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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순절 제 2주 토요일

미 7:24-25, 18-20
눅 15: 1-3, 11-32

메시지              잃은 자녀와의 화해

예언자 미가의 말의 이 독서 부분은 서정적으로 야훼를 지팡이든 목자로서 천성적으로 양떼들을 몰고 그것들을 분리해서 안전히 거하게 하고 평화의 들에서 자유로 먹이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외적인 하사품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낭비하는 용서, 온화 그리고 자비에 비교한다면 아무것도 아니며 그분은 우리의 죄를 되풀이하여 발밑에 밟아 으깨어 없애신다. 이것이 하나님이 평상적으로 행하시는 것이다. 비록 우리의 죄와 신실함의 결여로 화가 나시지만 하나님은 더욱 신적인 현존에서 우리가 살기를 기대하신다. 계약의 담지자로 우리가 입으로 맹세한 것처럼, 만일 우리가 다시금 신실하기만 하다면!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맹세는 오래되고 신뢰할 만한다. 우리의 것은 그렇지 않지만 하나님의 인내와 참으심은 아마도 어느 날인가 신뢰에서 주어지는 말씀의 의미를 우리가 감사하도록 가르칠 수 있다.

예수는 평화, 화해, 그리고 우리가 듣고 기억하고 다시금 하나님께 돌아갈 소망으로 다시 말해진 말씀이다. 이 말씀은 아버지에 대한 굉장한 이야기와 우리가 단지 기회를 준다면 우리를 위해 하기로 기다리고 있는 것을 말한다. 야훼께서 사람들의 목자가 되고 그들에게 놀라운 징표를 주고 그들의 죄를 제거하는 옛날처럼 다시금 우리를 용서하고 우리를 다시 불러들여 서로 화해시키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예수는  말씀에 굶주린 세금 징수자들과 공적인 죄인들과 식탁에 앉는다. 그는 공적으로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한다. 이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눈에는 수치스러운 행동이어서 그들은 중얼거린다: “이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여 그들과 함께 먹는다.” 용서와 온화함으로 먹이는 기회를 붙잡고, 만일 그들이 언제나 하나님이 이와 같이 행동함을 기억하기만 한다면! 이 자기-의를 지닌 종교적 인물들은 사람들이 말씀과 계약의 길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즐거워하는 이들이기 보다는 하나님께 대항하여 사막에서 불평하는 이들처럼 보인다. 그래서 예수는 그들에게 이이야기를, 잃은 양의 3부곡에서 제 3자, 잃은 동전 그리고 이제는 잃은 아들을 말해주고 있다.

그 이야기는 우리에게 매우 친숙해서 때때로 듣기가 어렵다. 우리는 그것이 어떤 이들이 예수와 식사를 하고 어떤 이들은 그들과 함께 하기를 거절하여 “죄인들을 받아들여 그들과 함께 먹는 저 사람”이라고 판단할 때 말해진 것임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예수의 이야기는 식사로, 살찐 송아지가 있는 축제로, 한 아들은 밖에 나갔다 그의 친구들과 아버지와 함께 먹고 다른 하나는 들어와서 형제와 식탁에 앉는 것으로 끝난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두 아들이-두명의 매우 사랑이 없는 아들들- 있는 사람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 아들들은 그에게 큰 두통을 주고 있음을 틀림없다.

한 아들은 유산을 지금 원한다. 전통적으로 형은 재산을 상속할 것을 기대한다. 형이 동생들에게 재산을 주고 가정에서 아버지의 역할을 하는 것은 그의 권리이고 책임이다. 그러나  이미 이들 두 형제간에 불화가 있는 것은 분명하고 동생이 그가 이제 얻을 수 있는 것을 원한다. 그는 형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아버지로부터 얻을 수 있다.

일상적이지 않고 들어본 적이 없는 것은 막내의 소원에 아버지가 묵묵히 따른다는 점이다. 아마도 그는 이스라엘이 남은 형제들보다 요셉을 더 좋아하는 것처럼 아마도 둘째를 장남보다 더 좋아했는지 모르겠다. 어떤 이유에서든 유산은 증여되었고 둘째 아들은 세상에서 그의 길을 찾아 떠났다. 유대의 법과 공동체 밖에 있는 세상으로. 그는 아버지, 가족, 계약, 민족을 배반했고 방탕한 삶으로 돈을 탕진했다. 그는 가족에서 그의 위치와 이스라엘의 유산의 그의 몫을 상실했다. 그는 결국 돼지가운데 있는 종이 되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이것은 비참과 두려움의 깊이이다. 그는 부정한 동물가운데 살고 오직 그의 배를 남은 것으로 채우는 것을 생각하지만 아무도 그에게 그것 조차 제공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때 그는 정신이 들었다! 그는 집으로 되 돌아가는 길을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 집에서는 고용된 사람들이 그보다 더 잘 먹고 있을 것이다. 이것은 대화, 후회 혹은 그가 행한 것에 대한 수치감의 표현이 아니다. 그는 심지어 그가 원인이 된 굴욕에 대해 혹은 그가 형제에게 준 분노나 공동체의 수치에 대해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는 오직 그의 배만을 생각한다. 그는 이미 그의 아버지가 쉽게 접촉하고 아마도 그를 다시 능력을 부여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그는 돼지우리를 나와 집에 가면서 아버지에게 사용할 말들을 암기하고, 그는 먹고, 돈을 받으며 아버지와 형제의 재산으로 살 수 있음을 상기한다. 그는 절망적이지만 그는 여전히 지금까지처럼 이기적이다.

아버지는 놀랄만하다. 그는 둘째가 멀리서 오는 것을 본다 (이 문장은 요셉과 그의 형제들에 대한 이야기와 아들과 소작인들의 비유에서 본다). 그리고 그를 기다리다 달려가서 환영한다(요셉의 형제들과 그의 형제가 하지 않은 것처럼). 그는 아들의 사죄를 잘라버리고 아무리 성실하든 그렇지 못하든 간에 팔로 그의 목을 감싸고 입마추며 종들에게 옷(가장 사랑하는 아들에게 자주색 옷) 신발과 팔찌(전통적으로 가족의 팔찌)를 가져오라고 명한다. 그는 전 마을을 위해 축제를 제공한다. 가족, 부족, 민족 그리고 종교에 대한 모든 법을 어긴 신실하지 않고, 거칠며 무감각한 아들에 대해 그들이 어떻게 느끼던 지 상관하지 않고 축제를 벌인다. 아버지는 오직 한 가지만을 고려한다: 어쨌든 그가 돌아왔다! 이것은 제정신이 든 아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자녀에 대한 아버지의 억제 못하시고 추호도 의심없는 사랑으로 한다.

여전히 이야기 줄거리는 심화된다. 형이 들판에 있었다. 이는 재산을 탕진한 둘째에게 주어진 몫이후 원래의 재산에서 남은 곳이다. 그는 음악소리와 춤추는 것을 들었고 그가 무슨 일이 돌아가고 있는지 종에게 물었을 때 그의 아버지가 살찐 송아지를, 그의 아들이 건강하게 돌아왔기 때문에 중요한 날에 쓰기 위해 남긴 그 송아지를 죽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장남은 격노했다. 그의 마음엔 아무도 증오 심지어 살인까지 들어있었을 것이다(요셉의 형제나 포도원의 소작인들처럼). 그는 들어가기를 거절하고 축제에 함께 하느 srjt을 거절하며, 존경심도 없고 불복종한 둘째가 행한 것에 대해 아버지께 굴욕을 느낀다. 게다가 형으로서 그는 그의 동생에게 책임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책임을 성취하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는 둘째를 찾으러 밖으로 가야만 했었다.
그대신에 아버지는 매일 감시인이 지켜보는 것처럼 마을 어귀에서 기다렸을 것이다. 그가 다시 오는 경우에 그와 다시 걸어서(이는 “화해”를 의미) 가정의 안전 속으로 되돌아오게 할 수 있다. 아들은 가족에 뿐만 아니라 종교와 전통에 대해 불신실하였다. 그는 쓰레기에 던져져서 확실히 조롱과 모욕을 받았을 것이다. 심지어는 그가 돌아올 때 돌을 맞을 수도 있었다. 이제 아버지는 다시 나가서 향연을 뒤로 남기고 그의 다른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간구한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응답하는 데 있어서 얼마나 사악한지 “일생동안 그를 위해 노예가 되겠다”는 쓴 말을 아버지께 하고 그것을 보여주기 위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심지어 그의 친구들과 축하할 자녀조차 없다. 그는 자신이 아버지에게 느끼는 방법을 드러낸다-미워하고 달갑지 않은 주인/종. 그는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이기 보다는 이전의 비유에서 말한 소작인들과 더 가깝다. 그리고 유산을 받을 적합한 자라고 스스로를 생각한다! 그는 심지어 그의 형제를 인정하는 것을 거부하기 까지 한다. 그의 형제는 그에게 죽었고, 그의 심장에서는 살해되었다: 그는 단지 “당신의 그 아들”이라고 언급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것에 대해 저항하지 않는다. 그는 그 불신실함, 거칠음과 불복종을 자신에게 취하지만, 그는 자녀들이 서로에게 행하는 것을 참지 않는다. 예수는 이 이야기가 요셉과 그의 형제들처럼 전환되기를 원한다- 맏형에 의해 취해진 책임, 양측에서의 용서와 모든 공동체 가운데서 축하될 수 있는 화해, 주변 모두와의 교제. 맏형이 결코 받아들이지 않은 부드러운 조언이 하나 존재한다: “내 아들아 너는 나와 항상 함께 하고 내가 가진 것은 모두 너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축하하고 기뻐해야 한다! 네 이 형제는 죽었었고 삶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는 잃었고 다시 찾아졌다.” 기억하라. 기억하라.

그렇게 하는 데 있어 아버지는 관계를 -가족, 공동체 그리고 민족- 다시 돌려놓는다. 용서와 자비는 아버지의 관대함과 온화함과 자비에 기초하지 그 어떤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다. 관대와 온유와 자비는 항상 추방되지 않고 거절되지 않으며 살해되지 않은 혹은 배제되지 않은 이들을 위해 거기 있어왔다. 그 이야기는 갑자기 끝난다. 다시한번 예수는 청자들로부터 응답을 기다린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맏형들.”

실제로 대다수는 예수께서 선포하고 진수시킨 용서의 향연에 오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나이어린 형제 자매들로부터 잃어버린, 죽은 그리고 절단된 채로 남아있고 그들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거부하거나 아버지가 그들을 용서해서 그들과 관계를 바꾸고 교제의 놀라운 즐거움을 나누기를 거부한다. 그래서 다른 비유처럼, 옷, 반지, 관계 그리고 유산은 다른 아들에게, 그들의 아버지를 위해 풍성한 추수를 가져올 다른 자녀에게 주어지게 된다.

우리는 막내 아들이 그의 행동에 대해 속죄하고, 가족에서 분열을 치유하고 그의 아버지의 사랑을 존중하는지를 틀림없이 궁금해 한다. 그러나 궁금이상의 것을 우리는 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를 기쁘게 할 실재에 응답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로운 용서를 맛보고 즐기기 전에 우리가 잘못한 형제 자매에게 나갈 수 있다. 그리고 우린 자신의 이기심과 탐욕 그리고 사고에 의해 파괴된 관계를 수선할 수 있다. 혹은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선 이들에게로 가서 지원, 개방의 손을 뻗치고, 우리 또한 “하나님을 위해 우리의 전 삶을 보냈던 것처럼”행동하고 자기 의를 드러내어 아버지가 그의 모든 자녀를 위해 가지고 계신 사랑의 깊이를 못만남으로 우리도 아버지께 잘못을 저지르고나 있지 않는가? 우리는 큰 형처럼 우리의 책임에 따라 살아왔는지 자신들에게 물을 수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예수와 함께 식탁에 않아 함께 먹기를 거부하고, 가족의 모든 구성원에게 존경를 보내기를 거부하고, 우리 모두가 슬프게도 온화함, 관대 그리고 서로에 대한 몇 가지 보상이 필요함을 고백하기 거부하는 형제자매들 가시에서 화해를 추구하기 위해 무엇을 우리가 할 수 있는가?

우리가 가족에서 하기로 부르심을 받은 것을 더욱 넓은 기초에서 예수가 한 거처럼 하기로 부르심을 받는다. 무리엘 레스터(Muriel Lester)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무엇이 되어야하는지 지적한다:

평화를 만드는 자의 일은 전쟁을 중지시키고, 세상을 정화하며, 세상을 빈곤과 부로부터 구하고, 병든 자를 치유하고, 슬퍼하는 자를 위로하며, 아직 신을 발견하지 못한 자를 일깨우는 것이다. 기쁨과 아름다움을 네가 어디를 가든지 창조하는 것이다. 모든 것에서 그리고 모두에게서 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어느 파티에서든 하나님이 향연을 이끄시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다시 보기를 원하는 누구든 우리와 함께 이끌어가야 함을 확신할 필요가 잇다. 우리가 그들을 집으로 데리고 옴으로써 하나님이 우리에게 향하실 때 하나님의 사랑의 표정은 무엇과 같게 될 것인가? 

 
**세상을 위한 중보기도 : 이산가족의 상봉과 통일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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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용박사 | ecopeace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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