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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35

사순절 제 3주 화요일

단 3:25, 34-43 (그리스어 번역본)
마 18:21-35

메시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에 기초하는 삶    

다니엘서의 이 부분은 아자리아(후에 아브네고로 이름부름)의 기도이다. 그는 세 젋은이중의 하나로서 맹렬히 타는 화덕에 던져졌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망명중에조차 하나님의 명령에 신실하였기 때문이다. 이 기도는 불길의 심장속에서 울부짓는다. 그리고 정직, 겸손, 하나님의 명예 대한 경청 그리고 전 공동체의 죄악에 대한 자각에 있어서 주목할만하다. 아자리아는 자신을 위해 기도하지 않고 사람을 대신해서, 그들과 함께, 그들중의 하나로서 기도한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과 계약을 위해서 죽음으로부터 구출을 탄원하기 시작한다. 고통과 죽음의 와중에서조차 먼저 오는 것은 바로 다름아닌 하나님의 뜻이다. 그리고 신실했던 이들을 기억하며 기도한다: 아브라함, 이삭 이스라엘, 모든 사랑하는 종들과 약속을 받은 거룩한 이들 그리고 그렇게 비참한 상황에 지금 놓여있는 그들의 후손들들을 기억하며 기도한다.

아자리아는 그들의 죄 때문에 어느 다른 나라를 넘어서 그들이 영락해지는 정도를 슬픔가운데 열거한다. 그는 세상에서 역사를 선과 악, 죄와 정의의 더큰 비전과 연계한다.  그들을 그러한 통행에혹은 첫 열매를 제공하는 장소로 데려오는 것은 바로 개인적으로 그리고 전체적으로 바로 국가의 죄이다. 그는 예언자이자 하나님의 종으로서 기도하며 울부짖는다,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마소서. 단지 당신이 친절과 커다란 자비로 우리를 다루어 주소서. 우리를 당신의 놀라움으로 인도하시고 오 주여, 당신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소서.”

이것은 비록 시련과 심각한 어려움일지라도 예언자의 입에서 하나님의 말슴에 개방된 이들의 기도인 것이다. 이것이 나사렛 사람들이 응답해야 할 방도이다. 이것이 우리가 복종으로부터 멀어지고, 신실함으로부터, 거룩함으로부터 멀어졌음을 깨닫고 응답하도록 우리는 부름을 받는다. 이런 방식으로 기도하는 것은 세상에서 기독교인들로서 철저히 우리의 제의, 개인적 헌신 그리고 실천을 바꾸게 된다. 우리는 세상을 놀라게 하고 우리의 신앙을 증거하는 모두로 하여금 세상의 힘과 하나님의 힘에 대한 관계에서 그들 자신의 위치들을 재 평가하도록 부른다.

1972년에 사망한 랍비이자 예언자인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은 쓴다: “기도는 그것이 전복적이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그것이 경직성, 증오, 편의주의, 허위의 피라미드를 뒤집어 파괴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제의 운동(liturgical movement)은 약속, 희망, 비전을 지속적으로 파괴하는 힘을 전복시키기를 추구하는 혁명적인 운동이 되어야만 한다.” 아자리아의 기도는 헤셀의 표준에 들어 맞는다. 그 기도는 그들이 죄를 지었음을 알고 하나님이 악보다 더 자비롭고 더 강력하심을 아는 백성들에게 속한 기도이다. 이 기도는 공동체가 계약에 대한 신앙을 깨뜨리고 공동체 자신의 방식으로 진행할 때조차 이 기도는 공동체에서 의미와 강점을 찾는다. 아자리아의 이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개인적 욕구를 넘어서 기도하도록 가르친다. 『하느님의 추구』에서 헤셀은 썼다:

가슴속에 숨어잇는 것을 표현하는 능력은 희귀한 선물이며 모든 것에 의해 계산되어질 수 없는 것이다.
대체로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마음을 고정된 텍스트의 패턴에 관계시키고, 말씀에 마음을 열어서 그것의 의미에 복종하는 능력이다.
말씀은 영적인 힘이 충만한 사랑있는 실체로서, 종종 우리 마음의 파악을  넘어서는 힘으로서 우리 앞에 선다. 그 말씀은 종종 수여자가 되며 우리는 받는 자가 된다. 그 말씀들은 우리의 마음에 영감을 주고 영혼을 각성시킨다.

우리가 서로 예루살렘으로 걸으면서 우리는 다르게 기도하고, 예언자들의 기도속으로 성장하며, 다른 사람들을 위한 중재의 기도속으로 성장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래서 우리 자신을 잊고 심지어 우리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우리의 죄를 잊어버리게 된다.

어떻게 하나님앞에 있는 것이 세상에서 우리의 길에 영향을 주는가에 대한 이러한 감각은 복음서에서 심지어 더욱 철저히 지속된다. 베드로가 예수앞에 서서 질문을 한다, “주여, 내 형제가 나에게 잘못을 하면 얼마나 자주 내가 그를 용서해야만 합니까? 7번입니까?” 일곱 번이란 완전의 숫자임을, 유대 제도하에서는 성취의 숫자임을 명심하라. 그래서 예수는 대답한다, “아니다! 7번이 아니다! 내가 말하노니 일흔번을 일곱 번하라!” 하나님은 우리가 항상 용사하기를, 어떤 구실이나 예외가 없기를 기대하신다. 이것은 이성적일 수 없는 불가능한 요구이다. 그래서 예수는 즉시 한 이야기를, 왜 이것이 그의 요구인지를 말하는 비유를 말씀하시게 된다.

그는 말한다. 하나님의 통치는 그의 신복들과 계산을 청산하기로 결정하는 왕과 같다. 즉시 그의 관리 하나가 그 앞에 이끌려 나왔다. 그 사람은 많은 양을 빚지고 왕에게 빚지고 있었다. 그는 갚을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그와 그의 가족은 채무를 변제하기 위해 재 산을 모두를 팔고 노예가 될 운명이었다.

이것은 예수 당시에 흔치 않은 경험이 아니었다. 오늘날도 흔치 않은 경험은 아니다. 숫자가 말해주기를 오늘날 미국의 거시에 사는 사람들의 85%가 고용되었었고 전에 오직 몇 달만 집에서 살고 있었다. 미국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직업을 잃거나 재앙에 가까운 건강 문제로 고통을 받는다면 모든 것을 잃은 후 오직 2개월을 버틸 뿐이라고 한다.

관리는 주인앞에서 자신을 변명하고 그의 삶과 가족을 위해 탄원한다. 그는 간청한다, “내 주인이시여, 조금만 참아주시면 다 갚아 드리겠습니다.” 주인은 가엽게 여겨 (복음서에서 한 특징임) 그를 방면해 준다. 심지어 더욱 믿을 수 없게도 그의 전 부채를 탕감해준다! 그 사람은 자유로와지고 깨끗한 상태가 되었다. 그는 감사하고 정의롭게 살 기회를 부여받게 되었다-혹은 좀더 말하자면, 왕이 행한 것을 모방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 사람은 그에게 주어진 것을 감사하지 않는다. 즉시 그는 나가서 약간의 부채가 있는--이 부채도 사실은 왕의 부채에 속한 몫이지만- 다른 사람을 만난다. 그리고 왕이 한 것처럼 관대함을 실천하는 대신에 그는 즉시 변제를 요구한다. 그는 그 사람의 간청을 무시한다. 그 간청은 사실 일전에 왕에게 한 그 자신의 간청을 반향하고 있다. 그는 그에게 속한 약간의 것을 되돌려 받을 수 있을 때까지 그를 감옥에 가두고 그를 부끄럽게 하며 그의 정신을 흐트러뜨린다. 다른 종들이 관리의 행동에 매우 분개하여 함께 왕에게 가서 그에게 일어난 일을 말하며 그 주인 앞에서 그들의 동료를 고발한다.

주인은 즉시 그리고 정당하게 마음이 움직인다. 관리가 잡혀와지고 정확하게 “못쓰도록 사악한” 은혜를 모르고 무감각하며, 권력을 남용하고, 그자신의 죄를 잊고 어덯게 왕이 그를 다루었는지를 잊은 자로 불리워진다. 왕은 노하고, 그런 것이 정당하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친절과 용서로 다루었을 때, 우리가 다른 사람을 다루는 방법에 대해 예언자들이 노하는 것과 같다. 그 사람은 모든 것이 지불될 때가지 형리에게 넘겨주게 된다. 예수는 그 이야기를 끝마치고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을 향하여 말한다, “만일 너의 각자가 그의 형제를 진심으로 용서하지 않으면 같은 방식으로 내 하늘의 아버지께서 너희를 대하실 것이다.”

그 이야기는 산탄총처럼 장전이 되어 있어서 곧장 우리를 향한다. 우리는 부정직하고 왕의 일에 대해 주목하지 않은 관리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길에서 우리 것이 아닌 것을 낭비한다. 그리고 물론, 우리가 자비와 용서를 탄원하는 궁지속에 우리가 있음을 발견할 때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용서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경험으로부터 배우도록 기대된다. 우리가 용서받았듯이 우리는 용서해야 한다.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빚진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빚진 것에 비교할 때 오직 소량임을 알 때 전심으로, 되풀이 용서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똑같은 정도로 그 용서를 제공하지 않으면 그때는 우리는 하나님의 정의를 알게 될 것이다.

이 비유는 우리 아버지의 신비를 드러낸다, 그 분은 믿을 수 없이 자비로우시고 동시에 정의로우신 분이시다. 저울에 올려지는 것은 서로에 대한 우리의 행동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하나님의 선함을 나누기를 거절하는 우리의 완고함에 의해 하나님의 정의를 우리 자신에게 불러 들인다. 우리는 겸손하던지 아니면 교만하거나, 용서하든지 아니면 오만하다. 중간의 터전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 이야기의 강력한 부분은 우리의 개인적 행동이 우리 공동체를 흔들거나 아니면 기뻐하도록 원인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용서받았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에 의해 세례로 생명으로 되돌려졌다. 그리고 우리는 용서와 구원의 그 선물에 대해 서로 책임을 져야 한다. 우리는 예수의 기도를 할 때마다 용서를 구하며 하나님 앞에 나온다, 그리고서 우리는 거의 전 부채가 탕감된 관리의 위치에 선다. 우리는 기도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시여... 우리에게 부채를 진 이들을 우리가 용서한 것처럼 우리의 부채를 용서하소서.”

유진 라베디어(Eugene LaVerdiere)는 부채에 대한 기도에는 두 단어가 있다고 가르친다. 첫 번째 것은 지불될 수 없는 즉 보상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절대적으로 넘어서는 부채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부채이다. 두 번째는 쉽게 지불될 수 있는, 우리가 서로에게 채무를 진 부채이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먼저 용서하심을 따를 필요가 있고, 아자리아가 기도한 것처럼, 전심을 다해 하나님의 계명을 따를 필요가 있다. 이것이 예수의 길이며 어떤 다른 것도 그의 제자들에게 적당하지 않다. 만일 왕의 회계감사가 오늘 시작된다면 우리는 자신의 셈에 대해 어디에 설 수 있을까?

아마도 우리가 셈을 하기전에 우리는 성 레오대제(St. Leo the Great)의 말을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어느 때이든 자선을 위한 일을 할 올바른 때이다. 그러나 이 사순절의 날은 특별한 격려를 제공한다. 마음과 몸의 거룩함으로 주님의 유월절에서 참가하기를 원하는 이들은 무엇보다도 이 은총을 얻으려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자선은 모든 다른 덕을 포함하고 많은 죄를 덮어주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가 가난한 자에게 그리고 다른 방식들로 괴로움을 받고 있는 자들에게 좀더 열린 손을 지닌 관대함을 확대하자. 그래서 하나님께서 즐거운 목소리로 감사해 하고 곤핍한 자들이 우리의 금식에 의해 구제받도록 하게 하자.

성 레오가 언급한 이런 금식은 단지 굶주린 자에게 빵이 되는 음식으로부터 금식만이 아니라 악의, 용서에 대한 거절 긔고 우리에게 잘못을 행하거나 부채를 진 이들에 대한 긍휼이 없는 마음으로부터의 금식이다. 윌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감사함에 있어서 우리가 우리에게 빚을 진 이들에게 용서하지 않는다면 사순절은 무엇일 수 있을까? 세상의 거칠은 요구와 우리의 무감각성에 의해 속박되어진 이들을 향한 관대함을 우리가 배울 것인가? 우리의 마음과 공동체에서 부활절 날에 무엇이 발생되어질 것인가?


** 세상을 위한 중보 기도:  전쟁난민들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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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용박사 | ecopeace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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