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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자로서 나, , 세상에 진실성을 지니고 온전히 현존하기

 

그러나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셨다. "너는 그의 준수한 겉모습과 큰 키만을 보아서는 안 된다. 그는 내가 세운 사람이 아니다. 나는 사람이 판단하는 것처럼 그렇게 판단하지는 않는다. 사람은 겉모습만을 따라 판단하지만, 나 주는 중심을 본다."/ 사무엘상 16:7

너희는 사람의 표준대로 판단하지만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않는다/ 요한복음 8:15

'너희가 판단을 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판단하지 말아라/ 마태복음 7:1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고린도전서 4:3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로마서 2:1



이스라엘의 시원적 계시로서 신적 현존
(Divine Presence)

 

산업혁명 그리고 세속적 가치가 봇물처럼 르네상스 이후 휴머니티를 중심으로 새로운 문화사조로 우리의 삶에 들어온 지도 4백년이 흘렀지만, 불과 우리가 어린시절적인 최소 삼사십년 전까지도 귀신과 도깨비라는 신화적 존재가 여전히 부엌, 뒤뜰, , 계곡의 공간에 있었다고 믿어졌다. 이러한 신화적 세계관은 인류 문명의 지난 일만 년의 역사이기도 하다.

이렇게 강력한 신화적 세계관의 배경을 이해할 때, 삼천년 전에 모세를 통해 새롭게 이해된 신관은 인류 문명에 있어 인식구조와 가치의 패러다임 전환에 있어 혁명적 사건에 해당한다. 그것은 한 사막의 가시떨기나무에서 사라지지 않은 불꽃의 체험을 통해 일어난 것이다. 장소의 신들에 대한 숭배로부터 역사적인 활동 근원으로서 야훼YHWH”로의 새로운 이해를 통해 야훼신에 대한 새로운 신앙자들은 장소와 환경에 대한 두려움에서 영원의 시각하에서 시간적 현존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야훼 곧 이를 풀면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 나는 있으려 하는 있음이다 I will/shall be that I will/shall be”의 문장의 약자로 형성된 이 이름은 신의 이름을 부르는 데서 오는 불경성으로 인해 그 모음을 쓰지 않아 어떻게 부를지 몰랐었다. 그래서 임시로 나의 주라는 아도나이의 모음을 이 거룩한 4자음에 결합하여 여호와라는 호칭으로 불러져서 이제는 야훼가 더 가까운 호칭이라는 데 접근을 보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름이 아닌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그 의미에 있다.

모세가 기존의 거룩히 구별된 장소의 신과 달리 일상성인 떨기나무에서 신의 현존을 체험하고 또한 그의 이름이 무(nothingness)의 충격과 실존의 위협 속에서 있으려 하는 있음(스스로 있음, 자존)’으로 신적 현존을 경험함으로써 거룩의 의미에 대한 전위(轉位; trans-position)가 발생하게 된다. 이는 기존 문화의 대상화된 공간의 신에 대한 숭배에서 거룩한 목소리에 대한 자각적 현존이라는 새로운 주체적 결단의 무리들이 형성되고 운명에 대한 저항과 더불어 희망하는 힘을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 이 자각과 계약을 맺은 거룩한 교제 공동체-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 이스라엘 곧 유대 공동체라는 사회 속에서 새로운 이스라엘이라는 자각을 가진 일련의 무리가 예수라는 한 사나이를 통해 그가 그리스도 곧 신적 현존의 표징이라고 고백하며 과거의 이스라엘과 어쩔 수 없는 결별의 길을 가게 된 유대교 내의 갱신운동으로서 예수 운동(Jesus Movement)’에 있어서도 가장 큰 쟁점이 바로 이 신적 현존의 무제약성과 직접성에 있어서-“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나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 근본적인 전향(re-orientation)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사도바울의 입장에서 보면 율법과 복음의 구별이었다.

율법의 특색은 도덕적 판단이다. “~을 해야 한다 혹은 ~을 하지 말라 (You should do/do not this or that)”의 원래 취지는 거룩함에 울타리를 쳐서 이를 보호하려는 의미였으나 오히려 그 판단으로 인해 죄가 무엇인지 명료해졌으나 그 죄의 힘으로부터는 놓임을 받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올무에 걸려있었다고 본 것이다. 이는 진리를 알면 자유해지고 생명을 얻고 길을 가는 존재가 되며 영적인 삶으로서 사랑하는 능력이 충만해 진다는 요한복음 기자, 사도 요한, 성 바울의 일관된 주장의 입장에서 본다면 장소로부터의 구속은 이루어졌지만 율법이라는 계율로부터 구속은 여전히 있다고 본 점에서 갱신운동의 합목적성을 띄게 된 것이다.

새 이스라엘로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과 옛 이스라엘 무리와의 충돌은 같으면서도 그 표현방식에 있어 매우 중요한 쟁점이 된 것이다. 옛 이스라엘은 신적 현존을 보존하기 위해 거룩의 울타리, 곧 성막으로서 율법인 너는 해야 한다, 너는 해서는 안 된다는 도덕적 의무와 기율의 울타리를 쳐서 중심을 안전하게 보호할 필요성을 제시한다. 그 거룩한 중심을 보호하는 막으로서 수단의 중요성인 계율이 필요하다 본 것이다: “수단, 울타리는 거룩에 들어가는 장막/커튼이다.”

 

새 이스라엘의 새로운 선택: 거룩한 현존을 직접적으로 만나는 온전한 현존

 

그리스도 제자들은 예수라는 사람으로부터 신적 현존의 인격적 감염과 충격을 받으면서 새롭게 각성한 것은 신적 현존(Divine Presence)’을 제대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온전한 현존 (to be present fully and wholly)"으로서 사는 것이며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3: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이는 성령의 삶으로 비유되곤 한다.

성령의 인도로 사는 자에 대한 대표적인 표현은 요한복음 기자의 설명이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3:8).” 여기서 장소나 그 어느 것에 매이지 않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함의 전적인 이 순간 여기에 대한 온전한 현존 (being fully present)로서의 삶, 혹은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기대가 미치지 않은 사랑 안에서의 존재하기라는 현존이 핵심 문제가 되는 것이다: 요한일서 4:12-“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모세가 그 시작을 열었던 삶의 황무지의 덤불에서 절대적 현존을 예수 제자들은 다시금 온전한 현존으로서만 거룩한 현존을 대할 수 있음을 철저히 자각하였다. 그래서 개인의 온전한 현존과 거룩한 현존의 연결은 산상수훈이 제시하는 마음의 가난, 애통, 온유, 의의 목마름, 청결, 긍휼히 여김, 화평케 함등의 마음의 근본자세를 통해 이루어지며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의 자세로 설명된다. ‘세상에 속하지는 않되세상에 침투하는 이 하나님 나라는 먹고 마심이 아닌 성령을 통해서 누리는 정의와 평화와 기쁨이라는 온전한 현존의 이 지상적 삶을 추구한다.


온전한 현존의 문빗장으로서 판단 않기

 

이러한 거룩한 현존에 연결된 온전한 현존으로서 세상에 설 때에 원수/, 이방인에 대한 우리의 근본적인 정체성의 오해 -신의 거룩한 자녀이자 창조물로서의 우리와 만물-, 그리고 그러한 왜곡된 인식으로부터 오는 분리와 차별 -‘/우리/그들’- 논리에 따른 강제, 정복, 징계, 폭력의 반응과 힘 지배의 관계방식에 대해 새로운 차원의 영역이 열리게 된다. 정상적으로 보이는 현실 이면에 오래되고도 새로운 현실 - 자유와 섬김 그리고 돌봄과 화해의 하나님 나라 -에 대한 혁명적인 시야가 열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판단하지 않는다라는 것은 단순히 교제를 위한 윤리적인 명제가 아니다. 첫째로, 그것은 사물과 사건의 실상에 대한 진실의 왜곡을 넘어 존재론적인 근원인 신적 현존의 무제약성과 궁극성이라는 실재에 중심을 세우는 길이다. 이는 나의 생명과 실존의 터전 더 나아가 모든 존재의 생명과 실존의 터전이 이 무제약적인 신적 현존에 기반하고 거기서 연원한다는 존재론적 연결성 -일치의 일자로서 신적 현존의 현실성에 감싸여 있는 우리됨- 그 터전을 본원적으로 자각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은총(불교용어로는 상관적 자비의 관계성)이 우리 실재에 앞서 존재함을 인식하게 되고, 여기서 두려움을 내려놓고 사랑의 능력을 부여받게 된다.

둘째로, ‘판단하지 않는다함은 우리의 인식론적 오류를 교정한다. 공동관계성으로서 그리고 우정의 존재로서 만물의 코이노이아(koinoia; 거룩한 교제)로 초대된 우리로 하여금 삶이 희소성에 근거한 쟁투의 전쟁터이자 그 전쟁터에서 이기고 지는 삶의 게임에서 타자나 사물을 적대시 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충만과 영광을 향한 기쁨의 도상에서 파트너십과 선물로서 다양성을 경험하게 함을 이해하게 된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시편 16:11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10:10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후3:18

 

있으라라는 태초의 말씀 사건은 존재자체가 우리의 옳고 그름’ ‘좋고 싫어함’ ‘익숙하고 낯설음에 대한 인식론적 판단에 상관없이 있으라하신 분의 현존과 말걸음의 전령자로서 신비를 품고 있고, 다양성과 다름은 삶의 풍성함과 생생함을 얻게 하려는 인식론적 확장을 위한 것이다. 에고를 넘어 그러한 '타자와의 관계성속에서 나의 있음 (being-in-the co-relationships with others)'은 무제약적 책임과 관계 속으로 부른다. 그들을 통해 나는 배워가는, 타자를 통해 순전한 모습으로 형성되어지고 영광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데로 계속적으로 나아감이라는 자유와 영광의 순례자들로서 동료의식을 부여하게 된다. 이것이 은총에 기반한 인식론적 확장이다.

셋째로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은 진리와 은총의 신적 실재가 세상에서 온전히 능력으로 작동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는다. 이것은 논리가 아니라 에너지와 힘을 지니고 있다. 소통을 가능하게 하고, 서로가 힘을 얻도록 능력을 부여한다.

나와 상대에게 있어서 표현된 외모, 입장, 의견에 대한 판단이 없을 때 내면에는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 세워지게 된다. 그렇게 될 때 판단이 아닌 관찰을 통해 내 내면은 투명하게 그리고 온전히 현존함으로 상대방의 흔들림을 껴안아 떠받쳐주는(holding) 자유의 안전한 공간을 확보해 주게 된다. 그렇게 될 때 상대방은 나의 그 온전한 현존함을 선물로 받아 자신의 흔들림 속에서 중심이 일어난다.

역으로 판단없는 이해와 연민으로서 상대에게 다가감은 상대의 입장, 의견, 차이를 넘어 진정한 중심을 투명하게 보게 됨으로써 진심이 나에게 다가오게 된다. 그의 본성에 대한 왜곡이 없이 진심을 전달받음으로써 나는 자기 배움과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선택의 지평이 열린다. 그래서 자유를 증진하는 방식으로 말 걸기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판단 없이 다가가는 실재와 사건의 이해는 결국 외적인 사물이 내 내면에 빛으로 다가와 내 안의 혼란과 모호함에 명증한 이해를 높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와 반대로 내가 중심을 잡음으로서 형성된 내면의 빛이 상대방과 사물에 비춰지면서 관계와 이해력을 가져오는 쌍방 소통이 일어나게 된다. 여기서 자유와 생명의 충만함은 저절로 그리고 자연스럽게 출현한다. 종에서 친구로, 지배에서 섬김으로, 상처입은 완고함에서 온전한 약함으로, 불안과 두려움에서 이해와 연민으로 전환을 가져온다. 기독교 신비주의자들은 -특히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이것을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라는 잠재성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탄생으로 표현하고 여기서 능력과 왜라는 이유없는삶이라는 자유의 삶을 묘사하고 있다.

판단하지 말라고 한 것은 그것이 그대에게 그 자체로 올무가 되기 때문이다. 나의 옳고 그름에 따른 정당성과 타당함이 상대방을 새로운 가능성을 품은 변화할 수 있고 변화의 과정속에 있는 상대를 보지 못하고 과거의 것으로 현재와 미래를 재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정당성과 타당성이 아무리 옳다고 해도 나오는 결과가 분리, 상처, 분노를 가져오기 때문에 나의 기쁨과 선택을 유실시키고 말기 때문이기도 하다. 삶의 여행 중에 앞에 있는 암초나 소용돌이는 삶의 전체성의 한 일부이다. 그 한 일부에 내 의지, 시간, 주의를 모두 쏟을 때 나는 나머지 공간에 있는 대양의 찬란함, 투명한 하늘, 흘러가는 구름, 황홀한 낙조, 지저귀는 물새, 무한한 수평, 물고기의 약동의 전체성을 음미하는 것을 놓치고 만다. 이 충만함의 전체성을 잃음으로서 우리는 선물로서의 삶의 약동을 잃고 지루해지게 된다.

우리는 판단이 없을 때 낮과 밤, 햇빛과 비의 전체성에서 낮과 햇빛이 주는 충만함만 아니라 밤과 비가 주는 삶의 신비, 생의 의미의 숭고한 높이, 그리고 흔들림 속에 떠받쳐 주는 신적 존재의 깊이에 대해 놀라움과 환희를 경험하게 된다. 낯선 자와 적이 나에게 온전한 삶으로 인도하는 신적 현존의 전령자로 변모하여 나타난다. 성 바울이 경험한 그 충만함의 경험이 이를 확증한다.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3:19


2013.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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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용박사 | ecopeace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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