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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활동을 위한 묵상


               

             

   평화의 능력 - 뿌리박기와 날갯짓하기



너희는 무엇을 먹고 마시며 살아 갈까, 또 몸에는 무엇을 걸칠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공중의 새들을 보아라....

또 너희는 어찌하여 옷 걱정을 하느냐? 들꽃이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 보아라... 

(마6:25-31)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현실적으로 직면하는 수많은 문제들에 대해 예민하게 느낀다. 그들은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에 대해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무심하게 살지 못한다. 오히려 이들은 그것이 직접적으로는 자신과 관련이 없어 보이는 듯한 문제들에 대해서도 마치 자기에게 일어나고 자신의 문제인 것처럼  그렇게 아파하고 분노를 느끼며 가위눌리는 무거움을 느낀다.


약자들이 흘리는 수많은 눈물들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양 그렇게 태연히 살아가기엔 그들의 심장은 너무나 따스하고 맥박은 더욱 거칠게 뛴다. 굿바이하지 않고, 한 번도 주목을 받지 못하고 어느 새 사라져 버린 생태적 약자들의 부재, 그들의 침묵은 가슴을 찢는다. 아스팔트 도로 가운데 설치한 방벽에 의해 횡단하지 못하고 깔려 횡사한 수많은 주목받지 못하는 동물들의 시체를 지나치면서 가슴이 떨리고 보이지 않은 거대한 감옥과 눈멀음에 헉헉거리는 심장 소리를 듣는다.


분별없고, 조종하며, 공격적인 문화적 분위기속에서 그 어떤 신뢰할만한 자기 방어의 무기나 도구 혹은 굳건한 방패막이나 둘러싼 성채도 없이 현재의 삶으로 내던져져 있다는 사실이 그를 무척이나 두렵게 한다. 남처럼 삶의 이상이 성공, 영향력, 물질적 부, 자랑할 수 있는 것은 비현실적인 꿈처럼 보인다. 그만한 능력도 기회도 얻을 수 없다. 단지 평화를 오로지 가슴속 유일한 열망인 사람에게는 당장 현실적으로 부딪치는 문제는 내가 당장 무엇으로 먹고 마시며 살아갈까, 추위를 가리기 위해 몸에는 무엇을 걸칠 수 있을까 하는 소박한 이다.


내가 하는 행위로 얻은 이득이 누군가의 희생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면, 누군가의 눈물과 고통이 있는 것이라면 어떻게 그런 일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로 비추어지는 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나의 편리를 위해 내가 쥐고 소비하고 있는 이 일회용 생활도구로 인해 얼마나 많은 숲의 나무가 베어지고 그로 인해 다른 약자들의 삶의 자리와 그들의 먹거리가 사라지고 있는 지를 생각하기에 그런 것을 단지 생각하는 것만도 벅차기만 하다. 펀드나 투자로 이익을 보는 일도 누군가는 잃고 있고 있음을 알기에 마음이 가지 못한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사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다. 아니 남들에게 쉽게 보이는 생존하기조차 그토록 버겁게 느껴지게 된다.

   

최소한도 내게 필요한 먹거리, 나를 따스하게 보호할 수 있는 살림도구조차 힘들어지는 실존에 다가갈 때 비로소 우리는 그 가슴 시리도록 눈멀음과 당연한 생활방식이란 추위에 노출되어 있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염려하는 실존’으로서의 자신의 삶에 새로운 지평이 열리게 된다. 생활의 밑바닥에 추락하여 있는 덕분으로 인해, 진정으로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생생하게 염려하는 실존이 된 덕택으로 약함의 선물을 깨닫게 된다: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에 대해 눈뜨기.

 

토끼들이 하루는 회의를 열었다. 하늘에서는 독수리와 매가 달려들고, 땅 사방에서는 크고 작은 맹수들이 달려드는 것에 지치고 힘들어서 결론을 내렸다. "우린 저 하늘의 독수리처럼 자신을 방어할 강한 발톱도 없고, 숲의 맹수들처럼 남과 대적할 이빨도 강한 힘도 없으니 우리 모두 죽으러 갑시다" 모든 토끼들이 그 말에 수긍하여 동의하였다. “그럽시다!” 숲속의 연못에 빠져 죽을 심산이었다. 한편 연못에서 놀던 개구리들이 토끼 한 무리가 몰려오는 것을 보고 질겁하여 물속으로 첨벙 들어가며 소리쳤다. “토끼들이 쳐 들어온다~!” 자신들을 보고 놀라는 개구리들을 보고 한없는 위로를 받은 토끼들을 뭔가를 깨닫고 발길을 돌렸다.


약자가 그 약함을 버리지 않고 자기 방어의 무장 없이도 어떻게 ‘온전히’ 삶을 살 수 있을까? 예수가 말한 ‘세상에 있되 세상에 속하지 않는’ 삶이란 게 어떻게 가능할까? 성공, 부, 명망, 영향력을 향한 경쟁의 줄서기에 있지 않고, 그래서 다가오는 일상에서의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의 절실함이 그대로 생생하게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 염려함이 주는 무거운 ‘중력’이 ‘은총’이 되어 온전한 기쁨으로 살 수 있을까?


‘바닥의 작은 자’-들의 백합-와 ‘바닥에서 뿌리뽑혀 유리하는 자’-공중의 새-가 어떻게 그 자기 존재됨을 온전히 실현하면서 생을 즐기는가를 바라보라. 핵심은 ‘작은 자(백합, 새)’가 그 작음을 버리고 강한 자나 큰 자로 변형됨으로 일상의 염려를 벗어나는 게 아니다. 그 작음을 지켜 그대로 온전히 충만한 생을 맛보며 사는 것이 깨달음이 핵심이다.


자기를 지킬 수 있는 아무런 방어막 없이 존재함으로 오는 뼈 속까지 시린 자본주의라는 추위 속에서 일상이 힘들어진 먹고 마심 걸쳐 입음에 대한 작은 자들의 진정한 ‘염려함’의 문제가 사라져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통찰을 얻어 더욱 온전한 작음- 공중의 새, 들의 백합!-을 100% 즐기는 것이다. 토끼들의 염려함이 개구리를 보고 없어진 것은 아니다. 그대로 약함은 있되 더욱 생생한 토끼의 삶으로 변화된다.


그 열쇠는 아마도 본인이 믿기에는 ‘뿌리’와‘날개’에 있다. 자기의 온전한 본성-그대로 진실하며 충족적인 자기 내적 욕구-에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 자기 본성의 온전함이 방어없이, 억제 없이 표현됨으로 (let your own life/nature speak itself) 안에서 나오는 기쁨과 희열이 세상의 무게, 위협을 관통하게 된다. 이는 한쪽을 버리고 다른 한쪽을 취하는 개종의 문제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한 예를 들어보자.


한 때 오랫동안 시골에 쳐박혀 있었던 때의 일이다. 아침 산책하던 중 도시화로 인해 폐가가된 초가집 돌담옆을 지나던 길이었다. 마침 그 때 그 돌담안 그 집 옆으로 세워진 굴뚝에 커다란 거미줄을 갑작스럽게 대면하여 한 장면과 마주쳐 몸이 움직이지 못하는 얼어붙음 상태가 되었다. 그것은 바로 거미줄 속에 칭칭 감겨져 죽어있는 잠자리의 참혹함과 거미의 츙측함이 섬뜩한 그 무엇을 내 가슴속에 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와는 다른 실존 곧거미줄마다 간밤의 이슬들이 초롱초롱 투명하게 영롱한 구슬로 아침 햇살을 반사하면서 현기증나는 황홀감으로 가슴을 동시에 후비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참혹한 비극과 찬연하게 방사하는 영롱한 방울미소들의 겹침- 두 상반대는 실존의 공존과 상호 포섭과 융합!


‘들의 백합’과 ‘공중의 새’는 염려함의 실존과 뿌리박기/날개달기의 실재를 상호포섭하면서 생생하고도 온전한 생의 기쁨을 전달한다. 여기에서 거룩한 투명성 (Divine Transparency)가 드러난다. 한쪽을 거부하고 다른 한쪽 영역으로 넘어섬이 아니다. 이세상성이란 현실속에서 그 현실을 포함하되 그를 넘어서는 더 큰 전체(wholeness)를 열어준다. 그 작은 크기-백합, 새-가 그 자신을 넘어 들, 하늘의 생생한 넓음과 그 넓은 충만함을 포섭하여 드러내 준다. 들과 하늘의 그 넓음과 충만함은 바로 이 백합과 새로 인해 비로소 알려지게 되고, 그 영역이 살아 현존하게 된다.   


백합의 작음과 새의 작음은 변화되지 않는다. 염려, 자기 방어할 수 없음은 그대로 상존한다. 그러나 백합이 들에 ‘뿌리박음’으로 인해 그리고 새가 하늘에 ‘날개짓 하기’로 인해 다른 차원이 현존하게 된다 - 생생함과 온전함의 실재. 뿌리를 내리고 날개짓을 할 때 이제 백합과 새는 이 세상에 있지만 이 세상의 것은 더 이상 아니다.


그대가 다른 사람처럼 성공, 물질적 부, 강함, 영향력에 별 아쉬워하지 않고 살아서 일상에서 대면하는 먹기, 마시기, 걸쳐입기의 작은 자의 염려함의 실존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는 것으로는 약하다. 그대는 자신의 원칙, 가치, 신념을 지키고 살 수는 있다. 그대가 남들과 달리 평화라는 주제에 진지하게, 남의 희생에 대해 심각해하며 사는 것을 흔들리지 않고 지켜가는 것에 대해 주목받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작음의 삶이 -백합, 새로서의 삶- 더 넓은 경지 - 들, 하늘 -를 품어서 드러내고 있는가? 들과 하늘을 품어서 생생하고 홀로 자기됨에 충일한 기쁨을 발산하고 있는가. 의무와 책임을 넘어, 신념과 주장을 넘어 그로 인한 생이 기쁨이라는 화학적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가가 문제이다.


평화가 온전한 자기 본성이 되어 거기에 뿌리박고 그것에 의해 날개짓 하는 자유와 기쁨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직도 무언가 선물로 주어진 자기 존재의 깊이를 잃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평화는 주의주장이나 토론에 있지 않다. 자기 본성으로, 벌거벗고 방어없이 자기 삶으로 그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let your life speak!) 그럴 때 백합에게 바람은 춤을 선사한다. 새에게 그것은 비상이 된다. 뿌리와 날개라는 평화의 능력 없이는 그대는 평화를 염원하고 있고 평화에 대해(about) 말하는 것일 뿐 평화를 사는 것은 아니다. 뿌리와 날개 없이는 삶은 ‘걸어가는 죽음’이다.


공중의 새, 들의 백합을 보라! 그 생생함의 넘침이 어떻게 그 작음속에 흐르고 있는지를 눈치 채라. 그럴 때 평화는 강력한 에너지가 됨을, 자신의 진정한 본성임을 알게 된다. 작음이 춤이 되고 비상이 된다. 약함으로 더욱 생생하게 된다. 아~, 자기 방어없이도 기뻐넘치는 오롯한 생이여!      


2008. 1.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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