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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에 대한 최대의 도전:

적을 통해 하나님의 모습을 어떻게 볼 것인가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여라고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이다. 5:43-44


적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비폭력 대화 워크숍의 상황에서 혹은 단체와 학교폭력관련 갈등에 있어 활동을 하다보면 깊이 다가오는 현실이 있다. 그것은 이라는 단어가 막연히 저 멀리 다른 영역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가까운 현실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부부간에 있어서 사랑하는 사람으로 형식적으로는 보이지만 사실은 상대방의 강제, 무관심, 권위주의적 태도, 혹은 듣기 힘든 언어로 힘들어 하고 상처를 받은 40, 50대의 고백을 듣는 일이 결코 드문 일이 아니다. 부모자식간에 그리고 고부간의 갈등처럼,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고 비난의 화살을 쏟아낸 부모나 시어머니나 친척들과의 소통단절과 비인격적인 태도로 인한 깊은 좌절감과 단절의 경험에 대한 하소연은 봇물을 이룬다.

어떻게 그렇게 오랜 시간을 살아왔는가 싶을 정도로 공감하며 듣고 있노라면 가슴 시리는 경험을 자주 하게 된다. 원수가 저 멀리 있는 게 아니라는 것, 연인, 동료, 친척, 지인이라는 딱지로 살지만 실제로는 가해자, 원수로 대면하는 일이 자주 발생하며 이로 인해 가슴앓이를 너무나 많이 하고 있다는 현실에서 우리는 종종 말할 수 없고, 들어줄 사람도 없고, 드러내면 안전하지도 않아 속으로 쌓아가는 일들이 많다.

2013년 들어와서 학교폭력에 새로운 현상이 급속하게 그리고 그 관여되는 학생숫자와 발생건수에 있어서 심각하게 퍼지는 양상이 새로 생겼다. 그것은 카카오톡과 스마트폰의 문자에서 발생하는 집단적인 언어폭력의 만연에 교사들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모르거나 싫은 아이에 대한 집단적인 왕따만 아니다. 오히려 더 빈도수가 많은 것은 친구였던 사이가 한 두 오해나 상호 이해할 수 없는 사건으로 다툼과 증오 그래서 적으로 등돌리는 일들이 많아지고 있고, 복원력이 빠른 이들의 관계에 카톡이나 문자메일로 본 부모들이 그 내용을 보고 학생 당사자보다 더 분노하여 그것을 증거로 학교폭력위원회나 소송으로 비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이버 상에서 서로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을 끌어들이고, 상호작용하는 속도가 종래 만나서 언어로 전달하는 속도보다 훨씬 빨라지면서 자극되는 말과 행동이 부메랑이 되어 얽히고 섥히면서 가해자와 피해자가 그리고 최초 원인제공자와 이것을 퍼나르고 중간에 개입하는 학생들의 구분과 정체성이 모호해지도록 얽히면서 학생지도나 문제해결에 난감해 하는 담임이나 학생부장들의 하소연을 듣게 된다.

여기서 가정이나 학교의 사례를 꺼내는 이유는 우리가 원수()을 생각할 때 막연히 내가 사는 영토가 아닌 다른 곳, 내 생활공간 밖에서 마주치게 되는 그 누구가 아니라 실상 우리는 가족이나 공동체원이라 생각하는 현실속에서 가까이 대면하는 실재라는 것이다. 그들은 겉으로는 부모, 친척, 친구, 직장동료, 공동체원으로 있지만 실제로는 분리, 상처, 폭력, 손해의 경험으로 인해 실제로는 원수로 지내고 그로 인한 심리적 비용과 아픔은 드러내지는 않지만 매우 크다. 눈에 안보이게 저 멀리 있는 원수보다 집안에서 공동체안에서 만나는 겉으로는 가족, 친구, 동료이지만 속으로는 원수지간인 상황이 오히려 길게 가고, 상대방에게 기대가 있었기에 그 상처는 더 깊고 이로 인한 심리적인 절망과 무력감은 그 일을 계속 생각하게 하여 자신의 영혼까지 해치는 정도가 된다.

다시 말하거니와 원수는 단순히 추상적이거나 어쩌다 대면하는 희소성의 사례가 아니라 늘상 직면하는 실재(리얼리티)이자 우리의 현실이다. 그리고 이로 인한 무거운 정서와 소진하는 시간, 의기소침해지는 활력성의 상실,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과 타인에 대한 낯설음은 의식되지 않은 자동적인 반응의 폭력의 각본이 되어 우리의 의식을 점유하게 된다. 이것은 바로 적으로 비친 한 인간이 아닌 바울이 말한 우리가 대항하여 싸워야 할 원수들은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세력의 악신들과 암흑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의 악령들이라 말할 때 우리가 직면하는 인간을 넘어서는 작동원리로서 원수됨이라는 보편적 실재의 경험이다.

 

새로운 거룩함을 배우기로서 그리스도 제자직

마태 공동체가 유대인들의 세계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분리하여 예수라는 청년을 통해 다른 길을 걷게 된 데에는 거룩함에 대한 자각에 있어서 근본적인 패러다임 전환이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유대갱신운동으로 시작한 예수 운동(Jesus Movement)’은 두 흐름에 대한 저항에서 일어났다. 첫 번째는 제국주의로서 로마의 힘이 주는 무기와 강제적인 권력의 통치라는 힘의 지배에 의한 로마의 평화에 대한 안티 운동으로서 섬김, 작은 자에 대한 돌봄과 연민, 종속과 지배로부터의 해방과 자유의 삶에 대한 보편적 염원이 예수 운동의 한 에너지 축이었다. 이것은 마태공동체가 - 더 넓게는 초대 교회들 - 예수에 대한 응답으로 자신이 살던 삶의 외면적 환경의 폭력성에 대한 심각한 절망에 대한 새로운 선택이었다.

또 다른 하나는 예수 운동이 바로 거룩함 곧 하나님을 어떻게 만나고 어디서 경험하며 그분은 누구신가에 대한 근본 통찰의 변화에서 출발한다. ‘로마의 평화가 외적 현실에 대한 변혁의 동기였다면 이것은 내적 현실, 곧 자신들이 누구이고 무엇을 하는 존재인가에 대한 내적 성찰에서 나오는 것이다. 신정정치를 꿈꾸는 유대교에 있어서 그리고 신화적 세계관으로 사는 고대에 있어서 누구를 예배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예배하는 가는 단순히 안식일에 성소에 들려 해야 하는 종교적 의무의 범주를 넘는 자신의 정체성과 공동체의 존재이유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였다.

이 두 번째 통찰은 찬찬히 이해해야 그 심각성과 철저성이 얼마나 크고 충격적인지 비로소 드러난다. 왜냐하면 현대인으로서 지금의 기독교인들에게는 자신도 모르는 제도권 기독교-캐토릭이든 개신교이든지 간에- 교리적인 선입견과 지적인 승인으로서 그 어떤 도그마속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이 두 번째 통찰이 무엇인가하면 종교적 제의로서 신을 숭배하는 것이 거룩한 길이라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문화풍토속에서 종교적 제의가 아니라 생활실천 곧 돌로 된 정지한 성소나 회당에서 저 멀리 계신 신에 대한 예배가 거룩함의 본질이 아니라는 자각이 그것이다. 오히려 이 땅에 다가오신 신에 대한 자각을 통해 - 하나님 나라의 다가옴 - 이 지상에서 탈지배체제의 평화와 화해에 대한 길이 거룩한 분을 만나는 궁극적인 길이라는 통찰과 신념이 새로운 패러다임이 된 것이다. 본인은 전자의 통찰을 정치적 통찰이라 부르고 이것을 종교적 통찰이라고 부른다. 무엇이 거룩한 것인가,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이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자각에 있어 변화가 예수 운동에 있어 핵심이었다. 이 종교적 통찰로 인해 -하나님의 거룩함의 본성에 대한 새로운 자각- 그분이 원하는 삶의 방식으로서 정치적 통찰이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실현으로 샬롬의 통치- 서로 맞물려 예수 운동에 대한 뒤따름으로서 그리스도 제자직이 형성되었다.

이 통찰은 마태 공동체에서 하나님의 아들(페미니스트들의 말을 수용하면 하나님의 자녀)’의 독특성과 그것을 언제 어떻게 사용하는 지를 눈여겨보면 알 수 있다.

우선 마태 5-7장은 당시 자신들이 속한 유대인들에게 가장 권위있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것에 대한 하나의 동등한 유비로서 십계명을 받는 것과 같은 말씀의 선포를 받는다. 그래서 51절을 보면 시내산에 모세는 혼자 올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지만 이제 마태 공동체는 제자들이 함께 산에 올라가 말씀을 받는다. 이것은 집단적인 체험으로 동일시된다. 서로가 증인이고 서로가 같이 현장에서 눈으로 목격하고 함께 들은 신으로부터의 사신(message)이다.

그 계명으로서 산상수훈은 십계명의 신에 대한 섬김과 이웃에 대한 섬김으로 나누는 십계명과 더욱 철저하게 다르다. 이 산상수훈은 철저히 이 땅에서 삶이 어떻게 신과 연관되어 있는지를 통전적으로 보여준다. 마음의 가난, 슬퍼함, 온유함, 옳은 일에 굶주림, 자비실천, 마음의 깨끗함, 평화를 위해 일함, 의를 위해 박해받기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이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신섬김과 이웃섬김의 분리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이 지상에서 거룩한 길을 걷기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자신의 빛을 사람들에게 비추어 그 착한 행실을 상대방이 인정할 때(5:16)야 비로소 이루어지기에 직접적으로 찬양, 예배, 기도등으로 신의 영광에 가는 길이 아닌 자신의 행실이 남들이 보고 그들이 하나님을 찬양함으로 이루어지는 철저한 간접의 길이다. 이것이 율법의 완성이다(5:20). 그래서 예배보다 우선 형제와 갈등과 반목이 있으면 가서 먼저 화해(5:24)하는 것이 예배보다 더 중요하다. 간음, 이혼, 맹세, 보복 등은 이 지상의 삶에 있어 우리가 겪는 문제이고 이것에 대해 어떻게 대하는 가가 -성소와 회당밖의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신을 섬기는 일과 연관되어 있다. 그 근본 태도는 너의 이익이나 입장을 견고하게 방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를 품기 위해, 상대와 관계를 맺고 돌보기 위해 근본적인 마음을 내어라.

5장을 넘어서 6장의 핵심인 주기도는 이 땅에서 거룩하게 살기의 철저화이고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그래서 서로 잘못한 자들을 우리가 용서하듯이 우리를 용서하시고 악에서 구해주소서- 종교적 외형으로서 단식이 아닌 판단안하기(7:1) 열매를 맺는 행위가 종교적 생활의 진정성을 심판하며(7:15- 거짓 예언자에 대한 분별기준), 반석처럼 말씀을 실행하기(7:24)가 지혜있는 삶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5-7장의 이 지상에서 평화와 화해의 핵심이 군중들이 놀라워 한 이유이고 - 이 말씀을 마치시자 군중은 그의 가르치심을 듣고 놀랐다 (7:28)- 율법학자와 다른 권위의 본질 (7:29)의 핵심이었다. 그러한 가르침이 산에서 있고나서야 이제는 사람들이 그 말씀에 결단하며 뒤따름이 있게 된다: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 오시자 많은 군중이 뒤따랐다”(8:1). 이것이 예수 운동의 본질이자 앞으로 다가올 그리스도 제자직의 미래에 대한 전망에 대한 예시적 사건이 된다.

이렇게 이 지상적 삶에 대한 거룩의 길은 이렇게 건물성전(솔로몬 성전, 헤롯성전처럼 돌로 지워진 정해진 공간의 성전), 몸성전(신앙의 대상화로서 예수를 기리는 예배로서의 성전)을 넘어 생활성전(예수의 말과 행위에 대한 이 지상적 삶에서의 실천으로서 신을 만나기)에로 철저화를 요구하고, 특히 평화와 화해의 실천을 - 이 지상에서 거룩한 분을 만나는 길 - 하는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부여하는 명칭을 그들에게 똑같이 부여하며 그것이 그리스도의 본질에 가까이 가는 삶임을 역설한다.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 그들이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5:9).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이다(5:44-45).

 

이런 선포는 단순한 것이 아니다. 당시에는 목숨을 걸고 위험을 자초하는지에 대한 생명을 건 마태 공동체의 선포이자 왜 자신들이 기존의 유대교와 다른 길을 걸을 수 밖에 없는지에 대한 명확한 자기이해의 핵심이다. ‘하느님의 아들을 아무데나 쓸 수 없는 당시 유대사회속에 살면서 과감하게 누가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지를 새롭게 공포함으로써 이들은 루비콘 강을 건너는 역사적 발걸음을 시도했던 것이다(여기서 시도란 이후 제국종교로 바뀌면서 지금까지 기독교가 이것을 망각해왔기 때문에 실현되지 않는 꿈을 꾼 그들이 있었다는 점에서 시도이다).

이것이 마틴 루터가 95개조 종교개혁을 하면서도 교리주의, 형식주의에 대한 '아님(No)'에 대한 자각이 무엇을 향한 (yes)’인지 빠뜨린 불철저한 개혁이 된 이유의 근거가 되고 오늘날 개신교가 어떻게 아직도 성직주의, 종교적 제의에 대한 맹신에 갇혀있는지에 있어서 예수운동에 멀리있는지를 보여준다. 현재의 개신교는 프로테스탄트라는 말 그대로 저항은 있지만 그 저항이 가톨릭의 형식주의에 대한 안티운동이지 평화와 화해로의 에 대한 근본적인 방향정위는 놓쳐버린 셈이 되었다.

그래서 많은 개신교 주석가들은 이 문구를 해석하기를 다음과 같은 성향으로 받아들이도록 한다. 첫째 해석방향은 예수의 이런 주문의 철저성과 우리가 그렇게 하지 못함의 죄성을 노출시키는 방식으로 교훈적인 성찰을 이끌어 내는 흐름이다. 예수께서 이런 주문을 하셨는 데 우리는 그렇지 못하니 우리가 얼마나 원죄에 물들어 있는지 원죄의 교리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해석하며 우리를 꾸짓고 그리스도의 신성을 높인다(대다수 보수적인 개신교전통의 해석방법으로 이것은 경직된 교리주의에 입각한 명백한 오해이다).

둘째 해석은 라인홀드 니버 등에 의한 개신교 현실주의 윤리학자들의 입장으로서 성직자와 평신도의 역할을 구분하는 것이다. , 예수의 이러한 철저한 윤리적 요구는 신을 섬기며 살아가는 성직자에게는 해당되지만 악한 현실을 살아가는 일반 평신도는 따를 수 없는 계명이기에 지킬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한계를 설정한다. 그렇게 해서 성직자에게는 고도의 윤리적 도덕성을 그리고 일반 평신도에게는 윤리적 타협을 제시함으로써 안심하게 만든다(이것은 개신교중도좌파의 입장으로서 많은 개신교도들을 자본주의를 변혁시키는 누룩//소금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돈과 로마의 평화와 같은 지배문화에 안심하게 살도록 마취약을 준 꼴이 결과적으로 되어버렸다).

셋째, 이 본문이 그리스도 제자직의 핵심으로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이 지상에서 타협하지 않고 사는 소수의 핵심 그룹이 역사에 있어서 간헐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프란체스코전통, 재속 수도회, 그리고 역사적 평화전통-형제교회, 메노나이트교회, 퀘이커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이 예수의 선포를 진지하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삶에서 실험하며 그것을 진리의 등불로서 자신의 삶을 비추고 성찰하며 이로 인한 희생에 대해 달게 받는 삶을 공동체에 확립한다.

 

원수를 대하는 방식과 그 의미의 3 가지 측면들

지금까지 필자는 원수란 추상적인 멀리 떨어져 있는 대상이 아니라 우리 삶에 실제로 만나는 일상의 현실이며 - 그 정도와 심각성은 달라도 - 이것은 기독교 아니 최소한 그리스도라 불리는 예수가 제자들에게 -산에 올라 가 앉으시자 제자들이 곁으로 다가왔다. 예수께서는 비로소 입을 열어 가르치셨다 (5:1)- 전한 제자직의 핵심임을 역설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이 기독교인들에게 조차도 너무나 비현실적인 것처럼 들린다. 그리고 특히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에게는 전적으로 악은 징벌하고 처벌하고 절단하며 배제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기에 이 예수의 요청은 전혀 먹히지가 않는다. 그 이유는 효과나 실효성에 있어서 의문이 가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적인데 그렇게 되면 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아닌가? 독종이자 다른 종류의 인간인 '원수에게 그렇게 사랑으로 대하면 상대방이 바꾸어지지 않을 텐데? 혹은 신앙은 비이성적이어서 내가 이해는 못하지만 원수를 사랑하라 했으니 그저 신앙으로 따라야 할 텐데 실제로 가능하지 않아 걱정이라는 하소연을 듣게 된다.

필자의 논점은 이것이다: 정말 원수를 사랑으로 대하는 것은 비이성적인 차원의 영역인 것이고 성자들이 가져야 하는 품덕으로서 일반인이 뒤따르기엔 어려운 과제인가? 정말 실천적 효험성은 떨어지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세가지 측면에서 어떻게 원수를 대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결과가 무엇인지 성찰해보기로 하자.

 

첫째, 원수를 보복하기

이 대응방식은 원수가 나에게 행한 상처와 고통 그리고 손실에 대한 보상의 최선은 상대방에게 내 고통과 손실 그리고 상처를 알려주는 것이고 확신한다. “너는 내가 지금 어떤 형편에 있는지 알지 못하지? 내가 억울하게 이렇게 당했는 데 너는 그것에 대해 아무런 느낌이 없지? 나는 울고 있는 데 너는 발 뻗고 잠을 잘 자고 있지?” “그러니까 너는 네가 내게 무슨 영향을 주었는 지 전혀 교훈을 받지 못하고 있고, 내 억울함과 힘듦이 너에게 전해져서 네게 뭔가 변화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너는 그냥 말이나 부드러운 행동으로는 전혀 알 수 없을 거야. 그것을 알려주기 위해서는 내가 당한 차원의 일부를 네가 맛보아야만 정신 차리게 될거야. 그러니 너도 당해봐야 내 심정을 알겠지.”

상대는 원수이고 얼마나 잘못된 인간인지 잘 알고 있어서 그것을 고치려면 그리고 내가 어떤 상황인지 알려주려면 상대방이 나에게 한 같은 종류의 그 무언가를 최소한 돌려주거나 더 자연스럽게는 더 강하게 전달해야 상대방은 잘못됨을 알아차리고, 인정하고, 더 나아가 자신의 행위를 더 이상 미래에는 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여기에는 확고하다. 지금 내가 견디기 어려운 상황을 상대방이 다시 하지 않기 위해서는 고통을 부과하는 방식으로 상대방에게 대응해야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일차원적 대응방식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상대방이 나에게 행했다고 해석한 방식 그대로 혹은 그중의 일부로 되돌려 주는 같은 종류의 상호응답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 방식은 내 응답이 비록 숭고할지라도 -네가 변화되어야 해 이것이 너를 위한 길이기 때문에 너에게 똑같이 해주는 것이야- 그 결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힘에 의해 눌려지면 다시 기회를 보아 폭발하고 공격하면 상대방이 더욱 잘못 했음에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다시 반격해 들어온다. 아니면 굴종하여 겉으로는 바뀐 것같이 행동하지만 실상 마음에서는 또다른 분노와 판단을 야기한다. 나에게 일시적으로 친절하지만 마음은 승복하지 않는 것이다. 그 이유는 보복하기는 결국 두려움, 수치심을 유발시켜서 자신이 9를 잘하고 상대방은 1을 잘했더라도 그 1의 정당성을 근거로 다시 도전해 오기 때문에 악순환을 단절할 수 없게 된다. 그러면 결국 논쟁과 다툼이 지속되고 그 결과는 상처뿐인 영광, 주변에 박수치는 사람없는 승리를 얻게 되고, 그 영광과 승리이후 씁쓰레함과 자기 자신에 대한 회의감도 일어나게 마련이다. “뭘 얻으려고 내가 이렇게 한 것이지?” “이런 결과를 얻으려고 한 것은 아니었는데~~.”

이 대응의 문제는 내가 옳고 상대방이 잘못임이 명확한 진실이라 할지라도 나의 타당성 혹은 정당성이 서로간에 주는 분리, 상처, 손상의 비용이 아무리 무겁고 크더라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분별감 상실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너하고는 앞으로는 말도 하지 않겠어라는 회피로 인한 불편함이 수개월이 지속되어 그 불편함의 비용이 크고 자신에게도 큰 부정적인 영향과 결과를 미침에도 불구하고 그런 비용에 대해 참아내도록 나의 정당성이 역할을 한다. “그래도 네가 사과하기 전까지는 나는 태도를 안 돌릴 거야. 네가 잘못한 거잖아. 내가 왜 태도를 바꿔야 하는 데?” 이로 인한 무거운 대가의 비용이 얼마나 큰지 알더라도 나의 옳음의 타당성은 그 비용의 질문을 묻고 견디게 만든다. 이 얼마나 무섭고 우둔한 방식인가? 그래서 새롭게 주어지는 삶의 생동감과 자유를 맛보는 다른 방식에 대해 눈을 감아버린다.

여기에서 대응방식의 초점은 타인에 대한 강제의 힘이 효과가 있다고 믿는 것이고, 상대방의 잘못을 교정하기 위해 그 힘을 사용하는 것이 정당하고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는 구속, 처벌, 고통부과, 분노, 안보기, 상대방의 논리나 진영을 훼손하기 혹은 무너뜨리기 등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나도 어느새 모르게 내가 싫어하던 적을 닮아가기를 실습하게 된다. 상대방이 나에게 행한 싫은 것을 나도 이젠 자연스럽게 그리고 정당하게 상대방에게 하게 된다.

조지 오웰의 <1984>에서 나오는 대화의 한 장면이 이 태도를 잘 표현한다.

어떤 방식으로 한 사람이 또 다른 사람에게 힘을 사용하는가?“
윈스턴은 생각했다. “그를 고통스럽게 하는 방식으로.” 맞다. 그를 고통스럽게 하는 방식이다. 복종을 충분하지 않다.
그가 고통 받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그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너의 뜻에 복종하고 있는 지를 확신할 수 있겠는가? 힘은 고통과 굴욕감을 주는 것이다.

 

둘째 원수와 협상하기

이것은 보통 갈등해결의 방식으로 나타난다. 나와 다른 적에 대해 불만과 불편함이 존재하지만 보복하기가 주는 분리, 고통, 손상의 악순환 사이클을 알기에 그리고 내가 현재와 미래의 삶이 힘들기 때문에 상대방과 타협하여 지내는 것이다. 이것은 나의 고통과 상대방의 고통을 교환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나의 고통에 대한 자각이 자신의 정당성안에 머물러 있지 않고 이것을 통해 상대방으로 나아가 상대방에 대한 접근성과 신뢰를 발전시키는 대화의 의지를 갖는다. 나의 고통에 대해 말하면서도 상대방의 견해를 들으려는 개방성에 대한 헌신을 보여준다. 그래서 적어도 고통으로 인해 서로가 갖는 무거운 비용들을 더 증가하는 어리석음에 대해 중지하고 서로 무슨 이익을 얻을 수 있는지 물음으로써 맞교환하거나 타협하는 길을 택한다. 이것은 나를 넘어 상대를 보기 때문에 이차원적 대응방식이라 볼 수 있다. 즉 나의 입장에 있지만 너의 요구를 들을 귀를 여는 것이다.

이것은 안전의 문제를 자기 방어와 폐쇄에 놓고 이를 침입하는 상대에 대해 공격성으로 반응하는 맞붙기나 보복하기보다는 상대방에 대한 인식이 있다는 점에서 이차원성을 갖는 성숙한 방식이다. 여기에는 상대방에 대한 개방과 공유점에 대한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 나의 고통을 통해 너의 고통의 처지를 이해할 수 있다. 혹은 적어도 둘 다 더 이상 나아가면 지금의 것조처 더 잃게 된다는 추가 손실의 중대성에 대한 이해나 서로가 표현은 달라도 원하는 것에 있어서 공통적인 측면에 대한 통찰이 있게 될 때, 타협 혹은 교환의 관계가 발생하게 된다.

나의 입장에 서 있지만 너의 요구를 들어볼 귀는 열어 두고 이를 통해 의견을 교환하고 그 경중을 따져보며 서로간에 나눔의 이익을 경험하는 것은 서로의 분리감, 상처, 손상을 어느 정도 치유하고 덜 강제적인 형태로서 민주적이며 상호 복지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상당히 고무적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무엇이 한계인가?

타협이나 교환은 있지만 그것은 상대방에 대한 적 이미지가 바뀌어진 것은 아니다. 단지 현실적인 추가 손실의 중대함에 대한 이해를 통해 더 손상을 주지 않거나 만족하지는 않아도 약간의 추가적인 이득이나 자기 입장의 확보가 가능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선택인 셈이다. 최소한의 범위에서는 내가 상대방을 그렇게 대할 때 나에게 돌아오는 몫이 작거나 고통이 돌아온다는 교훈을 통해 최소한의 피해를 위해 참아내야 할 인내나 관용이 일어난다. 아니면 더 긍정적이게는 나의 고통의 이해가 상대방의 고통에 대한 이해로 발전되면서 쌍방이 동의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승승의 문제해결로서 타협이나 현상유지로서 교환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에도 한계는 상대방에 대한 이미지가 그리 바뀌어 지지는 않고 참아내고 일부의 이득을 얻는 데 머물러 있어서 상대방은 경계의 대상으로 존재하게 된다.

 

셋째, 원수를 사랑하기

원수를 사랑하기는 상대방을 패퇴시키기나 참아내고 서로의 원하는 것을 교환하기를 넘어선다. 이것은 간디가 말한 상대방에 대한 진정한 승리는 적을 넘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꽉 붙잡고 궁극적으로는 상대가 선을 행하도록 하게 하는 방식이다.

원수를 사랑함에 있어서 그 능력은 이해와 연민의 힘에서 나온다. 이것은 상대방이 저질러진 행위와 구별된 감추어진 인간성이 보여지면서 그런 능력이 나타나게 된다. 갈 데까지 간 두 당사자들이 조정의 자리에 앉았을 때, 처음에는 전혀 말이 안통하고 거센 분노와 좌절이 오고가는 상태에서 계속적인 연결을 위한 공감을 해 줌으로써 적이미지의 상대방이 쓰고 있던 자기 입장의 가면이 떨어져 나가고 인간성의 얼굴을 제대로 보기 시작함으로써 이해와 연민이 싹트면서 전환이 일어난다. 서로의 진심이 들려지고 가슴이 열려지면서 상대의 궁지와 비참함 그리고 그 행위 뒤의 충족되지 못한 욕구들에 대한 귀가 열리면서 화해의 가능성이 열린다.

이것은 자신의 비통함이 심장을 파열시키지만 그로 인해 추락과 파괴가 아니라 가슴이 열려져서 새로운 전체에 대한 시각을 얻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구겨진 조각이 펼쳐짐으로써 새로운 개방과 삶의 질적인 전환이 있게 된다. 여기에는 나와 너를 넘어 우리라는 감각, 어쩔 수 없이 연결된 공동운명에 대한 감각이 찾아온다. 이것이 삼차원적 대응방식이다. 이것이 가장 깊은 대응방식이고 여기에는 항상 슬프지만 따스한 애도, 달콤한 아픔이 발생한다. 그리고 자기 배움과 성장이 있게 된다. 적은 더 이상 적으로 있지 않고 나에게 새로운 눈을 열어준 선물 주는 자로 작용한다.

한 예를 들어보자. 뉴욕 경찰청 스티븐 맥도널드 경관이 열다섯 살짜리 소년인 쉐보드 존슨이 등과 발에 총을 쏘아서 한 발이 척추를 관통하는 큰 부상을 입고 병원에서 18개월을 보냈다. 이 끔찍한 사고이후 힘든 정신적 내상과 달구 살아야 하는 인공호흡기에도 불구하고 그 소년을 용서했을 때 사람들이 용서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가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수개월이 지나고 수년이 흘렀습니다. 저는 쉐보드를 용서한 것을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돌아보면, 우리의 용서가 다른 누군가의 인생에 이토록 중요한 영향을 주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용서했습니다... 용서를 통해 가장 큰 도움을 받은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용서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교황과 대통령, 주지사와 평범한 사람들이 우리를 그들의 사무실이나 집으로 초청해 우리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합니다.

결국 하느님은 가장 끔찍한 것을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바꾸셨습니다. 저는 하느님이 우리의 능력과 무능함을 동시에 사용하신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팔과 다리,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사용해 다른 사람들에게 하느님이 살아계신 분이며 좋은 분이라는 사실을 전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용서는 진정 우리 자신의 치유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작은 상처를 입을 수도 있고, 때로는 그 상처가 마음 깊이 남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위태로운 우리의 영혼을 살리는 길입니다.”

-잭 캔필드·마크 빅터 한센외 지음, <더 좋은 세상을 위한 행진>에서

원수를 사랑함으로써 우리는 과거의 비극적 고통의 무거움에서 비로소 굿바이를 할 수 있는 동기와 이유를 얻게 됨으로써 비로소 자신을 용서하고 놓아주게 되는 선물을 받는다. 물건은 남에게 주면 남의 것이 되고 나에겐 남아 있지 않은 것이지만 영혼에서 일어나는 것은 남에게 주면 반드시 그만큼 나의 것이 된다. 그래서 영혼 안에서 주는 것은 나에게 그대로 일어나고 선물이 된다. 삶의 비극적 상황에 대한 보편적 자각과 서로가 지닌 인간성과 비극에 대한 연민이 서로를 풍성하게 하여서 어렵고 힘든 것에서 아름답고 강한 것을 뽑아내게 되는 셈이다.

우리가 원수를 사랑함에 의해 자신에게 그리고 또한 상대방에게 무겁게 내리누르는 두려움과 수치심 그리고 도덕적 판단의 굴레로부터 자유로워짐으로써 둘 다 새로운 시간에 대한 감각을 되찾는다. 그것이 오히려 나에게는 더욱 감사한 일로 다가온다. 나의 영혼도 새로워지고 구함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적 이미지를 해체하기 실습

적이미지는 낯선자에게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내게 익숙한 자에게도 나타난다. 그러한 적 이미지는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새로운 미래를 선택하는 데 있어 장애가 되고 그런 적이미지를 갖고 있는 순간 그 사람을 만날 때 이미 그것은 자동항법장치로서 작동하여 그 결과를 어떻게 가져올지를 결정하게 만든다. 내 안에 상대방에 갖은 고정된 딱지로서 적 이미지는 지금 살아 있고 변화의 가능성이 있는 상대방에 대한 고정된 과거의 패턴의 틀을 씌워주게 되고 상대방도 나의 그러한 기대와 반응에 의해 그 방식대로 응답하게 되는 비극의 악순환을 겪도록 한다.

상대방이 새로운 가능성에 접촉하고 자발적인 변화에 응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쌍방안에 있는 진정한 것을 나누고 풍성히 하기 위해 우리는 내 안에 있는 적이미지를 해체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먼저 나의 내면의 살아있는 에너지인 느낌과 욕구에 대한 충분한 공감을 거쳐서 일어난다.

이를 위해 먼저 내가 적이미지를 갖고 있는 상대방을 생각으로 불러낸다. 상대방을 떠올릴 때 일어나는 판단과 비난의 메시지를 관찰하며 주목하는 자로 있는다. 이것은 상대방에 대한 판단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떠오르는 생각과 판단들을 지켜보느 자로서 있으면서 발생하는 판단들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렇게 판단들을 알아차리면서 그 뒤에 있는 내안에 살아있는 에너지의 문인 나의 느낌을 찬찬히 들여다 본다. 내안에서 일어나는 정서적 감정 그리고 그 감정에 따른 몸의 감각의 변화들을 하나씩 확인하고 주목한다.

비폭력 대화에서 느낌은 언제가 자동차 내부의 보이지 않은 엔진의 계기판처럼 그 느낌이 일어나게 하는 주인공인 욕구들(가치들, 혹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확인한다. 수용, 배움, 책임, 이해, 돌봄, 연결, 사랑, 존중, 자기 표현, 자유, 교제, 친밀... 그 욕구들이 무엇인지 찬찬히 하나하나 느낌뒤의 주인공들을 확인하며 그 욕구들을 찾아낸다. 욕구들이 어느 정도 찾아졌으면 이제는 중요한 것은 그 욕구들에 음미하며(savoring) 머물러 있는 것이다. 뭔가 변화가 느껴질 때까지 그 욕구들 하나하나에 머물며 감싸안고 음미하며 있는다. 그래서 어느 정도 변화가 일어나면 - 점차 편해진다든지, 감정의 이완이나 애도 혹은 통찰의 가벼움 등- 이제는 상대방을 추측하며 위의 과정을 밟는다.

상대방은 어떤 생각, 감정을 가졌을까? 그가 그렇게 말한 말이나 행동뒤에는 충족하고자 한 욕구는 무엇이었을까? 추측하여 그것이 무엇일지 생각해본다. 중요한 것은 정확성이 아니다. 그렇게 시도해보고 다시 판단이 일어나면 나에 대한 공감을 다시 하면 내 판단뒤의 느낌과 충족하고자 하는 욕구를 다시 확인한다. 그리고 다시 상대방에 대한 공감을 시도한다. 그의 느낌과 욕구가 무엇이었는지 추측한다. 어느 정도 상대방이 충족하고자 했던 욕구들이 떠오르면 내 욕구와 그의 욕구를 포함하여 나에게 어떤 부탁이 있는지, 이것들을 희생하지 않고 서로 들어줄 수 있는 그 어떤 부탁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지 지켜본다. 그리고 떠오르면 그것을 실행한다. 이것은 상대방을 만나기 전에 실습한다.

이 연습은 단번에 이루어지지는 않지만 충분한 시간을 갖고 하면 상대방을 받아들일 공간이 내면에 생기고 나 또한 이 실습을 통해 통찰이 일어나게 된다. 그리고 선택할 것이 보이게 된다. 이러한 실습을 통해 원수는 내가 무엇을 소중히 생각하는지 비로소 깨닫게 해 주는 선물이 된다. 이 경험을 통해서야 비로소 나는 내가 누구인지 더욱 잘 알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원수가 변형되어 선물을 주는 자로 나타날 때, 거기에는 황홀감, 생생한 충만감, 진지한 명료성이 발산한다. 질적인 도약이 내면에서 일어나 긴 여운을 남긴다. 얼마나 충만한 생인지를 새롭게 보게 된다. 거룩함에 대한 새로운 자각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2013.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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