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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성훈련으로서 비폭력 대화(NVC)

                                                                                                                         박성용

----------목 차--------

-삶의 작동원리로서 성육신 사건

-안(內)과 밖(外)은 서로를 품는다

-절망과 실패의 신비: 자기판단/자기비난은 선물이다

-적대자(enemy)가 신성을 계시한다



삶의 작동원리로서 성육신 사건

필자가 비폭력평화물결에 소속하여 비폭력과 관련된 여러 훈련과 교육에서 활동하면서 최근에 기독교평화활동가로 나 자신의 정체성을 갖을 수 있게 해 준 하나의 체험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요한복음 1장에서 말하는 기독교의 가장 보편적인 진리인 성육신에 대한 새로운 체득의 경험의 경험이다. 신앙의 대상인 초월적 존재로서 그리스도에 대한 신학적 진술로서 그동안 알고 있던 이 성육신에 이해는 삶의 실제적 현실(리얼리티)로서 내게 가슴으로 다가온 것이다.

'진리와 은혜가 눈에 보이는 현실'로, 곧 진정성(truthfulness)과 자비(mercy)가 보이는 실재로 우리 현실에서 작동하며 몸(embodiment)을 입을 수 있고, 인간의 보편적 가능성으로서 주어졌다는 깨우침이 다가온 것이다. 구약의 '하나님 형상(imago dei)'가 하나의 아이디어나 관념으로 생각되어졌었는데 복음의 핵심은 바로 이렇게 진실과 자비가 보이는 실재로서 그것도 '충만함'으로 '세상'(월터 윙크의 말에 의하면 더 좋은 번역은 "지배체제")속에서 작동하는 원리이자 실재로서 눈에 보여진다는 것의 충격이었다. 나는 비폭력 대화(NVC)를 5년간 실습하고 교육하면서 비로소 NVC가 기독교의 진실과 자비가 실재이자 빛으로서 힘을 갖고 작동한다는 이 사실(what)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작동될 수 있는 지에 대한 그 방법(how)을 알게 되면서 투명하면서도 내면에 걸림이 없는 평온함을 맛보기 시작하게 되었다.


안(內)과 밖(外)은 서로를 품는다

대게의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은 융합하기 어려운 과제로 인식되고 있다. 소수의 진보진영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일반적인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구원과 자유의 체득이라는 개인적인 성취가 먼저 있은 후에야 비로소 사회적인 문제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흔히 사람이 먼저 되지 않고 사회적 문제의 개입은 어렵다는 인식이 그 것이다. 반대로 이웃의 고난과 아픔의 현실을 외면한 자기 수도의 방식은 무책임한 태도이자 비윤리적이기에 그리고 폭력의 사회적 시스템이 개인의 삶을 힘들게 하기 때문에 그러한 지배체제로서의 사회적 문제의 변화없이는 개인의 구원문제가 해결 될 수 없다는 생각을 지닌 진보진영의 활동가들도 존재한다.

위의 '이것이냐-저것이냐'의 우선순위에 대한 이분법적 태도와는 달리 사회적 양심에 대한 문제에 고민하는 기독교인들은 아침 일찍 혹은 특별한 기간에 내적인 영성생활의 시간도 갖고 또한 일부 사회적 참여에 대한 활동에도 적극 개입하고자 한다. 내 주변의 민중교회운동을 하던 몇 분들은 기나긴 민중해방운동의 참여와 해결되지 않은 이슈들의 반복됨으로 오는 피로감에 의해 영성에 관심을 갖고 자기 충전을 위한 노력을 하기 위해 여러 영성 프로그램에 관심을 갖는 분들의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이러한 "이것도-저것도"의 방식을 취하는 이러한 태도는 일반적으로는 사회활동에서 오는 에너지의 소진과 갈등의 문제들의 있는 사회참여 영역과 에너지를 공급받는 영적인 내면의 영역을 조합하는 방식으로서 자신의 '영혼'의 정화와 사회적 이슈들에 대한 참여를 결합하는 방식을 취한다. 여기서는 "같이 함께"는 있지만 서로 동전의 양면처럼 아직은 서로간의 영역이 구별되어 양쪽에 대한 균형을 잡기 위한 노력과 긴장을 갖게 된다. 여기서의 문제는 사회활동이 영적수련의 장(場)이 아니라 개인의 영적수도를 통한 에너지를 소진하는 곳이 되고 에너지의 공급은 개인의 내면적인 영적 수도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데 있다.

나는 "이것이냐-저것이냐"의 우선선위의 택일방식이나 혹은 "이것도-저것도"의 절충주의 방식이 기독교 평화운동에서는 궁극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 끊임없이 전쟁, 폭력 그리고 갈등의 이슈들이 터져나오는 현실에서 문제를 해결할 연구시간과 기획 모임 그리고 각종 워크숍 기획과 진행 스케쥴에도 바빠서 사실상 나는 앉아서 기도할 시간이 별로 없다. 그리고 실상 살아계신 하나님, 무소부재의 하나님에 대한 창조신앙에 대한 나의 신뢰는 빛, 일치, 내적인 평화에서만이 아니라 어둠, 분열, 일상적 삶에서도 똑같이 신적 현존에 대해서 있다고 믿는다. 그러한 생각속에서 나는 어떻게 앉아서 하는 방석-명상이 아니라 나의 활동이 '움직이는 명상'으로 나의 활동이 신적 실재의 현존을 맛보는 계기로 전환될 수 있는가에 관심을 가져왔었다.

내가 몇 년 전에 나의 질문에 대한 통찰을 받은 것은 퀘이커 교육사상가인 파커 파머와 현대 평화학의 아버지인 요한 갈퉁이 제시하는 '뫼비우스 고리' 법칙에 대한 이해였다. 일반적으로 매듭이 평면상에 펼쳐져 있을 때 그것의 안과 밖은 만나지 않고 서로는 구분되어 있다. 그러나 뫼비우스 고리로 연결되어 있을 때 안은 밖을 만나며 밖으로 '멀리' 갈수록 안으로 '깊이' 들어오게 된다. 여기서 내가 얻은 통찰은 이것이다. 안은 밖을 품고 밖은 안을 강화한다. 타자에게로의 다가감은 새로운 깊이에로의 '초월'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 초월의 경험은 실천에 있어서 배움을 주고 실천에 대한 계획에 에너지를 주게 된다. 행동이 영성수련이 되고 그 행동에서 동기부여와 힘을 새롭게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통찰이 내게 준 영향은 적지가 않았다. 행동후에 있어야 한다는 쉼의 필요에 대한 요구가 적어지면서 행동과 쉼, 일과 재미가 별로 구별되지 않게 되면서 스트레스가 없게 되었다. 이건 정말 희안한 경험인데 사실 나는 따로 쉼에 대한 내적인 긴장이 요즘 들어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전에는 들어보지 못한 코멘트는 남들에게서 나에게 하는 자주 듣는 소리는 대할 때 편하고 안정적인 느낌이란 말들이다. 최소한 남의 말은 차지하고 나의 내면은 요즘 중심에 안착되어(grounded) 있는 그런 느낌이 자주 든다. 이는 NVC의 욕구의식(needs-consciousness)의 덕분이기도 하다. 언제 어디서나 이 행동의 뒤에 어떤 욕구가 충족/불충족 되어 있는 가에 대한 자각과 욕구에 현존하기가 나를 어느 때 어느 곳에서도 안전한 공간감각을 회복시켜주고 있다.


절망과 실패의 신비: 자기판단/자기비난은 선물이다

불과 며칠 전 NVC 조정중재 1년과정 워크숍 첫 번째 코스를 밟으면서 생긴 일이였다. 조정중재의 5단계 실습중 마지막 단계인 갈등 당사자 쌍방에 대한 욕구찾기이후 쌍방의 욕구에 근거한 요청하기 단계를 실습하였던 적이 있었다. 3인 1조 의자 세팅에서 조정자로서

쌍방에 대해 문제해결을 요청하도록 돕는 실습이었다. 그 실습에서 내가 행한 모델 보여주기에 대해 나는 만족스럽지 못했고 내내 마음이 걸려서 저녁 성찰모임에서까지 내가 실패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고백 할 정도였다.

다음날인 마지막 날, 수확하기 시간에 개인연결작업을 하면서 이 문제를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이 자극되는 상황에 대한 나의 생각은 "나는 제도로 배울 수 없는 인간인가봐,""왜 나는 배우는 게 이토록 느린거야"였다. 이러한 자기 비판/자기 판단에서 충족하고 싶은 욕구는 물론 손쉽게 찾아졌다. 그것은 능률, 성취, 수완, 능력, 소통이었다. 그런 것들이 충족되지 않아서 아쉬웠던 것이다. 이에 대해 나는 애도를 하면서 다시 다른 질문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 자극되는 상황에서 충족된 욕구는 무엇인가? 잠깐만, 아니 실패했는 데 무슨 충족된 욕구가 있단 말인가? 이상스러운 질문이고 뜻밖의 질문이자 모순되는 질문이었다. 이 자기 판단/자기 비난의 자극상황이 나에게 '충족된 욕구'가 뭐냐는 질문은 서로 전혀 맞지 않은 것을 꿰려는 불합리하고, 논리적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어쨌든 의식을 모아서 이것에 집중을 하였다. 그리고 발견된 것은 놀랍고도 뜻밖의 것이었다.

그것은 내가 답답해하고 낙심하던 이유가 바로 나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는 요즘 매우 편안해서 내게 갈등이 있는 것을 찾는다면 매우 시간이 걸릴 정도로 갈등이 없다) 바로 남에게 기여하고자 하는 열정이 있다고 하는 자각-알기, 배움-이 생기면서 뭔가 깊은 감동이 나를 스치고 지나게 되었다. 내 안에 남에 대한 기여에 대한 자기 알기의 '충족된 욕구'를 이해하게 되면서 내 안에 있는 선의에 대한 고마움과 감사가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자기 판단/자기 비난이 나를 힘들게 만들었던 것이 이제는 내가 진정으로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선물이 되면서 전환이 일어났고 이로 인한 위로와 힘을 얻게 되었다.

일상과 활동에서 일어나는 절망과 실패는 NVC의 욕구의식에서 보면 그것 자체가 초월을 일으키는 암호가 된다. 우리가 밖에서 만나는 수많은 'No', 절망 그리고 실패는 따로 한적한 곳에서의 명상수련을 통해 힘과 에너지를 얻어서 이것들을 상쇄하게 되는 방법에서만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낮과 밤의 하나님, 선인과 악인에게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우리가 한다면, 밤과 악의 여러 변형된 경험들 그 자체는 양파의 껍질 벗기 기법처럼 그 자체가 거룩한 현존을 알려주는 선물로 변형(trans-formation)되어진다.


적대자(enemy)가 신성을 계시한다

마태기자는 '하나님의 아들(자녀)'가 되는 길로서 "평화를 위해 일하기"(5:9)와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기"(5:44)를 연결한다. 그래서 예배보다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와 화해하는 것을 우선순위에 놓는다(5:23-24). 이것을 비종교적으로 그리고 NVC적으로 말하자면 본래적인 인간성은 적-이미지를 어떻게 다루는가에 달려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적-이미지(enemy-image)는 -그것이 내적이든, 관계적이든- 자기의 한계이고, 자신이 충족하지 못한 욕구의 왜곡된 반영이다. 그러므로 그 적 이미지는 또 하나의 자기 모습이다.

성서는 이에 대한 도움을 주는 예화를 보여준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갈릴리 호수에서 어둠과 폭풍우의 격랑속에서 "자,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let's go over the other side)!"라고 말씀하셨고, 제자들이 예수의 그러한 '저편으로의 건너감'을 "유령이다(it's a ghost)!"라고 소리 지를 때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냈다: "나다(it's me)!" 어둠과 풍랑이 신성한 현존을 계시하는 것이다. 타자(the other side)로의 건너감(go-over)은 신적 현존을 불러일으킨다. 그 신적 현존은 우리의 궁극적인 의미성이 노출되는 곳이자, 통합과 화해가 이루어지는 연결의 깊이를 말한다.

그래서 어둠과 풍랑의 '위협'과 '두려움'의 권세가 그 힘을 잃게 되고 가야 할 방향이 더욱 오롯이 명료화된다. 아니, 오히려 그 어둠과 풍랑의 덕택에 그 똑같은 에너지가 변형이 되어 갈 길을 채촉하게 하고, 다리에 힘이 붓고,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고, 갱생의 변화가 이루어진다. 우리는 이를 제자들의 삶에 일어난 실존적인 부활(예수가 다시 몸으로 살으셨다는 '신화적 부활'에 대비하여-본 훼퍼)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이러한 현실은 NVC-ers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일어난다. 비난과 비판의 부정적 에너지 뒤에서-어둠과 풍랑- 다가오는 신적 현존의 경험을 체험한다.

이러한 사회적 현실속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본다는 생각은 더 멀리는 마더 데레사, 샤를 드 푸코 그리고 본 훼퍼 등에게까지 올라간다. 그들에게 영향을 주었던 것은 마태 25장의 최후의 심판에 대한 새로운 통찰이었다. 그 본문은 양과 염소의 가름의 기준을 말하면서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었고...내가 병들었을 때..너희가 여기 가장 보잘것없는 이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라고 제시한다. 여기에는 놀랍게도 예수의 신성의 위치전환(transposition)이 일어난다. '저위'에서 '바닥'으로의, 저세상에서 현세의 일(the mundane)에로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전환되어진다.

나는 21세기에 들어와서 '9.11사태'로 인한 '폭력과의 전쟁'이 가져다 준 전 지구적인 지역분쟁과 폭력이라는 어둠과 풍랑의 시기를 사는 우리에게는 위에서 제시한 원시기독교공동체와 20세기 영적수도자 및 신학자들의 이해에 기초하여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도전은 "적을 통해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기"라고 확신한다. 자신이 분노하고 비난하는 대상-적/원수/문제아-을 통해서 신적 현존을 경험하는 새로운 작업이 21세기 영성에 꼭 필요하고, NVC는 이런 점에서 치유와 화해에 대한 방법적 도구를 제공한다.

진실과 자비가 현실이 되고 충만할 정도로 우리가 실제로 느낄 수 있으며 그것이 우리에게 빛과 생명이 될 뿐만 아니라 궁극적인 실재로서 그리고 작동 원리(working principles)로서, 세상(지배체제)에 있으나 거기에는 속하지 않는 새로운 실재로 존재한다는 확신은 기독교 비폭력 실천가들, 특히 NVC-er들에게는 이해가 되는 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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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용박사 | ecopeace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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