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
글 수 7

 

창조영성에 이르는 수행의 길







고전적인 기독교신학인 타락-구속의 영성을 추구하는 길은 정화(purification), 조명(illuminationA) 그리고 일치(union)이다. 이는 희랍의 프로클루스,  플로티누스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 신앙관에서 물려받은 매튜 폭스의 창조영성은 서로 관련된 긍정, 부정, 창조성, 그리고 변혁의 길이다.



첫 번째 길로서 긍정의 길(Via Positiva)은 감사와 황홀의 길이다.1) 이는 생명인 우리 자신과 만유인 창조계의 아름다움과 우주적 깊이를 느끼고 맛보는 여행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모든 사물, 시간, 공간을 통해 흘러나오는 하느님의 창조력(다비르)이 존재한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이 신적 창조력은 말을 넘어 행위를 내포한다. 성서에 따르면 계약의 하느님은 축복의 하느님이시다. 비옥한 땅, 건강한 자녀, 건전한 삶 등 좋은 것을 약속하며, 이는 삶의 기본적인 선물들을 누림에 관한 축복이다. 축복이 창조의 목적인 것이다. 원죄를 강조한 영성은 실상 기쁨을 장려하지 않는다. 원죄는 그동안 제국건설자, 노예 주인들, 가부장사회의 지배이데올로기가 되어왔다. 여기에는 공동체, 정의, 축제에 대한 깊은 욕구가 무시되어진다.



긍정의 길은 감성, 단순함 그리고 우리의 땅스러움(earthliness)로서의 겸손을 회복한다.2) 우리가 땅에 속해있다 함은 욕망과 도덕적 격분 등의 열정을 긍정한다는 것이며, 땅과 땅의 것에 가까이 머무는 단순한 삶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이는 하느님의 육화신비-그리스도가 인성, 땅스러움, 감성과 성을 지님-가 보여주는 겸손이다. 어찌 보면 우주 자체가 성사적이다. 만유의 모두가 움직이며 춤추고 노래하고 놀람에 가득차다. 하느님은 조화와 균형의 우주적 춤꾼이요 우리는 춤이다. 그리고 세계의 거룩함을 판독함으로 우리 자신의 거룩함을 탐구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우주 안에 있고 우주가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세계를 성사적으로 본다함은 하느님이 모든 것 안에 그리고 모든 것이 하느님 안에 있음을 보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연계되어 있다는 것은 우주가 하나의 공동체란 의미이다. 여기에는 조화, 아름다움, 정의가 요구되어진다. 우주는 다양성을 가르친다. 그리고 우주적 의식이라는 보편성속에서 지역주의, 이기주의를 지양한다. 개인화하고 원자화된 이원론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존중이 싹튼다. 원복과 우리의 땅스러움에 대한 긍정과 희열의 맛봄은 우주적 신뢰에 필연적으로 연관된다. 신뢰를 통해 우리는 자신과 우주의 끊임없는 성장의 가능성을 촉진한다. 신앙의 근본태도로서 신뢰는 변화와 과정을 존중하는 개방성을 낳게 된다. 여기서 성장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는 우리의 왕다운 인격존엄과 하느님 나라 건설에 대한 책임에 대한 자각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 책임은 우주적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주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생에 대한 긍정은 곧 우리 가운에 있는 하느님 나라, 곧 만유내재신론적 능력과 은총의 체험만이 아니라 “때의 충만”(실현된 종말론)에 대한 새로운 체험이기도 하다.3) 영생은 후일의 일이 아니라 현재의 심연을 신뢰하며 지금이 그 때라는 체험이다. 지금에로 과거와 미래의 최선을 것을 모아들이며 지금이 신적 돌입의 순간임을 경험한다. 생에 대한 긍정의 길은 풍성한 은혜로서 생명잔치에로의 초대, 우주적 환대에 대한 경험을 낳는다. “매우 좋다”하신 이 잔치에 “감사합니다”라고 손님으로서 우리는 동참하며,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해 더욱 깊이 존중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죄는 사소화, 개인화의 의미영역에 있지 않고 창조계를 손상하여 아름다운 것을 추하게 하는 데 있게 된다. 생명의 축복들을 경축하기를 거부하는 것이 죄인 것이다.   



두 번째 길은 부정의 길(Via Negativa)이다.4) 이는 비움과 어둠이 길이다. 우리는 기쁨과 황홀에서만이 아니라 고통과 슬픔에서도 우리가 우주적 존재임을 배운다. “하느님은 영혼안에서 더하기가 아니라 빼기 과정에서 발견되신다”는 에크하르트의 말처럼 비움, 침묵, 어둠속에서, 이미지의 떨쳐냄을 통해 신적 깊이에로 잠겨듦이 일어난다. 고통을 통해 비움(케노시스)가 일어난다. 고통을 끌어들여 함께 여행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자비를 인식하며 익히고 성숙해진다. 고통을 통해 강인해지고 아름다움을 담을 그릇이 된다. 이는 자신을 열어 놓아 다를 사람들과 맺어준다.



비워지고 잠겨들면 무와 대면하게 되며 어둠과 벗할 줄 알게 된다. 삶의 심연은 집착에서 자유롭게 하며, 실제로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는 그런 제로 지점에 이르게 되면 통찰의 기회를 얻게 되며, 해방에 투신할 수 있게 된다. 이 단계는 본질적으로 수용력을 익히는 길이다. 타자가 다름을, 있는 그대로의 받아들임에서 힘을 얻게 된다.  부정의 길이 요구하는 힘은 놓아버림(letting go), 금욕적인 극기의 힘이나 상황통제의 힘에서가 아니라 상처받고 떨어지기를 지속하는 희생의 힘이다. 죄는 놓아버림을 거부하는 것으로, 신비와 어둠과 미지의 것에 대한 거부, 그리고 너무 많은 무장이 이에 속한다. 그 결과의 예가 핵무기 광기, 민족국가의 권력, 엘리트의 자기만족 등이다.



여기서 구원의 힘은 고통을 통해 온다. 십자가는 명상의 대상이 아니라 구체적 과정에로의 참여이다. 이는 비움, 무, 제로의 힘이다. 그리스도는 힘을 거부했으며 신성을 비움으로써 비워진 인격의 모범이시다. 비워진 인격을 통해 정의와 자비에 민감해지고, 그 비움으로 신적 은총의 통로가 되셨다. 그래서 신적인 창조력(다비르)가 강하게 솟구쳐 흐르는 예언자가 된다. 철저히 놓아버림이 충만해지는 것이 하느님 나라이며, 이렇게 놓아버림을 통해 변모를 일으킨다. 산모가 이완에 의해서만 출산을 도울 수 있는 것처럼 지나친 방어, 너무 두꺼운 벽은 은총의 기회인 상처받을 가능성을 막는다. 이러한 방어는 고통을 받아들임으로 치유되는 길을 막는다.



셋째는 창조의 길(Via Creativa)이다.5) 이는 하느님의 모상이자 공동창조자인 우리의 창조성을 신뢰하는 길이다. 별이 공간의 어둠에서, 해방운동이 종살이 고통의 어둠에서 태어나듯이 창조는 전에 없던 것을 낳는다. 창조성은 우주적 에너지이다. 우주는 탄생중이고, 창조활동의 장구한 과정을 밟고 있다. 모든 유기체들이 지속적인 출산을 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의 두려운 창조성의 상속자이자, 우주발생의 작용인이다. 우리 자신이 생명을 위한 창조에 동참하지 않는 한, 우리의 창조력은 두렵고 위험한 도착된 출산방식, 즉 악마적인 것, 파괴를 위한 출산을 멈추게 할 수 없다. 지난 3세기동안 타락-구속의 신학이 가져온 비극은 우리안의 예술가와의 이혼이었다. 그 결과 아름다움과 놀라움, 경이와 정의, 부드러움과 놀이에 대한 출산력이 상실되었다. 사람마다 신적 출산력을 물려받았으며 우리는 내면의 예술가를 나오게 해야 할 책임이 있다.



창조하는 것은 신성과의 닮음을 체험하는 것이다. 인간의 상상력 안에 신적인 영이 깃들어 있다. 예술없는 종교적 신앙은 메말라지며, 명상도 종교적 엘리트의 전유물이 되게 된다. 명상으로서의 예술, 안에서 솟아나 내적 형태를 갖추는 예술은 형태있는 명상이다. 구체적 형태가 내적 진리에 기여하는 명상이다. 우주발생의 창조에 집중하는 예술의 힘을 회복함으로써 영성이 살아나고 역동적이게 된다. 이는 가장 진정한 의미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부로부터 불러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회복된 예술의 힘은 사회변혁의 도구가 된다. 창조는 희생제물이 되는 것을 거부한다. 명상인 예술을 통해 서로에게 타고난 아름다움과 장대함을 발견하며 치유되고 자기 이미지를 신뢰하며 삶에 줄 중요한 것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예술은 두려움, 상처받을 수 있음에 더욱 개방적이게 하며 긴장을 풀고 놀이할 수 있게 되며 축복을 경험한다.



창조의 길은 내적인 심리학에서 우주적 심리학으로, 정적 우주에서 창조력이 발휘되는 역동적인 우주로 나아간다. 우리 안에 신적 모상(이미지)을 낳는 것에 대한 신뢰가 없을 때 두려움과 죄악과 길들여짐 그리고 안락의 유혹을 받게 된다. 이미지에 대한 신뢰가 주는 고통은 새로운 출산, 새로운 창조의 고통이자 치유적인 고통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예술작품”으로서 하느님의 외향명상이다. 일과 놀이와 예술을 통해, 혼과 몸의 상호 결합을 통해 영과 생명을 낳게 된다. 사회정의, 예술 그리고 영성의 회복은 일하시고 창조하시고 놀이하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닮은 인류의 존엄을 회복하게 한다. 아름다움은 우리의 우주적 상호관계를 의식시킨다. 이는 아름다움의 체험이 우주적 온전함의 체험이기 때문이다. 우주가 상실됨으로 아름다움이 상실되고 그래서 우리는 신경증에 걸리게 된다.   



우리의 신적 출산의 권리와 책임인 창조성이 무시되는 가부장적 전통은 하느님의 모성의 측면과 우리 자신안의 모성을 발전시킬 책임을 경시했다. 모성의 억압은 예술가의 억압에 이어진다. 줄리안, 힐데가르드, 에크하르트, 메히틸드 등 중세 신비가들은 하느님의 모성을 경축한다. 감쌈, 출산, 양육, 흘러나옴, 포용, 반김의 용어를 통해 하느님의 신비를 모성적으로 표현한다. 창조의 길에서 보는 죄는 하느님이 모상인 우리의 상상력의 오용, 죽임을 위해 오용하는 창조성에 있다. 상상력의 억압, 창조력의 낙태, 내면의 예술가 박해가 죄에 속한다. 또한 예술의 상실은 사회적 죄가 된다. 예술가의 추방으로 삶이 왜곡되고 폭력적이게 되며 추해지고 권태가 찾아온다. 따라서 우리안의 신적인 창조성의 자각은 우리의 신성에 대한 가능성을 일깨운다. 우리 안에 잠재한 새로운 출산행위를 통해 신성 속으로 성장할 수 있게 한다. 아름다움은 치유하고 일치시키며 구원한다.



넷째는 변혁의 길(Via Transformativa)이다.  이는 자비, 경축, 에로스적 정의의 길이다.6) 이 길은 죄스럽거나 불의한 관계가 쇄신된 창조계를 회복한다. 여기에는 지혜와 경축, 자비와 놀이에로 귀환한다. 자본주의, 군국주의, 인종차별과 성차별은 정의와 자비없는 영성의 무력감과 연계되어 있다. 따라서 창조영성은 정적인 관상보다 행동하는 자비와 정의를 강조한다. 이 길은 아나윔(사회적으로 잊혀지고 억눌린 사람들)을 위한 예언자의 길이다. 창조영성은 무력한 자의 처지에서 힘과 지혜를 길러내고 교회와 사회의 변혁에 공헌한다. 여기에서 관상은 행동에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통합되어진다. 그러나 변혁은 쉬운 길이 아니다. 연설이나 시위로 되는 것이 아니라 가치를 식별하고, 문명의 규율을 세우며, 후세대들이 삶의 의미에 대한 전망을 얻을 수 있는 생활양식을 성취할 수 있는 훈련이 요구된다. 이는 먼저 새 창조에 관여하시는 창조주에 대한 신뢰 그리고 은총에 대한 우리의 의식 내에서의 영적혁명을 요청한다.



변혁의 길은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벧후3,13)을 구축하는 살아있는 예술이다.  평화와 아름다움, 정의와 자비, 차이가 존중되고 경축되는 삶을 추구하는 곳에 하느님의 영이 계신다. 성령은 또한 생태적 조화와 지구적 문명의 재창출에로 공동창조자인 우리를 부르신다. 이는 우리 각자 안에 있는 예언자에 대한 보편적 소명을 뜻한다. 예언자는 불필요하게 겪는 고통에 진지한 관심을 가지며, 비관과 냉소와 절망에 개입을 하며, 억눌린 자들의 분노를 변혁과 새 창조의 길로 재 순환시킨다. 이는 세계를 종살이와 억압에서 자유와 정의로 변혁시키라는 소명이다. 이는 각자의 삶과 전문직 내에서 예언자이기를 시작하라는 초대이다.



창조영성은 지구의 약자들, 아나윔들을 위한 영성이다. 여성, 토착원주민, 동성애자, 장애우, 제 3세계 가난한 이들은 본성과 창조계의 다양성을 무시하는 기존의 억압적인 영성에 의해 이들의 존엄과 정의와 축제를 차단하는 이념적 역할을 수행해 왔다((지배계층에 의한 타락-구속의 모델의 이념화). 상상력은 새로 낳은 신적 힘을 지닌다. 창조영성은 약자들의 상상력을 촉진하여 신적 에너지를 풀어 놓아 자기 세계를 재 창조할 힘을 부여한다. 아나윔에 대한 관심의 이면에는 우주적 상호의존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존재한다. 이 상호의존 의식속에서 자비가 깨어난다. 자비는 상호의존의 의식만이 아니라 상호의존의 삶을 수행한다. 이 자비의 실천은 축제와 정의실현 속에 구현된다. 축제는 에로스적인 가치(관계하기, 결합하기, 어울리기, 접촉하기, 동참하기)를 놀이로 표현하고, 이 표현을 통해 무력감과 분열이  치유된다. 에로스적인 경축이 일어나면 정의의 시대도 열린다.7) 남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된다. 이는 에로스적인 축제는 간접적으로가 아니라 직접체험, 불의로 고통받는 희생에 대한 눈으로 보고 직접 접촉하는 열정과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변혁의 길에서 죄는 돌볼 줄 모르고 무감동한 태만, 열정의 상실을 뜻한다. 우리 삶의 축제와 정의 실현을 위한 자비의 결여인 것이다. 변혁하기를 위해 상상력과 예술적 재능을 사용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변혁의 길을 거부하는 셈이 된다. 이원론에 근거한 폭력이 인간적, 성적, 인종적, 경제적 착취로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서 개인화한 구원은 창조계의 불의에 대한 냉담을 가져온다.  자비와 정의의 실천은 새 창조, 즉 하느님의 백성의 새 탈출, 새 해방을 표출한다. 이 변혁의 길은 모든 사람을 새 창조의 도구로서 정의와 변혁의 행위자로서의 역할을 회복하도록 초대한다. 자비와의 접촉함 그리고 에로스적인 경축은 우리에게 힘을 부여해 준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7 세포(몸)이 지닌 지성을 통한 생태 영성 10 계명 메인즈 2012-11-10 2693
6 우주적 그리스도에 대한 시-우리 위, 아래, 옆, 안에 계신 그리스도 메인즈 2008-05-21 2413
5 창조 영성과 우주 기독론 file 관리자 2008-04-23 2629
4 창조영성과 자비 file 관리자 2008-04-23 2775
» 창조영성에 이르는 수행의 길 file 관리자 2008-04-23 2962
2 창조영성, 그 의미와 내용 file 관리자 2008-04-23 2792
1 창조영성-기존의 '타락-구속' 패러다임을 넘어 file 관리자 2008-04-23 2501
박성용박사 | ecopeace21@hanmail.net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