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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제 5주 목요일

창 17:3-9
요 8:51-59

메시지            죽음이전에 제대로 사는 것 배우기

창세기 부분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말하고 그와 모든 시대를 위한 계약을 맺는 것에 대한 설명이다. 계약함에 있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이름, 운명, 그리고 세상에서 그의 의미를 바꾼다. 그는 아브라함, 열국의 아버지가 된다. 그의 자손은 극히 비옥할 것이고 이는 생물학적인 의미만에서가 아니라 신앙과 자신의 자손들과의 예배에 있어서도 그렇다. 왜냐하면 왕들이 그의 가문에서 나오고 다른 나라들이 이스라엘에 와서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존경을 표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계약의 개시자, 유지자, 양쪽에 대해 권리와 책임을 펼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모든 세대를 통해 신실하실 것이고 모든 시대를 통해 계약을 유지할 것이며 결코 어떤 이유에서든 그 계약을 깨뜨리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지금 머무는 땅, 가나안 전체 땅을 영원한 소유로서 주실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다-그들의 유일한 하나님. 반대로 한가지만이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그리고 그를 뒤따르는 이들에게 있어서 요구되어진다: 그들은 계약을 지켜야만 한다. 그들은 하나님께만 속해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어야 한다. 계약은 독서의 초점처럼 보이지만 독서의 진정한 중심은 아브람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약이고 아브람은 그에게 다가오셔서 역사와 이스라엘의 종교를 움직이시는 이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가 엎드려 있다.

시편 105편은 우리에게 아브라함의 하나님에 대해 그리고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살지를 더 말한다. 후렴은 하나님의 입장에 대해 상기시킨다: “주님은 그의 계약을 영원히 기억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강함, 놀라운 행위, 징조, 심판을 기억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자 하나님의 종들, 선택된 자들임을 기억해야 하고 최소한 천여 세대동안 하나님께 매여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기억되어진다. 우리는 문자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개인으로서 그리고 한 백성으로서 함께 결합되어 있다. 우리는 모든 다른 역사와 나라들의 가운데서 살게 된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주어지게 된다. 우리의 태도는 아브라함의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앞에 엎드리고, 계약을 지키며 겸손하고 복종하며 경청한다.

다시 예수와 그의 당시 사람들은 신학적으로 논쟁하고 예수는 먼저 행동한다: “나는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한 사람이 내 말에 충실하면 그는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이런 입장은 물론 그들을 화나게 하는 데 충분하다 그리고 그들은 그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비난한다. 그들은 자신의 이유들을 내뱉는다. 아브라함은 죽었다. 예언자들은 죽었다. 그리고 당신들은 당신의 말을 지키는 누구도 죽음을 알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치명적인 비꼼이 명료해진다: “확실히 당신은 우리 아버지 아브라함보다 더 위대한 것처럼 행동한다. 혹은 선지자도 죽었거늘 너는 스스로를 누구라 생각하는가?” 이것이 갈등의 핵심이다. 예수는 그의 본질이외의 어떤 다른 인물로 가장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과 친밀한 하나님의 자녀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만을 듣고 복종하고 행하기 때문이다. 그는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계약을 온전히 성취하신다. 그분은 하나님의 이렇게 신실한 친구의 후손중의 하나이고 그는 신실함 그 자체이고 지상에서 하나님의 길에만 전적으로 헌신한 분이다.

그는 자신의 후렴구에로 되돌아간다: 나는 하나님을 알고, 오직 하나님만을 영화롭게 한다. “나는 그분을 잘 알고 나는 그의 말을 지킨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예수는 아브라함에 대해 추가적인 언급을 함으로써 정곡을 찌른다: “너의 아버지 아브라함은 그가 주의 날을 볼 것을 기뻐하고 그것을 보고 즐거워했다.” 예수의 아버지는 하나님이지 아브라함이 아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의 오심, 계약의 성취를 기뻐한다.

그러나 유대인 지도자들은 예수의 말속으로 더 이상 깊이 들어가지 않을 것을 주장한다. 그들은 그것들을 액면 그대로 해석하고 율법, 계약 그리고 예언자에게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한 특정한 것이나 쉽게 범주화할 수 있는 것으로 축소될 수 없다는 것을 명료히 보여주는 그들의 오랜 역사를 무시한다. 하나님이 언급한 모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슴에 심겨진 씨앗이 되었고 그들의 신실함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힘과 자비에 의해 이들 씨앗은 성장하고, 더욱 더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듣기를 원하지 않고 그래서 거부한다: “당신은 아직 오십도 되지 않았잖는가! 어떻게 네가 아브라함을 보았다고 하는가?” 그들은 아브라함에 대한 전체 약속이 생명에 대한 것, 죽음을 극복하고 아브라함의 이름, 기억, 신앙을 천 세대를 걸쳐 연장하는 계약에 관한 것임을 잊고 있다. 아브라함은 계약의 요구를 지키는 데 신실한 후손들에게서 살고 있다. 그들은 달리말하자면 죽은 자들이다.

예수는 그리고서 강하게 선포한다: “나는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I AM)." 이것은 이집트에서 바로를 대면하기 전에 모세가 산에서 질문한 응답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이름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지칭될 수 없음을 선포한다. 항상, 하나님은 신비이자, 알 수 없고 말을 넘어서 계신 분이다.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 하나님안에서 살고 감추어져 있는 자 이외에 어떤 다른 것이라고 가장하지 않는다. 그들은 고의로 그의 말을 잘못 해석하고 돌을 들어 그를 치려고 한다. 그들은 거기서 그때 그를 돌로 쳐 죽이려고 한다. 그러나 예수의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가까웠지만 아직 아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숨기고 성전을 빠져 나간다. 

예수는 그들의 마음에 도달하려고 시도하였지만 종교적이라고 주장하면서 성서와 전통을 자기 자신의 아젠다를 위해 사용하는 이들이 항상 존재해왔다. 그들은 듣지 않고 하나님을 그들의 용어로 정의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목적, 그들의 죽음의 길을 지원하지 않는다. 예수가 하나님은 생명의 하나님, 더욱 충만한 삶, 죽음보다 더 강한 삶을 그들에게 이해시키고자 그들과 변론한다.

안소니 드 멜로(Anthony de Mello)와 많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 말해진 배움과 제자직에 대해 말하는 한 수피 이야기가 있다.

옛날에 많은 사람들이 시장에 모여 스승에게 질문들을 한 때가 있었다. 몇몇은 심각하게 진리에 관심하고 그들이 알기 원하는 하나님이신 분의 선과 생명의 힘에 일치해서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데 관심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에서 오고 친구들에 의해 따라왔다. 어떤 이들은 단지 거기에 있었다. 여러 명들이 그 스승을 무효화시키고 그를 덫에 걸리게 하려고 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른 사람을 섬기고 있고 그들 자신의 그룹에 대한 위협으로 그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엔 스승 자신의 추종자들도 있었는 데 이들은 토론들이 끝나고 오랜 후까지는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지 못했다.

그날 모든 질문이 죽음, 무덤 그리고 사후의 삶에 대해 확신할 수 있는가에 대한 것처럼 보였다. 이는 매우 당황스러웠고 특히 스승 자신의 제자들에게 그러하였는데 그 이유는 모든 질문들에 대한 응답에 있어서 스승은 오직 웃기만 했기 때문이다. 때때로는 부드럽게, 단순히 껄껄거리며 때때로는 소란하게 매우 불손하게 웃었다. 때때로는 즐거워하며, 때때로는 거의 발작적일정도로 웃었다. 질문하는 이들과 듣는 이들은 분노, 혼란, 모욕감속에서 반응하였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단지 웃기만 하였다. 마침내 스승은 그들 모두로부터 걸어 나가 사라졌다.

후에 그날 밤 제자들은 그에게 심문하면서 그가 아침에 대해 말하도록 요구하였다. 그는 무슨 뜻이었는가? 그들은 진정으로 마음이 산란해지고 혼란스러웠다. 그는 그들을 조롱어린 진지함으로 바라보고 말했다, “내생-죽음후의 삶-에 대해 질문을 계속하는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주목해 본 적이 있는가? 어떤 이유에서든 그들 모두는 이것에 곤란을 겪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결코 이생에 전연 관련없는 다른 생을 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제자들의 불안을 잠재우지 못했고 한 사람이 툭 튀어 말했다: “그러나 스승이시여, 사후의 삶이 존재합니까 존재하지 않습니까? 간단히 말해서 예 아니오라고 대답해 주십시오!” 스승은 다시 크게 웃었다.  그리고서 한 질문을 되물었다: “내가 알기 원하는 것은 죽음이전에 삶이 존재하는가이다.” 그리고 그는 모두를 쳐다보았다: “너희중 어느 누가 진실로 살고 있는가?”

그래서 고난주간이 오기전 금주에는 십자가와 죽음을 직면하기 전에, 우리의 세례의 약속을 기억하고 죽음이전에 그의 생의 종식을 향해 예수와 걸어가기 전에, 그것이 질문이다: 우리는 실제로 살아 있는가?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살아 있는가?
   


** 세상을 위한 중보기도: 언론의 공정성과 공공의 유익을 위한 방영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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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용박사 | ecopeace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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