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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평화관련 시에 대한 묵상

                                           
          

나무가 자라는 집

                                                    - 최하림-


나무가 자라는 집에서는 작고 애매한 파동이

아침 내내 일어 새들이 무리로 몰어내어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집 안은 잡목숲을 따라오는

파동 때문에 금세라도 지붕이 무너져내릴 듯

했습니다 그 집의 역사가 유지되는 것은

순전히 숭숭 구멍을 뚫어대는 동박새라는가

딱따구리 생쥐의 역할인 듯했습니다

한낮이 되어 늙수그레한 남자가 나타나 비음이

심한 목소리로 무어라곤지 중얼거렸지만 파동은

조금치도 변동이 없었습니다 나무가 자라는

집을 구성하고 있는 지붕과 유리창 마루

거실들은 파동에 떨고 반향하며 근원 같은

곳으로 사라지는 듯했습니다 오후가 되자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한동안 울렸건만

아무도 뒤란을 돌아 문을 따주러 가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나무가 자라는 집은

더욱 깊은 파동 속으로 들어가 움쭉도

않았습니다. 해질 무렵 예의 남자가 잠시

나타나 뒷걸음치듯 주춤거렸지만 그것도

잠시, 남자는 잠목숲으로 사라지고, 시간이

열렸다가 닫히고 나무가 자라는 집은

깊은 적막으로 빠져들어갔습니다




 


나무가 자라는 집에서는 작고 애매한 파동이/

아침 내내 일어 새들이 무리로 몰어내어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진리를 안다는 것에 생각해 보면 ‘진리가 무엇일까?’라는 의문과 ‘안다는 게 어떻게 가능할까?’라는 의문이 함께 이어집니다. ‘진리’가 종교적으로 ‘궁극자’ 혹은 ‘일자’(the One)라는 무한성과 관련된 그 ‘무엇’이라고 한다면 그 자체는 나를 넘어선 위대함과 숭고함이라는 매력은 있겠지만 나의 지금 여기 있음이 풀어지지 않고, 나 자체가 내 삶이 문제가 되는 것에 대해서는 눈멀음이 있게 됩니다.


‘안다’는 의식행위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사물 하나가 거기 있는 것이 파악되는 것으로 안다함을 말할 수 있는 건가요? 얼추 그렇게 생각이 들지만 왜 나는 그 수많은 다른 사물들중 그 어느 하나가 주목되고 수용되고 의식속에 존재하고 나머지는 주목하지 않는 걸까요? 특정한 한 사물이 다른 것중에 선택되어 시야에 잡히고 눈에 의식되는 것 말고도 그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하는 문제는 또 남아있습니다.


이 질문들을 묻게 되는 것은 바로 한 시인의 시가 주는 충격때문입니다. 여기서는 ‘진리’ 그리고 ‘안다’는 것에 대해 극적인 전환을 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앎의 대상은 나무, 집, 새, 집 안, 잠목숲, 지붕, 동박새, 딱따구리 생쥐, 늙수그레한 남자, 유리창 마루 거실, 남자...이고 그들이 앎의 대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주목하는 것은 ‘나무가 자라는 집’이라는 하나의 대상이 아닌 열린 공간의 포용성입니다. 하나 하나의 사물들의 존재가 아니라 그 존재들이 엮어내는 관계의 전체성, 통전성 그리고 상호 엮어짐이 주는 굽이치는 자장(magnetic field)입니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대상이 출현하지만 집착되지 않고 그 대상들 하나하나는 다른 ‘보이지 않는’ 의미 공간을 열어 보입니다. 나무, 집, 새, 집 안, 잡목숲...등은 각각 자신의 사물성을 지니고 거기 있지만 진실로 거기 있는 것은 그 각 사물성들이 서로 엮여서 보여주는 그 ‘무엇’에 대한 역동성입니다.


존재하는 것에 의해 엮여진 ‘보이지 않은’ 그 무엇의 역동성, 그것은 바로 시인이 붙잡고 있는 ‘진리’의 현시이겠지요. ‘나무가 자라는 집에서는 작고 애매한 파동이...멈추지 않았습니다.’ 궁극자나 일자, 저 위에 존재하는 초월자가 아니라 구체적인 일상인 ‘나무가 자라는 집’에서 시인에게 말을 던지는 것은 바로 ‘작고 애매한 파동’이었습니다. 개념으로 설명을 다하기엔 부족한 한 은유로서 이 ‘작고 애매한 파동’은 시인의 가슴을 사로잡는 것이었고 ‘거기 저 곳의 그 무엇’과 지금 여기 나라는 인식자간에 일어나는 교감의 일치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실존입니다.


미세한 파동, 그것은 인식자 내면에서 일어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인식자 외부의 저기 각 사물들이 만들어내는  결합된 그 무언가의 정감적 에테르의 흐름의 상호 굽이침입니다. 각 사물과 인식자는 따로 존재하지만 자신의 독특성은 갖고 있으면서도 개체성은 희미한 구별로 남고 전체를 만드는 그 살아 움직이는 그 무엇- 파동-이 바로 직접적으로 여기, 지금 가슴을 후비며, 눈을 뜨이게 하며 살아 현전하고 있습니다. 



한낮이 되어 늙수그레한 남자가 나타나 비음이/

심한 목소리로 무어라곤지 중얼거렸지만 파동은/

조금치도 변동이 없었습니다 나무가 자라는/

집을 구성하고 있는 지붕과 유리창 마루/

거실들은 파동에 떨고 반향하며 근원 같은/

곳으로 사라지는 듯했습니다.....



자유, 사랑, 의지, 평화, 희망, 이상... 이 얼마나 아름답고 눈물겨우며 소중한 말들입니까. 그러나 여기에는 모두가 인간적인 것들, 다시 말하면 인식자로서 인간 주체라는 자기주장이 확고히 들어있습니다. 언제나 유아독존적인 인간 세계만이 세계의 전부인 것처럼 다른 존재를 망각하고 없는 것처럼 이야기 되고 있습니다.


아아~~ 그런데 보십시오. 시인의 눈을 통해 보여지는 세상인 ‘나무가 자라는 집’에서는 그러한 인간의 우월적 지위나, 인간의 시·공간의 확보는 보이지 않습니다. 심지어 대상을 바라보는 인식자인 시인도 여기서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늙수그레한 남자는 존재하지만 그 공간을 독점하지 않습니다. 주인공이 되지 않습니다. 인식자는 인식하고 있지만 인식자(the seeing one)는 사라지고 인식(the seeing)만이 존재합니다.


새들의 무리, 잡목숲,  지붕, 숭숭 구멍을 둟어대는 동박새, 딱따구리 생쥐, 눍수그레한 남자, 유리창 마루 거실 등과 같은 공간의 존재들과 ‘자라는’ ‘아침 내내’ ‘무너져내릴 듯’ ‘숭숭 구멍을 뚫어대는’ ‘한낮이 되어’ 등의 시간적 존재들은 자신의 거기 있음이라는 독특성은 있지만 개별성이라는 각자의 구별은 해체되면서 그 무언가 살아있는 현존 -파동-을 일으킵니다. 이 파동은 보이는 개체적 존재물이 아니라 존재들(Beings)이 엮어내는 존재의 힘(the Power of Being)입니다. 존재의 힘으로서 파동은 각 존재들의 자기 역할과 동시에 그들의 관계성에서만 존재합니다.


인식하는 사람(시인)도 각 사물도 여기에서는 중심이 아닙니다. 중심없는 중심으로 파동이라는 이 시원적 일치와 다이내믹한 현존력은 각 사물이 현존하면서도 자신을 비움으로 엮어지는 새로운 현존의 보이지 않는 몸-이른바 공동의 정신적·영적인 기운-입니다. 이들은 현시되어 존재하지만 그들은 또한 자신을 비워 사라집니다. 각 현상의 드러남은 그렇게 자신을 비워, 주인이 아니라 빈 공간을 내어줌으로서 새로운 깊이의 공간을 지시합니다. “거실들은 파동에 떨고 반향하며 근원 같은 곳으로 사라지는 듯했습니다.....” 서로가 자신의 몸을 섞고 융합되어 새로운 실재 ‘근원 같은 곳’을 형성하여 자신을 넘어선 상호관계의 새로운 일치와 깊이의 실재를 노출합니다.



......오후가 되자/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한동안 울렸건만/

아무도 뒤란을 돌아 문을 따주러 가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나무가 자라는 집은

더욱 깊은 파동 속으로 들어가 움쭉도/

않았습니다. 해질 무렵 예의 남자가 잠시/

나타나 뒷걸음치듯 주춤거렸지만 그것도/

잠시, 남자는 잠목숲으로 사라지고, 시간이/

열렸다가 닫히고 나무가 자라는 집은/

깊은 적막으로 빠져들어갔습니다.



이 ‘근원 같은 곳’은 놀랍게도 다른 곳에 엉뚱하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각 사물간의 ‘사이’속에서 중심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새들이 무리로 물어내어도’와 ‘순전히 숭숭 구멍을 뚫어대는 동박새와 딱따구리 생쥐’, ‘늙수그레한 남자’의 ‘심한 목소리로 무어라곤지 중얼거림’과 ‘지붕과 유리창 마루 거실’ 또한 ‘대문 두드리는 소리’와 ‘해질 무렵 예의 남자,’ 및 잠목숲 등들의 존재와 그들의 행위 ‘사이에’ 근원적 중심이 생기고 이 근원적 중심은 파동으로 그러나 ‘작고 애매한’ 파동으로 시인에게 다가 옵니다.


파동은 거기에 구별된 존재로 있지 않습니다. 전체적 그 무언가의 하나, ‘근원 같은 것’은 각 사물을 포용하고 그들을 더욱 그들 되게 합니다. 그 근원은 각 작은 존재들의 공간과 시간 그들의 거기 있음과 그들의 행위를 방해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이 파동은 ‘근원같은 것’을 노출시키면서도 일상의 범속은 그대로 안고 갑니다. ‘순전히 숭숭 구멍을 뚫어대는’ ‘한낮이 되어..비음이 심한 목소리로 무어라곤지 중얼거렸지만’,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한동안 울렸지만’ ‘뒷걸음치듯 주춤거렸지만’ 이라는 범속한 시간, 아무런 의미를 형성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일상성과 단편성은 파동과 엮어져 있습니다. 그 순간성이 ‘근원같은 것’을 붙잡고 살짝 교감을 갖습니다.


여기서 시인은 단지 한 관찰자로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이 일상이 지닌 순간, 개별적 존재들의 공간과 어울려 참여함으로서 시인도 보는 자가 아니라 ‘봄(the seeing)'의 현존인 파동이라는 실재속에 존재합니다. ’깊은 적막으로 빠져들어갔습니다.‘ 존재물의 각 활동이 이 침묵속으로 용해되면서 거기에는 새로운 에테르의 흐름만이 존재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보는 것은 이 파동은 하나의 단일한 실재로서 강력한 궁극성을 띠고 현존한다는 게 아닙니다. 각 일상 사물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까닭에 쉽게 해체될 수 있고 여리고 쉽게 눈에 띄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 파동 실재의 ’작고 애매한‘을 희미하게 느끼지만 시인의 겸비의 감각으로 인해 실재함에 대해 포착하는 것은 놓치지 않습니다. 근원이 확실히 존재하는 객관성의 것이 아니라 각 존재들이 자신을 열어 서로의 관계속으로 들어감으로 형성하는 현존력이기에 ’근원 같은 것‘으로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교만하지 않는 투명한 눈으로만이 잠시 현시하는 이 ’작고 애매한‘ 파동과 ’근원같은 것‘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 충격은 깊이깊이 남아 일상을 가릅니다.


마침표 없이 흘러가듯 사물을 불러내고 흐르며 다른 존재를 엮어내면서 드러내면서도 사라짐으로 그렇게 파동은 작고 애매하지만 ‘멈추지 않고’ ‘조금치도 변동없이’ 그렇게 현동(現動)하고 있습니다. 소음은 침묵을 불러내고 존재물은 존재의 힘을 불러냅니다. 그리고 나는 모두의 ‘우리’속에서 새로운 존재의 집(oikos)을 부여받습니다. 그토록 이 시인의 눈은 철저하게 그리고 겸허하게 땅에 내려 앉아 자신을 낮춥니다. 그래서 그토록 일상적이고 범속한 것들이 애정어린 존재로 다시금 태어납니다.


아아~ 이토록 맑은 눈이라면 그 얼마나 눈부시고 아리도록 고독한 눈이겠습니까?

그 작고 애매한 파동이 저에게도 일어나기를...


2008. 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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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용박사 | ecopeace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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