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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으로 비폭력 실천가의 황금률

'남으로부터 대접받기를 원하는 대로 남에게 대접하라"

우리의 삶에서는 끌어들임의 법칙이 작용한다.

내가 나 자신에게, 상대방에게 그리고 구조적 제도에서 행하는 것은 일련의 동일성의 패턴이 작용한다. 흔히 우리는 내가 내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사회에서 누군가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마치 내 심장에는 두 개의 방이 있어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공간과 미워하는 공간이 따로 있는 것처럼... 그러나 실재는 연결되어 있고, 우리의 영혼은 하나의 나누지 못하는 온전성(wholeness)을 지니기에 동시에 사랑과 미움이 가능하지 않다.

나의 사랑, 공감, 자비 그리고 신뢰는 타자와 우주의 사랑, 공감, 자비, 그리고 신뢰를 끌어들인다. 반면에 나의 분노, 파괴적인 에너지 그리고 분리감은 상대방과 우주의 그와 같은 에너지를 끌어들인다. 내가 햇살 속에-삶의 태도- 있으면 밝고 명랑하며 즐겁고 평화로운 삶의 분위기를-삶의 정황- 대면하게 되고, 반면에 내가 음지 속에 있으면 좌절, 무력감, 슬픔, 외로움의 삶의 분위기를 대면하게 된다. 왜냐하면 생명계는 상호소통의 열린 개방시스템이고, 물리적 현상과 정서적 현상 그리고 우리의 영적 현상은 생명으로서 동일한 법칙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누군가를 미워하면서 내 자신을 사랑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이미 누군가를 미워하는 순간에 나의 참 모습인 온전성에 먼저 손상을 가하지 않는 한 남에게 손상을 주는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거꾸로 나에 대한 진정한 사랑없이- 아니 내 자신의 존재가 사랑임을 알지 못하고서는- 남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 일어나기가 불가능하다.

 

주는 것은 받는다

물리적 세계에서 나의 것을 준다는 것은 나에게 있는 것이 남에게 건너간다는 뜻으로 인과관계의의 법칙을 지닌다. 물건으로서 그 어떤 것은 공간적으로 이동이 되어 내 것이 더 이상 아니게 된다. 그러나 영혼의 세계에서는 나의 것을 준다는 것은 상대방에게 가버린 것이 아니라 내게 돌아온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준 것만이 나의 것이 된다.

이는 비물질적인 경계 없는 영역에서는 비인과적인 연기 법칙 혹은 순환 법칙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이것이 일어나면 저것이 일어나고 저것이 일어나면 이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이 사라지고, 저것이 사라지면 이것이 사라진다. 이것과 저것은 분명히 다른 데 동시에 발생하고 사라지면서 쌍방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이것을 비폭력 대화나 갈등해결의 현장의 사례에 적용해보면 상대방의 고통, 갈등, 손상에 대한 개입이나 경청에 관여할 때, 이것은 외면적으로는 나의 에너지, 시간, 노력의 소모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진정 그런 상황에 개입하여 온전히 알아차림과 현존함으로 있을 때 많은 경우 뜻밖에도 지침과 소모로서가 아니라 에너지의 충전, 의미의 부여받음, 삶에 대한 통찰을 얻으면서 더 큰 자아에 대한 감각, 세상 안에서 세상을 넘는 그 무엇에 대한 직관을 얻게 된다.

손상, 파괴, 분열, 갈등의 상황에서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던 연결과 해결이 출현하게 될 때, 비폭력 실천가로서 진행자는 쌍방에게서 일어나는 적대감의 해소와 궁지에 대한 새로운 돌파를 당사자들이 헤쳐 나가며 길을 찾는 것을 볼 때, 뜻밖의 선물을 받는다. 안도감을 넘어 그 어떤 궁지에서도 인간에 대한 신뢰를 얻고, 암흑의 긴 터널 뒤의 희미한 빛의 손짓을 의식하면서 강렬한 희망과 삶의 온전성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비폭력 실천가의 보람이자 자기성장의 비결이다. 영혼 안에서 주는 것은 언제나 받는다. 그리고 주는 만큼 자신이 성장한다.

 

대접하는 수고를 삶의 에너지로 바꾸기

우리가 하나님을 낮과 밤의 하나님, 햇빛과 비를 골고루 주시는 하나님으로 고백한다함은 영혼에서 낮과 햇빛만이 아니라 밤과 비도 신을 만나는 거룩한 길이라는 궁극 체험을 지칭하는 것이다. 기쁨, 찬양, 성취, 충일감의 낮과 햇빛의 길로서 전통적인 영적 신비의 길이 유일한 길이 아니다. 추락, 어둠, 낙담, 분리, 손상, 폭력의 현장은 그 자체가 신께로 가는 거룩한 길이요, 그분의 보이지 않는 뒷면이 된다.

밤과 비를 신을 만나는 거룩한 길/차원으로 체험하기 위해서 하나의 장애물은 일어나고 있는 사건-사람, 관계, 상황-에 있어서 나의 판단을 주목하여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 판단쇼의 올무에 닫혀 있을 때 나는 지침, 에너지의 소모, 낭패의 부정적 감각, 아니오라는 막힘이 일어난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수고스러움이라는 에너지 소모의 경험을 직면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이 삶의 자연스런 법칙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건 전혀 삶의 자연스런 법칙이 아니다. 생명계는 어둠과 비를 통해 자기 성장과 목적, 방향, 에너지를 얻는다. 인간만이 왜곡된 지식에 의해 다른 관점을 갖고 있는 것이다.

고통과 손상을 경험하는 상대방에게 비폭력 실천가로서 대접을 할 때 수고스러움의 에너지 소모의 경험이 아니라 오히려 타자//상대로부터 대접을 받는 차원으로 내가 선물을 받게 되는 경험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일어나는 것온전히 현존하기(to be fully present)’로 관찰과 공감으로 있는 데서 발생한다. 이것은 사전에 기대하지 못한 뜻밖에 출현되는 존귀한 그 무엇(something)이 되는 것이다.

우주 안에서 존재하는 것들은 그 무엇도 사소한 것이 없다. 살아있는 생명계는 엔트로법칙(에너지가 소모되어 더 이상 움직임이 없이 굳어져 버리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열린 개방계로서 존재할 때 모든 정보와 에너지는 전환이 일어난다. 비폭력 실천가로서 내가 진행자로 남을 온전히 공감과 현존으로 대접하고 있을 때, 그 타자로부터 내가 대접받음이 일어난다. 인간성이 파괴된 그 격렬한 분쟁과 증오감의 흐름속에서 새로운 그 무엇이 출현된다. 감추어진 보편적 인간성에 대한 신뢰가 나타난다. 적대감을 내려놓고 서로의 진심을 진정으로 들으며, 미래를 향한 새로운 선택을 하게 되는 전환이 일어나게 된다. 이를 통해 진행자는 자신의 줌이 대접받음으로 돌려받게 된다. 에너지가 충전되고 삶의 의미가 충일된다.

 

대접받음에서 거룩한 현존으로, 많은 일에서 하나의 일로

비폭력 실천가는 대접하기(giving)’가 나의 노력, 시간, 에너지의 소모가 아님을 경험한다. 뜻밖에도 이를 위해서는 비폭력 중재자는 정말로 아무런 기대감이나 예측, 혹은 사전의 해결에 대한 아이디어 없이 현존해 있어야 한다- 당사자들이 스스로 자기 문제를 해결하는 전환을 경험하며 존중과 배려의 연결로 일이 풀려나감을 보면서 대접받기(receiving)’를 경험한다. 이 새로운 차원의 경험이 자신의 수고스러움을 넘어 보람과 의미, 감동과 에너지를 상대로부터 오히려 부여받는다.

이런 보람과 의미의 충전, 감동과 에너지의 넘침은 비폭력 실천가들이 금전적인 사례나 안정적인 보수에 대한 기대없이 일하면서도 그 활동에 자신의 삶을 거는 매력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폭력의 문화와 구조의 일상화된 패턴을 뚫고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예고 받는 그 맛봄이 강렬하기에 그러한 일에 헌신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러한 대접받음의 경험으로 인해 그 경험이 상대방의 문제 해결, 갈등 당사자들로부터의 감사, 나의 하는 일에 대한 존경의 표현, 작은 금전적 사례의 보답이든 간에- 자기 일의 중요성, 자기 존중감에 머무르는 데 있지 않다. 이것은 그것이 아무리 보람있는 경험이든 간에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기-에고를 강화시킨다.

기독교 비폭력 실천가는 대접하기-대접받기수고함-보람의 패턴을 초월하여 더욱 앞으로 나아간다. 그것은 그 장(; field)이 이미 신의 거룩한 현존의 곳(locus)이라는 인식의 체험이다. 여기에는 자기경험이 아니라 신체험의 경험이 존재한다. 자신이 행한 한 가지 물방울(a waterdrop)의 행위에서 대양(the ocean)을 깨닫는다. 자신의 물방울 행위는 대양속에 적셔 들어간다. 거기에는 의 경험이 없다. ‘’ ‘궁극적인 그 무엇’ ‘하나님의 그것의 현존으로 들어가는 문이 될 뿐이다. 나는 하나의 문을 열게 된다. 거기에는 또 다른 차원에로 들어감의 경험이 일어난다. 전체(wholeness)속으로의 일치, 자기 개방이 펼쳐지는 것이다.

이것이 (work)’이 기도가 되는 방식이며, 워크숍(work-shop)이 예배(worship)이 되는 이유이다. 멈추지 않고 일하는 것이 지침과 소진됨으로 끝나지 않고 경배와 헌신으로 전환이 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이는 내가 일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궁극적인 존재의 터전위에 설 때 나는 일하게 된다. 통로가 되는 것이지 작동원인자는 따로 있다. 그래서 일이 더 이상 일이 아니다. 또한 모든 일은 또한 그분의 일/현존이 된다. 여기에는 영혼의 엔트로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많음(many)’하나(one)’가 된다. 많은 일들은 오직 하나의 일이다. 그분의 일이다. 그분의 현존의 변형일 뿐이다. 많은 일이 있음에도 혼란이 있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의 일이요 한분의 일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대접하기대접받음을 넘어 오직 하나의 전체성에 존재한다. 그것은 신의 자비에 기초한 하나의 환대(hospitality)’일 뿐이다. 삶의 모든 것은, 모든 존재는, 모든 행위는 한 분이신 궁극 존재의 하나의 환대속에 있을 뿐이다. 환대의 전체성이 존재의 비밀이다. 이것이 기독교 비폭력 실천가가 도달하게 되는 궁극의 목표이다: 하나의 일이 되기-예배, 헌신, , 노력, 시간보내기, 탐구, 실천, 대화, 지침, 열정...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현존'으로 하나의 일로 되기.

(2012.10.22.          HIPP 심화과정을 진행하고나서 얻은 통찰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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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용박사 | ecopeace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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