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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영이요 생명이 된다면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다’(6:63)

 

우리가 경험하는 갈등의 본질은 사건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그것을 본 사람의 각기 다른 주관성의 차이 때문에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갈등의 본질은 사건의 상황도 그것에 다가가는 사람들의 주관적 이해의 차이도 아니라 오히려 소통의 문제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내가 참여하여 갈등을 해결하는 과정속에 있어왔던 경험과 내 자신의 갈등의 경험을 통해 볼 때 이제야 내게 명확한 결론이다.

 

그러나 나의 이 결론은 지금까지 상식을 뛰어넘는 것임을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첫째 견해는 ‘X라는 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너와 나는 아무 일이 없었을 것이다라는 견해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지금까지 괜찮았는 데 X라는 사건이 생김으로 인해 너와 나는 불편함과 힘든 상황으로 몰아갔다는 입장에 선다. 예를 들어, 불륜의 행위를 하지 않았으면 파트너로서 너와 나는 괜찮았을 테고, 남북이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로 갈라지지 않았으면 이런 사드 문제니 분단의식으로 인한 지배체제의 고통이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견해가 그것이다.

 

이 견해는 정말 그런 것처럼 보인다. 객관적 원인이 주어질 수 있다는 이 견해는 우리에게 설득적이기도 하다. 그런데 갈등의 원인이 이렇게 마치 객관적인 외부의 요인으로 이해한다면 - 설령 그것이 타당할지라도 - 그 핵심의 덫은 선택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미 객관적인 그 무엇으로 던져져 있어서 그것의 옳고 그름의 시비의 부정적 에너지에 대해 아무런 조처를 못하고 그 흐름속에 매몰되고 만다. 그리고 그것이 불륜이든 이념적 차이든간에 역사적으로 꼭 모두가 자동적으로 이혼하거나 모든 나라가 항상 싸우고 있는 것도 아니다.

 

둘째 견해는 갈등은 사건과 상황 그 자체에 있기 보다는 그것에 다가가는 당사자의 내면적 주관성의 차이로 인해 발생한다는 견해이다. 이것은 첫 번째의 객관주의적 견해와는 다른 주관주의 입장에서 보는 견해이다. 대개의 경우 이런 견해는 갈등해결에 종사하는 많은 이들과 임상심리학적 입장에 선 사람들 대부분이 취하는 태도이다. 사실상 전자의 견해로서 해결하지 못하는 갈등상황을 이런 견해를 가짐으로 많은 해결을 하고 있기도 하다.

 

갈등은 사건 자체에 있기 보다는 그것을 대면하는 당사자들의 주관성에서 기인한다는 이해는 불륜이나 남북이념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문제에 있어서 각자의 입장과 관점에 투영된 이익(interest)필요(needs)에 따른 경험적 주관성에 대해 확인하고 이 이익과 필요를 충족하는 방식으로 갈등상황을 재해석함으로서 갈등해결 혹은 갈등전환의 기회로 나아간다.

 

사실상 나 자신도 두 번째 견해에 대해 동조하며 내 활동에 많은 에너지를 이 견해의 입장에서 쏟아온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서클의 경험을 통해 내가 근본적으로 문제의식을 다르게 갖게 된 것은 이것이다: 왜 이 서클의 안전한 공간에서는 객관적 상황이나 주관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갈등으로 번지지 않고 오히려 진실의 전체성이 드러나면서 각자의 성장과 배움으로 전환되는 것인가? 서클에서 아버지의 성폭력에 대한 자기 경험의 나눔이 객관적 사건의 일어남이라는 외부 원인이나 그것에 대한 나의 대응의 주관성의 문제의 자책감도 아닌 제 3의 방식으로 삶의 의미의 회복과 치유가 발생하는 데로 나아가게 되는 것인가?

 

더 나아가 갈등이 일어날 때마다 주관적 경험의 차이에 대한 이해를 통해 서로 연결하여 해결하는 사후약방문의 조치말고 적극적인 기여의 방식으로 사건, 상황, 관계, 사람을 만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서클모임에서 경험한 것처럼 그렇게 호기심을 가지고 지지하는 마음으로 말을 듣는 것만 아니라 언어 행위를 바꾸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대화나 서클에서 이야기 나눔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이 경청의 중요성이지만 언어행위는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최근에 성서에서 예수가 한 말인 내가 하는 말은 영이요 생명이다라는 이 문장이 그토록 새롭고 가슴을 후비며 다가 온 이유는 바로 그러한 나의 질문에 대해 그 문장이 그 어떤 계시적인 응답처럼 가슴을 울렸기 때문이다.

 

내가 깨닫게 된 본질은 갈등은 상황 그 자체보다 그 상황에 대응하는 당사자의 내면적 주관성에서 어떤 중요성의 관점으로 보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에 동의를 갖고 갈등작업을 해 온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러한 이익/욕구에 대한 해석과 의미의 발견이라는 소극적 작업은 언제나 사건의 뒤처리로 가게 된다는 사실의 당혹감에서 변화를 적극적으로 가져오기엔 역부족이라는 이해에 기반한다. 어떻게 능동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더 적극적인 모멘텀은 어디에 있을까하는 의문에 대해 예수의 문장은 새로운 눈을 열게 만든다.

 

그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서로 힘들어 하고 고통속에 머무르는 것은 사건, 상황이 주는 어려움보다는 그것에 대응하며 소통하는 우리의 언어 행위 그 자체가, 즉 의사소통 과정 그 자체가 서로에게 고통을 주는 방식으로 사용해 온 것이 핵심 원인이었다. 다시 말하면 사건과 상황이 갖는 고통의 객관성도 그것에 대한 주관적 중요성도 그 나름의 타당성이 있으나 실상 우리가 본질적으로 변화되어야 할 부분은 우리의 언어행위의 본질에 있다는 통찰이다.

 

, 우리의 언어행위 자체를 말이 돌이 되어 상대방 가슴을 치거나 장벽이 되어 가슴을 막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주는 방식으로 전환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사후약방문하는 소극적 방식이 아닌 언어 행위 그 자체를 언제나 투명하게 하고 힘을 주게 하는 방식으로 내 언어행위를 항상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처럼 그렇게 항상, 그리고 범사에 그런 방식으로 유지할 수 있겠는가?

 

나는 아직 생명을 주는 방식이 무엇이고 어떻게 하는 것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그러나 최소한 예수의 이 말이 샬롬의 나라 시민들에게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삶의 기술이 되어야 한다는 강렬한 부름을 받는다. 과연 어떻게 그런 언어행위가 가능해질 것인가?

 

내가 가장 어려워했던 철학자 하이덱거의 격언이 생각난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나는 그가 한 이 말이 어떤 뜻으로 쓰여졌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두 가지 통찰이 영과 생명을 품은 언어에 관련하여 생각나게 만든다.

 

첫째는 집(home)의 개념이다. 어떻게 우리는 언어를 통해 낯선 공간인 모텔이나 게스트 하우스가 아니라 편안하고 쉬고 안전함을 느끼는 이라는 공간으로 대화가 일어나는 공간이 그렇게 될 수 있겠는가?

 

둘째는 존재라는 개념이다. 어떻게 우리는 언어를 통해 사회적 지위나 역할의 마스크(개성이라는 영어의 personality란 말은 persona , 가면 mask라는 뜻을 갖고 있다)를 넘어 본원적인 존재의 상태를 - 영혼의 깊이의 상태를 - 드러나게 하는 행위로 나아갈 수 있는가?

 

21세기 현대에서 제자직의 핵심이 기독교 화해사역자라면, 그리고 내가 그러한 길에 나가는 것이 나의 삶의 소명이라면, 우리는 예수의 이 말, ‘내가 하는 말이 영이요 생명이다라는 차원에 어떻게 가까이 나도 닮아 갈 수 있을까가 필연적인 질문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에게 거룩한 현존의 의미체로서 이해한 그리스도는 바라보는 악세사리로 전락하고 삶의 경험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된다.

 

더 나아가 기독교도로서 나는 감히 말하거니와 그 어떤 교리적 이해나 신앙의 행위도 내가 하는 말이 영이요 생명이다라는 것에 대한 실존적 자기 체험의 상태에 다가가지 못하면 그리스도를 체험하거나 안다거나 혹은 그리스도가 내 안에있다는 그 어떤 경험도 사실상 어려울 것이라는 마음의 명령(decree of heart)을 새롭게 듣는다.

 

그러나 현재 아직 이해가 부족한 나의 현실과 이 마음의 명령의 실존적 틈으로 인해 곤고함의 비참한 상태에 있다. 마치 사도바울처럼-‘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고통에서 무엇이 나를 건져내 줄 것인가?’

 

(2016.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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