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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제 3주 월요일

왕하5:1-15
눅4:24-30

메시지                       완고함과 불신앙으로부터의 참회

이제 우리의 여정이 중간지점에 이른 사순절 셋째 주이다. 예수와 그의 반대편에 있는 이들 사이에 긴장이 점점 강해진다. 예수 자신은 대결을 일으키고 그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그들이 어디 서 있으며 누구를 위해 충성하는지를 의문을 제기한다. 금주의 독서에서 예수는 선과 악의 윤곽을 그려내고 그에게 속한 자와 세상속으로 오는 왕국의 도래에 반대하여 서있는 자를 분리하는 예언자가 되다. 그것은 선택의 시기, 변화로 부름을 받는 때이다. 우리는 공적으로 예수와 함께 서거나 그렇지 않거나 둘 중하나가 된다.

예수는 열왕기하와 관련된 이야기를 언급한다. 시리아에서 나아만이란 사람이 있었는 데 아람 군대의 왕의 장군이었다. 그는 매우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으나 문둥병자였다. 아람인들이 이스라엘 땅을 침범하고 이스라엘의 어린 소녀가 나아만 가정의 종이 된다. 그녀는 주인에게 사마리아에 있는 예언자에게 그의 몸을 보이면 그는 문둥병에서 치유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녀의 신앙은 확고하다.

그래서 아람왕은 나아만에게 이스라엘 왕에게 주는 친서를 붙여 보내어-은 10달란트, 금 육천 세겔, 옷 열 벌과 함께- 왕에게 나아만의 문둥병을 고쳐달라고 요청한다.

이스라엘 왕은 그 편지와 선물을 받고 절망에 빠져 옷을 찢으며 아람의 앙이 그에게 트집을 잡으려고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엘리야의 길을 따르고, 엘리사의 정의의 망토를 갖고 있으며, 언술의 능력과 심지어 문둥병자를 고치고 죽은자를 살리는 힘을 지닌 엘리사가 왕의 행동을 듣고 그에게 전갈을 보내어 어째서 그가 절망에 빠져 행동하는가를 물는다. 그는 나아만을 그에게 보내어 나아만과 두 왕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에 예언자가 있음을 보게 한다. 이것은 단지 한 개인의 치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들이 이것을 알든 모르든지간에, 하나님의 왕국의 힘과 왕국에 대한 신앙의 이야기이다.

나아만은 복종하여 엘리사의 집으로 간다. 거기서 그는 요단강으로 가서 7번 몸을 씻으면 그는 나으리라는 말을 듣는다. 나아만은 분노한다. 그는 엘리사가 어떤 개인적인 몸짓을 통해 그를 치유할 것을 기대하였다. 그는 추론하기를 다마스카스의 강들이 이스라엘의 강만큼 효과적이라고 생각하고 분노하여 떠나게 된다.

다행히도 그의 종들이 그를 뛰따라 온다. 그들은 그를 불러 논의하면서 그에게 예언자가 그에게 뭔가를 특별나게 하라고 말했다면 주저하지 말고 그대로 복종하도록 말한다. 그들은 주인에게 그가 예언자 엘리사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종과 주인간에 주목할만한 관계를 노출한다. 왜냐하면 나아만은 그의 종들의 말을 듣고 복종하였고 그의 몸을 복종함에 있어서 다시 어린 아이의 몸처럼 (치유)되었기 때문이다.

나아만은 모든 그의 종들과 함께 예언자에게 돌아와서 그앞에 서서 그의 신앙을 직설적으로 고백한다: “이제 나는 알았습니다. 이스라엘밖에는 온 세상에 신이 없습니다.” 이 신앙의 고백은 이방인, 시리아인, 이스라엘의 선택받은 백성이 아닌 자로부터 온다. 그것은 치유의 이야기. 하나님의 말씀을 그의 입술에 담은 자에 대한 복종의 이야기이다. 그것은 예수가 그 자신의 백성가운데 행하려고 시도한 것의 전조가 된다.

복음서의 시작 초기에서 누가는 예수를 성령이 충만한 예언자로, 회당에서 말하고 그는 기름부음을 받았다고 공언하며 하나님의 현존을 눈먼자, 절름발이, 문둥병자, 수감인 그리고 잃은 자에게 가져온 예언자로 제시한다. 그는 나사렛에서 그 자신의 백성에게 만일 그들이 그의 입술로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믿는다면 그것은 그들의 몸과 그들의 마을에서 참되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다.

그러고서 그는 오늘의 성서 문구를 계속한다. 그는 단호히 이스라엘 역사에서 어느 예언자도 본 고향에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그는 이야기들을 목록으로 제시한다: 예언자 엘리야를 시중든 시돈의 시렙다 과부이야기, 예언자 엘리사에 의해 치유된 시리아 문둥병자 나아만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예수는 그들에게 그는 엘리야와 엘리사 전통에 있는 예언자이고 그는 그들이 믿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그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그들에게 그가 그들의 표준에 따라 누구인지를 입증하는 것- 할 의도가 없다.

그는 예언자이고 그의 메시지의 타당성은 다른 장소에서 보여질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앙이 결여되었고 마음이 굳어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참으로 그들의 완고한 조상의 자녀들이고 예언자를 인식하는 데 늦으며 자신들의 죄를 참회하고 태도를 바꾸기 위해 예언자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데 더디다.

반응은 이스라엘이 엘리야와 엘리사에게 제공한 것과 똑같다: 분노와 성이 남. 그들은 일어서서 그를 나사렛으로부터 추방하고 그를 언덕의 벼랑가에까지 데리고 가서 그를 해쳐서 죽이려고 의도한다. 무대는 그렇게 설정딘다 이스라엘은 여전히 그들에게 변화하라고 도전하고 하나님의 뜻을 들으라고 도전하는 예언자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거부한다.

이는 누가복음에서는 예루살렘으로 향한 여행을 위한 배경막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에 따르며 우리는 예언자의 말씀이 필요한 때에 불신앙 세대의  일부임을 자각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예언자에게서 등을 돌려 우리의 불신앙과 악한 행동을 비난하기 때문에 그를 우리는 매도할 것인가. 예언자로서 그는 우리의 유익을 위해 어떤 기적도 행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입증하지 않으며 우리가 좋아하는 것에 비위를 맞추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계약에 대한 신앙을 깬 죄인으로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보여줄 의도를 지닌 하나님의 예언자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적들을 치유할 것임을 믿고 인정하도록 부름을 받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종종  우리보다 더 하나님의 말씀에 개방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 예수의 제자들이다--혹은 우리는 진실로 그러한가? 우리는 세례를 통해 끊임없는 개종으로 부름을 받았고, 덕을 실천하고 우리의 죄와 세상의 불신앙에 대한 우리의 참여에 대해 배상하도록 부름을 받는다. 예언자 예수는 우리 앞에 서있고 우리에게 우리의 신앙 결여, 표증과 기적에 대한 우리의 욕망, 우리를 대신해서 하나님이 행동하도록 기대하는 우리의 완고함 그리고 회개하고 세상 죄에 대한 우리의 참여에 관한 책임을 지는 것을 거부함 등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추종자에 의해 상티다스라고 불리우는 란자 델 바스토(Lanza del Vasto)는 간디의 제자이자 방주 공동체의 창설자이다. 그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예언자에 대한 이런 필요를 썼다-모든 믿는 자들을 위한 대결과 개종을 위한 필요를. “아첨하는 이들을 위해 엄격한 말을 지니고, 너와 다투는 이들을  위해 침착한 말을, 지쳐있는 이들에게 따스한 말과,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강한 말을, 눈먼 이들에게 명료한 말을, 자만하는 이들에게 결정적인 말을, 그리고 잠자는 이들을 위해 한 양동이의 물과 막대기를 지니는 강력한 자비”(Principles  and Precepts of a Return to the Obvious). 우리 각자는 "야단을 맞아야“한다. 역사와 신앙의 더 큰 상황속에서 우리 자신들을 보아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빨리 자라고 확신을 지니게 된다. 우리가 머리를 굽혀 용서를 구하던지 아니면 강직하게 우리 죄에 머물러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보다는 복음의 소지자와 싸우게 된다. 단지 약속의 자녀들이라는 것들 때문에 우리가 신실한 자녀거나 세상의 빛이나 이웃에 대한 희망이라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아마도 하나님은 그밖의 다른 곳에서 놀라운 일을 행하실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삶에서 빨리 성장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가 나사렛에서 그를 살해하려는 이웃들로부터 멀어진 것처럼 우리가운데로 곧장 걸어가셔서 우리로부터 멀어져 갈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약함, 신앙의 결여, 죄많음에 대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예수와 그 길을 걸을 수 없다.

남미와 북미에서 교회에 대한 기자이자 작가인 페니 레누스(Penny Lernoux)는 40대에 암진단을 받았다. 프로젝트와 책가운데서 그리고 가난한 자들에 대한 헌신하는 삶과 진리를 말함 가운데 암 진단을 받았던 것이다. 그는 편지를 친구들과 동료들에게 그가 죽기 바로 몇주전에 편지를 썼다. 일부분은 이렇다:

나는 새 길을 걸어 내려가고 있음을 느낀다. 그것은 신체적인 두려움이나 죽음의 두려움이 아니다, 왜냐하면 라틴 아메리카에서 용기있는 가난한 이들이 나에게 생명의 신학을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연대와 공통의 투쟁을 통해 죽음을 초월하는 생명의 신학이다. 오히려 그것은 무력감이다-가난한 자들의 참피언이 항상 되고 싶은 나는 단지 무력하다-나는 또한 내 구걸하는 사발을 내밀어야 한다; 나는 그리스도의 궁극적인 무력감을 배워야만 한다. 그것은 씻어주는 경험이다. 그래서 많은 것이 덜 중요하거나 전여 중요하지 않다. 특히 야망이 그렇다.

금주에 우리는 우리의 우선순위, 목표, 기대 그리고 삶의 스타일을 재 평가하도록 부름을 받는다.  예언자 예수의 말을 들으면 우리는 우리의 안락하고 통제가능한 공간을 떠나서 예수와 함께 낯선 곳으로 걸어가서 하나님, 진실한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이 그러하길 원하는 분이시며, 우리의 번역이 아닌 실제의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낯선 자가운데서 친밀함을 발견해야 한다. 보라! 상기하라! 기억하라! 우리가 예언자를 조심하는가? 우리는 예수와 함께 여행하는 하나님의 예언자인가? 아니면 우리는 우리가운데 있는 말씀에 대항하고 있는가?

  


** 세상을 위한 중보기도: 원폭 피해자와 그 환우 2세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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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용박사 | ecopeace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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