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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폭력 삶의 길

조회 수 2281 추천 수 0 2007.05.05 22:22:46
 

                                                 비폭력 삶의 길

                                                                                                박성용 비폭력평화물결대표


             약자가 우리를 인도한다


교통의 불편함을 무릅쓰고 광교산 깊숙이 세를 얻어 살고 있는 나는 요즈음 산의 변화가 주는 연둣빛 기운에 위로와 힘을 얻는다. 가까이 다가가 보면 아직도 나무들은 텅 비어 있는 데 작은 순들이 일어나 주변을 가득 찬 봄기운으로 단장하니 그야말로 ‘텅 빈 충만’의 자태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신선한 충격이다. 멀리서 보면 그 존재의 흔적조차 느끼지 못하건만 다가서면 키 큰 나무들 틈새로 여기저기서 허리쯤 서 있는 진달래가 응달 속에서 그 가냘픈 몸매와 더불어 눈물 나는 웃음을 짓고 있다. 그 약한 가지로 인해 부딪치면 뚝뚝 부러질 그런 약한 몸으로 커다란 몸짓들 속에서 다른 거목들의 이파리로 가리우기 전에 꽃부터 피우는 진달래의 순박한 모습이 눈길을 붙잡는다. 곱고 숭고한 자태도 아니고 어쩌면 시골아낙 모습처럼 그다지 풍채가 돋보이지는 않아도 가녀린 몸짓과 응달 속에서 바람을 가르고 있는 그 자태는 가슴속에 뭉클한 파문을 남긴다. 약하고 작은 것들이 눈을 뜨게 하고 힘을 북돋아주고 있는 것이었다.   

인생에 여러 차례 위기와 혼란이 올 때마다 삶의 가치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고, 결국은 오늘날 신앙수련으로서 평화운동에 몸담게 만든 일종의 계시적인 사건이 둘이 있다. 그 하나는 대학시절 홀로 지리산 등산하던 도중에 거대한 고목이 쓰러져 있었고 그 무게로 인해 주변의 작은 초목들이 휘어져 성장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장면과의 마주침이었다. 그 고목은 살아 있을 때도 그 크기로 인한 응달로 주변에 아무런 나무들이 자라지 못하더니 죽어 쓰러져 벌써 수년이 지났는데도, 그 아래서 올라오는 초목들의 성장을 힘들게 하고 있는 것이었다. 덩치가 큰 이유로 말미암아 죽어서도 삶의 무리들의 공간을 침해하고 있음을 보면서 어떤 경종의 울림이 가슴깊이에서 경험하게 되었다.


두 번째는 미국에서 유학시절에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침 일찍 주택가를 걷던 길에 뜻밖에 토끼와 마주침으로 길을 멈춘 나에게 찾아온 경련의 경험이었다. 이웃집 뜰 가에서 조심스레 풀을 뜯고 있던 토끼의 그 천진한 눈망울과의 마주침, 그리고 아무런 힘을 갖지 않은 약자로부터 더 이상 다가서서는 안 된다는 절대적 부름의 충격이 전신을 휘감았던 것이다. 한 발자국 다가서면 위협을 느끼고 사라질 그의 쉽사리 상처받을 수 있음(vulnerability)이 나를 오히려 긴장시키고, 자기 방어수단 없이 온 발과 귀 끝까지 감싼 극도의 예민한 경계심을 갖고 있는 그에게 해치지 않을 테니까 안심하라는 메시지를 어떻게 전달할 지 어쩔지 몰라 답답해하던 몇 분 동안의 당혹감. 그러나 결국은 해치거나 방해할 의도가 없었어도 나와 같은 거대한 몸체의 출현만으로도 작은 자, 약자는 겁을 먹게 되고, 결국은 자기 공간을 내어주고 덤불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작지만 내 영혼을 흔들어 놓은 이러한 경험을 통하여 점차적으로 커지기와 힘 가지기는 그 자체가 폭력을 잉태함을 깨닫게 되었다. 힘과 크기는 관계를 형성하지 못한다는 이 계시적 사건의 경험은 진리의 일상수행으로서 평화형성(peace-building)에 대한 다른 이해와 관점을 나에게 갖다 주었다. 폭력은 전쟁과 같은 군사적 충돌이나 시위 현장 등의 거대한 현상들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일상생활 구석구석 그리고 의식 속에 습관적으로 자리 잡고 있다. 힘(영향력, 명성, 크기, 소유)을 숭배하는 생활양식에는 영락없이 폭력이 현존한다. 거목과 토끼의 예에서 보듯이 스스로 깨닫지 못해도, 의도하지 않더라도 힘을 지닌 존재는 약자에겐 위협이 된다. 폭력은 다양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신체적 폭력처럼 직접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이 있는 보이지 않고 가해지는 구조적이며 제도적인 폭력이나 문화적 폭력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런 현상적인 폭력들의 뿌리에는 근본적인 인식과 가치의 문제로서 힘과 크기에 대한 숭배가 존재한다. 힘과 크기를 인식과 가치에 있어서 선호하면 작고 힘없는 대다수는 주변화 되면서 관계가 깨어져 나/우리와 너/그들의 관계로 나뉘게 된다. 여기에는 힘겨루기나 자기주장의 관철이 생활문화로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힘과 크기의 숭배에 따른 겨루기와 일방적인 자기주장은 종교권력의 사학법 악개정을 위한 삭발투쟁, 두 정치집단간의 사안별 불소통과 의견대립, 전 국토에서 벌어지고 있는 부동산투기와 악 개발 국가권력에 의한 한미 FTA 체결, 국내 국제자본과 대기업의 국가정책 주도 등의 현상 속에서 잘 나타난다. 그 결과로서는 사회적 약자와 생태적 약자의 인간안보와 생태안보 기반의 붕괴, 50배 차이로 벌어진 상하계층간 소득격차, 농업기반 약화, 이주노동자들의  3D산업진출로 이어진다. 최근의 공무원 퇴출의 예에서 보듯이 국제경쟁력 강화, 효율성의 제고, 글로벌 경영 등의 이름으로 상처받을 수 있는 약자들은 자연스럽게 도태되고 주변화되며, 각종 유명 스포츠 선수나 연예인의 성공신화, 평창, 인천, 여수등지의 지속가능하지 않은 대규모 국제행사의 유치혈안과 같은 왜곡된 사회적 엘리티즘의 현상이 두드러지게 된다.  
 


상처받을 수 있음과 약함이 관계를 형성한다


우리가 누구의 목소리를 듣고 어떤 삶의 형태에 무게중심을 두는가를 요즘 사회현상을 통해 일별해 보면 결국 그 흐름을 만들어내는 가치와 관점이 상처받고 약한 자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누군가 자신을 건드릴 수 없도록 하는 강자되기라는 강박적인 논리속에 빠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명문대 입시를 위한 특목고들의 경쟁, 그리고 교회의 대형화를 위한 신축 붐들도 안전의 의미가 바로 ‘크기’와 ‘힘’에 의존한다는 세태를 반영한다. 그러는 와중에 자살률이 OCEC국가 중 1위, 30대 가출률이 10대를 앞지르고, 이혼율의 상승폭이 가파르게 올라가고 있어서 이 사회가 강자의 논리에 따른 자기 주장강화와 타자에 대한 소통의 단절, 다양한 갈등과 폭력의 만연이 위험 수준에 올라와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건물이 올라갈수록 음지가 커지는 것이다.


누가 나를 건들지 못하도록 강해져야 한다는 이 강박관념의 편재는 결국 상처받을 수 있고 작은 자로 있다는 것이 약한 것의 표현이고, 그 약함이 남에게 보여진다는 것은 곧 쉽게 내가 상처받을 수 있게 된다는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능한 물샐틈없는 자기 방어를 구축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대화에 있어서 친밀하지 않으면 자기 느낌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다. 강하게 보이기 위해서는 자기 약점을 보이거나 상대의 진실을 인정하는 것은 지는 게임으로 간주하게 된다. “빈틈없이 있으라. 강해져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침몰하게 된다.” 이런 논리로 인해 우리는 조금씩 삶의 생생한 표현과 교제의 능력을 상실해 나가게 된다.


힘을 위협을 줄 수 있거나 위협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것으로 인식하게 될 때, 타자의 대상화가 일어나고 나/너의 관계라는 거리를 떨어뜨려 분리와 소외의 상태가 ‘정상’으로 이해되어진다. 이러한 힘의 이해가 내면화되고 사회적 제도에서 구조화됨으로서 우리는 갈등과 폭력의 악순환을 맛보게 된다. 이익과 손실, 승자와 패자의 이분법이 적과 아군으로 사람들을 나누게 하고, 이 힘의 관계에서는 굴복하는가, 회피하는가 아니면 타협하는 가의 세 가지 삶의 양식으로 굳히게 한다. 문제는 굴복, 억압, 그리고 타협이 문제의 진정한 질적 변화와 관계의 형성을 가져오지 못한다는 것에 있다. 


비폭력은 연두빛 숲과 음지 속에 핀 진달래가 전해주는 연약한 작은 자의 생생한 감동과 자기의 자발적 발현, 그리고 토끼의 쉽게 상처받을 수 있음이 강한 자의 도덕적 책임과 돌봄의 윤리를 통한 관계 맺기를 초점으로 하고 있다. 이는 약자가 처해있는 음지와 고통에 대한 점차적인 각성의 과정인 동시에, 이들 약자로부터의 분리됨을 변혁시키고, 단순한 도움주기를 넘어 “함께 있음,” “옆에서 걸어감” 그리고 “그와 하나 됨”으로 움직여가는 공감적인 삶의 과정이다. 또한 강한 자가 휘두르는 위협에 대한 용기 있는 관여인 동시에 정죄함 없이 강한 자의 참된 인간성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는 내면의 여행이다.

이 내면의 여행은 그동안의 타자화된 약자에 대한 무관심과 윤리적 민감성의 결여 그리고 나의 우월성에 대한 무의식적 태도에 대한 각성으로부터 출발한다. 점차로 나의 위치가 그 어떤 형태로든지 정당하지 못한 특권의식과 우월성에 근거한 열등자로서의 약자에 대한 배려라고 하는 숨겨진 자기 교만도 읽어내게 되면서 근본적인 변화가 중도에서 일어나게 된다. 여기에서 차별이 없는 차이를 이해하게 되고, 또 이를 이해하기 위해 공감과 의사소통 그리고 협력기술들을 발전시키게 된다. 


그러나 비폭력 실천가는 궁극적으로 협력자 되기를 넘어선다. 협력자가 아직도 도와줌과 특권의 거리두기를 통한 남에 대한 배려의 문제에 있다면 비폭력 실천은 삶의 실재가 삶의 신성함과 상호관계성에 있음을 깨닫고 이를 수행하게 된다. 여기에는 자기의 이해와 삶의 가치의 근본방향 정위, 약자에 대한 공감과 일치 그리고 강자의 인간성에 대한 믿음과 변화가능성을 믿는 수행이 존재한다.



                쉽게 상처받을 수 있는 곳에서 변혁의 힘이 나온다


비폭력의 삶을 사는 것이 어려운 것은 그것이 우리들에게 새로운 종류의 힘을 요구하며 삶의 가치와 의미를 생각하는 데 새로운 방식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악이라고 이해하는 바에 대해 저항해야 한다는 것은 진실이다. 악을 이기라는 명령은 신앙운동에 있어서 중요한 과제이다. 그러나 역 폭력(counter-violence)에 의존하지 않고, 그 문제에 회피하지도 않고 또한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악에 대항할 수는 없는 것인가? 폭력자, 가해자로 하여금 약자로부터 오는 상처받을 수 있음을 통한 자기 책임과 존중감을 배우게 만들 대안의 길은 존재하는가? 상대가 적이기 전에 인간의 얼굴을 한 동료로 행동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이 질문에 대해 비폭력 진영에서 쓰는 한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뉴욕 센트럴 공원에서 저녁에 도서관에서 집으로 걸어가는 한 젊은 여인이 있었다. 그런데 상상해 보라.  어느 한 남자가 그녀를 뒤따라와서 명백하게도 치근덕거리려고 한다. 그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느낀 그녀는 갑자기 돌아서서 그의 눈을 뚜렷이 바라보며 말한다. “아 참 행운이군요, 당신이 내가 가는 길에 걷고 계시다니. 이 책들이 너무 무거웠거든요.” 그는 완전히 얼얼한 기분으로 그 책을 건너받게 되었다. 그리고는 그녀를 평화롭게 집문 앞까지 바래다주게 되었다.  


겉으로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에는 진정 무언가 매우 흥미로운 것이 일어났다. 그 남자는 폭력적인 범행을 하는 데로부터 보호되었다. 약자인 그 여인은 쉽게 상처받을 수 있는 상황에서 또한 거대한 위협이나 그자신이 폭력에 직면하지도 않고 개인과 개인 사이에 간단한 요청에 의해 보호되었다. 치명적인 상황이 놀랍게도 평화로운 결론으로 끝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두 가지 질문을 제기한다: 어떻게 희생자가 될 뻔했던 자가 그와같은 기대 밖의 행동을 행할 수 있는 마음과 용기의 상태를 발견했을까? 그리고 어째서 그녀의 놀라운 행동이 사건의 진행을 가까스로 바꿀 수 있게 되었는가?


평범한 우리가 특별히 강한 그 어떤 것으로 무장하지 않더라도, 자신이 쉽사리 상처받을 수 있는 약자의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으로 강자의 위치에 대한 존중과 그의 입장을 인정하면서 강자가 폭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할 수 있는 약자의 힘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약자의 무기로서 비폭력의 행동은 때때로 실상 가장 강력한, 효과 있는 수단이 됨을 보여준다. 거꾸로 강자는(그 남자는) 자신의 힘을 오용하는 데로부터 구함을 받게 된 것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약자의 기대하지 못한 돌발행동 -“참 행운이군요. 그렇지 않아도 무거운데 좀 들어주시겠어요?”-에 의해 자신의 의도에 대한 부끄러움과 자기 자신이 무력의 기회를 쓰지 않았다는 자기 존중감을 배우게 된다. 그 약자의 상처받을 수 있는 상황과의 직접적인 대면을 통해 그는 자신 안에 있는 잊혀진 숭고함이 분출된 것이다.

 

이 여인의 비폭력적인 요청은 강한 자로 하여금 폭력의 기회로부터 그의 힘을 남용하는 것을 막아냈을 뿐만 아니라 그녀가 희생자가 되는 길로부터도 벗어나게 하였다. 그렇다고 그녀가 특별한 능력의 소유자여서 그런 상황을 만들어 낸 것도 아니다. 비폭력은 이미 이상적인 완전함의 상태에 있는 자의 소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진리로 실험’하는 일련의 과정이자 점차로 그런 방향으로 가면서 배우는 실천의 힘이다. 폭력, 회피 혹은 타협의 길이 아니라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고 상대의 인간성을 살려내는 비폭력은 악의 실재에 대해 소박한 생각을 하지 않고 악의 구체적인 실재를 알아차리면서도 다른 가능성, 곧 폭력보다 더 궁극적이고 더 큰 변혁적 힘으로서의 삶의 신성함(sacredness)과 상호관련성을 굳게 지킨다.


비폭력은 타인에게 이기기 위해 혹은 대항하기 위해 자신을 무장하는 길이 아니다. 이는 희생자를 만들고 폭력을 정당화하는 길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비폭력은 진정한 문제를 명료화하고, 쌍방이 책임 앞에 서게 하는 창조성을 발휘한다. 수많은 폭력들 - 내면적 폭력, 관계에서의 폭력, 사회 구조의 폭력, 문화적 폭력 - 앞에서 비폭력 실천가는 이들 폭력 실천의 근본 전제와 태도들 - 위협으로서의 힘의 소유와 이를 위한 강자되기 -을 근본적으로 변혁시키기 위한 영적 여행, 즉 파편화되고 상처받은 자아가 온전함을 추구하는 여행을 시작하게 한다. 우리는 지배의 관계가 아니라 우리의 쉽사리 상처받을 수 있음을 인정하고 신뢰의 관계를 통한 생의 선물과 신성함에 눈뜸에서 비폭력 실천의 삶이 자라게 되는 것이다.



비폭력 평화의 내면화와 사회화는 서로 같이 간다

               

오늘날 점점 심각해지고 복잡한 양상으로 번지고 있는 상황에서 직간접적인 여러 폭력에 저항하는 것은 매우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외적인 시위로서만 끝나버리는 운동은 우리 안에 있는 내면화된(프로그램화된) 폭력의 각본과 악에 공모하는 생활실천에 대한 근본적인 통찰 없이는 어떤 것을 변화시킨다는 것이 어렵고 외양만 바꾸게 된다. 그 악이 타자의 잘못과 타자로부터 기인하는 원인에 근거하는 것으로 이해할 때, 나의 책임의 소재는 없어지고 타자에 대한 ‘적’과 ‘악’의 이미지화는 더욱 커지게 된다.


비폭력 실천은 타자에 대한 상호관련성의 입장에서 악에 대한 나의 책임성을 인정하며 동시에 타자/적대자 안에 있는 진정한 자아에 대한 신뢰와 삶의 신성함을 보는 것을 통해 어둠과 속박으로부터 ‘함께’ 자유로운 상태로 부르는 것이다. 간디의 소금행진과 물레의 돌림은 영국의 제국주의라는 사회적 시스템/ 구조적 폭력에 대해 나의 책임성과 보편적 인간에 대한 신뢰와 상호관계성의 입장을 견지하고, 나의 비폭력 평화의 내면화가 물레를 돌리고 소금행진의 걷기를 통해 억압자와 억압받는 자를 동시에 해방시킬 수 있다는 실례를 보여준다.  간디가 요구하고 때때로 성취한 것은 그가 공모한 악에 대해 책임을 지기 위해 각 사람의 영혼안에서 투쟁이었다. 영혼의 힘(사티그라하)을 통해 악과 폭력에 대한 책임을 짐으로써 자기규율을 수련하여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다.


영국의 경제제국주의와 맞서서 인도전통옷(카디)을 입고, 사회적 관례를 깨고 불가촉민과 함께 먹고 살며, 땅을 나누는 등의 행동들은 변화를 가져오기 위한 자기의 책임을 스스로 인정하고, ‘세상이 변화되기를 원한다면 그대자신이 먼저 변화가 되라’는 가르침에 따라 스스로를 변화시킴으로서 자신들의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었다.  악을 자신의 밖에 두는 것이 아니라 그 악에 대한 공모의 책임을 스스로 짊어지는 윤리적 민감성을 살려냄으로써 자신의 정신적 독립이 인도의 독립을 몰고 온 것이다.


수많은 관계적이고 구조적인 폭력들과 절망적인 지금의 사회현상들을 주목하면서 나는 간디가 악과의 공모를 인식하고 그것을 없애야 한다는 간디의 주장이 개인과 사회변화를 위한 투쟁에 있어서 근본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강자와 강자의 거대한 사회 시스템 앞에서 변화를 일으키는 것에 무력감을 느끼는 우리가 남에 대한 책임을 전가하지 않고 약자가 되는 것을 자기 선택으로 다시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는다. 약자에 대한 윤리적 무관심과 거리두기 그리고 수많은 사회적 생태적 희생들에 대한 무서운 태연함 앞에서, 우리는 이제 자신과 남의 약함과 쉽사리 상처받을 수 있음을 감추지 말고 의도적으로 드러내고 그 소리에 들어야 한다. 출애굽사건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낸 곳은 바로 약자인 하비루의 신음소리를 들었다고 하신 그분이 이들 약자의 쉽사리 상처받을 수 있음에 대해 주목하셨다는 것이다.


만일 변화의 동기가 외부의 시스템 혹은 이들 강자의 자비의 손에 달려 있다면 우리의 변화는 매우 빈약하고 그 희망은 모호해진다. 우리가 이들 강자에 대한 공모 -그들의 가치, 세계관, 문화의 추종 -를 거부하기를 배운다면 그때는 변화는 일어나게 될 것이다. 약함과 상처받음에 대한 각성과 더불어 우리들의 것만이 아니라 상대자/적의 진리의 조각조차 인정하고 이를 함께 모을 수 있다면 우리는 용서와 자비를 배우게 되는 것이며, 또한 함께 성장하는 기쁨을 맛보게 될 것이다. 이것에는 실패의 경험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우린 그것으로부터 더욱 변화되어지게 된다. 연두 빛 자연을 통해 내가 배우는 것은 존재의 무게는 크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오롯한 생동함과 상처받을 수 있는 약함에 대한 상호 감싸주기로 드러나는 생명의 공감에 있다는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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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용박사 | ecopeace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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