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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제 5주 금요일

예레미야 20:10-13
요한 10:31-42

메시지           권력자들의 시도와 하나님의 시도

예레미야의 메시지는 낙담시키고 용기를 꺽지만 그것은 단순히 고뇌에 찬 말이 아니라 확신과 힘으로 차있는 말이다. 예레미야의 운명은 힘들다. 다른 사람들은 그를 비난하고 그에 대해 뒷소리를 한다. 공포가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특히 그가 생각하기에 친구라 믿었던 이들이 이제 자신이 어떤 잘못을 벌이는지 감시하는 것을 깨닫는 데는 애처롭기까지 하다. 그들은 그를 올무로 잡으려고 기다리고 있고 그래서 그에게 복수할 수 있고 그들의 힘과 소원은 전국에 퍼지게 될 것이다. 그들은 예언자와 예언자의 하나님에 반항한다, 왜냐하면 예레미야는 결과가 어찌되든 하나님이 말하라고 명령한 것을 선포하는 이외는 다른 삶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언자는 그가 섬기는 분을 알고 ‘장사와 같은’ 하나님의 신실함을 알며, 그의 대적자들이 스스로 걸려 넘어져 그를 이기지 못할 것임을 믿는다. 그들이 그렇게 할지라도 결국에 그들은 실패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의지를 꺾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그들은 부끄러움에 처할 것이고, “길이길이 잊지 못할 혼란”에 빠질 것이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고난받는 이들의 기도, 절망하는 이들의 기도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 충성하기 때문이다:

오 만군의 야훼여, 사람의 뱃속을 아시고
심장을 꿰뚫어 보시는 공정한 감시자여
이제 이 백성에게 제 원수를 갚아 주십시오
이 눈으로 그것을 보아야겠습니다.

우리는 이 기도를 전에 들었다. 그것은 심판에 대한, 스스로를 의롭다 여기며 그들을 반대하는 어느 누구든 그의 운명의 결정하는, 특히 진리를 말하고 그들을 회중의 눈에 드러내는 이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이들에도 불구하고 정의가 지배하도록 하는 보편적인 기도이다. 예레미야의 기도는 찬양과 기도로 끝난다! 과거와 심지어 그 자신의 생애에서 하나님은 사악한 자들의 권력으로부터 가난한자를 구해내신다!

출애굽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형성하는 것은 이집트의 노예의 일관된 커다란 소리침을 들으시는 하나님과 함께 시작했다. 비탄에 빠진 이들, 하나님에 대적하는 다른 이들의 죄와 공모 때문에 고난받는 이들은 야훼가 그들과 함께 하며 예언자의 말씀에서 그들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입증하고 폭력당한 낮은 자들을 일으켜 세울 때가 옴을 알게 된다.

시편은 응답한다, “내가 비탄속에서 주게 부르짖으니 그가 내 목소리를 들으셨다‘는 것이 악에 저항하고, 그들 자신의 약함이나 그 시대의 문화나 기류에 종속되기를 거절하는 이들의 일관된 기도이다.  종종 그것은 예수의 기도였음이 틀림없다. 그는 확실히 그의 대적자의 손에 그 자신의 파괴에 앞선 시간에 그러한 기도를 드린다. 시편 18편은 하나님을 묘사한다: 우리의 하나님은 야훼시니, 우리의 힘, 반석, 요새, 구원, 피난처, 방패, 구원이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듣는다. 비판에 빠진 이들의 목소리는 하나님이 듣는 목소리가 된다, 왜냐하면 그 목소리는 하나님의 가슴을 찢기 때문이다. 그것이 지상에서 일어난 것에, 모든 피조물에 대해 하나님의 희망을 깨뜨리는 것에 증언한다.

예수는 이제 막 돌을 맞으려고 한다. 그들이 돌을 집으려 할 때 예수는 땅에서 일어나 저항하며 그들이 범하려는 자신의 행동과 살인에 대한 책임을 지게 한다. 그의 목소리는 주목을 이끈다:“내가 아버지께서 맡겨 주신 좋은 일들을 많이 보여 주었는데 그 중에서 어떤 것이 못마땅해서 돌을 들어 치려는 것이냐?” 예수는 가르치고, 치유하고, 용서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가난한 자들을 돌보고 곤핍한 자들에 다가갔다. 그는 그들 앞에 서서 이들 행동 어느 것 때문에 그들이 그를 돌로 치려고 하는지를 알기를 요구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의 일들을 무시하고 말에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들은 그가 스스로를 하나님으로 만드는 신성모독을 저질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는 그들이 그렇게 쉽게 행동하도록 하지 않는다. 그는 성서로 되돌아가 그것들을 인용하며 들려준다:

“너희의 율법서를 보면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를 신이라 불렀다’ 하신 기록이 있지 않느냐?
이렇게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모두 신이라고 불렀다.
성경 말씀은 영원히 참되다.
아버지께서는 나에게 거룩한 일을 맡겨 세상에 보내 주셨다.
너희는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말 때문에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하느냐?     

예언자들조차도 그들 내부에 하나님의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고 불리워졌다. 그들은 또한 계약의 하느님께 속한 참으로 신실한 백성,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것을 뜻하는 인간의 아들과 딸이라 불리워졌다. 예수는 그런 용법을 사용하고 그것을 아버지로서 하나님과의 특정한 관계에 확장한다. 말씀은 활동에 진정한 터전에 기초한다. 사람은 단순히 자신의 말이 아니라 그의 행동, 연합, 가까움에 의해 다른 이에게 속해있는 것이 알려진다. 오직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일들을 할 수 있다.

예수는 그들에게 도전을 한다: 만일 그들이 자신의 신앙을 그에게 두지 않는다면 최소한 그가 행하고 믿은 행위들을 그들은 인정할 수는 있다. 이들 작업은 항상 그들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현존에 대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경종을 준다. 그들의 율법과 계약이 그들에게 계속해서 되풀이 된다: 가난한 자들이 보호받고, 고아와 과부들이 돌봄을 받으며, 감옥에 있는 이들이 자유로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이방인들이 존중을 받으며 낯선 자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환영받아야 한다. 곤핍한 이들속의 삶의 질은 공동체의 신앙이 낮다는 것을 반영한다. 그리고 나라, 특히 지도자와 사제들, 부자와 엘리트들은 그들의 곤핍함에 대해 책임이 있다.

교회공동체의 삶은 사회에서 포용하지 않은 이들, 처리해 버릴 수 있다고 여겨지는 이들의 삶의 질과 친밀하게 결합되어 있다. 결코 하나님의 백성은 이집트에서의 그들의 억압자들, 감독관들과 노예 주인들과 같을 수 없다. 그들 가운데 있는 가난한 이들은 그들이 하나님과 이웃에게 빚진 친절과 존경으로 대우받아야 한다. 이것이 계약이다. 신실한 이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실천하는 이들은 신적 형상과 닮음으로 만들어진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이다.

그러나 일단 다시 그들은 예수의 말을 곡해한다. 그의 말은 자신들이 사랑과 신앙이 없고, 율법을 따르는 것을 실패했다는 것을 확신시켜준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부과되는 어떤 명령도 없기를, 심지어 하나님에 의해서도 없기를 원한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시대의 사람들을 비난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결국 우리는 오랫동안 성령의 능력속에 있는 예수와 아버지를 아는 특권을 지녔었다. 그런데 우리가 한 일은 무엇인가? 우리의 신앙은 어디에 놓여있는가? 우리는 진실로 그 시대 사람들보다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거나 말씀의 계시에 더 개방적이고 더 거룩하다고 생각할 위치에 있지 못하다.

예수는 강하게 말한다: “아버지는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있다는 것을 이것이  의미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도록 이러한 일들을 믿으라.” 그리고 그들은 다시 그에게 가서 그를 체포하려 시도하지만 그는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 몸을 피하신다. 그들이 붙잡으려하는 것은 정확하게 그들이 하나님에게 하려고 시도하고 있는 것을 드러낸다: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입장을 타당하게 하도록 이용하기. 그들은 신앙을 잃고 하나님의 말씀을 쉽게 할 수 있는 실행가능의 진술로 낮춘다.

그래서 예수는 그들을 떠나고 요르단을 건너 요한이 초기에 세례를 준 곳으로 간다. 그는 집으로, 성령이 그에게 충만하게 다가온 곳으로 그리고 아버지의 말씀을 확증한 곳으로 간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종, 내가 선택한 자라. 그의 말을 들어라.”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왔다. 그들은 그의 말을 듣고 그의 활동을 쳐다 보았고 그를 믿게 되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우리의 활동이 우리 가슴에 있는 하나님을 믿는가?

필 맥마누스(Phil McManus)가 그의 책 『우정』에서 보고한 것처럼 가난한 멕시코 여인들 한 그룹이 수도에 가서 그들의 남편의 사면을 탄원하였다. 그들은 정부청사앞에 있는 플라자에서 금식과 기도 철야농성을 조직해서 관리들과의 모임을 주선하였다. 다음 대화는 그들을 영접한 관리와 이루어 졌다:

관리: 기도와 금식의 행동에 관해 이것은 무엇인가? 어째서 이런 것들을 행하는가?

여성들: 왜냐하면 우리는 신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관리: 너희는 혼자가 아니다. 누군가 너희 뒤에 있다. 누군가가 너희 마음에 이런 생각들을 주입했다.

여성들: 그것에 대해  당신이 옳습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뒤에 계시고 우리의 머리에 아이디어를 공급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혜를 주십니다.

관리: 이것은 법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이다. 어째서 너희는 그것에 하나님을 혼합시키는가?

여성들: 왜냐하면 하나님은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관리: (아마도 어떤 보수적인 기독교 신학자들의 주해를 잃은 모양이다) 하나님은 부자와 가난한 자간에 어떤 자별을 두지 않는다.

여성들: (이들은 확실히 레오나르드 보프나 다른 해방 신학자들을 읽지 않았고 단지 그들은 이미 말한 도움을 준 자들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부자와 가난한 자를 구별하지 않는다면 그러면 어째서 세상은 그렇게 하고 우리를 더욱 힘들게 다루시는가?

관리: (인내의 한계를 넘어서며) 알았다. 그만하자. 하나님을 이 문제에 혼돈하지 말자. 나는 그에 대해 더 이상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다.

여성들: 그래요. 우린 이해합니다. 당신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고려대상이 아니지요, 왜냐하면 당신은 돈에 신뢰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돈이 없고 그것이 어째서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는지 하는 이유입니다.

선한 일들은 우리를 곤란하게 할 수 있다. 예레미야를 기억하라. 예수를 기억하라. 예수의 하나님을 드러내는 멕시코 여성들과 많은 남녀들을 기억하라. 아버지는 그들을 그의 자녀라고 부르시고 그들이 존엄과 존경으로 대우되기를-요구가 아니라- 기대한다.


** 세상을 위한 중보기도: 새터민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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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용박사 | ecopeace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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