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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금요일과 성토요일에 일어난 두렵고 떨림의 경험

(종려주일)

 

>종려주일로의 초대<

 

생각 일 그리고 행동이라는 세상의 중력속에서 감춰진 나의 존재됨을 드러내는 일은 바로 죽음과 부활이라는 두 극단이다. 죽음은 혼란 고통 무기력 그리고 지쳐버린 사랑의 종착이자 무의미의 근저를 표현한다. 그것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최저의 심연이다. 부활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생각하거나 의식하지 못한 그리고 기대하지 못한 차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 세상에서 우리의 의식과 열망을 넘어선 차원으로 우리를 끌어올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처형및 죽음과 부활을 너무 갑작스럽게 논리적으로 비약한다. 처형과 죽음이 너무 심리적 고통을 자아내기 때문이고 너무 쉽게 해답에로 넘어가고자 하기 때문이다.

   죽음이후 부활이라는 이 논리에 대해, 종려주일과 고난주간에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할 것은 예수의 죽음과 부재속에 성금요일과 성토요일에 무엇이 남아있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즉 죽음후 부활로의 도약이전에 어떤 과정이 그 중간의 시기에 경험되어지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신의 부재속에 죽임이 생을 점유할 때 우리에게는 무엇이 남는가? 점프하지 않고 죽음에서 쓸개즙을 들이키며 끝까지 죽음이 나에게 점점 더 다가와 내 생 전체를 뒤엎을 때, 내 의식과 삶에는 무엇이 남아있게 되는가이 질문을 우리는 피할 수 없다. 일과 행동 그리고 희망이 무력화되는 그 최저점에서 무엇이 남아있는 것인가?

   (한국 개신교에서는 사라진) 사도신경의 원문중 하나였던 지옥에 내려가신 그리스도처럼 지옥(hell)의 경험속에 내던져있는 우리의 삶이 아오슈비츠, 재앙, 트라우마, 암진단 그리고 죽고싶은 삶의 영역속으로 추락해 있다면 무엇이 나에게 남아있는 것일까? 종려주일과 고난주간은 이러한 실존적 고뇌속으로 들어갈 것을, 깜깜한 어둠속에 들어가는 인생에 대한 주목하기를 요청한다. 만일 우리가 성금요일의 예수의 처형과 죽음이후 성토요일에 막달라마리아 베드로 그리고 다른 사랑하는 제자처럼 무덤속으로 들어가는상태속에 있다면 그리고 아직 부활이 목격되지 않은 <통렬한 비극과 파열된 심장>의 상태에서라면 무엇이 우리의 생을 견디어내게 할 것인가? 생의 승리가 아닌 죽음이외의 것을 희망할 수 없다면...당신의 인생이 이제 더 이상 희망이 없고 파산이라는 종착역에 서 있게 되는 경험속에 홀로 울고 있다면, 무엇이 남아있는 것인가? 요한기자의 17장의 내 사랑안에 머물러 있어라가 아니라 오히려 죽음의 종착역에 남아있는상태로 전락했다면 무엇이 이제 그대에게는 남아있는 것인가?

   종려주일과 성토요일은 지옥에까지 내려간 그리스도와 남은 이들에 대한 성찰로 초대한다. 그리고 그를 따라 지옥의 순간까지 내 생이 내려간 (나를 포함한) 어느 누군가의 삶에 대한 성찰로 우리를 부른다. 오늘은 좀더 일찍 오셔서 예배전 마음의 묵상을 통해 이에 대해 가슴을 열고 비극과 죽음에 연결하여 피상적인 희망과 개념적인 신앙의 껍질이 벗겨지기를...

 

 

본문: 19:1-16;25-34;20:1-14

 

 

4월 중순인 어제 10여년 만에 북한산 백운대를 7시간에 걸쳐 오르고 내리면서 봄꽃들을 즐겼다. 4월은 이렇게 새롭게 피어나는 새순들과 꽃들의 시작과 더불어 겨울 잔해로 죽음의 끝자락에 있어서 말라비틀어져 썩어가는 것들과의 묘한 대비를 맛보게 한다. 그래서 T.S엘리웃은 <황무지>시에서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고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고 말하였다. 죽어서 해체되는 것들의 정점과 새로운 생명의 시작속의 전환속에서 죽음과 탄생의 이중주처럼, 종려주일에 예수의 처형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이중주를 만난다.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은 죽음이후의 부활, 곧 죽음의 승리에 대한 생명을 이야기한다. 우리의 주목은 예수의 죽음과 그분의 부활에 맞추어져 있고, 처형/희생/죽음과 승리/영광/부활이라는 두 간극에서 과정에 대한 탐구 없이 점프하여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요한복음서에서는 양 극단의 갑작스러운 전환대신에 좀더 죽음과 부활 사이의 <중간에서> 어떤 과정과 무슨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잠시 멈추어서 살펴봐야 할 것들이 존재한다. 성금요일과 성토요일 스토리는 각각 죽음을 맞이하는 예수의 삶과 예수의 죽음으로 일어난 제자들의 삶의 이야기이다.

   이미 요한복음의 기적징표의 스토리들에서 일어나고 있던 외부 유대인들의 불신, 저항, 그리고 죽임에 대한 모의와 더불어 내부 제자들의 의심과 떠나감 그리고 배신의 전개과정이 설정되어 있었다. 그러한 암울한 전조의 과정 속에서 예수는 일관되게 하느님으로부터 왔다가 다시 돌아가는 자신의 정체성과 이 지상에서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을 자신의 삶의 내용으로 진술하고 있었다. 이것은 단순히 저위의 하늘나라에 대한 형이상학적 진술이 아니다. 이미 요한복음의 기적징표 스토리들에 있어서 알게 된 것처럼 우리의 삶의 무능력, 불안, 고통, 그리고 두려움에 대해 <하느님의 아들(이는 신적인 대상에 대한 언표가 아니라 신적 생명을 내재한 이지상적인 존재의 상징임)>임에 대한 진술은 그분이 이 지상의 삶에서 두려움과 질병의 치유라는 효능성에 있어서, 다시 말해 하느님의 영광(이에 대한 이 지상에서의 삶은 사랑, 평화, 성령을 받음으로 나타난다)을 이 땅의 삶에서 누림이라는 실천적인 해답임을 보여준다. 나에게 다가오는 힘든 상황이 어떠하든지 간에 이것은 최소한 요한기자의 증언을 듣는 청자와 그의 텍스트를 읽는 독자가 인상깊게 알게 되는 요한기자 진술의 일관성에 대한 통찰이다. 그 일관성이란 고별담화 속에서 서서히 내부 제자들에게만 보여주는 하느님의 사랑에 머무름(목자와 양우리, 농부와 포도나무, 그리고 예수의 마지막 기도의 핵심이다)에 대한 것이었다.

   성금요일의 스토리에 따르면 곧 예수에 대한 재판과 처형 그리고 십자가에 올려짐에 있어서 그동안 보여준 기적과 달리 무기력함과 연약함, 그리고 그에게 가해지는 매질, 모욕 그리고 가시나무 왕관과 허리에 찌른 창으로 인한 상처라는 플롯이 전개된다. 앞서 기적스토리들에서는 인간의 비참함이 전개되었지만, 고별담화 후 만나는 예수개인의 신상에서 일어나는 이 스토리는 기적없음의 무신성(無神聖)의 절대적 고독, 무의미, 말씀의 침묵 속으로 들어간다. 기적징표가 보여준 살아있는 인간과 보이는 세상에서 비참함을 넘어서 이제는 죽음의 종국성과 보이는 세상 그 근저의 지옥(스올, Sheol) 곧 극도의 암흑과 버려짐 그리고 깊은 공허와 신의 부재 속으로 떨어지는 장면으로 전개진다. 이것은 바로 한국개신교가 잃은 사도신경의 원문인 <지옥으로 내려가신 그리스도>의 표현과 일맥상통한다. 그분의 십자가위의 올려지심은 역설적으로 지옥으로 떨어지심에 대한 것이었다.

   길·진리·생명이신 그리스도가 길없음, 침묵, 전적인 끝으로서의 죽음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재판과 십자가 처형이라는 수동적죽음(종교와 정치권력의 음모와 진행의 수용)과 더불어 그가 능동적죽음(지옥으로 내려가기의 적극적인 수용)이라는 이중 죽음을 통해 무엇이 드러나는가? 이것에 대한 알아차림은 제자들에게도 쉽지않은 것이었다. 남아있는 제자들은 혼란, 십자가로부터 멀어짐, 두려움으로 <균열, 단절, 쪼개짐; 신학자 셸리 램보의 용어>을 맞이한다. 하느님의 연약함과 침묵은 도대체 무엇을 드러내는 것일까? 그가 신포도주와 해면 물을 마시고 그를 찌른 상처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옴으로 인해 이를 본 소수의 무리들은 무엇을 알게 된 것인가?

   성금요일이 예수에게 일어난 죽음의 사건이라면 성토요일 남은 제자들에게 일어난 혼란의 사건이다. 본문에서 성토요일을 증거하는 막달라 마리아의 이야기를 통해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자. 성토요일에 일어난 그녀의 경험은 그녀가 알던 거룩한 주님인 예수가 돌아가셨고(즐거웠던 일이 추억으로 변했고) 그녀의 기쁨의 삶도 사라졌다.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의 목격자였던 그녀는 죽음의 종국성을 맞이하여 이를 피하지 않고 예수의 시신이라도 찾고자 나선다.

   성금요일에서 재판의 핵심이었던 그대는 유대인의 왕인가?’그대는 어디서 왔는가?’질문이 여기서는 누군가 제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다 모셨는지 모르겠읍니다로 바뀐다(이는 함축적인 의미를 내포한 중요한 메타포이다). 그녀가 예수를 알아보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몇 가지 방해물들이 놓여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이른 새벽아직 어두울 때’(20:1)에 움직였다. 어두움이 그녀의 시야를 가로막고 있었다. 두 번째는 무덤 밖에서 무덤 안을 홀낏 본 것(11:여기서 헬라어 원어는 대충봄[파라쿱토]의 뜻이다)으로는 안을 살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무덤 안을 들어가 보지 않고 밖에서 흘낏 봄으로는 제대로 된 인식이 일어날 수 없었다. 세 번째는 울음이 눈앞을 가려 앞에 있는 존재를 알아볼 수 없었다. 상실에 대한 눈물이 보는 것을 막았던 것이다. 네 번째로는 뒤로 돌아섬으로도 그분의 현존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무덤 앞으로 달려감과 뒤로 돌아섬으로도 그분의 현존/나타나심에 대해 알아보지 못한 상태가 지속되었다. 육의 인식과 다른 그 어떤 것이 일어나야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죽음의 끝이 자기 생으로 들어오고, 가슴이 파열되어, 죽음의 종국성에 가로막힌 상태에서 우리의 눈은 그분이 계신 곳과 그분을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이 요한의 증거이다. 눈으로 만지거나 느끼기 어려운 상태에 대한 모호한증언이지만 우리가 이해하는 것은 그 무덤, 눈물 그리고 또 하나의 응답이 신비스럽게도 그 무언가를 일으켰다는 사실이다.

   죽음이 최종적인 권위와 힘을 행사하는 생의 한가운데서 아직 희망의 전조를 볼 수 없는 상태에서 승리하는 신앙이 아니라 지친 모습으로 남아있는 지옥의 신앙생존자들에게는 아직 무엇이 남아있을 수 있겠는가? 성 금요일의 목마르다고 하신 분이 더욱 목마르게 한 신포도주와 해면물을 마시고 동시에 찌른 상처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온 금요일의 체험이 우리 앞에 전개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는 극심한 혼란, 두려움 그리고 힘이 빠져버려 소진된 열정과 어둠속을 길없이 생을 맞이한다.

   이제 무엇이 우리에게 남아있는 것인가? 엘리옷이 말한 것처럼 따스한 봄기운(예수의 생애와 그의 영향)이 아직도 잔인한 겨울잔해의 기운에 파묻힘으로 다시 뒤덮혀질 때,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 수 있는가? 세상의 잔인함 -아오슈비츠, 재앙, 암과 같은 불치의 병, 그리고 더 이상 나갈 수 없는 출구없는 삶의 상태라는 <전적인 끝>의 상태에서 무엇이 남게 되는가?

   성금요일과 성토요일의 이야기는 단지 이틀이라는 순간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맞이하는 <전적인 끝>이라는 인생의 순간·의 이야기이다. 성금요일과 성토요일의 이야기는 죽음후의 부활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살아있는 세상보다 더 힘든 쉬올과 하데스라는 지옥을 맛보고 몸으로 통과하여(through) 우리는 무엇이 남는다고 얘기할 것인가를 묻고 있다. 여전히 죽음이 그 권세를 휘두르는 상황에서 그 지옥을 맛보고 통과하여 무엇을 최종으로 목격하고 무엇에 대한 증언이 (“이것은 자기 눈으로 직접 본 사람의 증언이다”19:35) 내게 남는가에 대한 고백을 요청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금요일에 십자가 밑”(1(:25)에 있어 봐야 하고, 성토요일에는 아직 어두울 때...무덤에 가”(20:1) 보는 경험이 필요하다. 이 세상의 비참함만 아니라 죽음의 권세라는 지옥까지 내려간 예수와 나의 어둠의 경험으로부터 비로소 무제약적인 그 무엇이 여전히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성토요일까지는 비밀로 그리고 기대하지 못한 상태로 남아있게 된다. 침묵과 부재 속에서 어떻게 남아 견딜 것인지가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거룩한 독서 방식에 의한 개인 성찰

 

1.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그대 자신에게 침묵을 허락한다. 텍스트를 천천히 읽는다. 읽으면서 각 부분을 맛보고 말씀이 자신 속으로 들어오게 한다. 영혼을 움직이는 들려지는 말씀에 자신을 열어 놓는다. 무슨 말씀이 들여지는가?

 

2. 191:-16절의 성금요일의 장면들은 상상하며 몰입하여 거기에 있으라. 주변환경, 사람들의 목소리와 감정들, 전체분위기속에 자신이 있다고 상상한다. 무엇이 발견되어지는가? 그 무리들 속에 자신은 어디에 무엇을 하고 있는가

 

3. 201:1-14절을 상상의 눈으로 따라간다. 당신과 막달라 마리아와 일치시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주변과 내면을 살핀다. 어떤 감정, 생각, 대응이 일어나고 있는가?

 

4. 삶의 십자가(비난과 모욕)의 밑에서 그리고 무덤(의미의 해체, 전적인 끝의 경험)앞에서 그대에게는 무엇이 남아 있었는가? 무엇이 그대를 그리고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였는가? (정직하게 자신의 영혼에서 일어나는 것을 관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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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용박사 | ecopeace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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