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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제 3주 토요일

호 6:1-6
눅 18:9-14

메시지                   하나님의 자비와 십자가의 힘에 결합하기

하나님의 말씀은 애처롭게 호소하며 강력하시다. 하나님은 선택받은 백성, 사랑받은 에브라임에 다가가시고 하나님을 멀리한 유다는  불행에 빠져버렸다. 하나님은 그들이 자신을 치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실 지라도 그들의 상처를 치유할 분 역시 바로 하나님이심을 그들이 깨닫기를 확신하신다.

우리가 주님을 알기 위해 노력한다면 우리는 그분이 지상을 축축히 적시는 비처럼 우리에게 오실 것임을 확신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에브라임과 유다를 알고 있다-그리고 우리를. 우리의 경건은 이슬과 같아서 일찍 사라지고 만다. 우리는 변덕스럽고 우리의 신실함은 짧고 얇다. 그래서 되풀이하여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우리에게 보내시어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볼 수 있게 하신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유일한 것은 사랑이지 희생제물이 아니다. 제의, 의식, 헌신 그리고 기도 모두는 그것들이 사랑, 복종, 신실함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의해 진행되거나 이에 따르지 않으면 그 모두가 조롱이 된다. 우리는 끈기있고, 겸손하며, 영적으로 참회하며 타인들을 대함에 있어서 하나님을 모방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 밖에 아무것도 요구되지 않는다. 아무것도 그 외에 받아들여지 않을 것이다.

이 모두는 바리새인과 세금징수원에 대한 예수의 비유에 대한 전주이다. 그 비유는 자기 자신의 의를 믿으나 모든 다른 사람은 경멸하는 이들에 대해 말해지게 된다. 우리는 그 이야기에 친숙하다. 두 사람이 성전에 기도하러 갔다. 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머리를 구부리지 않고 서서 거룩하신 분께 큰 소리로 기도한다:“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자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욕심이 많거나 부정직하거나 음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세리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일주일에 두 번이나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리떨어져서 감히 눈을 치켜들지 못하고 단지 가슴을 치며 기도하였다, ”오 하나님, 죄인인 저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우리는 어떻게 기도하는가?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가 누구이고 얼마나 선한 일을 하는 지 말하여서 그분이 감명을 받아서 우리의 말을 들을 수 있도록 좀더 개방하고 우리가 요청하는 것을 들어주게 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거룩하신 분과 진실한 관계를 추구하는가? 우리가 하는 것은 무엇이든 결코 충분하지 않다.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우리를 엄습하고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죄와 사랑의 결여를 자각하는 것으로 채운다. 우리는 감히 하나님을 마주 바라보지 않는다. 우리는 특권적인 위치??? 전혀 확신하지 못한다. 심지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일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죄인이고 자비가 필요하며 심지어 기도하기 위해서, 심지어 하나님께 접근하기 위해 성령님이 필요하다.

이것들은 우리에게 제시된 두 극단이다. 그것들이 하나에서 열까지의 저울이라면, 세리는 열이고 바리새인은 하나이다. 어디에 우리는 자신들을 위치시키는가? 결코 쉬운 질문은 아니다. 그리고 예수에게서 비유에 대해 요약하신 것은 명백하다: “나를 믿어라, 세리는 의롭다고 인정받고 성전에서 집으로 돌아갔지만 다른 사람은 아니었다. 스스로를 높이는 모든 사람은 낮아질 것이요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하나님의 계산법에서는 모든 것이 거꾸로 되어있다. 우리는 우리의 선을 결코 확신할 수 없고 그 선은 누군가의 눈에 있는 먼지나 한발에 한 빗방울보다 더 하지 않다. 우리는 온전히 하나님께 속하기 위해 가야 할 긴 길이 있다. 호세아와 예수께서 우리에게 말하는 이 하나님은 우리를 치유하시고 우리의 상처를 붙잡아 매줄 것이다. 우리는 오직 겸손히 하나님께 돌아서기만 하면 된다. 우리가 그렇지 않으면 그때는 하나님이 예언자의 입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힘으로 우리를 치시거나 부수시고 상처를 주셔서 우리가 실 것이고 우리는 고통속에서 하나님께 돌아서게 될 것이다. 우리가 심지어 기도하기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예언자의 말과 예수의 비유를 주의해 들을 필요가 있다. 그것들은 우리의 교만에 대해 우리를 대결하고 우주의 중심으로서 우리 자신에 대한 자만감에 대결한다. 아마도 우리는 그것을 거의 기대하지 못할 때 겸손해질 것이다.

이는 우리가 되어야 할 바에 대해 쳐다보아야 할 좋은 시기이다. 우리의 세례에서 우리는 약속을 하였고 부활절 기도에서 그 약속들을 다시 갱신하며 새로운 예비신자들이 이에 결합한다. 고대 구절들은 짧고 다소 모호하다. 그것들은 우리로부터 더욱 더 도전을 하는 긍정적인 어감보다는 거부의 언어로 표현되어 있다. 라틴아메리카의 제의에서는 그 약속들은 좀더 직접적이고 우리에게 어떤 겸손을 가르친다. 첫 번째는 이것이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의 자유에서 영원히 살기를 약속하는가? 자녀로서 자유롭고 아버지, 성령 예수 그리스도에게 결합되며 서로에게 결합되겠는가? 삶과 죽음에서 자유로우며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자유롭겠는가? 가능성으로 충만하여 노예로부터, 죄로부터, 불필요하고 파괴적인 모든 죽음에서 자유롭고 거룩함과 은총을 위해 자유롭겠는가?

두 번째 약속은 원래의 것보다 더 상세하다(당신은 사탄과 그의 모든 조언을 거절하기를 약속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거절해야 하는 수많은 것들을 열거한다. 당신은 죄에 의해 다스려지는 것을 거절하는가? 당신은 악에 의해 사로잡히는 것을 거절하는가? 이 질문은 수없이 우리에게 놓여진다: 당신은 물질주의, 국가주의, 폭력, 인종차별, 성차별, 이기심 그리고 탐욕, 증오, 군사주의와 전쟁, 자본주의와 공산중의, 당신으로 하여금 예수를 따르게 하는 것으로부터 방해하는 어떤 것,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속으로 오는 것을 방해하는 어떤 것의 죄들에 의해 다스려지는 것을 거부하겠는가? 초점은 우리가 사회에 창궐하도록 기여하거나 허락하는 악들에 있다.

그리고 마지막 약속은 이것이다: 당신은 십자가의 표징이외에 어떤 권력의 표징아래 사는 것을 거부하겠는가? 당신은 겸손, 감사, 비폭력, 관대함, 용서, 자비, 기쁨으로 살기를 약속하는가? 당신은 공동체감각, 예수와 성령 그리고 형제자매들과 동반하는 감각을 촉진할 것인가?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요 계약이다. 우리가 정한 그 약속들을 쳐다본다면, 우리는 어디에 서야하는가? 우리는 이들 약속과 우링 교회 공동체에 복종해 왔는가? 우리의 교만을 삼키고 교회의 뒤로, 그룹의 뒤로 가서 우리는 예언자가 묘사한 것과 같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서 우리의 눈을 마루에 내려놓아야 할 시간인가: 우리의 경건은 아침 구름과 같고 하루 이른 시간의 이슬과 같다. 그것은 그정도 오래 지속하고 그토록 비실체적이다. 최소한 우리가 죄인으로서 자비를 구하고자 간청할 때 우리는 세상에 대한 예수의 선물에서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감사와 신앙을 나누는 모든 이들에게 우리자신을 결합하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의 일부로서 되돌아서서 우리의 상처 우리가 타인에게 가한 상처들에 대한 치유를 희망하게 된다. 우리는 제 3일에 부활을 희망하고 은총과 우리를 유지하고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의 힘을 희망한다.

사순절 네 번째 일요일 전날은 우리가 어디에 있고 얼마나 멀리 우리가 가버렸으며 여전히 우리앞에 무엇이 놓여있는지를 깊이 보아야 할 시기이다. 이 날은 우리가 건너고 길로 전향하여 들어설 출발점, 경계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넘어지고 얼마나 많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자기 의와 가장된 선함에 의해 잃게 만드는지를 인식할 수 있다.  

우리는 파오디카의 디아도쿠스(Diadocus of Paotica)의 말을 상기한다: “세례는 하나님의 성상(icon)을 재생시키고 그것을 빛나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닮음을 생산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협력을 기다리신다. 그리고서 은총이 이 성상에서 하나님의 닮음을 채우기 시작한다.” 우리가 오늘 기도하러 갈 때 우리는 빛을 방사할 것인가? 오직 다른 사람들만이 그것이 존재함을 뜻하는 방식임을 알 것이다. 디아도쿠스는 또한 그의 추종자들에게 상기시킨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닮음속에서 창조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닮음속에 존재한다는 것은 그분에게 그들의 의지를 사랑스럽게 서약하는 이들에게만 적절하게 말해질 수 있다.” 오늘은 서약하는 시간이다. 약속을 갱신하고 우리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의 강함을 확신하는 시간이다.


** 세상을 위한 중보 기도: 음지에서 공공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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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용박사 | ecopeace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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