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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이 있는 곳에서 경청이 어려운 이유

 

 

갈등전환의 핵심은 먼저 듣는 것이다

 

갈등해결을 위한 대화진행이나 회복적 서클을 훈련받고 전달하는 과정에서 일부 참여자들이 이에 대해 어려워하는 이유중의 하나는 이 모델을 배우면 뭔가 이야기를 잘하거나 말을 잘 해 주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오해에 있다. 사실 그렇게 되면 뭘 말해주어야 할지에 신경을 쓰면서 회복적 서클이 지닌 구조적 틀을 넘어서 상담형태로 대화가 전개되면서 길을 잃어버리는 일이 허다하게 된다. 사실상 회복적 서클은 서클의 본성인 경청을 중심으로 서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잊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대화가 안 되는 이유의 하나도 말해주는 사람은 있어도 듣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갈등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뭔가 잘못된 것이나 아닌 것에 대해 말해주는 것을 통해 상대방 변화된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순간에 - 이러한 이해는 쉽사리 대다수가 빠지기 쉬운 유혹이다-, 적대적인 감정이 있는 상태에서 옳은말을 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위험하다. 정당하더라고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데는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좀 더 깊은 성찰을 요구한다. 아무리 그 동기가 선한 의도에서 출발했지만 자신이 가져오는 대화의 결과는 처참함을 경험하게 되는 대부분의 경우,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식조차 못하고 불편한 감정을 지니고 지나가게 된다.

 

예를 들어 가장 흔히 경험하는 상황은 교사가 싸우고 있는 학생들에게 사연이 어떻게 되어 그런 싸움이 일어났는지 설명을 듣고 그 상황을 진단하여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학생들에게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충고하거나 평가하여 주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대개의 경우에는 선생님의 제시에 마지못해 사과하는 형태를 취하면서도 그 후 그 선생님과는 멀어지는 관계의 결과를 가져온다. 혹은 적지 않은 경우, 뜻밖에도 학생당사자들이 선생님께 오히려 짜증을 내면서 결국 선생님도 그 사건에 휘말려 적대감을 학생들로부터 받는 상황으로 가는 경우도 발생한다. 주로 내가 외부 대화진행자로 요청받고 학교에 들어가는 경우는 후자의 경우이기도 하다. 분명 여기에는 선생님의 학생싸움을 말리고 화해시키려는 선한 의도가 있었지만 그리고 선생님 나름의 경력과 경험에서 나온 해결책에 대한 말해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대한 결과는커녕 상황이 더 악화되어 아이들 싸움에 선생님까지 휘말려 들어가게 된 난감한 상황으로 빠지게 되었다. 이런 경우, 그 학생들이 다른 학생들과는 다른, 고집스러운 혹은 이상 성격의 소유자라서 그러한 경우가 발생하는 것인가? 그런 이해라면 앞으로 그런 종류의 고집스러운 혹은 이상 성격의 사람과는 대화가 불가능하다는 태도로 일관되게 된다. 그 결과는 무력감이나 자기 방어를 위한 강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신념으로 행동하게 된다. 이 또한 불행의 사이클을 만들게 된다.

 

내가 여러 심각한 갈등관계에 대해 직접 개입하여 관찰한 바에 의하면, 뜻밖에도 갈등에 있어서 변화의 핵심은 말해주기에 초점을 두는 것이 - 즉시, 그 상황의 문제를 이해하고 진단해서 대답을 가르쳐 주는 것- 아니라 경청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계속적으로 발견하게 된다. 감정이 팽팽히 달아오른 상황에서 말해주기는 마치 풍선에 바늘을 꽂는 것과 같은 효과를 가져와서 폭발하게 되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갈등해결을 위한 대화나 서클 진행의 핵심은 말해주기가 아니라 경청에 있다는 이 사실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보다 더 미묘하게 간과되거나 그 중요성이 심각히 여겨지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신념적으로상대방이 알지 못한 그 뭔가를 말해주어야 상대방은 이해하고 변화된다는 선-이해(pre-understanding)을 갖고 있기 때문에 경청은 수동적으로 혹은 아무런 정보제공도 없는 행위라고 생각하기에 경청을 먼저 선택하는 일이 쉽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경청에 대한 심각할 정도로의 오해이다. 실제로 공감경청연습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단순히 말을 끊지 않고 끝까지 듣고, 능동적으로 연결하여 주목하며 청자가 들어줄 때, 화자의 느낌은 편안하고, 존중받으며, 온전히 상대방이 나를 향해 있어주어 집중하게 되고, 또한 자신의 말을 돌려받을 때 그동안 놓친 의미나 모호한 것에 대한 명료함의 자각을 갖게 되었다는 피드백의 경험을 보편적으로 경험한다. 즉 경청은 수동적인 아무것도 안하고 있음이 아닌 것이다. 그건 연결을 통해 안전한 공간을 제공하면서 자기 탐구의 길을 열고, 반영적 경청을 통해 자기 명료화나 의미에로의 돌파를 가능하게 해주는 힘을 가지고 있다. 아무리 경청이 중요하다 말을 해도 납득이 안 되거나, 이해를 하지만 그게 그렇게 쉽지 않아요라고 응답하는 참가자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필자가 해주고 싶은 말은 말해주는 것이 얼마나 더 어렵게 상황을 꼬이게 만드는지에 대한 철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말해 주는 것이 더 어려운 것이라는 이해를 다음과 같은 예들을 통해 말하곤 한다.

 


말해주기가 어째서 일을 더 힘들게 만드는가

 

첫째, 우리는 무언가 자극이 되는 상황/사건/사람/관계가 발생했을 때, 그 모호한 것이 출현하면 즉각적으로 그리고 생리적으로 3 F's의 반응방식에 따라 하나를 선택하도록 우리 영혼의 DNA는 자동 프로그램화되어 있다. 이것은 바로 맞서기(Fight), 피하기(Flight) 그리고 얼어붙기(Frozen)이 그것이다(말하기의 3F's 대응유형이 작동한다).

 

여기서 핵심적인 이해는 출현한 모호한 것에 대한 인지는 우선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생존본능에 따른 위험신호로 일단 받아들여서 위험한 것에 대한 대처로 우선적으로 반응하도록 지난 수만년의 문화적 인자(DNA)가 우리 안에 있어서 그것이 안전하다고 확인이 되기 전까지는 위험체로 인식하도록 만들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극 상황에서 뭔가 이해되지 못한 일이 발생했을 때 그것을 일으킨 당사자에 대해 당신이 뭔가 말하려 하는 순간, 그 언설(speaking)은 결국 공격, 자기 정당화, 혹은 안전을 위한 침묵으로 나타나게 되고, 상대방은 결국 자신을 공격하거나, 자기 정당화로 듣거나 혹은 응답하지 않는 무시하기로 해석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말하기는 공격-정당화-무시라는 이 프레임에 갇혀서 헤어나지 못하게 된다. 말을 계속 할수록 당신은 그런 프레임이라는 수렁에 깊이 빠지게 된다.

 

여기서 핵심은, 우리가 믿는 바(what we believe)가 우리가 보는 바(what we see)를 결정하고, 우리가 보는 바는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는 바(what we do)를 결정짓는다는 사실에 대한 이해이다. 출현한 자극 상황이 위험으로 믿게 되면 말하는 그 모든 것은 자동적으로 이 프레임을 따라 무엇을 말할지 결정되어 있게 된다. 그리고 그 말함은 그런 프레임을 더욱 강화시킨다. 문제는 말함이 위험에 대한 근본적인 인지 안에서 일어난다는 점이다. 당신은 위험한 존재에 대해서는 환대, 신뢰, 친밀감을 줄 수 없다. 따라서 당신의 말도 당신의 태도를 따른다.

 

둘째로, 갈등이나 폭력에 관련된 당사자들은 각자 보는 면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손상이나 상처를 입은 갈등 당사자(주로 피해자라고 하는 부류의 사람들)는 상대방이 자신에 게 행한 보이는 거칠은 행동이나 말에 시야가 붙잡혀 있다. 반면에 손상이나 상처를 준 사람(보통 가해자라고 말하는 부류의 사람)은 자신이 겉으로 보여준 거칠은 말이나 행동보다는 왜 자신이 그렇게 상대방한테 했는지 그 이유나 동기를 상대방이 알아주길 원하고 거기에 시야가 붙잡혀 있다(말하기의 다른 관점이 서로를 소외시킨다).

 

이렇게 피해본 사람은 눈에 보인 상대방의 거칠은 행동/에 걸려 있고, 피해를 준 사람은 자신의 내적 동기에 초점을 두고 있기에, 이런 입장에서 서로 말을 하는 겨우 이는 서로 독백이지 대화가 안 되는 상황으로 가게 된다. 왜냐하면 상호 이해의 실마리가 되는 공통의 기반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어서 만나지는 지점이 없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말을 계속 할수록 서로로부터 멀어지게 되고, 나의 말함이 의외로 상대방의 관점을 되레 강화시키며, 결국 짜증과 분노 혹은 심리적인 참호 속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는 일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기의 결과는 결국 서로를 소외시키는 분리의 결과를 자동적으로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셋째로, 좀더 미묘하고 더 관찰되기 어려운 부분은 바로 자극상황에서 반응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일어난다. , 갈등상황에서 말하기로서 나와 상대방의 반응은 사실과 태도의 장막에 가려 내용의 진정성을 이해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반응함으로써 비극을 맞이한다(포장지를 뜯어보지 않은 내용전달의 비극이 발생한다).

 

포장지를 뜯어보지 않은 내용전달의 비극 발생이라는 것은 철저한 이해가 필요하다. 메시지가 ‘~~게 해라고 강요나 당신은~~해서 나빠요라고 비난으로 전달되는 경우에, 그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러한 메시지를 전하는 이유나 동기 혹은 마음의 읽기(예를 들어, 강요인 경우 어떠어떠한 필요의 발생, 혹은 비난의 경우 어떠어떠한 자기 웰빙의 요청)가 중요하다. 그런데 비난이나 강요라는 포장지에 싸여 그 필요나 웰빙의 요청이라는 내용이 그 포장지안에서 전달되기 때문에, 그 메시지를 택배로 받는 사람은 포장지를 열어 내용을 보기 보다는 포장지가 보여주는 비난과 강요에 대해 실증이나 짜증으로 반응하게 된다.

 

포장지만 보고 그 내용은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 포장지에 다시 자신의 포장지를 -비난이나 저항- 다시 싸거나 그 포장지에 부정적인 낙서를 해서 다시 상대방에게 보내면 상대방도 다시 그 포장지의 부정적인 모습에 시야가 고정되어 결국은 한 번도 포장지 내용은 열어보지 못하고 일명 포장지 발송작업만 하다가 끝나고 만다. 여기서 말하기는 포장지 발송작업에 연연하기 때문에 몇 차례 포장지 상호 발송작업을 하다보면 순식간에 상황의 경직성으로 들어가면서 짜증과 분노폭발이라는 비극적 상황을 초래하게 된다. 당신의 말하기는 오해와 상대방의 당신에 대한 부정적 신념을 강화시키는 방식으로 기능을 했기 때문이다.

넷째로, 상대방의 부정적 표현이 듣는 자신을 향해 말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경우이다(상대방의 말을 자기 정체성을 건드리는 것으로 오해한다). 예를 들어, 파트너나 동료가 당신은 왜 만날 그 모양이야? 그것밖에 못해?’라고 말하거나 아이가 선생님은 ~~해서 나는 싫어요라고 말하는 것을 나의 정체성에 대한 판단으로 이해를 하는 것이다. 그런 경우 심기가 불편해지면서 자신도 부정적인 감정이 올라와 그에 상응하는 맞대응을 하거나, 안전하지 않아서 다시 그 사람을 만나는 것을 회피하게 된다.

 

우리는 이것을 말하는 상대방의 진의에 대한 인식의 오류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 화자의 진의에 대한 인식의 오류는 매우 보편적이며 거의 이것이 오류라고 느끼지 못하고 우리는 살아간다. 사실 위의 예시처럼 당신은 왜 만날 그 모양이야?’선생님은 ~해서 나는 싫어요는 마치 듣는 나를 향해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보이는 현상이 실재의 참은 아니라는 점이다. 듣는 나에게 연관되어 있을 때 이것이 인식의 오류라고 이해하는 것은 무척 힘들다. 우선적으로 감정이 올라오기 때문에 지성이 발생이 어렵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두 가지에서 인식의 오류라고 말할 수 있다. 첫째는 그게 듣는 나를 향해 말하고 있다고 설령 이해해도 그렇게 이해하고 청자인 당신이 상대방에게 말을 할 때 편안하게 소통이 되는 방식으로 말을 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거나 힘들어지게 된다. 당신의 정당성과 옳고 그름의 판단이 작동하여서 자기 내면에 있는 생존 본능의 녹음기가 돌아가면서 안에 있던 자기 보호, 저항, 개입(조작이나 통제)의 기제를 작동시켜 상대방을 향하기 때문이다. 자기 보호, 저항 조작이나 통제의 개입으로 말하는 순간 자동적으로 당신은 상대방과 논쟁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는 누군가는 패배해야 끝나는 치킨게임이 되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아무리 당신이 승리했어도 상처뿐인 영광을 얻게 된다.

 

두 번 째 인식의 오류는 바로 화자가 청자인 나에게 비난이나 강요를 하는 것은 나의 정체성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화자의 내적인 필요에 대한 의 왜곡된 혹은 비극적 표현이라는 점이다. 비록 상대방의 말이 거칠어서 내가 이해하기 어렵거나 -그래서 진의를 이해하기가 어려운 왜곡된 표현이다- 아니면 듣는 나의 감정을 거슬려서 오히려 공격하도록 초대하기는 하지만 -그래서 진의를 이해는커녕 오히려 화자 자신을 공격하도록 초대한다는 점에서 비극적 표현이다- 그 핵심은 화자 자신의 필요, 목적, 가치를 말하고 있는 것이란 점이다. 화자는 자신에 대해 말하고 있지 듣는 나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본질이 아니다.

 

예로서 위의 비난 너는 항상 왜 그 모양이야? 그것밖에 못해?’는 자신이 답답하다는 것을 알아달라는 것, 나의 협력, 민활한 소통이나 일처리, 자신의 할 일이 쌓여 있는 것에 대한 부담에 대한 알아줌 등등의 표현인 것이다. ‘선생님은 ~~해서 나는 싫어요는 자신에 대한 관심, 공평하게 대우해주기, 자기 선택에 대한 존중이나 이해, 소통 등의 표현을 의미하는 것이다. 비록 상대방의 말하기가 비난이나 강요의 너메시지로 다가올지라도 그것은 언제나 화자의 자기안의 그 무언가에 대한 진정한 것의 표현이다. 왜곡되건 비극적으로 표현하던 간에 그것은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지 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말하는 것이 대부분 남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으로 해석할 때, 우리의 말하기는 진실을 놓치고 엉뚱한 곳에서 해결책을 찾게 맞는다. 그리고 그 해결책은 언제나 또 다른 참혹한 현실을 잉태한다.

 

 

경청을 대화와 서클진행의 중심에 다시 놓기

 

위에서 진술하였듯이 말하기가 4가지 굴절된 인식의 오류를 만들어 낼 때, 우리의 삶은 자동예언충족의 법칙처럼 그 비극적 결과를 이미 예시하고 있다. 이것은 그 사람의 성격이 완고하거나 인성이 모자란 덕성의 결여 문제가 아니다. 철저히 인식의 오류의 문제이다. 그리고 이 인식의 오류는 철저히 리얼리티에 대한 이해의 오류인 것이다.

 

갈등의 현장에서 보여지는 거칠은 행동과 언어가 그 사람의 본성을 나타낸다고 하는 이해는 실제로 무엇이 진정으로 있는 것인지(what is real)에 대한 인식에 있어 오류를 가져오고 그 결과는 매우 비참해 진다. 이로 인한 심리적·관계적 희생이나 비용은 매우 크다. 분리, 상처, 무기력, 분노, 두려움, 불안, 무거움, 즐거움의 상실 등의 비용이 발생한다.

 

만일 위의 4가지 굴절된 인식의 오류가 하나가 아닌 두어 개 이상이 서로 중첩되어 발생할 때, 분명한 것은 앞으로 무슨 일, 사건, 관계, 상황, 사람을 만나던지 자극의 순간이 발생하면 비극적 결과 -아무리 선한 동기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를 맞이할 것이라는 자기충족적 예언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과학(science=see) 곧 앎의 문제이지 품성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

 

4가지 굴절된 인식의 오류를 언급하면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말하기가 경청보다 더 어려운 과제라는 점이다. 말하기는 자동적으로 작동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며 이 4가지 장애를 여과해서 통과해 지나가야 한다는 점에서 어렵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청이 더 훨씬 낫다-처음엔 물론 말하기보다 더 훨씬 어렵게 느껴진다 할지라도. 경청은 상대방의 진의와 마음에 연결되려는 전 존재의 자기 투신을 요청한다. 그리고 그 연결에로의 헌신속에는 자기 속생각을 내려놓는 것과 연결된다. 이렇게 외적으로는 타자를 향한 존재로서 자기 헌신과 내적으로 자기 속생각을 내려놓기가 함께 어우러져 경청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러한 타자를 향한 자기 헌신으로서 연결과 자기 속생각 내려놓기로서 경청이 일어날 때, 신비로운 변형이 일어난다. 두려움, 불안, 낙심, 무기력, 긴장, 혼돈이 사라지고 명료함과 편안함의 안전한 공간이 형성되면서 우정어린 사귐,’ 일어나는 것에 대한 명료함그리고 나아감의 방향감각과 열정이 출현하게 된다. 그래서 농담삼아 나는 동료들에게 신은 말하는 존재가 아니라 경청하는 존재라고 말하곤 한다. 신께서 말씀이 없으셔서 다행이라고, 그래서 내가 살아갈 수 있고 그게 내가 존중받는 비결이라고 말할 때가 있다. 또한 다른 농담은 비폭력 대화가 아니라 비폭력 경청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사실 우리가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방식은 8%로는 언어로 37%는 어조로 그리고 55%는 비언어적인 몸짓으로 하기 때문에 92%에 해당하는 비언어적인 커뮤니케이션은 들어야 하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말하기 혹은 말해주기의 자동화된 습관을 멈추고 각자가 들을 때 우리는 뭔가 신비로운 일치감을 경험하게 된다. 나의 자아 정체성, 타자의 타자성 그리고 이슈/주제의 진리가 서로 장벽이 아니라 창(window)으로 열리면서 리얼리티의 깊이, 높이, 넓이를 총체적으로 심화시키며, 풍성케 하며 그리고 춤추게 하는 역동성으로 다가오게 된다. 말해주기는 일을 부담으로 느끼게 만들지만, 듣기는 일을 선물로 받게 한다. 자발성이 이 듣기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경청은 한 가지 근본적인 패러다임을 가져온다. 그것은 도전, 위기, 손상, 파괴의 자극 상황을 문제(a problem)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배나 우주선이 항행(navigating)을 할 때 그것을 통해 나와 승무원들이 우리가 어디까지 와 있으며 어디로 가고자 하는 지를 알려주는 체크포인트로 삼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별이 되어 나아감을 향한 방향지침을 계시해 준다. 그것은 듣고자 하는 이에게 일어나는 신비로운 별이자 안내(guide)인 것이다.


(20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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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용박사 | ecopeace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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