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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수기(Natural Writing) 번역 글 - 번역자 박성용


원전 This Sacred Earth, Edited by Rocer S. Cottlieb New York and London: Routledge, 1996.


<걷기 Walking> 헨리 데이빗 쏘로(Henry David Thoreau)


나는 절대적 자유와 황야라는 자연에 대해 말하고 싶다. 이는 단순히 시민사회의 자유와 문화와는 대조되는 것으로 인간은 사회의 구성원이라기보다 자연속의 거주자이자 한 일부라고 주장해야 한다. 이러한 주장은 아마도 듣기에는 극단적인 언급이라고 생각될 것인 데 왜냐하면 수많은 문명의 옹호자들, 예를 들면 목사나 학교운영위, 그리고 그대 모두가 문명에 관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는 서부는 다른 이름을 붙인다면 야생지(the Wild)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말하고 싶어하는 바는 세상의 보전은 광야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모든 나무는 황야를 추구하며 그 뿌리를 내린다. 도시는 나무를 가격을 치루고 들여온다. 인간은 경작을 하며 광야를 전진한다. 인류를 지탱하는 활력제와 문명이기들은 숲과 야생지로부터 온다. 우리의 조상들은 야만인이었다. 늑대에 의해 젖을 빨리운 로물루스와 레무스의 이야기는 의미없는 우화가 아니다. 탁월한 위치로 성장한 모든 국가들의 창시자들은 자신들에 대한 양육과 생기를 그와 비슷한 야생의 자원으로부터 공급받았다. 바로 제국의 자녀들이 늑대에 의해 양육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정복당하고 북부 숲의 자녀들에 의해 대치되었다.


나는 숲, 초원 그리고 옥수수가 자라는 어둔 밤을 믿는다. 우리가 차를 마실 때 그 속에는 여러 나뭇잎들이 녹아진 것을 마신다. 건강을 위해 먹고 마시는 것과 단순히 과식으로부터 먹고 마시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남아프리카 호텐토트인들은 일상적으로 영양의 날 것을 열심히 먹었다. 우리 북인디안의 어떤 이들은 북극 순록을 날 것으로 먹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들은 파리의 요리사로부터 성냥을 얻어 불로 보통 익힌 것을 얻었을 것이다. 이것이 아마도 축사에서 나온 소고기나 도살장의 돼지보다 나았을 것이다. 마치 우리가 얼룩 영양을 날 것으로 먹고 살았던 것처럼 어떤 문명도 경험하지 않은 야생을 내게 돌려 달라.


삶은 야생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장 생생한 삶은 가장 야생적이다. 인간에게 아직 정복되지 않은 야생의 현존은 인간을 충전시킨다. 쉬임없이 앞으로만 달려가 일로부터 휴식을 하지 못하며, 빠르게 자라나서 생에 대해 무한한 욕구를 가진 자는 항상 자신이 새로운 전원이나 황야에 있음을 발견하고 생의 원시적인 자원에 의해 둘러싸여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그는 야생 숲 나무를 올라갈지도 모른다.


내게 있어 희망과 미래는 잔디와 개간된 들, 마을과 도시에 있지 않고 오히려 맑고 살랑거리는 늪지에 있다. 일전에 내가 구입하고자 골똘히 생각하던 몇몇 농장에 대해 왜 내가 특별한 애정을 갖고 있나 분석해 보니까 종종 나는 몇 평방미터의 스며들지 않고 밑을 알 수 없는 늪지에 대해 유일하게 매료되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는 나를 현란하게 만드는 보석이었다. 나는 마을의 경작된 정원보다 나의 원시적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늪지들로부터 더 많은 생계를 얻고 있었다.


문학에서도 나를 매혹시키는 것은 오직 야생이다. 지루함은 길들임의 다른 이름이다.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은 학교로부터 배운 것이 아니라 햄릿과 일리아드, 모든 경전과 신화론 속에 있는 문명화되지 않는 나무와 야생의 사고이다. 야생오리가 길들여진 것보다 더 날쌔게 날고 더 아름다운 것처럼, 떨어지는 물방울사이로 늪 위로 길을 날아가는 야생-천둥오리-의 사고도 그러하다. 참으로 좋은 책이란 서부의 초원이나 동부의 정글에서 발견되는 야생화처럼 자연스럽고, 기대하지 않고 설명할 수도 없이 곱고 완전한 어떤 것이다. 번갯불이 지식의 신전 자체를 흔들듯이 천재는 어둠을 보게 하는 빛이다. 이는 일상의 빛앞에 희미한 인류의 용광로속에 타고 있는 가느다란 초는 아닌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모든 선한 것은 야생적이고 자유롭다. 악기나 인간의 육성-예를 들어 여름밤의 호각소리-에 의한 음악속의 그 무엇인가가, 비유하지 않고 그대로 말하자면, 그 소리의 야생적인 것에 의해, 본래적인 숲속에서 야생 짐승에 의해 방출되는 울음소리를 회상시키곤 한다. 그것은 내가 이해할 수 있을 만큼 그들의 야생성을 말해주고 있다. 나의 친구들과 이웃들은 길들인 자들이 아니라 야생의 사람들이다. 야만인들의 야생성은 선남과 연인에게 부여되는 두려운 흉포함에 대한 부드러운 상징이다.


나는 가축동물이 자신의 타고난 권리, 즉 그들이 전적으로 자신의 본래적인 야생 습관과 활력을 잊지 않았다는 그 어떤 증거를 거듭 주장하는 것을 보고 싶다. 마치 내 이웃의 암소가 이른 봄에 목장에서 뛰쳐나와 녹은 눈으로 덮여 있는 100여 미터의 차갑고 회색 물결의 강을 수영해 나가는 것과 같은 증거처럼. 그것은 미시시피를 건너는 물소였다. 이러한 탐험은 내 눈에 소떼들에게 있는 어떤 위엄을 전달해 준다. 마치 무한한 시간을 보내는 대지 밑의 씨앗들처럼 본능의 씨앗들이 가축과 말 가죽안에 보존되어 있다.


나는 말과 수송아지들이 인간의 노예가 될 수 있기 전에 뛰놀고 인간 자신들은 사회에 묵종적인 구성원이 되기 전에 여전히 씨 뿌릴 야생의 떡깔나무를 가지고 있는 것에 기뻐한다. 의심할 바 없이 모든 인간은 동등하게 문화에 맞는 주체는 아니다. 개나 양처럼 대다수는 상속된 성향에 의해 길들여졌기에 타인들이 동등한 수준에로 환원되도록 그들의 본성을 깨뜨려야 할 이유는 없다. 인간은 대체로 서로 같다. 그러나 그들이 다양하기 위해서 몇 여러 수준으로 만들어졌다. 낮은 수준의 사용에서는 어떤 이는 거의 다른 사람들과 같다. 높은 수준에서는 뛰어난 개인이 존경을 받는다. 어떤 이는 바람을 막기 위해 구멍을 막을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은 그렇게 하는 게 드물다. 공자는 말하기를, “호랑이와 도마뱀의 거죽을 햇볕에 그을리면 개와 양의 거죽을 햇볕에 그을리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호랑이를 길들이는 참된 문화의 일부가 아니며 양을 사납게 하는 것 또한 참된 문화의 것이 아니다. 신발을 위해 그들의 거죽을 햇볕에 그을리는 것은 최상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 이렇게 넓고 우리에게 소리치는 어머니인 야생의 자연이 있다. 이는 도마뱀처럼 자신의 자녀들에게 깊은 애정을 지니고 그토록 아름다움으로 둘러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녀의 가슴으로부터 너무 일찍 젖을 떼어 사회로, 인간과 인간의 배타적인 상호작용의 그러한 문화로 성장했다. 기껏해야 재빠른 한계를 지닐 운명의 문화를 생산하며 자라났다.


내가 모든 사람 혹은 사람의 모든 면이 문명화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내가 지구의 모든 면적이 문명화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부분은 경작지가 될 것이지만 더 큰 부분은 초원과 숲이 되길 바란다. 이는 단지 직접적인 사용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먼 미래의 식물이 매년 감소하게 될 때를 준비하기를 바란다.


지난 1월 어느 날 우리는 놀라운 석양을 체험했다. 내가 조그만 개울가의 근원이 되는 초원위를 걷는 때였다. 차갑고 희뿌연 날이 지나, 태양이 마침내 지평선에서 투명한 층에 이르기 직전이었다. 부드럽고 밝디 밝은 아침 햇살이 마른 초원 위를 내리 쪼고, 반대 지평의 나무의 줄기위로 그리고 언덕위의 키작은 참나무 이파리 위로 쏟아져 내렸고, 반면 우리의 그림자는 초원동편위로 길게 느리워져 마치 우리가 그 광선속에서 나방처럼 느껴졌다. 우리가 전에는 한 순간도 상상할 수 없는 그러한 빛살이었고 창공도 따사롭고 숙연하여 그러한 초원의 파라다이스를 만들 것이 더 이상 요구되지 않았을 정도였다. 이것은 결코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유일한 현상이 아니라 무한한 저녁에 영원히 일어날 것이고 거기에 걸을 마지막 어린이를 기쁘게 하고 재확인할 것임을 우리가 깨닫았을 때, 그것은 여전히 더욱 장관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태양은 어떤 집도 볼 수 없는 어떤 한적한 초원위로 내려 아마도 전에는 결코 그러지 않은 것처럼 장려함과 우아함을 도시위로 아낌없이 발산하였고, 그 고독한 늪위로 매가 날개를 미끄러지듯 날거나 거기에는 사향쥐가 자신의 집에서 쳐다보고 있고, 늪지 가운데로 작은 개여울이 꾸불꾸불 흘러가고, 썩어가는 나무 그루터기에는 느리게 바람이 불어대고 있었다. 우리는 그토록 순수하고 밝은 빗살아래 걷고 있었다. 시들어 말라가는 풀과 이파리를 금도금하듯 그렇게 부드럽고 평화로이 밝은 빛이 어울려져 나는 어떤 불평이나 파문도 없이 그토록 금빛 찬란한 홍수속에 결코 몸을 담궈본 적이 일전에는 없었다고 생각하였다. 모든 나무의 서쪽 방향과 일어서는 바닥은 그리스 신화의 최상의 행복나라인 엘리시움의 영역처럼 미광을 발하고 있었고 우리의 등 쪽에서 태양은 점잖은 목자처럼 우리를 저녁에 집으로 인도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우리는 거룩한 땅을 향해 이전에 태양이 행했던 것보다 더 밝게 비출 때까지 어슬렁 산책을 하였고 아마도 그 햇살은 가을에 둑제방위로 따스하고 평온하며 금빛 찬란하게 우리의 마음과 가슴속으로 침투해서 우리의 전 삶을 그토록 거대한 각성의 빛으로 밝혀 주리라.




경외로움에 대해(The Sense of Wonder)    라이첼 카슨(Rachel Carson)


내 조카 로저가 막 20개월 되던 어느 폭풍우 치는 가을 밤, 나는 그를 담요로 말아 비오는 어둠의 해안가로 데리고 갔다. 우리가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가의 저쪽에는 커다란 파도들이 으르렁거리며 들어오고, 포효하듯 큰소리치며 희미하게 보이는 하얀 모양의 거품들이 우리 앞에 돌진해 들어왔다. 우리는 함께 순수한 기쁨에 웃었다. 그 어린 아이는 처음으로 거대한 대해의 야생적인 소동을 만났고 나는 내안에서 전 생의 반을 바다 사랑으로 젖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우리를 둘러선 거대하고, 포효하는 바다와 야생의 밤에 대해 똑같이 가슴이 두근거리는 반응을 느꼈다고 생각한다.


하루 이틀 밤 후인가 폭풍우가 물러나가자 나는 다시 로저를 이끌고 해안으로 나가 이번에는 어둠을 플래시 빛으로 비치며, 그를 물가에 홀로 두었다.  비록 비는 그쳤지만 밤은 분열하는 파도들과 꾸준한 바람으로 다시금 소란스러웠다. 거기야말로 명확히 거대하고 자연적인 것들이 압도하는 시간과 장소였다. 


이러한 특별한 밤에 하는 우리의 모험은 삶과 관련 있다. 왜냐하면 로저가 때때로 낮에 해안에서 보는 모래색깔의, 함대와 같은 발의 존재인 유령의 게를 우리가 찾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게들은 주로 야행성이며, 밤의 해안이 울부짖지 않을 때는 이들은 여전히 바다가 그들에게 가져오는 것을 바라보고 기다리며 그들이 숨어있는 데서 표면위로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 나에게 있어서 바다의 잔인한 힘에 대항하여 외롭고 연약한 이들 작은 살아있는 피조물을 본다는 것은 철학적인 함축의미의 감동을 불러일으키어, 나는 로저와 내가 같은 감정으로 반응한다고는 가정해 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유아기에 자연적인 것들의 세상을 받아들이고, 바람의 노래, 어둠 그리고 포효하는 파도에 무서워하지 않으며 어린아이가 경탄하며 유령 게를 찾아 들어가는 것을 본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


관습적인 방식으로 그토록 어린 아이를 즐겁게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지금 나는 조저와 함께 그의 14번째 생일의 지난 과거를 상상하며 우리는 여전히 그의 어린 아기 시절에 우리가 시작한 자연세계에서의 모험을 나누는 것을 우리는 여전히 지속하고 있다고 믿으며, 그 결과는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눔은 폭풍우뿐만 아니라 잔잔하고, 밤뿐만 아니라 낮의 자연을 포함한다. 그리고 이 나눔은 가르침보다는 함께 즐김에 기초한다.


어린이의 세계는 신선하고 새로우며 아름답고, 경외와 즐거움으로 넘쳐있다. 우리 대부분이 아름다움과 경외를 불러일으키는 것에 대한 참된 본능과 비전이 점점 희미해져서 심지어는 어른이 되기 전에 잃어버린다는 것은 우리의 불행이다. 만일 내가 모든 어린이들을 통괄할 수 있는 좋은 요정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면 나는 세상의 각각의 어린이들에게 그녀의 선물은 파괴할 수 없는 경외감이며 이는 전 생을 지속하여 말년의 지루함과 미몽에서 깨어나는 틀림없는 해독제가 되고, 또한 우리의 장점의 근원으로부터 소외와 인위적인 것에 단조로이 몰두하는 것에 대한 해독이 될 것이라고 요청할 것이다.


인간실존의 경계를 넘어서는 어떤 것을 인식하는 이러한 경외와 신비감을 보전하고 강화는 가치는 무엇이겠는가? 자연 세계의 탐구는 어린이들의 금쪽같은 시간을 지내는 단순한 기쁜 방식일 뿐인가 아니면 더 깊은 어떤 것이 존재하는가?


나는 더 깊고 지속적이며 의미 있는 어떤 것이 거기에 있다고 확신한다. 과학자나 평신도로서 대지의 아름다움과 신비가운데 거하는 이들은 결코 홀로 있거나, 생에 싫증을 내지 않는다. 그들의 개인적 삶의 괴로움과 관심이 어떠하든지 그들의 사고는 내적인 만족과 살아있음에 갱생된 흥분으로 이끄는 길을 찾을 수 있다. 대지의 아름다움을 관상하는 이들은 삶이 지속하는 한 견디게 해주는 강함의 저장소를 찾게 된다. 새의 이동, 썰물과 조수의 흐름, 봄을 준비하는 주름잡힌 꽃봉오리에는 상징적일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아름다움이 존재한다. 자연의 반복되는 리듬에는 무한히 치유하는 어떤 것이-새벽은 밤 이후에 오며 봄은 겨울이 지나면 온다는 확인- 존재한다. 


나는 몇 년전 93세의 나이에 작고했지만 마지막까지 날카로운 정신력을 소유했던 저명한 스웨덴 대양작가 오토 페터슨(Otto Pettersson)을 기억하고 싶다. 그의 아들 역시 유명한 대양작가로서 최근의 출판 서적에 어떻게 그의 아버지가 그의 주변의 세계에 대해 매일 새로운 경험과 새로운 발견에 열정적으로 즐거워했는지를 기록하였다. “그는 치유하기 어려울 정도로 낭만적이었다”고 아들은 적었다. “그는 생과 열정적으로 사랑에 빠졌고 우주의 신비와 사랑을 하였다.” 그가 지상의 장면에 대해 더 이상 즐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오토 페터슨은 그의 아들에게 말하였다. “나의 마지막 순간까지 나를 지탱시키는 것은 앞으로 오게 될 것에 대한 무한한 호기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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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용박사 | ecopeace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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