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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석에 떠올리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들


                                                                                                 박성용/비폭력평화물결공동대표


금년 들어 꽤나 많이 내린다고 생각한 빗줄기가 추석하루를 앞두고부터 줄기차게 내렸다. 광교산 자락의 세내어 살고 있는 이층집 거실창문으로 밖의 나무들은 춤을 추며 빗방울을 맞이하더니만 이제는 문앞 개울가는 봇물 터진 듯 요란한 흙탕물로 시끄럽게 넘쳐흐르고 있다. 개울 건너편으로 둑위로 길게 한 무리져 피어 있는 코스모스들이 그 여린 줄기를 생동거리며 바람을 타고 있다.


비 그친 지금은 집을 둘러친 광교산 산줄기를 타고 흰 구름이 용오름을 하며 하늘로 오르는 모습이 장관이다. 무거움을 벗고 희디흰 구름안개로 승천하는 그 모습이 무척이나 아련하고도 엄숙하여 빨리울 듯 나는 응시하고 있었다. 내가 장남이라 어머니께서 오셔서 추석음식을 준비하면서 이런저런 과거 얘기하다가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가 옮겨지게 되었다. “네 에비가 술만 안 들었어도...” “그 이가 제 정신만 차렸어도 우리 사는 게 훨씬 수월했을 텐데...” 이미 오래전 위암재발로 돌아가신지 아버지에 대한 어머니의 착잡한 심정은 최근에 부도로 직장을 그만 둔 둘째의 사정 때문에 더한 듯 보였다. 그러나 어머니 못지않게 나의 아버지에 대한 회상도 깊이 패인 상처로 내 가슴에 남아 있었다.


내 기억에 남는 아버지의 인상은 주로 91년 늦여름에 미국에 유학 오기 전의 모습들로 채워져 있다. 유학중 세 차례 이 삼주씩 두고 온 아내와 두 딸을 보러 한국을 방문한 것으로는 아버지와의 깊은 얘기를 나눌 기회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 기억에 새겨진 아버지 인상은 정반대의 두 모습이 겹쳐진 것이었다.


하나는 내 나이 20대 초반까지 계속된 알콜중독의 모습이요, 또 하나는 술 안드시는 동안에는 생계를 위해 행상과 품팔이를 하시는 어머니 대신에 가사 일을 돕던 모습이다. 어렸을 때 내가 말이 없고 부끄럼을 잘 타며 자신 없어 하며 남 앞에 나서지를 못했던 이유는 바로 아버지의 알코올중독의 영향 때문이었다. 일단 술을 드셨다하면 2-3주를 내내 술과 살아야 했고, 그 심한 술주정과 자정이 넘는 늦은 밤에 취한 고성으로 온 이웃을 깨우며 남에게 들려 들어오시는 아버지는 집에 들어오셨어도 꼭 뒷풀이를 어머니와 우리들 특히 장남이 나에게 하셨다.


불행하게도 이런 경험들은 사춘기를 거치면서 나의 인격에 부정적인 영향들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에 대한 밝은 상을 갖지 못하였다. 때로는 깊은 증오와 반감을, 때로는 슬픔과 가정의 문제에 대한 좌절을 맛보면서 크게 된 나는 결국 남에게도 밝지 못한 조울증의 모습을 보여주게 되었다. 평소에는 괜찮다가도 술에 빠지면 어김없이 사람이 달라져 폭력적이며 어린아이처럼 행동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어떻게 이해랄 수 있었겠는가? 술중독은 자연히 아버지를 일생동안 직장생활을 할 수 없게 만들었고 생계의 몫은 자연히 어머니의 처지였다. 내가 어려서부터 대학에 들어간 후 얼마동안까지 어머니는 새벽 6시 반이면 어김없이 집을 나가셨고 저녁 7시나 지나야 집에 들어오셨다.

자식이 아버지를 존경하기보다 어린나이부터 한편으로는 두렵고 한편으로는 불쌍히 생각하며 자란다는 것이 얼마나 큰 상처인지를 나와 같은 처지에 있던 사람이라면 알리라. 자연히 나는 가정에 대해 남에게 알리기를 싫어하였고 누가 가정에 대해 물어볼 때마다 - 네 부모는 무엇 하시냐는 질문 따위들 - 진땀이 나며 거짓말을 둘러대기가 일쑤였다.


집에 있는 것이 불편했던 나는 결국 산에서 시간을 보내거나 교회에서 중, 고등부의 신앙 활동으로 시간을 보낸 것이 유일한 낙이었으니, 산과 교회를 통해 어느 정도 마음의 치유를 받긴 했지만 여전히 어렵고 낯설었던 것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였다. 아버지의 그런 모습과 알코올중독에 의한 힘든 경험으로 인해 나에게 있어서 하느님을 아버지로 이해하는 문제는 참으로 낯설고 어려웠던 것이다. 언제나 아버지란 단어는 나에게는 어렵고 힘든 언어였다. 그런데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한 집안에서 점점 쌓여져간 아버지와 나와의 담은 우연한 기회를 통해 전환점을 갖게 되었다.


고등학교 일학년 봄소풍 - 그 때는 소위 학도호국단이 형성되어 소풍도 춘계행진이라 불리웠다 - 때의 일이었다. 간밤에 들어와 지속된 아버지의 술주정으로 어머니는 거의 녹초가 되어 잠시 눈을 붙이고 일어나 일 나갈 준비를 하고 계셨고 아버지는 심한 술 냄새를 풍기며 주무시고 계셨다. 그런데 도시락을 안 싼 것에 대한 나의 불만에 대해 “너희들 아니었으면 벌써 죽고 말았다”는 어머니로부터의 심한 화풀이만을 듣게 되었다. 결국은 더 이상 말을 듣기 싫어 집을 뛰쳐나와 풀이 죽은 채로 학교로 향했다.


소풍장소인 서울근교 서오능은 마침 여러 학교들이 함께 모이는 바람에 대단히 북적거렸다. 점심시간이 되었으나 다른 친구들처럼 도시락을 안 싸와도 남의 것 얻어먹는 뱃심도 없었던 나는 숲 속의 한 구석에서 간밤에 못잔 잠이나 보충할 참으로 누워 하늘을 보고 있었다. 얼마나 잤는지는 모르나 친구들이 찾는 소리에 깨어 일어났다. “너의 아버지가 오셨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에 가슴이 덜컥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아침에 나올 때 아버지가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아는 나로서는 순간적으로 도망가 숨어버리자는 생각이 떠올랐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아버지가 술 취해서 어떤 불미스런 행동을 선생들이나 친구들에게 할지를 몰라 더 이상 창피한 일이 일어나기 전에 아버지를 그들과 격리시켜야 하겠다는 다급한 마음이 들어 달려갔다.


그런데 뜻밖에도 아버지는 나를 찾기 위해 두 시간이나 넘게 이곳에서 찾아 헤매셨다는 말과 함께 네 점심이라며 어깨 옆으로 메는 스포츠가방을 내미시는 것이었다. 이미 한쪽 줄은 무게를 견디지 못해 끊어져 있었고 가방 안에는 과일들과 빵이 채워져 있었다. 친구들과 함께 먹으라는 말씀과 함께 아버지는 곧장 거기서 다행히도 떠나셨다. 여전히 술 냄새는 풍겼지만 자식이 부끄러워 할 행동은 하지 않으신 채......


“야, 너희 아버지 대단하다. 어떻게 여기를 알고 찾아 오셨니!” 친구들의 얘기를 건성으로 들으면서, 무의식적으로 가방을 열고 친구들에게 과일과 빵을 나눠주었지만, 마음은 그 순간 형용할 수 없는 깊은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아, 아버지!” 짧고도 긴 탄성과 휘몰아치는 격정이 가슴을 흔들며 진동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평소 행동과는 다른 나에 대한 아버지의 내면을 어렴풋이 보게 된 것이다. 아버지 정(情)의 확인! 어떻게 그가 내가 서오능에 있는지를 알았는지는 모른다. 단지 내가 아는 것은 그가 두어 시간을 나를 찾기 위해 헤맸었다는 것과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한쪽 끈 끝이 끊어져 나간 가방을 힘들게 가져오셨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술주정은 보통 이주이상 술과 끝장을 보고나서 다시 일주일을 심히 누워 앓고나서야 비로소 일어나시는데 그날은 달랐던 것이다.


그런데 그날만은 정말 예외였던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한 아버지의 술주정은 나를 찾아온 다음 며칠간도 계속된 것 같다. 그러나 아버지가 점심가방을 놓고 간 그 순간부터 내가 아버지께 가졌던 깊은 골은 화해의 실마리를 내 내면에서 찾게 되었다. 그 이후부터 나는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탈출하고 싶었던 내 가정의 상황을 서서히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아무런 역할을 못하시는 아버지에 대한 적의감도 훨씬 줄어들기 시작하였고 점차 아버지의 생에 대한 이야기를 주어 듣기 시작하였다.


아버지는 평남 성천군 구용면 운전리가 고향이시다. 부모님아래 8남매 중 마지막 둘째로서 1.4후퇴 때 오직 혼자만 내려 오셨다. 그곳에서는 일제 식민시대의 영향에 의해 조혼제로 인한 약혼자가 있었으나 휴전선이 그어진 이후 결국은 다시 지금의 어머니와 결혼하셨다. 그의 고향에 대한 애착은 나와 남동생의 이름을 아버지의 고향주소에서 따온 데서 보여진다. 내 이름 성용은 바로 평남 ‘성천군 구용면 운전리’에서 앞에서부터 따온 것이고 동생 운용은 ‘구용면 운전리’의 뒤로부터 따온 이름인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혈육의 문제와 아버지 내면에서 생생히 살고 있는 고향에 대한 실재(reality)를 충격적으로 접하게 된 것은 그 후 몇 년지나 MBC 방송국에서 방영한 ‘이산가족찾기’ 생방송의 몇 주간의 경험이었다. 아버지는 거의 그 기간 동안 TV에서 눈을 떼지 않으셨고 재회 장면마다 뜨거운 눈물을 줄곧 흘리시곤 하셨다. 여의도 MBC 방송국 옆 광장에 이산가족 명단이 있다는 것을 아신 아버지를 따라 광장에 도착한 나에게 있어서 여의도에 있었던 한 나절은 일생 지워지지 않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방송국 벽마다 헤아릴 수 없이 붙여있는 사람 찾는 벽보들, 풍선에, 등에, 모자에, 가로수에, 심지어는 임시 화장실마저 꽉 채운 사람 찾는 종이들로 덮여 있었다.


그보다 더욱 저리도록 아픈 것은 거기에 모인 사람들의 애절한 눈빛들! 며느리와 자식이 그곳 광장 거리에 죽치고 앉아 있는 어머니에게 ‘벌써 며칠째 이냐고, 병날 것 같으니 가서 잠시 집에 가서 쉬시고 오자’고 달래도 막무가내인 모습들, 자식들이 밥을 날라오고 심지어 화장실에 가는 시간에 찾던 사람이 지나갈까봐 오강까지 부탁하는 어느 할머니의 모습!


갑자기 내 가슴이 찢어지며 엄청난 고통의 실재의 충격이 뼛속으로 전해졌다. 그동안 내가 간과하고 살아왔던 또 하나의 살아있는 실재, 이산가족의 현실! 아아-- 누가, 그 무엇이 이 많은 무리들을 이토록 아프고 힘들게 만들었단 말인가. 분노와 울분, 그리고 깊은 연민의 소용돌이 속에서 무어라 정리할 수 없는 북받치는 감정 속에, 나는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뼛속이 떠는 한기를 맞고 있었다. 그제서야 나는 알게 되었다. 아버지도 피해자라는 사실을! 거의 막내로 자란 그가 어찌 이런 전쟁의 참화를 견딜 수 있었겠는가.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채, 어느 순간 주변은 전쟁의 아수라장으로 돌변해 버린 것이었다.


둘째 남동생이 79년 그 당시 등록금이 가장 싼 서울 시립대에 들어간 후, 상고를 나와 은행생활을 하던 나와 막내 여동생마저 81년 각각 대학에 들어가고 나자, 그 때부터 아버지도 무슨 책임을 느끼셨는지 담배도 끊으시고 술도 끊으려고 부단히 노력하였다. 아마도 우리가 살고 있는 서울 삼양동 돌산의 빈민촌의 열악한 환경에서 자식들이 나쁜 길로 가지 않고 각각 자기 운명과 싸우는 모습이 어떤 각성을 아버지께 준 것이라 생각된다. 그 후 어쩌다가 술에 빠지는 일도 있었지만 조금씩 아버지는 나아지셨고 신앙생활로 돌아서면서 지금까지 보여준 길과는 다른 인생길로 들어서는 계기가 되었다.


91년 유학이후 미국에 살면서 부모님으로부터 듣는 소식은 언제나 잘 있으니 염려 말고 거기서 사는 것이나 열심히 하라는 전화의 말씀이었다. 아마도 우리가 이곳에서 생활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알고 있어서 걱정하지 않도록 하려는 배려였을 것이다. 그 후 아버지가 위암으로 수술을 하고 치료를 받는 동안에도 역시 모든 게 잘 돼가고 있으니 염려 말라는 소식이었다(당시 집에서는 내 유학생활에 큰 영향을 줄까봐 일체 어려운 소식을 보내지 않도록 아버지의 엄명이 있었다고 나중에 전해 들었다).


그러다가 위암 수술후 일 년이 지난여름 초 어머니 환갑 차, 여행 겸 96년 여름에 두 분이 뉴욕의 존 에프 케네디 공항에 내려서 출구로 나오실 때 나는 말 그대로 팍 늙으시고 반쪽이 되신 아버지를 처음엔 알아보지를 못할 정도였다. 그만큼 암 치료가 힘들었었다는 증거였다. 그 자리에서 또 한 번 가슴 저린 아픔을 나 홀로 삼켜야 했다. 내가 그토록 모르고 있었다니... 한 달 동안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으면서 아버지는 육체의 연약함과는 전연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목사인 내 자신이 부끄러울 정도로 그는 생활에 대한 열렬한 감사와 찬양 그리고 기도생활을 하셨고 새벽부터 자는 시간까지 덤으로 사는 인생을 감사로 산다는 신념으로 순간순간을 정성으로 사신 것이다. 그 짧은 동안의 만남 속에서 아버지는 과거엔 세상에 밀려 사셨지만 지금은 모든 것을 극복한 상태로 일어서신 모습을 보여 주셨다.


그동안 차도가 좋았던 위암이 갑작스럽게 나빠진 것은 미국방문 다음해 초 예기치 않았던 어머니의 급성폐렴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이 주일을 중환자실에서 의식불명으로 있는 동안 아버지는 나을 것이라는 신념을 전화로 여러 차례 하셨고 그분의 극진한 기도와 병간호는 새벽첫차로 백병원에 도착해서 저녁까지 이어졌고, 그 결과 어머니는 이 주 만에 의식을 회복하시고 점차 기력을 조금씩 회복하게 되었다. 어머니가 퇴원하시고 한 달쯤 결국은 아버지는 병간호의 여파로 기진해 누우셨고 암은 다시 급속도로 전신에 번지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해서 아버지는 일생 어머니께 진 빚을 그의 마지막 온 힘을 다해 어머니를 간호함으로서 갚고 가시게 된 것이다. 어머니나 우리 형제들이 이구동성으로 동의한 것은 바로 아버지께서 어머니를 살려놓고 돌아가신다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며칠째 밤에 나만 찾으셨다는 어머니의 전화연락을 받고 나는 그 다음날로 즉시 아내와 애들을 모두 데리고 비행기에 올라탔다. 이제 아버지의 여생이 얼마 안 남았다는 예감과 더불어 이제 겨우 회복세로 돌아선 어머니마저 아버지 병간호로 돌아가실지 모르기에 아내가 같이 가서 간호를 해야겠다는 주장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결국 내가 도착해서 꼭 일주일 만에 운명하셨다. 위암으로 혀까지 나와 굳어지는 그 상황에서 말씀하실 수 있었던 도착 후 3일 동안 그는 주로 고향이야기와 6.25때 겪은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이 모두는 처음으로 새롭게 알게 된 이야기로 그가 가슴깊이에 묻어 둔 것들이었다. 부모님이 학살당한 이야기부터 인민군에 있다가 다시 남쪽에 내려와 전향하여 국군특수부대에 속한 후 종종 북파 되어 첩보활동을 하던 이야기들, 그리고 그가 신앙에서 다시금 소망을 얻고 신앙에 안착하기까지의 인생여정을 듣게 되었다.


마지막 돌아가시는 순간에도 그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에 살고 있었고 다 회개는 하였다 하였지만 그가 인민군에서 국군으로 전향해 첩보활동하면서 그 첩보활동의 실재 내용은 나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그가 겪은 위험과 위기상황은 짐작하고도 남았다. 가장 삶에 민감한 20대 초 나이에, 자신을 키워주고 품어준 산하에 들어가 자신의 터전인 고향에 등을 돌리고 군사정보를 수집하고 고향 땅을 해치게 만드는 입장에 서게 되었으니 어느 누가 제 정신으로 살 수 있단 말인가? 민족분단은 평범한 한 개인의 영혼도 갈라놓고야 말았던 것이고, 그로인해 우리 가족도 그 힘든 과정을 함께 받아야 했던 것이다. 아버지는 내가 도착 후 세 째 날 오후부터 물도 안 드시고 말씀도 못하시며 복수가 차오르기 시작하였다. 그 후부터는 계속 신음뿐이셨는데 입안도 거의 굳어가고 계셨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은 아버지의 마지막 말씀이 머릿속에 맴돈다. 사흘째 되는 날 낮에 아버지는 한 동안 안 여신 입을 억지로 여서서 가까스로 같은 내용의 한 마디를 내뱉으셨다. “지금 통일전망대에 나를 데려다 달라”는 말씀이 그 것이었다. 그리고서는 혼수상태로 들어가셨다. 그러나 나는 그때 아버지의 청을 들어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날의 일기가 너무 불순한데다가 조금만 움직여도 대단한 고통의 신음을 쏟아내시는 데 어떻게 움직일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아버지의 최후의 말씀은 가끔씩 내 귓가를 스치며 그 후 기일이나, 구정과 추석 때면 어김없이 나타나곤 한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입천장이 굳어버리고 입술은 말라 갈라지며 치아까지 시꺼멓게 녹아 굳어가는 그 지경에서도, 마지막 온 힘을 내어 뱉은 한 마디가 휴전선 통일전망대에 가보고 싶다는 것이었으니... 망향의 한 맺힌 그리움이 그토록 사무쳤을 줄이야. 그 말을 들으며 마주잡았던 내 손끝을 타고 뜨거운 회한의 바다가 가슴속에서 넘쳐흘렀다. 그리고 대상을 알 수 없는 치미는 분노가 전신을 훑으며 지나갔다. 이토록 소박한 인간 본연의 소망이 어째서 가장 어렵고 불가능한 꿈이 되어버렸는가?


아버지의 임종기간과 장례식을 치루면서 나는 여러 사람들로부터 병문안과 추모를 하면서 아버지에 대한 최근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아버지가 그의 끝 몇 년을 어떻게 보냈는지를 대강 알 수 있었다. 그분은 암 판정을 받으시고 나서 남은 일생을 상심하고 병든 사람을 찾아가 위로하는 데 정성을 다하였고 할 수 있는 순간까지 아무 내색을 안 하시고 교회의 남선교회 일을 책임 맡아 모임안내와 선교회 사업에 기력이 있는 기간까지 애를 쓰셨던 것이다. 영안실에서 눈물을 흘리던 여러 교회 식구들과 그의 친구들이 보여준 아버지에 대한 석별의 정은 잊혀지지가 않는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만 일생동안 진 빚을 갚은 것이 아니었다. 바로 아버지가 암 투병을 하던 몇 년의 헌신적인 삶을 통해 그동안 내안에 있었던 잊어버린 그에 대한 아버지상을 다시 회복해 주시고 이제야 비로소 아버지를 존경의 언어로 부를 수 있게 하시고 가신 것이다. 그동안 내가 남몰래 아버지를 얼마나 부끄러워하고 증오했던가? 그가 아버지상을 내게 되찾아주시고 가신 것을 내게 주신 그의 가장 큰 선물이었다. 강화도의 어느 야산의 자투리 묏자리를 사서 안장하고 나서 홀로 묘 앞에 서서 형용할 수 없는 목메임에 파묻혀 있었다. 임종과 장례식에도 보이지 않던 눈물이 묘에 안장을 하고나서 다들 되돌아간 후에 비로소 주체할 수 없이 뜨겁게 내리 흘렀다.


더 이상 아버지를 부끄러워하지 않으리라! 아버지와 자식으로서의 나와의 관계는 완전히 회복되었다. 아아--, 누가 이 고백의 의미를 알겠는가. 그동안 아버지로 인해 참으로 힘들었던 삼십 여 년간의 맺히고 맺힌 아픔과 절망의 응결이 풀려져 나가는 나의 이 고백을 누가 과연 이해할 수 있겠는가? 아버지는 평소에 화장을 해달라고 하셨고 유언으로까지 남기셨지만 어머니께서 너무 허망하여 본인이 견딜 수 없다고 하여서 결국은 어머니 고향인 강화도 어느 야산에 묘소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께 그 자리에서 약속을 하였다. 잠시만 여기 계셔달라고. 내 생전 기필코 아버지의 고향인 평남 성천에 다시 묻혀드리겠다고-.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그리고 유학이 끝나고 귀국한 지금까지도 종종 아버지의 마지막 말씀이 무겁게 나를 내리 누르곤 한다. 무언가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자각시켜주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내 아버지의 이야기는 남에게는 시시하게 느껴지는 평범한 한 개인의 삶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평범한 인간을 평범한 인생조차 제대로 못 살게 하고 결국은 나의 인생 반평생조차 어두운 그늘로 덮게 한 것이 단지 개인의 윤리적 문제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분의 이야기 뒤에는 자식으로서도 다 이해하지 못한 한 개인의 운명 뒤에 민족의 분단이라는 고통이 얼마나 크게 작용했으며 심지어 뒷 세대에게도 얼마나 아픈 상처를 주었는지 깨닫게 해준다.

아버지의 일생 전체가 이로 인해 힘들어하며 사셨고, 자식인 나의 일생 절반이 이로 인해 힘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부자지간을 힘들게 한 원인이 바로 아버지 탓으로 돌리고 아버지의 무능과 술 중독을 비난하면서 난 살아온 것이었다. 이제야 이해하게 된 것은 아버지 자신도 견디기 힘든 인생을 그 어느 누구로부터 아무런 위로없이 사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개인의 운명 뒤에 작용하는 거대한 민족사의 아픔이 존재하고 있음도 알게 된 것이다.


이번 추석에 오신 어머니께서 아버지의 술주정에 대한 비밀을 얘기 해 주셨다. 그 전에는 아버지가 술주정은 없으셨다고 하셨다. 그런데 정보부에 관련된 일(특수첩보활동)을 하면서 이북을 자주 넘어가게 되면서부터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 처해지면서 그가 술주정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도 아버지가 돌아가기 직전에 내가 오기 전에 어머니께 미안하다고 고백하며 말한 것이어서 어머니도 몰랐던 일이라는 것이다. 어머니 얘기인즉슨 ‘북에서 넘어온 청년을 다시 간첩 질을 하게 하면서부터, 미래를 알지 못하니까 받은 돈을 술로 날려 보냈다’는 설명이었고 이는 아내에게도 죽을 때까지 숨기고 있었던 비밀이었다는 것이다.


거칠게 내리 쏟던 비가 그치고 이곳 광교산 나무숲들의 녹염이 더욱 가까이 다가온다. 이미 가을의 전령은 일부 나뭇잎을 바닥에 그 흩뿌리면서 알몸으로 하늘을 맞이하기 시작하고 있다. 지나온 기억의 무거운 이파리들이 하나씩 나로부터 떨어져나가 이제는 텅 빈 알몸으로 하늘 앞에 서고 싶다. 아팠던 생채기들, 내리쏟던 거칠은 운명의 빗줄기들을 뒤돌아보면서 아픔으로 새롭게 실재를 볼 수 있는 눈을 허락해 준 것에 감사하며 이제는 잘 가라고 굿바이를 하고자 한다. 한때는 아프고 힘들었지만 이제는 커오는 두 딸을 보면서 나의 뒷 세대에 대한 책임 앞에 서리라.



2005년 광복 60주년 한가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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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용박사 | ecopeace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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