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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제 4주 월요일

사 65:17-21
요 4:43-54

메시지:                  집으로 돌아오라 그러면 살 것이다

금주에 예수가 세상의 빛이며 아버지의 일을 하는 것을 보여주는 일련의 장면들을 읽으며 우리는 요한복음을 깊게 들어가게 된다. 우리는 또한 치유받은 이들, 예수의 힘에 대해 증언하는 이들, 그를 거부하는 이들, 그를 죽이려고 시도하는 이들의 반응들을 또한 보게 된다. 반대가 형성된다. 어느 편에 우리의 삶을 놓아야 하는 지를 선택하는 데 피할 방법은 없다. 우리는 아버지에 의해 보내지고 성령에 의해 힘을 받은 예수에 대해 증언할 것인지 혹은 우리는 더 깊게 우리의 눈멀음 속으로 들어가서 빛을 죽이려고 하는 이들을 지원하고 악과 불의의 세상의 권력들 편에 있을 것인지 해야 한다. 이는 쉬운 주간이 아니다. 각 독서는 우리를 십자가가 무시될 수 없는 순간으로 좀 더 가깝게 우리를 밀어 붙일 것이다. 우리가 예수와 함께 선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임할 것이다.

이사야로부터 독서는 빛, 희열, 기쁨 그리고 영속하는 생명으로 가득하다. 시작에 있어서는 놀라운 방법이며 심지어 세상이 예수의 생명을 취하려 시도할지라도 예수가 세상을 돌아다니며 그가 추방한 것은 바로 그 그늘의 내적인 알맹이이다. 그것은 창조에 대한 설명, 하나님이 하고자 하신 것의 재창조 이야기이다.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한다.
지난 일은 기억에서 사라져 생각나지도 아니하리라.
내가 창조하는 것을 영원히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이것은, 물론, 부활이고 세상은 구원받고, 우리가운데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으로 흠뻑 적시게 된다. 예수의 시련, 거부 그리고 십자가형에서 막 지나가게 되는 것은 기쁨과 생명으로 가득 찬 세상에 대한 문을 열기 시작할 것이다. 이러한 생명의 질적인 것은 장수의 용어로 묘사된다:

“거기에는 며칠 살지 못하고 죽는 아기가 없을 것이며
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는 노인도 없으리라.
백 세에 죽으면 한창 나이에 죽었다 하고
백 세를 채우지 못하고 죽으면
벌을 받은 자라 할 것이라.“

유대인의 희망에 대한 다음의 묘사는 더 친근하다:

“사람들은 제 손으로 지은 집에 들어 가 살겠고
제 손으로 가꾼 포도를 따 먹으리라.”
 
그것이 예언자들의 이미지이다. 그들은 지속적인 평화, 정의, 그리고 그들의 자녀와 증손자들과 기뻐할 가능성에 신실한 이들을 확신시킨다.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자유를 약속하고 포도의 첫 열매를 드리고 하나님을 기뻐하는 백성들처럼 기뻐하는 들판을 약속한다.

물론 이것은 또한 예수가 그의 삶, 죽음 그리고 부활에 의해 창조되고, 유행되며 믿는 자들에게 첫 번째 선물로서 우리 가운데 있을 성령의 현존에 의해 지속될 예수의 공동체에 대한 묘사이다. 우리는 오아시스에 있게 되고 그곳은 다른 사람의 악의 결과인 슬픔, 불의 그리고 고통으로부터 휴식을 그리워하는 모든 이에게 쉴 곳이 될 것이다. 우리는 사순절 제 4주를 죽음후의 생명, 세례후의 생명에 대한 비전과 약속으로 시작한다. 이 생명에로 우리가 고통의 와중에서 그리고 과거의 것들과 옛 땅과의 대결속에서 심지어 지금 어떤 몫들을 나누도록 초대받는다.

예수는 사마리아로부터 갈릴리로 다시 돌아가는 여행을 하고 있고, 그의 목회와 설교의 더 거칠은 몇 몇 장소로 되돌아간다. 거기서는 기대가 높지만 신앙은 얇고 저항은 강해진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그를 알고 있고 그가 어디서로부터 왔는지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은 눈이 멀었다. 여전히 그는 예루살렘에서 벌어진 향연에서 있었고 그 경우에 그가 행한 것 모두를 보아온 이들에 의해 환영을 받는다.

예수는 가나, 곧 첫 번째 징조의 장소로 간다: 그곳은 물을 포도주로 바꾸고 새로운 공동체의 터전을 닦은 곳이다. 이것이 두 번째 징조를 위한 뒷배경이다.

가버나움에서 자신의 아들이 병들은 고관이 있다. 그가 예수는 가나에 있다고 들었을 때 그는 그에게 가서 거의 죽어있는 자기 아들을 치유해 달라고 간청한다. 예수의 응답은 퉁명스럽고 화가 나 있다: “너희 백성들은 징조와 기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를 않는다.: 징포와 기적은 믿지 않은 자, 눈먼 자, 마음이 경직된 자, 먼저 보지 않고는 믿지 않는 자를 위한 것이다. 그러나 관리의 신앙은 놀랍다. 그는 주장한다, ”선생님, 제 자신이 죽기 전에 같이 좀 가 주십시오.“ 그 고관은 사마리아 여인이 바로 한 것처럼 그를 대하고 그래서 예수는 그에게 말한다, ”집으로 돌아 가라. 네 아들은 살 것이다.“ 이 고관의 반응의 묘사가 모든 것을 말한다, ”그는 예수의 말을 믿고 집으로 떠나갔다.“  이 사람이 신앙인이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그것에 복종하였다. 그는 이제 예수의 추종자이고 제자이다. 그는 집으로 가서 보고 아들과 함께 구원받는다.

그가 거기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의 종들이 그에게 그의 아들이 살아난다는 소식을 가지고 그를 만난다. 그는 몇시에 그 소년이 회복되었는지를 묻고 그들의 대답이 그의 복종과 신앙을 확인시킨다. 그것은 예수가 말씀을 하신 똑같은 시간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관리와 그의 모든 가정은 믿게 되었다. 그들은 이제 공동체의 구성원이다.

관리의 세례와 예수를 주로서 받아들임은 어떤 면에서는 나면서 소경인 사람의 길과 병행한다. 그는 말씀을 듣고 복종한다. 그는 여행을 시작하고 예수안에 있는 하나님의 힘과 발설되어진 말씀의 힘을 길에서 발견한다. 그리고 그는 그 신앙을 다른 사람에게 확산시킨다.

이 사람은 관리이지 유대인이 아니다. 그리고 그는 공개적으로 예수와 연결됨으로 잃을 많은 재물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의 가족과 그의 종들 그리고 그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이제 예수가 그의 주임을 안다. 그들의 삶은 이제 치유에 대한 감사와 생명의 삶이 된다. 그들은 새로운 창조에서, 예수의 인격과 그의 공동체에서 세상에 제시된 왕국의 포도주를 나눈다. 예수의 공동체는 모두에게 개방되어 있다. 예수는 필요하고, 찾고 그의 말씀에 복종하는 모두를 환영한다.

징표와 기적은 예수의 믿는 자들의 공동체 속으로 혹은 그의 아버지의 왕국으로 흑은 성령의 힘으로 들어가는 확실한 입구가 아니다. 확실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과 그에 대한 충실한 지지 그리고 응답이다. 우리는 보지 않고 믿도록 명령받았고 하나님이 약속한 것은 진실하며 우리의 일상의 선택에서 내기를 걸만한 가치가 있고, 특히 그와 똑같은 복종과 희망을 나누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믿어야 함을 명령받는다.

시편 30편과 그 후렴구는 고관이 이 경험을 반영한다(우리 모두는 주님의 말씀을 신뢰하도록 부름을 받는다): “나는 주님 당신을 찬양하리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나를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갱생한 자, 죄와 죽음 그리고 지상에서 선을 파괴하려고 시도하는 이들로부터 구원받은 이들의 시편이다. 그것은 신신할 이들, 울음을 알아온 이들, 울음을 춤으로 바꾼 분을 아는 이들로부터 오는 찬양의 노래이다. 그것은 지속적인 신실함의 기도이고 우리를 구원하신 우리 하나님 주께 감사를 돌리도록 부름을 받은 우리 모두의 기도이다.
아마도 오늘날, 우리가 우리 자신들을 우리에게 선포한 말씀에 신뢰하른 것에 다시 헌신함으로써 우리는 토마스 머튼이 한 길에 대한 그의 기도와 함께 기도할 수 있다:

나의 주 하나님이시여, 내가 어디로 가는 지 내가 알지를 못하나이다.
저는 내 앞의 길을 보지 못하나이다.
그것이 어디에서 끝날지 확실히 알 수도 없나이다.
나는 자신도 진실로 알지 못하며
내가 생각하기에 당신의 뜻을 따른다는 사실이
실제로 내가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뜻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믿는 것은 당신을 기쁘게 하고자 하는 욕망이 
사실상 당신을 기쁘게 할 것이란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하고 있는 모든 것에서 그런 욕망을 내가 가지고 있기를 희망합니다.
나는 그런 욕망으로부터 분리된 어떤 것도 하지 않을 것을 희망합니다.
그리고 만일 내가 이것을 한다면
당신께서 내가 그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할지라도
옳은 길로 나를 당신께서 인도하실 것임을 저는 압니다.
그러므로 나는 잃었다고 느껴지고 죽음의 그늘에 있을 지라도
항상 당신을 신뢰할 것입니다.
나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나와 함께 영원히 있을 것이기 때문이고
당신은 내 위험을 홀로 직면하도록 나를 결코 내버려 두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독에서의 사색)

그리고 아마도 우리는 우리의 길을 홀로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발견하기 위해 말씀에 가깝게 듣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어떤 것들은 배우기 위해 일생이 걸릴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항상 경청하는 것을 기억하는 것만 필요하다, 특히 예수의 목소리, 우리를 인도하는 말씀에 대해 주의가 산만한 때에 그렇다.  오늘날 그 목소리는 말한다, “ 집으로 돌아오라. 너와 네가 사랑하는 이들이 살게 될 것이다.” 우리가 집으로 가서 세례에서 용서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우리와 함께 나눈 이 새로운 삶을 살 시간이다.


** 세상을 위한 중보 기도: 교사들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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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용박사 | ecopeace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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