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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20

나는 본다, 나는 듣는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다. (1:2-4)

 


 

자신의 삶의 상황이 마치 일이 꼬이고

바람의 역방향에 서 있는 것 같아

나아감이 없다고 느껴질 때,

뒤돌아 생각해보니 그것이 견디기 힘든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뭔가 나아가려는

목적의식이나 내적 동기가 존재했을 때,

단순히 감당하는 것으로도 살아갈 수 있었고

버티며 발을 조금이나마 내디딜 수 있었다.

 

그런데 근본적인 흔들림은 삶의 역경이 아니라

영혼의 깊이에서 오는 무너짐이다.

아리도록 심장이 파열되는 듯한 외로움과

속에서 기운이 다 빠지고 난 이후 지침의 진액만이

쓴 맛으로 올라올 때,

 

마치 뜨거운 사막처럼 내 영혼안에 있는

생기있는 것이 다 말라버리거나,

훈제된 물고기처럼 그렇게 낯설음과 무()의 충격속에 있을 때,

할 수 있는 것과 하고 싶은 것들이 떨어져나가고서

자신의 영혼이 흑암자체에 삼키워져 있음을 자각할 때,

도대체 무엇이 가능한 것일까?

 

이는 마치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함과 무엇이 다르랴?

혼돈, 공허, 흑암의 깊음이 바로 그러한 영혼의 상태를 말해준다.

내가 흑암의 깊이라는 영혼의 실존적 절망에서 신음하고 있었다는 것을

지난 50여년을 돌아보며 자각하게 되었을 때,

 

환상과 악의에 대한 내 영혼의 훈제절임과

주변 상황과 사회의 구조적 경향속에서 내 영혼이

숨을 못쉬고 있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을 때,

바로 그 때서야 나는 겨우 눈을 뜨게 되었다.

나는 본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나는 이제서야 본다.

혼돈, 공허, 흑암의 깊음위에 하나님의 기운이 휘돌고 있음을.

 

그리고

그 혼돈, 공허, 흑암의 공포로부터

무작정 방어하고 저항하고

그나마 그것도 더 할 수 없는 깊이에 삼키워져

소리지르기 커녕 그 흑암의 에테르속에 잠기워져 있음을 깨닫게 되고서야

나는 듣는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다.‘

 

환상과 악의라는 흑암의 깊이에서

두려움, 방어 그리고 저항의 몸부림마저

그 깊음으로 인해 삼키워져 더 이상 할 수 없을 때

이제야 비로소 나는 본다 그리고 나는 듣는다.

 

하나님의 기운이 그 흑암위에 운행하시고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니 빛이 생겨났다는 것을

나는 본다

그리고 나는 듣는다.

 

아니, 나는 보게 되었다

흑암의 깊이만이 아니라 뭔가 신적인 것이 거기에 휘돌고 있음을,

아니, 나는 듣게 되었다,

어둠의 침묵속에서 터져나오는 말씀하심.

 

나는 모른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원래 혼돈, 공허, 흑암속에 신적인 것이 있었던 것이었을까?

아니면, 내 영혼의 흑암의 깊이가 신적인 것을 불러들인 것일까?

나는 모른다, 어떻게 그렇게 보는 것이 일어나게 되었는지는.

 

나는 모른다, 어떻게 그런 동시성이 가능해졌는지를.

원래 그 깊고 지루하게 긴 영겁의 침묵이

사실은 말씀하심의 변형이었던 것이었을까?‘

아니면, 내 영혼이 환상과 악의의 지껄이는 소음으로 인한 침묵이

심장의 파열로 균열이 일어나 말씀하심을 초래한 것일까?

나는 모른다, 어떻게 그렇게 들음이 가능해지게 되었는지는.

 

그러나 단 한 가지, 이것만은 명확히 안다.

내가 그 뭔가 열망하고 추구하려 애쓰던 그 모든 것보다

가장 소중하게 다가오고 있는 것은 바로

본다는 것과 듣는다는 것이 가장 놀라운 일이요

가장 염원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본다, 그리고

나는 듣는다.

이로 인하여 나는 일어나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되었다.

이 늦은 나이에 비로소....

아리도록 아쉽지만 그래도 그럼에도불구하고,

감사하고 축복하리라...

 

  (2016.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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