 아니라 실질적인 무엇, 본질적으로 적극적인 무엇이다. 이것은 고대 랍비들의 관점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들은 메누하가 특별한 창조 행위를 낳았고, 그것이 없이는 우주가 완성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곱째 날에는 무엇이 창조되었는가? 평온, 고요, 평화 그리고 휴식.”

성서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에게 메누하는 행복, 고요, 평화, 조화와 같은 것이다.


그것은 투쟁이나 싸움이나 두려움이나 불신이 없는 상태다. 메누하야말로 선한 삶의 요체다.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아쉬움 없어라.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the waters of menuha)로 인도하신다” 후대에 이르러 메누하는 내세에 있을 삶의 동의어, 영생의 동의어가 되었다.


엿새 동안의 저녁을 맞으려할 때-“우리의 출입을 지켜 주소서”

안식일 저녁의 기도 - “당신의 평화의 장벽으로 우리를 감싸주소서”


2장 문명을 넘어서


자유를 위해 떼어 놓은 한 주의 한 날, 곧잘 파괴의 무기로 둔갑하는 도구들을 사용하지 않는 날, 자신을 돌아보는 날, 속된 것을 멀리하는 날, 형식적인 의무에서 벗어나는 날, 기술 문명의 우상들을 숭배하지 않는 날, 돈을 쓰지 않는 날, 이익을 얻고자 동료인간 및 자연세력과 싸우다가 휴전하는 날, 그날이 바로 안식일이다. 안식일만큼 인간의 진보에 큰 희망을 주는 제도가 있는가?


광포한 시간의 대양, 격렬한 수고의 대양 한가운데 고요의 섬이 떠있다. 우리는 그 섬의 항구로 들어가서 자신의 존엄성을 회복한다. 그 섬은 일곱째 날이자 안식일이며, 사물과 도구와 실용적인 업무에서 벗어나 영을 사모하는 날이다.


우리는 안식일의 모든 시간을 “매혹, 은총, 평화, 사랑속에서” 보내야 한다. “왜냐하면 안식일에는 지공에 있는 악인조차 평화를 얻기 때문이다.” 안식일에 화를 내는 것은 죄를 갑절로 지슨 것이다. “안식일에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불도 피우지 말지니라”(출35:3). 이 구절의 의미는 다음과 같이 해석된다. “너희는 논쟁의 불을 지펴서도 안되고, 화를 내어서도 안된다.” 안식일에 우리는 어떠한 불도 지펴서는 안 된다. 의분이라는 불조차 지펴서는 안된다.

안식일은 걱정하거나 근심하는 날이 아니며, 즐거운 기분을 떨어뜨리는 어떤 활동도 하지 않는 날이다. 안식일은 죄를 떠올리고 고백하고 뉘우치는 날이다. 안식일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위안이나 무언가를 달라고 청하는 날도 아니다. 이날은 찬양하는 날이지 요청하는 날이 아니다. 안식일에는 금식, 애도, 슬픔의 표시를 해서도 안된다. 상중이라도 안식일에는 잠시 멈추어야 한다. 안식일에 병자를 방문하는 사람은 이렇게 말해야 한다. “오늘은 안식일이니 불평해서는 안됩니다. 곧 낫게 될 것입니다.” 안식일에는 수고와 피로를 삼가야 한다. 심지어 피로를 느낄 만큼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도 삼가야 한다.


안식일은 조화와 평화를 이루는 날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평화를 이루고, 인간 내면에 평화를 이루며, 만물과 평화를 이루는 날이다. 일곱째 날에 인간은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를 주무르거나 물리적인 사물의 상태를 변경할 권리가 없다. 이날은 사람과 동물 모두가 안식하는 날이다.


안식일은 정전(停戰)이상의 날, 막간(幕間)이상의 날이다. 이날은 인간과 세계의 조화를 깊이 자각하는 날이며, 만물에게 동정심을 품고 아래 있는 것과 위에 있는 것을 하나 되게 하는 분위기에 참여하는 날이다. 이 세계에 있는 모든 신성한 것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날, 그것이 바로 안식일이다. 안식일이야말로 우주의 진정한 행복이다.


“너희는 엿새 동안 모든 일을 힘써 하여라”(출23:9). 사람이 엿새 동안 자신의 모든 일을 하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우리가 하는 일은 늘 미완의 상태로 머물지 않는가? 앞에 인용한 구절이 전하고자 하는 뜻은 이것이다. 곧 “안식일에는 너희 모든 일이 완성되었다는 듯이 안식하라”는 것이다. 달리 해석하면, “노동에 대한 생각조차 하니 말라”는 것이다.


3장. 공간의 화려함


랍비 시므온은 알고 있었다. 시간을 공간과 맞바꾸는 자가 영원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시간을 영으로 채울 줄 아는 자가 영원을 획득한다는 것을. 그에게 중요한 것은 공간이 아니라 시간이엇따. 그가 과제로 삼은 것은 공간을 건물과 다리와 도로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영원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해결의 열쇠는 기하학과 토목에 있지 않고 토라 연구와 기도에 있다.



5장 당신은 하나입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출 20:8)

거룩하게 하다 - le-kadesh 탈무드 어법에서 한 여인을 성별하는 것, 약혼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안식일이 아무리 숭고하다고 해도 그 자체로 충분한 것은 아니다. 안식일의 영적 실재는 인간과의 교제를 요구한다. 이 세계에는 하나의 크나큰 갈망이 있다. 여섯 날은 공간을 필요로 하고, 일곱째 날은 인간을 필요로 한다. 영이 홀로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스라엘이 안식일의 배필이 되어야 했던 것은 그 때문이다.

이 세계에 양면이 있듯이 안식일에도 양면이 있다. 안식일은 인간에게 뜻 깊은 날이면서 하나님에게도 뜻 깊은 날이다. 안식일은 하나님과 인간 모두에게 관계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 곧 양자가 계약을 체결했다는 표시다. 무엇이 그 표시인가? 하나님께서 그날을 거룩한 날로 삼으셨고, 인간은 그날을 거듭 성화하고, 자기 영혼의 빛으로 그날을 빛내야만 한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은혜로 거룩하지만, 인간이 부여하는 거룩함도 필요로 한다.


안식일은 신부이고, 그 의식은 결혼식과 같다.

“미드라쉬는 안식일이 신부와 같다고 가르친다. 신랑에게로 다가오는 신부가 사랑스럽고 아리땁고 향기롭듯이, 안식일도 사랑스럽고 향기롭게 이스라엘에게로 다가온다. 성서에는 ;주께서 일곱째 날에 일을 마치고 쉬셨다‘(출 31:7)고 기록되어 있으며, ’주께서 모세에게 켈칼로토(kekalloto)를 그의 신부로 주셨다‘는 구절이 뒤를 잇고 있다 (켈칼로토는 ’마친 때‘를 의미할 뿐 아니라 ’신부‘를 의미하기도 한다) 주께서 켈칼로토를 주신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을 가르치시기 위해성T다. 곧, 신부가 사랑스럽고 아리땁듯이 안식일도 사랑스럽고 아리따우며, 신랑이 가장 좋은 옷을 입듯이 우리도 안식이에 가장 좋은 옷을 입어야 하며, 하객들이 혼인 잔치 기간 내내 즐거워하듯이 우리도 안식일에 즐거워해야 하며, 신랑이 혼일에일을 하지 않듯이 우리도 안식일에 일을 삼가야 한다는 것이다. 고대의 현인들과 성인들이 안식일을 신부라고 부른 것은 그 때문이었다.


6장 한 날의 현존


여왕이나 신부처럼 안식일을 지칭하는 개념은, 안식일을 의인하한 것이 아니라, 신적인 속서을 예시한 것이며, 하나님이 인간의 사랑을 필요로 하신다는 것을 예시한 것이다. 그 개념은 실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현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한 비유적 예시는 하나의 사실을 말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가치를 말한 것이며 안식일 자체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말로 표현한 것이다. 안식일 준수는 한 계명을 이행하는 기법 그 이상이다.

안식일은 이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현존, 인간의 영혼에 개방된 하나님의 현존이다. 영혼은 애정을 다해 응답하고, 성별된 날과 교제할 수 있다.

일곱째 날은 아름다움과 위엄이 넘치는 날이자, 경외와 주목과 사랑의 대상이다. 안식일이 시작되는 금요일 저녁이면 마음과 영혼과 혀는 전율과 기쁨에 사로잡힌다. 달리 무슨 말이 필요하라? 세속에 물들지 않은 사람들, 말이 오염되지 않도록 조심하는 사람들에게 여왕이나 신부같은 단어는, 자비로운 위엄과 애정을 기다리는 단아한 순결을 의미한다.


7장 영원이 한 날을 낸다


당신의 평화로운 안식처를 우리 위에 펼치소서.

당신의 선한 권고로 바른 길을 가리키소서.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8장 영원의 직관

안식일과 영원은 하나다. 안식일가 영원은 본질이 같다.

온통 안식일뿐이 그때의 특징은 무엇인가? 그때는 “먹는 것도, 마시는 것도, 세속적인 거래도 없는” 때이자, “의인이 면류관을 쓰고 앉아서 존경을 받으며 세키나(Shechinah, 하나님의 임지)의 영광을 누리는 때다”


크라스테의 랍비 하임(Hyim of Krasne)은 안식일이 한 조각의 영원 그 이상을 담고 있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안식일이야말로 영원의 원천이자 천국의 근원이며 내세에서 이루어지는 삶의 뿌리라고 말한다.


철학은 성서로부터 배울 것이 많다. 철학자는 선이라는 관념을 가장 고귀한 관념으로 여긴다. 하지만 성서는 선이 으뜸이 아니라 버금이라고 가르친다. 선은 성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선이 산기슭이라면 성은 산마루다. 하나님은 엿새 동안 창조하신 것들을 선한 것으로 여기셨으나 거룩하게 하지는 않으셨다.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신 것은 일곱째 날뿐이다.


안식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시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영이다. 우리의 육체는 공간에 속해 있다. 하지만 우리의 영, 우리의 영혼은 영원을 향해 날아오르고, 거룩함을 향해 비상한다. 안식일은 정상을 향한 상승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시간을 성화하고, 선을 성의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속된 짓을 삼가고 성스러움을 볼 기회를 제공한다.


9장. 시간 속의 거룩함


10장 너희는 탐내어라

선택된 날의 거룩함은 우리가 노려보거나 겸손히 떨어져 있어야 할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를 멀리하지 않는 거룩함이다. 그것은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거룩함이다. “안식일은 너희에게 거루한 날이므로 너희는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출 31:14) “안식일은 이스라엘에게 거룩함을 더해 준다.”


맺음말. 시간을 성화하라.


공간의 정복, 피라미드, 명예를 통해서는 시간의 문제를 풀 수 없다. 시간의 문제는 시간을 성화함으로써만 풀 수 있다. 시간처럼 붙잡기 어려운 것도 없다. 하지만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에게 시간은 변장한 영원이다.

창조는 하나님의 언어이고, 시간은 그분의 노래이며, 공간의 사물은 그 노래에 담긴 자음이다. 시간을 성화하는 것은 하나님과 한목소리로 모음들을 노래하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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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용박사 | ecopeace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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