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
글 수 35


사순절 4주 토요일
예 11:18-20
요 7“40-53

메시지              선택의 기로

금주가 끝나가면서 우리는 예수와 함께 할 것인지 아니면 그에 대적할 것인지 선택하는 데로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된다. 어디에 설 것인가?

예레미야는 때대로 주저하는 예언자로 불리운다. 그는 종종 그가 자신의 운명을 불평하면서 깨어진 레코드판과 같이 들린다. 그가 설교하는 왕, 왕자, 백성에 의해 괴롭힘을 당하여 그 스스로 하나님을 괴롭힌다- 애처롭게 푸념하고, 감언으로 부추기며, 불평하고, 듣거나 참회하기를 거절하는 데 완고한 이들에게 공언하고 예언하도록 충동을 받은 말씀에서 다시금 계속해서 붙잡힌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경험으로 그 자신의 백성이 얼마나 완고하고 듣기를 거부하며 거친 심장의 백성인지 안다. 그는 그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고, 그를 침묵시키려 하며, 그들이 그를 함께 멈출 수 없다면 그의 생애를 오랫동안 비참하게 있도록 하고자 함을 알고있다: “나는 그들의 계략을 압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나에게 알려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오 주여 나에게 그들이 하는 바를 보여주셨다.” 그의 지식은 경험으로부터 왔지만 또한 기도로부터, 그가 섬기는 하나님의 현존과 가까우심으로부터 온다: “도살장에 끌려가면서도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양처럼, 나는 사람들이 나를 해치려고 하는 줄을 몰랐었다. ‘나무가 성성할 때 찍어 버리자. 인간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 이름조차 남지 못하게 만들자.’” 예레미야의 적들은 심지어 지상에서 그의 기억조차 없애려고 의도한다. 이것은 살인만큼 잔인한 다른 종류의 죽음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그의 삶, 믿음 그리고 희망을 무효로 만들려 하기 때문이다.

모든 그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들의 분노와 증오의 깊이를 깨닫지 못한다. 하나님에 의해 인도되어 그는 도살자의 손으로 향한다. 이것은 두려운 이미지, 빌려와서 예수께 적용된 이미지이다: 하나님의 어린 양. 염소는 도살장으로 끌려갈 때 소리 지르고 저항한다. 그러나 양은 온순하고 침묵하며 기꺼이 간다. 동물의 도살자를 묘사하는 것과 그 이미지가 인간에게 전가되고 의식적인 의도가 진리를 말하는 자의 목소리를 조용하게 달래는 것은 다른 것이다.

예레미야의 기도는 그 앞에 놓여있는 것에 직면하여 고뇌와 무력함의 기도이지만 그러나 희망과 신앙의 기도이기도 하다:

“만군의 야훼여,
사람의 뱃속과 심장을 달아 보시는
공정한 재판관이시여!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이 백성에게 원수를 갚아 주십시오.
그것으로 이 눈으로 보게 해 주십시오.
왜냐하면 당신에게 내 대의를 위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증언하기 위해 고통당하는 자는 바로 죄없는 자, 예언자, 설교자, 진실을 말하는 자, 믿든 자의 외침이다.

하나님은 악행자들을 멈추게 하려고, 하나님 나라에 섬기는 자들을 도살당하지 않도록 개입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의로운 재판장이시며 악을 행하는 이들에게 복수를 하실 것이다. 역사에서 나나나는 것을 넘어서는 계산이 존재하고 예레미야는 그 변호를 위해 증언하기를 원한다. 그의 증언은 희생자들의 기도, 이 삶에서 정의를 알지 못하는 이들, 권력의 강제에 붙잡혀서 중요치 않거나 문제가 되는 이들의 기도이다.

시편 7편은 신뢰의 기도이다. 우리가 그것을 말하기 시작할 수 있는가?

나에게 정의를 행하소서 오 주님
왜냐하면 내가 올바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 것은 바로 죄없는 이들의 의로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기도를 할 수 있는가?

사악자의 악의가 끝내도록 해 주십시오
그러나 의로운 자는 지속되게 해 주십시오.
오 마음과 영혼을 보시는 분,
오 의로운 하나님이시여.

우리는 하나님께 모든 우리 박해자들로부터 구해달라고, 그리고 정치와 rudw적 이득, 국가주의, 인종주의 그리고 과거와 새로운 증오의 세계에서 가난한 이들과 목소리 없는 이들을 위해 진리를 말한 것으로 인해 우리를 조각으로 찢어버리고자 하는 이들로부터 구출을 탄원한다. 우리가 이와 같이 기도할 수 있는가? 우리가 누구를 방어할 것인가? 누구를 위해 우리는 외칠 것인가? 언제 하나님, 마음과 정신의 추구자께서 우리 내부를 깊이 보시고, 무엇이 보여지는가? 누구에게 우리는 속하는가?

예수가 설교하고 가르치기를 계속함으로써 군중은 “그에 대해 날카롭게 분리된다.” 누군가는 말한다, “이자는 예언자임이 틀림없다. 그는 메시야이다.” 다른 이들은 신학적인 입장과 성서의 근본적인 해석을 토론하고 그가 그 분일지 결정하려고 시도한다. 여전히 다른 사람들은 덜 자비롭다: 그들은 그를 붙잡기를 원한다 비록 아무도 그에 대해 손을 대려고 움직이지 않을지라도.  그의 현존은 의견 불일치를 일으킨다.  말씀을 듣는 데 개방적인 이들, 그들의 귀를 막고 그들의 현재의 사는 방식에 머무려는 이들 그리고 솔직하게 위선적이고 악하며 사회에서 오직 자기 자신의 입장만 주장하는 이들이 존재한다.

예수의 현존 그 자체는 종교적인 반응뿐만 아니라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반응을 일으키고, 성전 경비병, 사제들과 바리새인들 모두가 관여한다. 경비병들에게는 어째서 그들이 그를 데려오지 않았는지 질문받는다.  결국 그는 사람들을 자극하여, 평화를 방해한다(엘리야 시대 이래 예언자의 정의). 그러나 경비병들은 혼란스럽고 충격을 받는다: “아무도 전에 그와 같이 말한 자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혼란되어 그에게 무엇을 행할지 알지 못하고 혼란스러워 한다. 그들은 최소한 그의 가르침에 대해 자신들의 반응에 있어 정직하다. 바리새인들은 관리들을 조소하고 그들이 예수에 의해 현혹된 것에 풍자적으로 비난한다. 그리고 경비병들은 예수에 대한 자신의 증오와 저항을 방어하고 산헤드린의 어느 누구도 혹은 바리새인들 아무도 그를 믿지 않다고 주장한다-“율법도 모르는 이 따위 무리들, 그리고 그들은 어쨌든 방향을 잃었다!”  오직 두 범주만 존재한다. 심지어 그들 가운데서도: 어쨌든 방향을 잃은 이들과 일이 어찌 되었든 구원받은 그들 자신들. 그들은 그들 자신의 방식으로 판단되고 마음과 영혼을 살피는 자가 판단하는 것처럼은 아니다: 공정하게(justly).

예수의 입장을 지지하는 시도를 한 사람이 단 하나 존재한다: 니고데모. 그는 한때 밤에 예수께 와서 어둠속에서 그리고 비밀히 와서 세상의 빛에 대해 물어보았다. 이제 그는 소리친다:"언제부터 우리의 율법은 먼저 그의 말을 들어보고 사실을 알지 못하고는 어느 누구도 단죄하였는가?“ 그리고 그들은 감히 그들에 반대하는 그들 자신의 한 사람에게 사악하게 몸을 돌려 말한다: ”당신도 갈릴래야 사람이란 말이오.“ 니고데모는 힐책을 당하고, 어리석다고 모욕을 당하며 말을 듣는다: ”성서를 샅샅이 뒤져 보시오. 갈릴래아에서 예언자가 나온다는 말은 없소.“ 그들은 니고데모를 불신임하기 위해 제한된 이해와 근본적인 해석을 사용하며 그들에게 율법의 본성, 즉 저주받는 자의 말을 듣고 어떤 판단하기 이전에 사실을 알기 위해 알아보는 것의 필요성을 상기시키는 조심스런 그의 질문을 존중하지 않는다.

가장 비난이 심한 것은 독서의 마지막 구절이다: “그리고 각자는 그 자신의 집으로 돌아깟다.” 그들은 예수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을 거부했다. 그들은 결정했다. 그래서 아무도 예수에게 손을 대지 않았다. 때가 아니었던 것이다. 예수는 그 순간을 결정할 것이고 자유롭게 그 자신을 그들의 손에 주도록 허락할 것이다. 그는 성령, 힘,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복종으로 충만한 분이다. 왜냐하면 그는 진실로 메시야이기 때문이다.

날마다 양쪽 편들이 갈라지고 개인들은 그들이 서있을 곳을 선택한다. 누군가는 갈등으로부터 떠나고 예수를 고발자들에게 남겨둔다. 니고데모는 예수를 위해 지지하는 한번의 시도를 하였고 이제 다른 사람들에 의해 위협받고 침묵한다. 아마도 그는 예레미야처럼 예수의 말과 그의 현존이 그이 진실됨과 회개로의 부름에 의해 위협당한 이들에게서 이미 발생하고 있는 음모와 분노의 정도를 보기 시작한 것 같다.

오늘 독서에 있어서 -그리고 오늘날 세계에 있어서- 많은 이들의 진정한 죄는 그들이 이해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는 범주에 하나님을 제한하는 것일 수 있다. 그들은-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하나님되게 하기 보다는 우리 자신의 말, 우리에게 수정될 수 있는 용어로 하나님을 지칭한다. 알려지지 않은 자와의 관계에서 사는 것은 용기, 겸손, 존경을, 개압의 태도와 죄됨의 인식 그리고 변형됨과 거룩하게 됨의 필요성을 지닌다. 우리 또한 우리 자신의 길에서 하나님이 누구인지 확신을 하는가? 우리는 오직 우리가 편안하거나 우리를 위해 존재하시는 하나님께 우리가 원하는 것을 드러내는 말로 하나님을 지칭할 것인가?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 자신의 이미지로 만들길 의도하는가? 예수를 세상에 보내신 분의 신비를 우리에게 열어줄 수 있는 칼 라너(Karl Rahner)의 기도의 말들을 우리가 기도하자:

나의 하나님, 제가 무엇을 당신에게 말할 수 있습니까? 내가 당신의 거룩한 이름을 칭송하는 모든 말을 수집해야 합니까? 내가 세상의 모든 이름들을 이름붙이실 수 없는 당신께 주어야 합니까? 내가 당신을 내 생명의 하나님, 내실존의 의미, 내 행동을 거룩하게 하는 분, 내 여행의 끝, 내 비통한 시간의 쓰디씀, 내 외로움의 집, 내 가장 보배로운 행복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나는 말하겠습니다: 창조자, 유지자, 용서하는 이, 가까운 분, 멀리계신 분, 파악하실 수 없는 분, 꽃과 별의 하나님, 미풍과 무서운 전투의 하나님, 지혜, 힘, 충성과 진실함, 영원과 유한, 항상 자비로우신 분, 의로우신 자, 사랑 자체라고 말해야 할까요?


우리는 우리 조상들이 한 것처럼 하나님을 제한하고 예수를 정의하며 성령을 속박하는가? 하나님은 진리이고 예수는 인간의 모습을 한 하나님의 진리이다. 우리는 우리자신에 대해 그리고 타인들에 대해 거짓말을 할 수 있지만 진리 그 자체에 대해서는 아니다. 프리드리히 헤벨(Friedrich Hebbel)은 한 때 말했다, “하나의 거짓이 너에게 하나의 진리(one truth)를 희생하는 것이 아니다, 진리(the truth)를 희생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겸손으로 예수의 말을 듣던지 아니면 우리자신의 집으로 가서 우리 자신의 진리의 작은 조각에로 돌아가든지이다. 그러나 우리가 공개적으로 어디에 서는지를 결정해야 할 시간은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

니고데모처럼 우리는 싸움에 대해 작은 침입을 단 한번이 아니라 계속해서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본훼퍼(Dietrich Bonhoeffer)가 말한 것처럼 침묵, 공모 그리고 거짓의 한가운데서 진리를 위해 일어서는 이들의 용기를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독교인이 되길 원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대범한 마음을 나누어야 한다. 그는 위험의 시간이 올 때 책임과 자유로 행동하셨고 두려움에서가 아니라 고난받는 모두를 위한 그리스도의 해방하시고 구원하시는 사랑으로부터 분출한 진정한 공감을 보여주셨다. 단순히 기다리고 쳐다보는 것은 기독교인의 행동이 아니다. 기독교인은 우선적으로 그 자신의 고통이 아니라 그의 형제들의 고난에 의해 공감하고 행동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그들을 위해 그리스도는 고난받으셨다.

  

** 세상을 위한 중보기도:  죽어가는 농촌을 위해

엮인글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35 평화의 성자이야기-세속의 성화와 형제 성소의 새로운 영적 개척자, 샤를 드 푸코 file 관리자 2009-05-13 2181
34 평화와 비폭력을 위한 사순절 묵상-사순절 제 5주 토요일 메인즈 2009-04-04 1783
33 평화와 비폭력을 위한 사순절 묵상-사순절 제 5주 금요일 메인즈 2009-04-04 1792
32 평화와 비폭력을 위한 사순절 묵상-사순절 제 5주 목요일 메인즈 2009-04-04 1816
31 평화와 비폭력을 위한 사순절 묵상-사순절 제 5주 수요일 메인즈 2009-03-31 1739
30 평화와 비폭력을 위한 사순절 묵상-사순절 제 5주 화요일 메인즈 2009-03-31 1796
29 평화와 비폭력을 위한 사순절 묵상-사순절 제 5주 월요일 메인즈 2009-03-31 1786
» 평화와 비폭력을 위한 사순절 묵상-사순절 4주 토요일 메인즈 2009-03-25 1801
27 평화와 비폭력을 위한 사순절 묵상-사순절 제 4주 금요일 메인즈 2009-03-25 1820
26 평화와 비폭력을 위한 사순절 묵상-사순절 제 4주 목요일 메인즈 2009-03-25 1776
25 평화와 비폭력을 위한 사순절 묵상-사순절 제4주 수요일 메인즈 2009-03-23 1794
24 평화와 비폭력을 위한 사순절 묵상-사순절 제 4주 화요일 메인즈 2009-03-23 1808
23 평화와 비폭력을 위한 사순절 묵상-사순절 제 4주 월요일 메인즈 2009-03-23 1761
22 평화와 비폭력을 위한 사순절 묵상-사순절 제 3주 토요일 메인즈 2009-03-23 1792
21 평화와 비폭력을 위한 사순절 묵상-사순절 제 3주 금요일 메인즈 2009-03-23 1822
20 평화와 비폭력을 위한 사순절 묵상-사순절 제 3주 목요일 메인즈 2009-03-23 1847
19 평화와 비폭력을 위한 사순절 묵상-사순절 제 3주 수요일 메인즈 2009-03-14 1845
18 평화와 비폭력을 위한 사순절 묵상-사순절 제 3주 화요일 메인즈 2009-03-10 1789
17 평화와 비폭력을 위한 사순절 묵상-사순절 제 3주 월요일 메인즈 2009-03-07 1872
16 평화와 비폭력을 위한 사순절 묵상-사순절 제 2주 토요일 메인즈 2009-03-04 1861
박성용박사 | ecopeace21@hanmail.net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