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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호이해와 선택을 위한 비폭력 대화의 공헌

-영성수련으로서 비폭력대화 (2)-

 

박성용 비폭력평화물결대표




 우리의 궁지-"너는 00한 인간이야. (그러니) 넌 ~을 해야 돼 (혹은 내가 가르쳐 줄게)"

 

아이슬러(『성배와 칼』), 월터 윙크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 그리고 제레미 리프킨 (『공감의 시대』) 등의 학자들이 주장하던 인류의 일만년의 역사가 사회화라는 프로그래밍으로 정착한 지배체제의 구조는 우리의 삶의 현장이 지배(power-over)와 종속(power-under)라는 논리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살고, 상대에게 그렇게 반응하도록 우리를 길들여 왔다.

월터 윙크가 훌륭하게 인용한 만화영화 "뽀빠이"에 나오는 주인공 뽀빠이, 올리브, 부루투스의 이야기는 우리의 삶의 공간이 "결투의 지대"이고 너와 나의 관계는 무찌르거나(맞서기) 당하는(굴복하기) 아니면 도망가는(회피하기) 관계로 여겨진다. 부르투스는 자기의 사랑의 표현을 상대방인 올리브가 알아듣지 못하게 아니 폭력적이라고 해석하도록 소통하고, 이에 대해 올리브는 언제나 한번도 상대방의 중심의도를 물어보지도 않은 채, 자신의 부르투스에 대한 악한 이미지에 의해 멀리하고자 하는 행동을 반복적으로 취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궁지와 문제 해결은 또한 상대방 부르투스가 가진 힘(강제의 힘)에 맞설 수 있는 똑같은 종류의 강제적 힘을 지닌 뽀빠이에게 의존하게 되고, 뽀빠이는 나에게 구원자이고 나를 위해 희생당했기 때문에 그를 사랑하지 않으면 안된다. 나를 위한 희생과 노력을 해 주었기 때문에 그의 부드러운 지배를 허용하는 논리를 갖고 살게 된다.

이 만화영화는 관찰자로서 시청자에게는 그 상황이 금방 이해가 가고 나의 설명에 대해 별다른 이의없이 손쉽게 찬성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실제 상황으로 들어서서 나의 타인과의 관계를 분별하고자 하면 뽀빠이 이야기에서 멀지 않은 나의 삶의 이야기를 보게 된다. 그것은 갈등의 관계에 있어서 나의 에너지와 관심 그리고 눈은 순식간에, 자동적으로 쏠리게 되고, '상대방이 얼마나 잘못을 했는지'에 대한 입증을 위해 내 논리가 진행되고, 결국은 정도에 차이는 있지만 상대방이 얼마나 나쁜지 딱지를 붙여 확인하며 이기고 지는 것에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하게 된다.

"난 그정도까지는 아니야. 난 부드럽고 교양이 있어서 그렇게까지 심하게 상대를 다루지는 않아"라고 별로 위의 진술에 동의를 안 했던 내가 비폭력 대화를 6~7년 전 접하고서 실천을 하면서 더 예민해지고 심각해 진 것은 쉽게 간파하지 못하는 '부드러운 지배'에 대한 것이었다. 그것은 이른 바 지시와 강제를 넘어서 조언하기, 동정하기, 위로하기, 교육하기, 설명하기, 평가하기, 고쳐주기, 심문하기, 하나 더하기, 무시하기, 이야기해주기 등의 사례들이 사실은 부드러운 지배(power-over)로서 상대방의 자율, 자유, 책임, 존중을 주지 않는 패턴들이라는 데서 심각해지고 고민스러워 진 것이었다. 그러면 이런 것들을 다 빼고 나면 어떻게 행동할 수 있다는 말이지? 한숨이 절로 나온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옳고 그름, 좋고 싫음의 나의 렌즈는 언제나 삶의 실재(reality)에 단순화시키는 색깔로 칠하여 검고 희거나 회색인 색깔로 바꾸면서 상대방을 그 농도의 정도에 따라 판단하고 그에 따라 대응하도록 나를 프로그램화 하였던 것이다.

 

치유와 교정하기 혹은 변화시키기보다 연결이다

 

로젠버그가 자극이 되는 상황이나 그 자극에 동기를 주는 상대방(혹은 내자신의 내면적 판단이 동기일 수도 있다)이 지금의 그 행위를 바꾸도록 원할 때, 두 가지 질문을 염두에 두라는 것이 나의 행동의 숨어있는 동기를 점검하는 데 결정적이게 되었다.

 

첫째, 당신은 상대방이 변화되기를 원하는가?

(이것은 백번 천번 yes이다. 아무렴요, 빨리 그가 바꾸어졌으면 해요. 난 지겹고 힘들어 미치겠어요.)

 

둘째, 상대방이 변화되는 데 있어서 당신은 무엇이 그 사람의 행동에 있어 동기가 되길 원하는가?

 

상대방이 나로 하여금 불편하도록 하게 만든 자극되는 상황을 연출할 때, 지금 내가 화를 내고, 때로는 성질을 부리거나, 신체적인 강제를 상대방(배우자, 자녀, 동료)에게 내는 것이 상대방이 바꿔지기를, 변화되기를, 치유되기를 기대하며 하는 행동인 것은 안다. 그런데 그렇게 내가 대응할 때 어떤 동기로 상대방이 바꿔지기를 나는 기대하는 것인가? 두려움, 수치심, 도덕적 의무 아니면 자기 희생? 아니면 나에 대한 존중, 자율성에 의해, 이해를 바탕으로 내 진심이 알려져서, 혹은 나에 대한 배려 때문에?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이 두려움, 수치, 도덕적인 해야만 하는 의무감이 아니라 존중, 자율성, 이해, 배려 등이 동기가 되고 그런 가치를 통해 우러나와 바꿔지는 것이 나의 가치요 내가 진정으로 소중히 여기는 것이라면 나의 자동반응은 바뀔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나의 지금 행동은 그런 나의 소중한 가치를 들어주기 보다는 더욱 멀게 하는 방식으로 나는 상대방과 소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결은 실재에 대한 통전적인 이해를 통해 자연스러운 변화를 출현시킨다

 

비폭력대화를 시작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큰 도전의 하나는 문제가 되는 상황과 상대방에 대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도에 -상대방 변화시키기- 관심을 갖기 보다는 먼저 그리고 마지막 시도도 '연결하기'라는 데 있다. 문제로 인식되는 '자극된 상황 triggered situation'과 그것을 행한 상대방에 대해 '잘못'의 시정을 요구하거나 그것을 깨우쳐서 빨리 바꾸도록 요구하는 것이 실제로는 상대방의 맞서기, 회피하기, 굴복하기의 태도를 유발하고, 실제로 내가 원하는 것을 상대가 실행했다 할지라도 그것이 두려움과 수치심 혹은 해야만 하는 억지춘향의 도덕적 의무감에서 하게 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는 시간이 꽤 오래 걸린다. 그리고 이것을 빨리 알아차릴수록 비폭력 대화의 공헌에 대해 눈이 떠지게 된다.

관심의 초점은 이것이다. '문제(a problem)'로 인식되는 자극된 상황에 대한 전통적인 대처방식이 상대방으로 하여금 전혀 배움이나 성장을 일으키지 못한다는 데 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상황에서 같은 패턴의 조건들이 형성되면 똑같은 반응을 반복하거나 쌍방이 만족하지 않은 방식을 주고 받는다. 그래서 내 기억은 그 자극되는 상황이 이제는 대면하고 싶지 않은 '문제'로 각인되고, 그런 상황을 일으키는 상대방은 동료, 가족에서 '낯선자' '문제아' 혹은 '웬수'로 이미지가 각인되며, 그런 일이 일어나면 점점 더 상대방과 멀어지는 방식으로 나아가게 되고, 결국은 그런 분리됨의 관계를 정당화하는 일이 내면에서 일어나면서 그 자극된 상황을 이 정당화에 사용하게 되어 새로운 가능성을 막는다.

생각해 보라. 그런 자극되는 상황에서 오는 불편함의 한 순간에 대한 집착을 넘어서 보면 그와 나는 때로는 힘든 일을 용케 함께 나누었던 경험, 행복했던 경험들, 그리 나쁘지도 않았던 순간들도 있었다. 아니면 그 자극상황이 아니었다면 다른 방식으로 미래에 또한 서로 만족하는 관계방식으로 만날 수 있는 기회들도 있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자극된 상황은 과거의 긍정적인 경험을 모두 삭제시키고, 미래의 새로운 가능성을 차단하는 데 정당화하는 구실로 작용하고 있게 된다: '저런 인간과는 상종도 말아야 돼." "더러운 것은 피하는 것이 상책이야."

자극되는 상황을 '문제(a problem)'가 아니라 '자신이 진실로 원하는 것에 대한 왜곡된 표현'으로 보라고 한 로젠버그의 말을 비폭력대화 실천가들은 매우 진지하게 유념한다. 그 통찰은 아!하는 탄성의 통찰을 우리에게 주며, 상대방이 진실로 원하는 것에 우리가 주목하도록 돕게 된다. 더 나아가, 자극되는 상황을 문제가 아닌 진실로 원하는 것을 보는 기회가 될 때 이해의 지평이 열리면서 사건의 진상 혹은 상황의 전체적 실재(reality)를 보는 안목이 열리게 된다. 상황을 '문제'로 해석하면서 '잘못된 것'에 에너지를 집중하면서 온 '적-이미지'에 따라 우리의 판단을 좁게 가두었었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될 때 우리는 여기서 집착에 대한 놓임과 해방을 경험하면서 상황과 상대방을 전체에서 보는 통전적인(integral, holistic) 실재가 펼쳐지게 된다. 문제된 상황과 문제아/ troublemaker로서의 실재에 대한 렌즈가 벗겨지고서 상황의 진실성, 무엇을 소중히 원하고 있는 지에 대한 그 이면의 실재가 열리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된 상황과 문제아/troublemaker에서 상황의 진실성, 상대방이 소중히 여기는 것에 대한 이해로의 인식의 전환은 비폭력대화 실천가들이 추구하는 나와 상대방의 '보편적 욕구'에-예, 자율, 존중, 책임, 휴식, 배려, 진실함 등- 대한 알아차림과 이에 대한 공감을 통해서 일어난다. 우리는 이것을 연결하기 곧 자기 연결하기, 상대방 연결하기라고 부른다. 다시 강조하지만, 바꾸기, 교정하기, 가르치기는 비폭력 대화의 목적이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매우 이상스럽게 처음에는 들릴 수 있다- 최소한 경험과 실습을 통해 이해하지 않고는 그렇게 느껴질 수 있다.

연결하기, 연결하기 그리고 다시 또 연결하기! 상대방이 겉으로 표현한 주장이나 입장이면에 진실로 소중히 여기는 것에 대해 알아차리고 그것을 거울비쳐주기로 상대방에게 전달해주는 것이 '연결하기'의 근본이다. 물론 이것은 문제로 인식된 자극되는 상황에서 상대방에게만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불편함이 일어날 때 적용되는 기술이다. 연결을 통해 우리는 상대방의 심리적 실재의 전체에 대한 조망을 얻게 되고, 두려움과 방어의 감각을 내려놓고 제대로 보고 듣게 되어 실재의 전체적인 시각을 얻게 되고 연약함과 신뢰가 주는 서로를 감싸는 선물의 경험을 맛보게 된다. 그렇게 되면 해결책은 저절로 '출현하게 된다.' 왜곡된 행동의 이면에 있는 진심과 진정성의 실재가 서로에게 보여지게 되면 기꺼이 상대방에게 기여하는 행동이 일어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로젠버그가 말하는 한 가지 원칙, 곧 비폭력 대화의 근본 신념의 하나는 '우리의 본성에는 누구나 상대방에게 기꺼이 기여하고 싶어하는 강력하고도 자연스러운 본성이 자리잡고 있다'에 대한 설명이다.

 

비폭력 대화의 목적은 단순히 갈등해결을 넘어 선택을 증진시킨다

 

비폭력 대화는 갈등해결의 기법으로서 사회적 기술 혹은 관계적인 심리 치료의 일종에 머물러 있지 않다. 그것은 삶을 보는 인식, 가치, 언어행위, 그리고 존재의 터전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가져오는 일종의 영적 수련의 영역을 포함한다.

선택에 있어 이야기 하자면 자신이 어느 한 행동을 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 표현된 행동(전략) 이면에 놓여있는 욕구들의 정체를 밝히고 드러난 충족된 혹은 충족되지 않는 욕구들을 주목하면서 그것을 실현시킬 다른 구체적인 수단(전략)을 생각하게 되면 수많은 다른 전략들이 보여지게 된다. '이것만이야'라는 선택에서 욕구에 대한 다양한 전략들의 지평이 열리게 되고 이는 다양한 선택들을 가능하게 하면서 삶을 풍성하게 경험하도록 돕게 된다. 시도한 행동의 이면에 있는 욕구에 대한 확인은 이렇게 다양한 선택의 문을 열어놓게 되면서 여유와 기쁨 그리고 의미실현의 풍성함을 느끼게 된다.

또한 가장 미묘하게 숨어 작동하면서도 가장 다루기 어려운 '감정적 노예'로부터의 해방을 경험한다. 이는 문제의 원인이 상대방에게 있고 상대방이 변화되어야 내 고통과 불안 그리고 분노가 해결된다는 태도를 취할 때, 결국은 나의 할 일은 아무것도 없게 된다. 내 행복과 안녕(welbeing)이 상대방의 변화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될 때 여기에는 '감정적 노예' 즉 나의 선택이 없는 무력감이나 상대에 대한 분노가 존재하게 된다. 비폭력 대화는 상대는 자극이고 원인은 내안에 충족되지 않은 욕구에 기인한다는 통찰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상대가 아닌 내 충족되지 않는 욕구를 스스로 돌보고 충족하는 방향으로 선택과 의지가 발동됨으로써 자율성이 증가하게 된다. 나의 정서와 행동이 상대방에 매있지 않고 스스로 선택하고 돌보는 감각이 형성되면서 삶의 존재론적인 축이 내면 깊숙이 형성되면서 풍랑과 격정속에서도 넘어지지 않는 중심감각을 음미하게 된다.

미묘하면서도 언뜻 이해가 안가는 자극의 제공자인 상대방에 대해서가 아니라 나의 충족하지 않은 욕구를 스스로 돌보고 상대의 욕구에 대한 이해속에서 서로의 욕구를 돌보면서 이를 충족하기 위한 선택을 강화한다. 낯설지만 비폭력대화의 핵심의 하나인 전적으로 100% 자기 책임하에 두기는 자극을 주는 상대를 비난하지 않고 중심을 지키면서 상대를 선을 행할 수 있도록 초대의 공간을 열고, 이러한 행동은 상대를 무장해제시키고 진실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볼 수 있는 시야와 쌍방에 대한 신뢰를 구축하게 된다. 신뢰는 이해를 가져오고 이는 정서적 해방과 자율적 선택을 강화시킨다.

 

자비롭고 풍성한 사회로의 열쇠: "나는 ~느껴요, 나는 00을 소중히 여겨요."

 

폭력이 정치?사회적인 영역만이 아니라 사실상 우리의 일상과 나의 내면에서 타자를 어떻게 보고, 자극되는 상황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그 근본적인 성격이 놓여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교훈이다. 개인의 내면과 일대일 상대방과의 관계성은 그대로 가족, 직장, 지역공동체, 국가 및 지구촌의 관계에 똑같은 패턴을 양상하게 된다. 규모와 상황의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 핵심은 타자의 행위에 대한 인식의 방법과 대응논리가 무엇인지가 공통적으로 같은 패턴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지배체제가 지닌 "당신은 ~한 인간이야. 당신은 00해야 돼(혹은, 그러니 내가 가르쳐줄께)"로 작동하게 될 때, 맞서기, 굴복하기, 회피하기의 대응방식으로 있게 되고, 이는 서로를 분리/소외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문제는 단순히 분리/소외만이 아니다. 미래에 있어서 아무런 배움/성장/수정의 교훈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폭력의 악순환이 반복되게 되는 것이다.

만일 만화영화 "뽀빠이"에 있어서 올리브가 약자이기 때문에 등을 돌려 도망다니지 않고 부르투스에게 정면으로 서서 "나는 ~을 느껴요. 나는 00이 소중해요"라는 말을 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강자앞에서 힘없는 사람이 아무런 자기 방어없이 오직 100% 자기의 느낌과 욕구에 책임을 지면서 이것을 명료하게 상대방에게 말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는가? 설사 그 상황에서 브루투스가 자기에게 험악한 행위를 하기 위해 가까이 더욱 다가온다고 하더라도 계속해서 뚜렷하게 그의 눈을 보면서 "나는 지금 두렵고, 힘들며, 무척 당황스러워요, 왜냐하면 나는 내가 이해하는 방식으로 당신을 만나고 싶고, 내가 존중되고 배려받는 것 그리고 소통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이어요"라고 말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대게의 비폭력대화 참가자들은 처음에 비폭력 대화를 하는 것은 약간 낯간지러움을 느끼고, 상대방에게 그렇게 하면 내가 지거나 무시를 당할 것이라는 코멘트를 한다. 마치 비폭력 대화는 마지막 남아있는 자기 방어의 벽마져 스스로 무너뜨려서 곧장 상대방에게 완전히 패배당하는 꼴을 보기 쉽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내가 경험한 바로는 계속해서 자기 진심이 전달된다면 상황은 다른 것이 실제 상황이라는 점이다. 대게의 경우 많은 것들이 나의 상대방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와 판단이 실제로는 관성의 법칙처럼 상대방을 그렇게 행동하도록 끌어들이며, 실제로 자기방어없이, 100% 자기 책임의 표현으로서 비폭력적인 대화는 뜻밖의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예를 몇 가지 들어보기로 한다. 하나는 "삶을 변혁하는 평화훈련(AVP; Alternatives to Violence Project)"에서 자주 인용되는 이야기이다:

 

뉴욕의 한 도서관에서 저녁쯤에 책을 대출하여 나온 한 여인이 집으로 가는 지름길을 택해 공원을 걷고 있었다. 그날따라 주변은 아무도 없었고 마침 자기 뒤에 얼마만큼의 거리에서 한 흑인청년이 모자를 쓰고 자기 쪽을 향하여 걸어오고 있음을 발견하였다(이는 미국문화에서는 무엇이 벌어질 것인지 대략적인 예측이 가는 상황이다). 계속해서 따라오는 이 인기척에 이 여인은 더욱 빠른 걸음으로 가고 있었지만 결국은 거의 뒤에서 따라 잡히는 지점까지 이르게 되었다. 상대방의 숨소리를 듣게 된 지점에서 갑자기 이 여인은 뒤로 돌아서 그 청년에게 손에 들고 있던 책을 안겨주면서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이고 참 감사합니다. 제가 힘이 들어 어려워하고 있는 참에... 고맙습니다. 저의 집이 바로 저쪽 근처인데 거기까지 도움이 필요합니다. 동행해 주시겠지요?" 상대방은 흠찟하며 "어~어!"하며 당황스러워 하다가 여인의 요청에 아파트 앞까지 같이 갈 수 있게 되었다.

 

로젠버그가 "그렇지만(but)"이란 말을 위협이나 화를 자신에게 내고 있는 사람에게 절대로 말하지 말하고 한 비폭력 대화 워크숍에서 한 여성 참가자가 말한 이야기가 있었다. 읽었던 대목에 대한 기억은 다음과 같다:

 

어느 날 새벽 침대에서 자던 자신이 눌림을 받는 것 같아 눈을 뜬 순간, 웬 낯선 사내가 자신을 누르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움직이지마. 꼼짝말고 입다물고 있어" 낯선 사내에 밑에 깔린 그녀는 상황파악이 되고 자신이 위험에 처해있다는 것과 또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임을 깨닫자 갑자기 로젠버그의 "그렇지만 (but~)"에 대한 교훈이 머리를 스치면서 그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당신의 처지가 매우 힘든 상태이군요".......상대방은 약간의 동요를 보였고 이 여인은 자신이 지금의 경우가 앞으로 자신의 삶에 어떤 고통을 줄 것인지 자기의 느낌과 자기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잃게 되는 슬픔과 염려를 말하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이야기는 상대방이 자신을 누른 상태에서 거의 30분이 넘도록 진행되었고 결국 그 사람은 침대에서 내려오게 되었다.

 

필자가 경험한 이야기이다.

 

나는 기독교계 한 환경단체가 여는 기후변화와 기독교의 대응에 관한 세미나의 사회를 맡고 있었다. 발제자들의 발표가 끝나고 질의응답을 갖는 도중에 한 노년의 참여자가 일어나 자신은 지방에서 올라온 모 교회 장로라고 하면서 질문이 아니라 한국교회가 얼마나 썩었는지 비난의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모임 종료가 얼마 남지 않았고, 혼자서 그렇게 분노의 에너지와 교훈조로 말이 몇 분간 이어져 가면서 주변에 앉아있던 목사들 그리고 일반 참여자들의 몸이 경직되고, 마치 '저 사람 뭐야? 뭐 저따위 사람이 다 있어'라는 표정의 듣기 힘들어 하는 몸짓이 역력해지는 것을 보면서 나는 매우 당황스러웠고 어떻게 개입하여 이것을 마치게 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주변의 표정에 또한 말하는 사람도 느끼고 있었는지 초점을 잃고 말았고 그래서 자신도 무슨 말을 하는 지 제대로 전달이 안되는 상태로 가게 되었다.

다행히도 내가 개입하기 전에 정리되지 않은 말을 회중에게 던지고 앉은 장로님께 사회자로서 나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러니까, 장로님의 말씀의 요지는 한국교회가 이런 중대한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고 있다는 게 마음이 아프고 걱정스럽다는 것이군요? 그래서 본인이라도 자신의 교회에서 뭔가 환경에 대한 프로그램을 하고 싶으신데 거기에 대한 아이디어가 없어서 걱정스러워서 저희들에게 도움이 필요하시다는 말씀으로 알아들었는 데 제가 제대로 이해했는지요?" 나의 이말에 그분은 아주 안도한다는 몸짓으로 나의 말에 끄덕거렸다. 사회자의 응답의 말과 그 사람의 안도의 자세를 보던 모든 참여자들이 뭔가에 감전이 된 듯한 분위기로 돌아가면서 눈빛이 다시 부드러워지고 밝아지면서 전체의 무거운 분위기가 돌연 바뀌면서 모두가 편안해지고 남은 시간의 참석자들이 이번 세미나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와 소감을 나누게 되었고 끝나고서 서로 인사하는 표정에서는 서로를 격려하며 헤어지게 되었다.

 

만일 위의 세 사례 이야기에서 나에게 불편/위험/분노를 주는 상대방에게 힘을 지니고 맞서기를 하는 경우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추측을 해 보면 답이 안나온다. 나는 전혀 힘을 쓸 수 없는 상태였고, 힘을 쓴다고 해도 상황은 더욱 악화될 수 있는 가능성이 더 큰 상태였다. 오히려 아무런 힘을 쓰지 않고 "나는 ~을 느껴요. (왜냐하면) 나는 00를 소중히 여기기 때문이어요" (혹은, 3번째처럼 질문형태로, "당신은 ~을 느끼는군요. (왜냐하면) ~이 중요하기 때문인가요?")라는 의사소통이 상대방과 나를 연결해 주면서 상황은 반전이 되었다.

강제, 위협, 처벌, 힘겨루기라는 지배체제의 생활관습이 나의 안보와 안전을 지켜준다는 것은 신화이지 삶의 진실이 아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더 나의 안보와 안전 그리고 공동체성은 깨어지고 만다. 연결을 통한 신뢰와 이해가 서로의 안전을 지킨다. 위 세가지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단지 비폭력 대화가 위급한 상황, 궁지의 상황에서 어떻게 자신의 문제를 해결했는지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오히려 더 귀중한 교훈이 있다. 그것은 비폭력 대화를 실천한 약자에 의해 힘을 소지한 자, 뭔가 불만족스러운 상황을 계획한 자가 그 궁지의 상황에서 자신이 계획한 것을 하지 않음으로써 그 약자의 도움으로 자신의 인간성을 지키게 되었다는 것이다. 강자가 자신의 궁지로부터 놓임을 받는 것은 그만한 강한 힘의 소지자에 의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힘을 뺀 약자의 적극적인 비폭력 실천에 의해 그는 자신의 인간성을 지키게 된다. 약자가 강자를 구해주고 강자의 인간성을 지켜주는 인도자가 되는 것이다.

연결을 통해 자비롭고 풍성한 사회를 세울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충격이자 강력한 사회적 도구이다. 탈지배적인 파트너쉽의 사회를 형성하는 데는 권리와 의무의 도식으로서는 한계가 있다. 오히려 느낌과 욕구의 자기 표현과 상대방의 느낌과 욕구의 공감이해를 통해서 더욱 현실화될 수 있다는 이 확신은 비폭력실천가들이 공유한 근본적인 성찰이다. 가해자, 피해자 그리고 잘못된 행위에 대한 주목과 에너지를 부여하기 보다는 "충족되지 못한 욕구의 왜곡된 표현"이라는 이 이해를 통해 세상은 이제 느끼고 소중히 여기는 것에 관심을 가지면서 그것을 어떻게 충족하고, 또한 충족되지 못한 것에 어떻게 애도하며 배움을 통해 수정해 나갈 것인지를 명료하게 알게된다. 여기에 평화를 구축하는 실제적인 전략과 도구가 있게 된다. (201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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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술 취한 사람과의 비폭력 대화 메인즈 2012-03-05 2395
62 영성수련으로서 비폭력 대화 ③-'감정적 노예상태'로부터의 해방 메인즈 2011-10-25 2424
» 영성수련으로서 비폭력 대화(2): 상호이해와 선택을 위한 비폭력대화의 공헌 메인즈 2011-10-10 2595
60 영성훈련으로서 비폭력 대화(NVC) 메인즈 2011-09-29 3178
박성용박사 | ecopeace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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