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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제5주 토요일

겔 37:21-28
요 11:45-57               고통과 희생을 통한 새로운 성소의 건설

지금 이때는 예수를 위한 마지막 안식일이다. 그가 누구이고 세상에서 그가 행하신 것 그리고 그가 가르친 말씀 모두는 다음 8일간의 사건을 향해 움직여 간다. 에스겔로부터 읽는 독서는 하나님의 견해로부터 오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인들과 함께 성취하실 것에 대해 말한다. 복음서는 좀더 직접적인 관점으로부터의 견해 즉 그 순간에 권력에 있는 이들의 견해이다. 그들이 그것을 알지 모르던지 간에, 그들 또한 하나님의 뜻을 섬기고 있다. 독서는 다시금 하나님을 바라본다. 그분은 이스라엘 백성을 그들이 유배되었던 나라들로부터 취하여 고국으로 다시 데려다 주기 위해 그들을 모을 것이다. 하나님이 의도한 것은 일치, 한 나라, 하나의 땅, 그들을 인도한 한 왕이고 결코 그들이 다시금 분열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최종적으로 진실해지고 우상, 혐오, 위반 그리고 변절의 죄들을 멀리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이 깨끗하게 되기를 원하신다. 항상 그것은 똑같은 희망이다: 그들은 복종할 것이라는 것. 하나님은 평화, 계약만큼이나 오랜 수세대에 걸친 지속적인 평화를 원하신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거하셔서 세상의 모든 나라들이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는 이는 나 하나님이다”는 것을 알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모두는 하나님의 성소가 그들 가운데 영원히 세워질 때 이것을 알게 될 것이다.

중심 단어는 성소(sanctuary), 하나님이 그들을 감싸실 피난과 안전의 장소이다. 그것은 예루살렘에서의 성전을 의미하게 되고 심지어 도시 그 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에게 있어서 그것은 제단주변의 안쪽 영역을 뜻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건물 이상의 것을 염두에 두고 계신다. 인류가운데 하나님이 거하시는 장소가 될 성소는 바로 그리스도의 몸, 그의 영이 내재하시는 교회이다. 교회는 부활하신 주의 성소, 지상에서의 하나님의 성소 그리고 잃어버린 자들 모두를 위한 쉬는 터전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희망이고 예수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약을 믿는 자들 모두의 소명이다.

선한 목자의 계속 반복되는 이미지는 성소의 장소를 넘어 한 사람에게 가는 보호와 안전의 이미지를 그려낸다. 예레미야 31장에서 야훼는 목자가 그의 양떼를 인도하는 것처럼 우리를 인도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목자들은 고통에 견디고 강건한 영혼을 지닌다. 그들은 험악한 날씨와 고독에도 익숙하다. 그들은 신체적으로 늑대들, 야생 개들 그리고 도둑들과 싸우기도 한다. 그들은 지팡이를 갖고 다니며 개들이 양떼를 몰게 하고 그들을 함께 보호한다. 목자들은 매일 매일 양들이 필요로 하는 물리적인 모든 것들을 돌본다: 음식, 풀, 물, 보호. 양떼들과 함께 있는 목자는 모두를 불러 모으고 집으로 돌아가는 강한 이미지이다.

이런 이미지는 유배된 후 고국으로 돌아오는 백성들, 언덕에 흩어진 양들이 모여 우리에 들어오는 것처럼 지상의 모든 곳곳으로부터 돌아오는 백성들에게로 확장된다. 백성들은 그들의 노동의 추수로 인해 소리치고, 노래하며 춤추고 즐거워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목자, 하나님께서 “그들의 울음을 기쁨으로 바꾸시고 위로하고 그들의 슬픔을 닦아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마지막 안식일에서는 위로의 약속, 고통과 슬픔후의 생명의 약속이 있다. 그것은 이제 올무가 예수에게 가까움으로서 시작된다.

우리는 모든 그의 삶, 죽음 그리고 부활에서 예수에게 일어나는 것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대화의 서약 Vow of Conversation』에서 토마스 머튼은 말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수난에 의해서만 오직 봉인되고 열리는 책으로서 역사를 보아야 한다. 그러난 우리는 역사를 짐승의 견해로부터 읽기를 선호한다. 우리는 변종과 권력의 입장에서 역사를 본다-금수(the Beast)와 그것의 가치의 입장에서. 그리스도는 가난한자, 자기를 방어할 수 없는 자에게서 자신의 수난을 계속해서 겪으시고 그의 수난은 금수를 멸망시킨다. 권력을 사랑하는 이들은 그들이 사랑하는 것들과 함께 멸하게 될 것이다. 그동안, 그리스도는 시간의 끝에까지 고뇌에 있게 된다.

오늘날 우리는 지금의 세상의 고통의 빛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성찰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그리고 세상에서 우리의 입장에 대해서도. 설교 62번에서 버나드 클레보(Bernard of Clairvaux)는 이렇게 썼다:

두 가지 일이 유배중에 있는 교회를 위로한다: 과거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수난의 기억과 미래에 있어서 교회가 생각하고 믿기에 성자들 가운데 교회가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것에 대한 관상이 그것이다. ... [교회의] 관상은 완전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관상은 무엇이 기대될 것인지를 알뿐만 아니라 다가오는 것의 근원을 알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안에 아무런 주저함이 없는 즐거운 기대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복음서는 예수께서 죽음으로부터 나사로를 살리신 것 직후에 대한 것이다. 나사로에 대한 예수의 생명의 선물은 예수께 친구와 추종자들을 데려다 주지 않고 그의 적들이 그에게 대적하도록 이끈 발아점(trigger point)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다는 것은 항상 당황스러운 일이다.

항상 그렇듯이 군중은 나뉘어진다. 어던 이들은 믿고 다른 이들은 바리새파사람들에게 가서 예수가 한 것을 보고한다. 대 사제와 바리새인들은 전체 산헤들린은 소집해서 예수와 그의 일에 대해 토론한다. 그들은 만일 그가 이런 종류의 것들을 하게 되면 무엇이 일어날 것인지에 대해 관심한다. “만일 우리가 그로하여금 이와 같은 일을 하게 놔두면 전 세상이 그를 믿게 될 것이다. 그러면 로마인들은 쳐들어와서 우리의 성소와 나라를 붕괴시킬 것이다.”

그들의 장소, 그들의 성전을 잃는다는 두려움 그리고 로마인들과의 불편한 공모가 논쟁의 핵심이다. 예수는 죄와 악의 세상에 빛과 생명인 하나님의 뜻에 열정적인 헌신을 함에 의해서 이 모든 것들을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이 역사속에서 활동하심을 인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특정한 권력의 영역에 -그들의 권력이 작동하는 똑같은 장소들에- 제한하기 때문이고 그래서 통제를 잃는 것은 견딜 수가 없다.

그 당시의 대 제사장인 가야바는 일어나 말을 한다: “당신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전 나라가 멸망하는 것보다 [백성을 위해]한 사람이 죽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가?” 물론 그는 또한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예수를 처리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나 역사의 결정안에서 그리고 그 결정을 통해 역어지는 하나님의 길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가바야는 예수는 나라를 위해 죽고 그들 모두를 , 사실상 모든 나라들을 언젠가 에스겔이 예언한 때로 하나로 모아질 것이라고 예언하기위해 하나님에 의해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결정은 예수를 죽이기로 되었다. 그것이 그들의 직접적인 문제를 푸는 정치적으로 편리하고 실행 가능한 선택이었다. 그 결정은 권력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 자신의 요새를 보호하는 것을 추구하는 종교적인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 졌다.

예수는 은신하여 자유롭게 움직이지 않고 있다. 그는 사막근처 지역에 있는 에브라임에 가서 거기서 제자들과 머물며 앞에 일어날 것을 대비하고 있다. 그는 정치가 어떻게 할 것인지, 어떻게 음모와 계략들이 그들에게서 이루어질 것인지 그리고 다시 일어나는 폭력이 어떻게 불안을 일으킬 것인지를 안다.

유대 유월절이 가까웠고 사람들은 도시로 밀려들어오고 있었지만 일어날 모든 것에 거의가 알지 못하고 있었다. 많은 이들이 예수를 볼 오T다. 그들은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는 루머와 그의 말을 들어왔고, 특히 그들은 죽음으로부터 나사로를 살리신 이야기를 들었다. 모두가 그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고 그가 축일에 있을 것인지 궁금해 했다. 예수가 어디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보고해야 한다는 말이 나갔고 그는 체포될 수 있다. 그는 이제 공공의 위협이 되고 이미 혐의를 받았으며 그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그는 죽어야만 한다.

그가 체포되기 전에 그가 도시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던 그 며칠 동안 진행 중인 것을 알고 있는 예수의 마음과 심정은 어떠했었을까? 에티 힐레섬(Etty Hillesum)은 나치수용소에서 죽고서 발간된 그녀의 잡지에서 1942년 5월 18일 이렇게 썼다:

위협이 점점 커져오고 공포는 날마다 증가한다. 나는 어두운 보호벽처럼 내 주변에 기도를 끄집어 내어 누군가 수도원 방에 들어가듯이 그 안에 움츠리다가 다시 더 침착하게 더 강하게 용기를 내어 밖으로 나온다. 나는 내 가 파편이 되어서 내 존재가 잃어지고 전적으로 황폐하게 되는 것을 방어할 수 있을 정도로 보호막이 강해질 때까지 기다리며 무릎 꿇고 끝 날을 맞이할 때가 다가옴을 상상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 또한 기도해야 한다. 아빌라의 데레사(St.Teresa of Avila)는 그녀의 수녀들과 교회에 이 기도를 남겨주었다:

아무것도 그대를 혼란시키지 않기를.
아무것도 그대를 두렵게 하지 않기를.
모든 것은 지나가나니-
하나님만이 변하지 않으신다.
인내가 모든 것을 얻으리라.
하나님을 지닌 자가 결핍함을 멈추리라-
하나님만이 충분하다.      
 

* 세상을 위한 중보기도: 다문화가정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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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용박사 | ecopeace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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