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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작업에 있어서 납치(kidnapping)됨의 비극<

 

 

요즈음은 점점 더 워크숍 일정들이 자동적으로 입력되면서 학교폭력관련 사건을 다루는 기회가 그만큼 드물어지고 있다. 당사자들과 학교일정에 맞는 시간을 내기가 어려워지면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묘한 학교폭력사건에 대해 아는 교사들의 지원 요청들이 있어서 동료들에게 맡기지 못하고 꼭 갈 필요가 있는 사건이 있게 된다. 요즈음에 그런 종류의 사건은 바로 중·고학생들 간의 성폭력과 관련된 미묘한 사안이다

  

내가 미묘한 사안이라 함은 적절한 단어가 생각이 안 나서 쓰는 말로 그 사건을 다루는 것 자체가 껄끄럽고 조심스러우며 그 실패의 파장이 복잡하고 자칫하면 크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이름하여 득보다 실이 많고, 당사자 문제를 넘어 주변의 다양한 시야와 논쟁적인 가치판단이 많은 모호한 지점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장애우의 인권과 성폭력에 대한 사회의 민감성이 강화되는 추세여서 피해자의 권리에 대한 강력한 요청이 존재하지만, 이것이 성인들의 세계와는 달리 학생들 사이에는 도덕적 판단의 불명료함과 이른바 디스(욕설과 비하)문화 속에서 특정사건이 불거지면서 그렇게 간단히 가해자처벌과 피해자보호라는 공식으로 끝나지 않는 모호한 공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비유로 하자면 나는 이런 사례 다루는 것이 마치 암치료와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수술이나 약물투여 대신에 할 수 있는 대안적인 치료방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다루는 책임성과 시간의 긴박성 문제로 보험사, 의료기회사, 그리고 의사의 전문직간의 공모가 이루어진다. 이로 인해 위험성과 책임성의 이름으로 전문직의 개입이라는 문화와 시스템으로 인해 고비용저효율의 방식을 선호하면서 대안적인 치료방식이 비전문성과 무책임성이라는 이름으로 배제되는 것과 비슷하다.


, 성폭력(내가 다루었던 학교내 청소년의 대다수 성폭력 사건은 성에 대한 지속적인 장난, 노골적인 희롱과 괴롭힘을 말한다) 사건을 다룰 때, 공적 기관의 개입을 통한 당사자 분리, 가해자 처벌과 보상, 피해자의 전문기관의 치유상담이 일반적인 코스가 되면서, 당사자들은 대상화되고 두려운 일로 여겨지며 그 일이 일어난 학습 커뮤니티 구성원들은 아무런 기여도 할 수 없는 무력감과 쉬쉬하는 침묵의 문화를 조장하게 되는 것이다. 두려움의 문화를 조성하고 그것을 해결할 전문가라는 특수계급을 형성하여 다룬다는 것이 고비용, 절차라는 긴 시간, 당사자들의 자기문제에 대한 무력화를 낳고, 이는 결국 계속적으로 전문집단의 필요성을 강화하며 그들이 속한 공동체의 자기 돌봄의 능력과 서비스지원을 약화시킨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현상이다.


내가 아는 다른 예로써, 작년에 야심적인 작품으로 출발한 경기도교육청의 갈등조정단의 활동은 그다지 실효없는 것으로 참여한 동료단체의 대표자로부터 들었다. 이는 원래 현장교사들의 숙원사업으로 교사들의 고통을 줄이고자 학교폭력을 학교단위에서 교육청으로 올려서 거기서 전문위원들-주로 변호사들-로 구성된 갈등조정모임에서 다루어 이른바 개별 학교의 고통을 덜어주자는 취지였다. 당연히 시작부터 예측된 것이지만 일반 사건의뢰에 대한 변호사비에 비하면 너무나 작은 사례비에, 생각보다 많은 감정노동 그리고 조정방식이 결국 고통비용처리에 초점을 둔 문제해결 방식에 초점이 있기 때문에 당사자들의 관계의 회복이나 긍정적인 미래 건설에 실패를 본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실상은 학교교사들이 갈등당사자들에 대한 암묵적 지식과 관계의 자원을 갖고 있는 데 교육청에서의 공식적인 모임은 그러한 사회자본’(신뢰와 협력의 관계)을 사용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학교현장은 골치 아픈 사건을 넘길 수는 있으나 당사자들에게는 분리와 고통의 역동적 관계라는 문화와 구조에 있어서 근본적인 해결되지 않아서 학습공동체의 관심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더구나 실상 미래 제4의 인공지능물결에 가장 중요한 집단적 문제해결능력을 가르침의 내용에서 배제하여 암기지식에 머무는 상황을 초래하고 있기도 하다.


각설하고, 내가 이번에 중학교 학생들 간에 들어간 성폭력 사건은 청소년들의 만연된 디스문화 속에서 남자애들의 일상화된 성희롱으로 인한 수치심으로 인한 폭력과 대상이 된 여학생과 여교사에 대한 학교의 우려에 의한 요청 사건이다. 사적이야기보호의 원칙을 염두에 두고 내용을 특정할 수는 없지만 여러 학부모들의 이에 대한 심리적 부담, 불안, 그리고 염려들이 복잡하게 있었던 사건이다. 그래서 학생, 학부모, 교사(담임, 학교대표교사)과의 사전, , 사후모임이 전체 17시간이 걸린, 나로서는 개별 사건들 중에서 가장 오래 시간이 걸린 사건이다.


이미 학부모와 교사 내에서 단순히 갈등해결로 인식된 회복적 서클이 만성적인 성희롱과 어쩌면 당사자 남학생의 중독증(?)의 의심도 있는 상황에서 이런 대화모임이 적절한지 아닌지에 대한 내부논의도 있었지만, 학교에서 이미 여러 명이 회복적 서클 훈련도 받았기에 일단 신뢰할 수 있는 진행자가 가는 조건이어서 나에게 의뢰가 들어왔다. 회복적 서클이 단순히 갈등해결 모델이 아니라 공동체의 자기돌봄 프로세스라는 이해를 갖고 공동체 안에서 일어난 손상에 대해 스스로 돌보는 시스템구축의 필요성을 제안하여, 공동진행자로서 교사가 한명 들어오고 그리고 학교를 대표하는 교사 한 사람이 더 들어와 학생과 학부모로 나누어 사전, , 사후서클을 진행하였다(, 학부모와 관련한 사후서클은 학교에서 나중에 보고형태로 진행하기로 하다)


내가 여기서 집중적으로 관심을 가진 영역은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각각의 당사자들 내면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조심스럽게 서로 확인하여, 어떻게 그 개인의 수치심과 사회적 비난과 이로 인한 내면의 상처들에 대한 감정을 드러내어 서로 받은 영향을 충분히 인지하고, 어떤 책임이행과 앞으로 서로를 어떻게 돌볼 수 있는지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학교교사들이 문제아로 찍힌 아이들의 딱지를 어떻게 거둬내고 정상적인 성장의 과정 속으로 들어올지 그리고 이로 인해 피해를 받은 당사자에 대해 어떻게 지속적인 지원이나 부정적인 심리적 상황에 대한 대안의 모색에 대해 학교는 향후 이에 대해 계속적인 관심을 갖는 시스템을 갖도록 책임이행에 포함할 것인지에 대한 것들이었다.


다행히도 쉽지는 않았지만 -부모만 아니라 학생들도 이 주제 자체를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일 개월 동안의 이행약속에 대한 실천기간과 사후서클을 통한 재약속과 상호신뢰의 안전장치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물론 당분간 아무 일없이 지내지는 못하지만 이번의 사건으로 인해 조심해야 할 자기 교훈을 얻고 상대방의 고통에 대한 인식과 나름의 지원을 약속을 하면서, 상호 분리와 고통을 추가하지 않으면서 다르게 서로를 대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게 되었다. 학교는 예방의 중요성, 개입에 있어서 대안적 절차의 이해, 그리고 향후 당사자들과의 지속적인 확인을 위한 시스템 구축의 필요성을 교훈으로 얻었다. 자칫하면 산불로 번질 수 있는 사건을 학생, 교사, 학부모들이 관여하여 자신들에게 일어난 중요한 일을 비난에서 성찰과정으로 가져갔고, 개인들 간의 사건에서 문화와 시스템을 새롭게 구축하는 민감성을 배웠다. 진행자인 나로서는 일을 해결하는 데 중점을 두기 보다는 계속적인 연결과 말해지지 않은 고통과 염려를 듣는 일에 집중하면서 당위의 압력보다는 당사자들의 미묘한 고통에 대한 진정한 듣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갈등과 폭력이라는 문제 상황에 접했을 때, 우리는 삶의 복잡함과 여러 가능성이 갑자기 하나로 정리되면서 갈등무대의 연기자들로 서 있게 된다. 수많은 다양한 잠재적 가능성을 지닌 당사자들의 정체성이 그 무대 위에서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역할로 고정되면서 제 3자는 심판관 아니면 구조자로 자신의 역할이 순식간에 변하게 된다. 그래서 누군가 피해자로서 자신의 고통을 호소할 때, 책임 있는 구조자 혹은 심판관으로서 공평함을 가져오는 정의의 실현에 저절로 관심을 갖게 된다. 그러나 내가 몇 년 동안 학교폭력 사안들을 다루었던 진행자로써 깨달은 점은 그 구조자 혹은 심판관의 역할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고, 숙고해야 할 점들이 많다는 것이다.


설명하자면 이렇다. 보이는 전면에 나온 갈등무대의 역할자들 뒤에 보이지 않는 후면의 더 큰 사건의 덩어리들이 있어서 함께 봐야 이해되는 것들이 있다. 표면적인 가해자, 피해자의 딱지 부치기는 후면의 더 큰 사건의 덩어리들을 보면 그리 간단치 않다. 뜻밖에 가해자로 지명당한 사람도 만나 이야기 해보면 자신도 피해자라고 말하는 -그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어느 정도 정당한 이유로 인해- 경우가 드물지 않기 때문도 있다. 그런데 내가 구조자나 심판관의 위치에 대한 조심스러운 입장은 단순히 문제의 모호함과 복잡함의 성격 자체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구조자/심판관의 역할로 다가갈 때 더 큰 진실의 왜곡이 벌어진다는 사실이다.


비유로 말하자면, 한 피해자가 차를 운전하면서 도로 옆에 있는 나에 다가와 정차하며 문을 열고 소리친다. “빨리 타세요. 저 앞의 저놈이 내 물건을 훔치고 도망치고 있어요.” 내가 구조자나 심판관으로 있고, 한 피해자나 희생자가 나에게 도움의 손짓을 할 때 나는 저도 모르게 그 사람의 옆에 동승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의 고통이 책임 있는양육자/심판관/구조자로서의 나의 역할을 요청하고 있어서 그의 고통을 지원해야 한다는 당위(must/ought)가 나의 의식을 사로잡기 때문이다.


그래서 운전사 옆자리에 앉아 나는 그의 말을 듣고 묻는다. 무슨 일이고 누구를 추적하며 어떤 나쁜 일/ 잘못된 일을 너에게 저질렀는지 확인하고 그 내용을 귀담아 듣는다. 이렇게 하여 두 가지가 일어난다. 하나는 운전자는 자신의 입장과 관점이 옆의 동승자의 들어줌으로 인해 자기 신념이 명료화되며 강화되고(저놈은 나쁘고 빨리 잡아야 하며 이 추적방법이 정당하다), 또 하나는 옆의 동승자는 운전자의 말로 인해 같은 방향을 가면서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납치(kidnapping)'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운전자가 말한 그 나쁜 사람에 대한 의식과 잡으러 가는 방향에 동승하여 나도 따라가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운전자의 고통에 대한 염려와 지지라는 선한 의도로 탑승했지만, 자기도 모르게 저기 앞에 달려가는 사람이 나쁜 사람이라는 딱지와 추적해서 붙잡기라는 방법이라는 행동 유형은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멀리 도망가기 때문에 추적하고 있다고 생각은 하지만, 실상 또한 내가(우리가) 추적하기에 상대방도 멀리 도망가고 있다는 생각은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선한 의도는 이해하지만 원하는 결과가 불만족스러운 경우가 생긴다. 예를 들어, 상대방을 못잡고 놓침으로 피해의식과 보복심리를 강화, 상대방을 붙잡아 과거의 피해로 그 사람의 미래를 박탈하기, 또는 상대방 면전에 섰으나 물건만 돌려받고 내 고통에 대한 이해는 받지 못했으며 이제는 주변 사람들에 대한 괜한 의심과 두려움이 생김 등의 원치 않는 결과들이 생긴다. 이는 선한 의도는 좋았지만 원하는 결과가 불만족스러울 때 내가 선택한 행동유형이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 못한다. 선한 의도에 내 의식이 집중되어 선택한 행동유형이 미치는 결과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내 <추적하기>의 노력이 상대방의 <도망가기>를 강화한다는 것은 더더욱 생각하기 힘들다. 그래서 내가 옳고 그름을 따지고, 정당성을 밝히기를 추적할 때 상대방은 내 관심과 노력과 고통에 뒷걸음치기라는 자기 보호의 장벽을 자연스럽게 높인다. 그러면 그동안 추적해온 노력에 대한 보상으로 분노, 위협 그리고 고통주기가 당연한 선택으로 강화되며, 이로 인해 상대방은 자신의 방어에 대한 정당성을 취득한다.


이것은 갈등당사자들의 문제만은 아니다. 오히려 책임있는 양육자/부모/교사가 제 3자로써 심판관이나 구조자의 역할로 들어갈 때 그 제 3자도 그 개입으로 갈등 당사자들의 문제가 자기 문제가 되어버린다. , 3자로서 그는 추적자와 도망자, 피해자와 가해자의 역할극에서 옳고 그름, 정당성, 지위, 영향을 주어 변화주기라는 수단들을 통해 힘(force)의 지지자가 되어 힘을 행사하게 된다. 그런 힘의 행사를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행하는 역할을 맡게 되면 누가그리고 얼마만큼문제인지 민감성을 몸에 체득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힘/권력에 의존하는 희생자의 덫에 빠져 나올 수 없게 된다. 남의 문제가 이제는 나의 문제가 된 셈이다. , 연결의 에너지보다 정당성의 에너지로 상황과 관계를 보는 주시자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이제 그러한 주시자가 양육자/부모/교사/지도자로 있는 한, 갈등무대의 다른 두 역할자들은 그 주시자의 권력의 눈에 걸리지 않는 교묘한 정치적 수단을 고안한다. 가해자는 거짓말하기, 분노의 표출을 통해 함부로 다가오지 못하게 하기, 힘에 거짓 순응하여 손해를 적게 보기, 주시자가 없을 때 피해자에게 엄포 놓아서 함부로 입 놀리지 못하도록 위협주기 등을 고안한다. 그리고 반면에 피해자는 심판관 앞에서 자기 고통에 대한 보복과 보상을 강화하기, 모호한 상황을 가해자의 잘못으로 정당화하는 논리와 명료함을 개발하기, 부정적 체험에 에너지와 의식을 지속시켜 주시자의 관심을 계속 얻기, 주시하는 권력이 없을 때 힘센 자에게 뇌물주거나 복종하여 보호를 받기, 가해자 본인에게 전가할 수 없다면 다른 약자에게라도 상처를 전가하기 등등이다. 그렇게 되면 주시하는 권력은 자신의 필요성과 존재 이유를 더욱 강화하면서 자신의 직무를 더욱 충실히 수행하려는 의욕을 갖는다. 이것이 패턴과 문화로 만들어지면 우리는 거기서 나올 방법을 거의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정상적이고 당연한 것이며 우리가 세상을 보는 실재의 실상으로 비치기 때문에, 내 안에 만들어 놓은 패턴이 투사되어 세상이라는 스크린에 보여지는 실재로 둔갑한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이 허상을 깨기 어려운 이유는 일단 갈등무대가 세팅되어지면 가해자-피해자-구조자의 구조의 필요를 강화하는 두려움의 효능성과 긴박성이 모두를 초조하게 만들어 <추적자>, <도망자>, <구조자>의 역할에 충실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관객들 모두가 그 갈등무대에 진지하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몰입하고 있어서 판을 뒤엎기가 또한 어렵다. 이렇게 우리는 갈등 드라마의 각본에 납치되어 무대 위에서는 가해자-피해자-구조자의 역할의 당위성과 그 아래에서는 관객의 역할을 충실하게 그리고 의심 없이 자연스럽게 해낸다. 모두가 갈등 각본에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할 수가 없다. 채널이 고정되면 더 이상 다른 채널의 가능성에 대한 호기심을 잃는다. 그리고 누군가 중간에 다른 채널을 바꾸면 화까지 내게 된다.


두려움이 이 갈등무대와 관객장소의 공간에 흐르는 중심 에너지와 내적 동기가 되고, 그 갈등무대위에서 추적과 도망, 맞서기와 펀치 날리기, 피하기와 보호하기 게임이 흥미를 일으키면서부터 점차 힘(forces)의 효능성을 무의식적으로 배우게 된다. 이로 인해 우리 모두가 짜릿한 흥분과 몰두하는 관심을 갖게 되는 순간, 이제는 누군가 맞아 무대 위에 쓰러져도 정당화되고, 모두의 관심은 승리자에게 있다. 그리고 놀랍게도 다음의 매치가 언제 열릴지 기대하게 된다. 그리고 심판관은 존재의 이유를 얻는다. 그리고 그 존재의 이유로 인해 갈등무대의 필요성과 그 갈등무대에 대한 존속의 이유도 더욱 강화된다. 이제 갈등무대에 억지로 올라왔더라도 혹은 구경 왔더라도 점차 그 공간과 장면을 즐기며 흥분하게 된다. 납치된 자가 즐기는 자로 서서히 변모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환상에서 점차 더욱 빠져나갈 길을 잃으며 그 갈등 드라마에 익숙해지기 시작한다. 결국은 존재는 사라지고 심장없는 역할자가 남는다.


우리가 어떻게 이러한 갈등무대에 납치됨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우리는 손상, 범죄, 갈등, 폭력에 대해 저절로 펼쳐지는 갈등무대를 해체하여 추적, 도망, 항복의 연기 대신에 존중과 돌봄의 댄스 플로어에서 상대를 만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정당성, 당위라는 힘의 압력을 내려놓고 오히려 각 존재의 독특성을 불러내어 그가 존재할 수 있는 용기와 공간을 각자에게 부여할 수 있을까? 어떻게 우리는 공동체원으로서 그러한 각자가 존재의 본 모습으로 있을 수 있는 공간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서로를 돌볼 수 있겠는가? 어떻게 우리는 두려움과 힘이 필요 없는 공간속에서 자기 존재의 나눔이 최상의 행복이 될 수 있게 할 수 있겠는가?

(2019. 3.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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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용박사 | ecopeace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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