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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평화주의(비폭력 영성과 실천)의 두 기둥

                                                                                                   박성용/비폭력평화물결공동대표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첫째가는 계명은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느님은 유일한 주님이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
또 둘째가는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 두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막 12:29-30

예수의 폭력에 대한 대응은 ‘이에는 이로 눈에는 눈으로’의 옛 율법의 논리에 따라 힘으로 응전하는 역 폭력(counter-violence)은 아니다. 이는 악과 불의에 대한 대응에 있어서 폭력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는 폭력에 대한 정당한 이유가 있을 지라도 똑같은 폭력의 사용은 폭력의 악순환과 그 사회적 비용이 지대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흔히 오해하듯이 기독교의 비폭력은 폭력에 대한 무저항이나 소극적인 태도가 아니다. 즉 폭력에 대한 회피나 순응주의도 아니다. 이는 근본적으로 폭력의 원인에 대한 해답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의 비폭력은 폭력에 대면함에 있어서 철저하고 진지하면서도 회피, 순응, 역폭력이 아닌 제 4의 대안적이고 창조적인 길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적극적이다. 그래서 비폭력 활동가들은 ‘적극적 비폭력 (active nonviolent action)'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평화신학자 월터 윙크(Walter Wink)가 그의 책『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에서 예수의 비폭력 행동의 구체적 사례에서 명쾌하게 논증하듯이 “다른 뺨을 돌려대라. 속옷까지도 벗어주어라. 일부러 더 많이 짐을 지고 가 주어라”(마5:38-42)는 비실제적이고, 피학적이며 자멸적인 모든 것을 다 내어주고 수모의 길을 사는 무저항의 길이 아니다. 손등으로 한쪽 뺨을 맞는 모욕을 당함에 있어서 다른 쪽 뺨도 돌려대는 것은 억압자의 비인간적인 힘을 빼앗은 것이다. 겉옷까지 이제는 저당 잡혀야 하는 극도의 가난한 상황에서 자신들을 수치스럽게 만드는 제도와 채권자에게 이길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 속옷까지도 벗어주라는 것은 그 제도와 인정 없는 채권자에 대해 벌거벗음을 통해 벗긴 사람에게 수치를 주는 항거이다. 그래서 채권자가 합법적으로 돈을 빌려준 자가 아니라 땅 없고 가난한 자를 굴욕적이게 만드는 무리로 노출되는 것이다. 점령군에게 5리의 강제노역의 의무적인 차출에 대항하여 반란이나 증오가 아니라 5리를 더 가줌으로서 피억압자는 선택의 능력과 인간의 존엄성을 되찾고 강제노역자의 우월성에 당혹감을 주는 전례가 없는 상황을 연출하게 된다. 약자는 악에 저항하고 비협조함으로 악을 닮지 않으면서도 도덕적 주도권을 쥐게 됨으로서 억압자의 변화를 유도한다(채권자-‘제발 속옷은 입으시오.’ 로마병사 -‘이젠 내 짐을 돌려 주시오.’)   
 
이렇게 철저하면서도 창조적인 반응을 무엇이 일으키는 것인가? 어차피 제도가 강자의 편이고 약자에겐 아무런 대항의 길이 보이지 않은 상황에서 억압자의 모욕, 채권자의 강제집행, 무기를 지닌 병사에 대해 약자가 인간으로서의 자기 존엄성을 회복하고 서로 더 깊은 폭력을 경험하지 않으면서 상대의 폭력행위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이것은 그의 자기 정체성과 타자(the Others)에 대한 인식의 변화에서 나온다고 나는 믿는다. 이를 예수는 영혼과 몸이란 말로 표현하였다.

 신이 네 진실한 영혼이다.

우리 하느님은 유일한 주님이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

인간의 두려움과 분노 그리고 탐욕과 파괴의 문제는 자기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자기에 대한 이미지가 과거의 폭력의 여러 경험들에 의해 쌓여 있는 것으로 응축이 되어 있을 때, 거기에는 쉽게 상처받고 이를 또한 자동적으로 방어하려는 마음의 기제가 작동하게 된다. 두려움, 분노, 탐욕과 파괴는 역기능적 현상을 드러내지만 그것이 표출되는 데는 그만한 ‘정당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곧 상처받는 자신에 대한 보존본능과 과거 반복된 부정의 경험들로 인한 축적으로 만들어진 상처경험의 자기(the ego)에 대한 자동적인 응답인 것이다. 악의 체제와 불평등한 차별의 관행과 시스템 구조에서 익숙해진 자아는 자기 보존을 위해 폐쇄적이게 되고 외부의 자극(the fact)에 대해 과거의 경험이 그에게 준 일정한 패턴에 대한 자기 해석을 통해(through glasses of habited interpretation) 평가를 내림으로서 부정적 감정들이 분출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위협적이기에 나는 두려움을 느낀다.’ 이 말속에는 외부의 자극 (그것-'what is happened')은 과거 경험의 패턴에 의해 위협적이라는 해석작용을 거쳐 나의 느낌은 두려움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숨어있는 것은 나에 대한 자기 이해가 어떠한가에 따라서 위협과 두려움은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고, 숨겨진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가 결정적으로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에 대한 해석과 느낌의 방향성을 결정짓는 것이지 ‘그것’이란 외부의 자극(input)이 자동적으로 그것은 위협하는 성질을 당연히 갖고 있고 나는 이에 대해 자연스럽게 두려움을 갖는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공이 바닥을 치면 튀어 오른다는 일반적인 생각은 바닥이 딱딱한 조건을 갖출 때에만 가능한 것이고 그것이 물이거나 늪일 경우엔 해당이 되지 않는다.      

나의 주장의 요점은 외부의 사건, 자극이 어떠한 것이든 그것에 대응하는 나의 반응이 두려움, 분노, 의기소침, 절망 등으로 표출되는 것은 그 사건이나 자극의 본래적인 성격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숨겨져 있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내안에 있는 자기 이해-‘나는 누구인가’-의 근본적 태도로부터 나타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태도가 있다. 하나는 일반적인 견해로 ‘나서 죽는’ 자연적 인간으로서의 자기 이해이다. ‘태어나서 죽는’ 자연적인 육신의 인간으로서 자기 이해는 최고의 경지로 올라설 경우엔 도덕적 자기 규율로 스스로의 행동을 절제할 수 있는 이상형을 자기정체성으로 제시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안되는 경우에는 일상 생활에서 소유, 힘, 명성, 영향력이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게 된다 -‘내가 소유한 것이 나이다.’

예수는 다른 독특한 자기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른바 그의 ‘아바(아버지)체험’에 근거하여 요한복음기자에 따르면 그는 자신을 ‘아버지께로부터 와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자로 자신을 인식하고 있었고 내 증언이 참된 것은 내가 나 자신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로부터 온 것을 증언하기 때문이란 자기의식을 갖고 있었다. 자신이 하늘 아버지로부터 기원하고 다시 그에게 돌아간다는 이 자기 정체성으로부터 나오는 증언들과 행동으로 인해 그를 대하는 자들은 그 어떤 신적 현존의 생생한 감각을 필연적으로 느끼게 되고, 강력한 생활변화의 동기를 부여받게 되며, 과거를 단(斷)하고 갱생의 대안적 상상력을 지닌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자기 자신이 신적 근원(Divine Source)에 근거되어지고 있다는 이 확신이야말로 세 번에 걸친 십자가 수난에 대한 그의 예고에도 불구하고 십자가 수행을 할 수 있는 힘을 영혼속에서 분출시키게 되고, 수많은 갈등과 대결, 제자들의 배신, 다가오는 것에 대한 공포, 유혹과 불안에 대한 인간적인 경험에도 불구하고 이를 극복할 수 있었던 내면의 에너지가 있게 되었던 것이다.  내면의 빛이 밝혀짐으로(the lighting of the soul) 어둠의 행위에 대한 알아차림과 자유로의 손쉬운 사역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사도바울을 이를 일으켜 ‘이제는 내가 사는 것(the ego)이 아니라 내안에 주가 사는 것(the Self)이다'라고 고백한다. 자아가 근원적인 신적 심연 (the Divine Depth)속에 있음으로 해서 창조적이고 역동적인 자유의 에너지가 분출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의 첫 계명, ‘우리 하느님은 유일한 주님이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은 대상적 존재로서 저기 위의 신에 대한 인간의 종교적 헌신이란 차원을 넘어서서 더 깊이 자아의 본래적 자리의 회복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신적인 힘과 근원이신 하느님은 깊이로서 만나진다. 즉 ‘신은 너의 영혼이다’라는 것이다. 이것을 중세기독교 신비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돌파의 경험을 통한 아들됨의 탄생으로 이야기한다. 유일한 실재로서 하느님은 따라서 자기 초월성을 사물의 ‘밖’에서가 아니라 ‘안’에서 초월성을 드러낸다. 아버지와 아들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아들은 아버지를 알고 그의 능력인 자기 초월성을 품수 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 목숨, 생각,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자신의 본래 존재를 일깨우는 길이다. 노예가 아닌 아들로서 자아는 자기 ‘안’(영혼)에 부어진 하나님의 생명에 의해 살아간다. 이것이 인간의 경험적 자아가 갖는 두려움, 분노, 슬픔과 힘겨움을 극복하게 한다. 왜냐하면 신적 에너지가 영혼속에서 분출됨으로서 자신의 신성함과 삶의 신성함에 대한 새로운 실재를 살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절대성이 아들을 일으키고, 창조자이신 아버지의 현존이 대안적 살림을 위한 창조력을 제공하게 된다.

이웃이 네 몸이다.

또 둘째가는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네 이웃, 곧 타자(the Others)가 너와는 거리를 가진 다른 존재로 인식함으로서 ‘우리 대 그들’이라는 대립적 구도가 생성되어진다. 나와 거리가 있는 타자는 쉽게 내 관심으로부터 멀어져서 무시되기 쉽게 된다. 따라서 나의 일 혹은 나의 주된 관심사는 아니게 된다. 그의 고통에 대해 ‘내 일’로서 다가오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쉽사리 타자의 고통에 대한 윤리적 민감성을 상실하게 된다. 심지어 우리는 당연한 결과를 받게 되었다고 그에게 일어난 불행이나 고통, 폭력과 상처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하게 된다. 일단 ‘나’와 ‘우리’에 관계없는 ‘그’나 '그들‘로서의 타자가 정위되어졌을 때 그들의 고통에 대한 윤리적 민감성을 약화시키고 결국은 타자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는 길이 열린다는 본인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시스템에 의해 구축되어진다.

‘나/우리’ 대 ‘너/그들’의 분리는 가치에 있어서 상하계급적인 사고를 형성한다. ‘위’와 ‘아래’의 가치구분이 일어나면서 백인/황흑인, 문화/자연, 마음/몸, 도시/농촌, 남성/여성, 이성/감정의 구분에서 전자는 가치에 있어서 ‘상위’가치를, 후자들은 ‘하위’가치를 지닌 것으로 간주되어진다. 따라서 전자들은 지위, 특권에 있어서 후자들과 구별된 우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이렇게 구분되어 질 때 ‘힘(power)’은 자연스럽게 열등한 능력을 지닌 것으로 간주된 후자를 통제하는 ‘지배로서의 힘(power-over)’으로 개념화된다. 아버지의 힘은 자녀를 지배한다. 판사의 힘은 피고를 지배하게 된다. 인간의 힘은 자연을 지배한다.... 지배의 힘을 가진 쪽은 지위의 유지와 삶의 능력에 있어서 보다 많은 것과 혜택을 누리는 ‘특권’의 누림을 정당화하게 된다(수입, 집, 교육 등). 결과적으로 우월한 자가 지배와 종속을 정당화하는 지배의 논리(a logic of domination)를 승인하는 사회체제가 구축되어지고 이는 당연하고 자연스런 사회적 실천으로 사람의 마음속에 각인되어진다.

만일 자신과 타자가 우월과 열등의 상하관계(up/down relation)이 아니라 좀 더 극단적인 관계로서 타자가 적(敵)으로 이미지화된다면 어떠할까? 현재 미국 기독교의 보수적 근본주의나 이슬람원리주의의 경우처럼 타자를 적으로 이미지화할 때는 무력충돌이 발생하며 이는 적인 상대로부터 완전한 전멸이나 복종 혹은 회복불가능한 정도의 상처를 입히는 것이 정당화된다. 적으로서의 타자의 문화, 가족, 땅은 파괴의 대상이 된다. 그러한 파괴와 폭력은 보복의 악순환을 낳고, 치유 불가능한 연쇄적 관계로 어제의 일이 오늘로, 오늘의 것이 미래세대로 넘어가면서 상처는 견고해 지고, 이에 따른 인간의 심성도 잔인해지고 폭력에 무감각해지는 사회병리적 현상을 낳게 되는 불행을 맛보게 된다. 즉 이런 폭력체제가 강화되면 인간은 기본적으로 폭력적인 인간이란 믿음을 갖게 되며, 우리가 속한 세상을 근본적으로 승리를 위한 전쟁지대(war zone)로 간주하게 되고, 갈등해결의 수단은 오직 폭력을 통해서라는 신념을 소유함으로서 지배와 폭력을 위한 새로운 행동들을 낳게 되는 것이다. 

이념적 타자(ideological Others)나 종교적 타자(religious Others)에 가해지는 이런 군사적 적대주의의 예에서 보듯이 명확한 물리적 폭력(physical violence-여기에서는 가해자를 확인할 수 있다.)의 실상과 앞에서 말한 위/아래의 관계에서 타자의 차이(difference)를 차별화(discrimination)하는 보이지 않는 구조적 폭력(structural violence-가해자는 보이지 않고 구조와 제도가 폭력의 기능을 수행한다)과는 달리 더 조심해야 할 것이 바로 문화적 폭력(cultural violence)이다. 이는 요한갈퉁(Johan Galtung)의 개념으로 물리적, 구조적 폭력을 정당화하고 지원하는 가치나 신념체계를 말한다. 예를 들면,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든지, 정의가 폭력에 우세해 지기 위해서 ‘더 나은/좋은 세력’이 선택되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나, 삶 자체의 존재 방식이 원래 폭력적(적자생존의 법칙)이라거나 혹은 질서와 안정을 위해서는 폭력은 어쩔 수 없는 사회적 비용이라는 신념체제들을 말한다. 

이렇게 ‘나/우리’ 대 ‘너/그들’의 차이가 차별과 폭력으로 낳는 폭력체제와 다른 길로서 예수의 두 번째 계명인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라는 말은 타자를 자아의 존재를 구성하는 유기적 상호관련성으로 보는 대안적 방식을 제공한다. 나는 독립적 개체가 아니라 공동인격이자 생명의 그물망(web of life)의 한 그물코인 상관적 존재이다. 물, 공기, 내가 서있는 공간 모두가 서로에게 열려져 있어서 하나로 흐르며 꿰뚫고 있다. 나의 숨은 너의 숨이며, 너가 마신 물은 나의 피가 된다. 이 공간과 대지는 너의 활동에 열려져 있고 또한 나의 터전이요, 경계없이 펼쳐져 있다. 우린 이미 45억년전 우주의 한 시원적 빅뱅사건을 통해 형성된 하나의 별 먼지(a stardust)에 의해 분화된 존재들이다. 한 기원을 갖고 수십억의 우주적 여행을 함께 경험하며, 그 여행속에서 각자의 독특성을 발전시켰고, 그 다양한 독특성의 교제가 서로의 안녕과 통전성을 지원하여 더욱 풍부한 생명세계를 꾸며왔다. 우주의 역사를 하루로 계산할 때 겨우 자정 2초전에 해당하는 시간에 한 공동존재가 인간의 모습을 이제 갖춘 우주의 신생아로서 태어났고 이 신생아는 우주의 타 존재들이 형성한 요람없이는 그 생존이 불가능하였다. 그들의 생기와 지원 그리고 우주적 축하 없이 어떤 새로운 존재도 그 생명을 부여받지 못한다.  

‘이웃/타자가 네 몸이다’는 예수의 두 번째 계명은 우리로 하여금 자기 방어를 위해 무력과 무기를 들 필요가 없음을 선언한다. 타자의 차이는 나의 생을 윤택하게 하고 생생하게 한다. 내가 가진 부분적 진리와 오류 가능성 그리고 너의 부분적 진리와 오류 가능성이 유기적 관계를 통해 더 큰 진리의 경험 사건을 가능하게 하고, 자신을 수정할 수 있는 명료함을 ‘차이’의 도전을 통해 얻게 된다. 그럴 때 타자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내게 선물이 된다. 만남과 나눔을 통해 차이는 영혼의 각성을 불러일으키면서 우리는 모두 ‘상즉존재(相卽存在)’-나는 너이고 너는 나이다-이자 공동존재로서 적이 아닌 벗으로 신으로부터 사랑받고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 (Beloved Community-마틴 루터 킹)의 한 구성원임을 깨닫게 된다.

이웃/타자가 내 몸임을 알 때 우리는 나의 안녕과 생존은 타자에 철저하게 의존하고 있음을 인정하게 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힘의 숭배 없이, 지배의 논리 없이 오히려 나의 ‘쉽게 상처받을 수 있음(vulnerability)’가 새로운 힘(power-with)의 원천이 됨을 경험한다. 나의 약함과 상처받을 수 있음이 너에게 개방되어지고 너의 약함과 상처받을 수 있음은 나에게 개방되어지면서 상호 의존과 신뢰가 싹트며 새로운 연대와 공동의 과제에 대한 의식이 싹트게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무기가 아닌 맨 몸으로 각자를 접촉함으로써 우린 서로 손잡게 되고 ‘같이 일함’의 가능성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힘과 무기가 우리를 변혁시키지 못한다. 이웃/타자를 공동존재(몸)으로 인식하는 것은 적자생존의 정글의 무대로서 사회가 아니라 상호부조의 공생의 사회로의 대안적 상상력을 갖게 한다.

이웃/타자가 내 몸이라는 인식과 그 생활실천은 사회적 약자와 생태적 약자의 고통에 대한 민감성을 회복시킨다. 사도바울의 말처럼 몸의 가장 약한 부분을 우리가 더욱 감싸고, 한 지체의 아픔이 전체에게 전달된다는 몸의 고통에 대한 지각력과 약한 부위에 대한 전체 몸의 즉각적인 공감능력이 몸의 건강상태를 만들고, 건강측정의 표준이 된다. 이것을 세상에 적용하여 세상을 사회적 몸(공동체로서의 몸)으로 보고 약자에 대한 배려와 그들의 고통에 대한 제도적 민감성을 키우는 것이 비폭력 영성의 중요한 과제가 된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철저하게 이런 점에서 사회적으로 배제된 약자들 -세리, 창녀, 죄인, 이방인, 과부, 어린이- 과의 우선적인 식탁교제와 치유를 통해 그리고 잃은 자와 섬기는 작은 자에 대한 비유속에서 비폭력적인 사회적 몸(공동체)을 만들기 위한 실천운동이었다. 몸의 각 지체의 차이를 존중하되 유기적 관계와 소통을 통해 배려와 상호성의 관계를 만들어, 약한 부위의 아픔을 전체 몸의 관심사로 만들어 내는 능동적인 비폭력의 대안사회를 꿈꾸었던 것이다. 사회가 건강한 것은 약자의 고통에 얼마나 민감한가에 달려있다는 이 통찰은 비폭력 영성의 두 번째 축을 형성한다.

기독교 평화주의는 예수의 삶을 통해 음미하면 두 가지 기둥 곧 자기란 누구인가라는 자기 정체성의 문제와 타자와의 관계성의 문제로 요약된다. 예수의 대답은 우리의 정체성은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거룩성을 내재한 존재로서 자기 인식과 공동존재로서 타자가 자신의 몸의 일부라는 사실에 대한 각성과 그 실천 속에서 찾아질 수 있다. 전자는 모든 억압과 폭력 그리고 지배에 맞서는 자기 초월성의 원리가 되고 후자는 우리의 상처받을 수 있음과 약함이 상호관계에 의해 의존하고 있으며, 건강도 그런 약함과 상처받을 수 있음의 경험을 서로 소통하고 지원함으로 유지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는 마치 두뇌신경학에서 세포 자체의 강함이 건강을 주는 것이 아니라 세포자체의 약함에도 불구하고 서로간의 소통과 교류가 건강을 유지한다는 생태적 통찰과 일치한다. 신은 너의 영혼(진정한 자아)이고 이웃/타자는 네 몸이라는 이 예수님의 계명은 비폭력 영성과 실천의 담론을 제공한다. 곧 비폭력 영성으로서 자기 존재의 근거와 토대로서 거룩함의 인식과 자아의 확대로서 상호관계성에 대한 인식이다. 이를 토대로 실천덕목으로서 타자와 더불어 공동의 몸만들기가 필연적으로 요청된다. 예수의 말처럼 기독교 평화주의에서 ‘이 두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2007. 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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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용박사 | ecopeace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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