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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집회와 기독교인의 비폭력 평화 행동


                                        박성용 비폭력평화물결 공동대표

                                     

복음과 상황 2008/8월호 기고


        촛불집회, 그 새로운 저항문화의 출현


지난 5월 2일에 중고생들에 의해 당겨진 촛불집회는 세계 역사상 유래가 없는 장기적이고 대규모의 자발적 집회라는 기록을 세우면서 과거에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시위 현상들을 보여주었다. 예를 들면 가족, 연인, 동료, 동아리들의 다양한 계층들의 참여, 인터넷 토론방을 통한 공동지성의 실험과 획일화되지 않는 다중적 행동과 행동전략에 대한 동의과정들, 수많은 자발적 여론 형성가와 시민기자의 출현 그리고 기존 언론권력의 무력화, 촛불소녀가 상징하듯 소녀, 아줌마들의 힘과 역할 증대, 명박산성에 대항하는 라면산성쌓기, 비장하고도 거칠은 저항문화가 아닌 재기발랄하고 축제적인 다양한 시위방식들이 그것이다.


연약한 촛불, 장미 한 송이, 노래 그리고 대형 컨테이너의 진입 막기에 대한 ‘명박산성’이름 붙이기와 그 막은 장소를 오히려 토론의 광장으로 사용하는 순발력, 직장에서 광장으로 그리고 아침을 맞이할 때까지 모였다 흩어지고 다시 모이는 지치지 않는 에너지들을 보면 평화진영에 몸담고 있는 본인도 이번 촛불집회에 대해서는 대단한 충격을 받았을 정도이다. 7월로 들어서면서 정치권의 여러 역풍과 강제 진압 등이 감지되고 있어서 촛불민심이 제시한 재협상이란 과제가 점점 멀어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 속에서도 필자가 한 가지 확신하는 것은 촛불집회가 보여준 새로운 대안적 상상력들과 지난 두 달 넘은 거리에서의 교육효과는 시민들의 직접행동과 비판의식에 지울 수 없는 각인을 해 주었고 이는 한국 민주주의의 도약에 커다란 에너지와 토양을 줄 것이란 전망은 결코 지나치지 않는 판단이라는 점이다.


특히 거리에서 그토록 많이 새롭게 외친 “비폭력”이란 구호가 집회참가자들의 폭력행위에 대한 자제를 갖고 오고, 다수에게 비폭력 평화행동에 대한 자각을 주었다는 평가가 있었다. 이어서 폭력이냐 비폭력이냐에 대한 뜨거운 논쟁을 인터넷 토론방에 가져오고 특히 정부측에서 극소수 시민의 과격한 행동에 대한 폭력성을 빌미로 질서를 위한 강제진압과 연행의 정당성을 홍보하는 이 시점에서 기독교인으로서 폭력과 비폭력에 대한 성찰을 한다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하여 글을 쓴다.



폭력과 비폭력의 잣대는 무엇인가?


어느 신문사의 주간잡지 최근호 광고에 나와 있는 광고는 다음과 같다. “촛불이 폭력이면 우리 사무실은 아마겟돈 전쟁터입니다/ 촛불이 폭력이면 조·중·동은 대륙간 탄도미사일입니다.../그런데도 화염병 대신 십자가와 목탁이 나왔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질긴 평화 보셨습니까...” 이글은 보이는 물리적 폭력과 -일부 시위대의 전경차 부수기와 전의경 구타- 물리력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시스템과 정책으로 행해지는 제도적 폭력 혹은 구조적 폭력은 -광우병소고기수입과 경부대운하건설에 의한 시민안보의 침해- 서로 그 사회적 비용과 규모를  볼 때 비교도 안 된다는 사실을 잘 표현하고 있다.


평화의 반대는 전쟁이 아니라 폭력이다. 이 폭력은 우리 자신이나 타인들을 지배하거나, 존엄성을 떨어뜨리거나 혹은 그들을 제거하는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 구조적, 상징적(문화적 혹은 종교적) 행동을 모두 포함한다. 폭력은 두려움, 분노 혹은 탐욕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대부분의 경우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종종 불의 앞에서 정의를 위한 욕구에 의해 권력의 부조화를 극복하며, 희생이나 억압을 극복하고자 하는 확신에 의해 보복적 폭력이 일어나기도 한다. 나와 남과의 관계를 분리하여 지배, 억압, 손상, 제거하는 어떤 형태도 바로 폭력에 속한다. 그리하여 폭력의 순환을 몰고 온다.


폭력의 논리는 우리 사회에서 지배적이다. 우리는 세계가 위험한 장소이고 인간은 본래 폭력적이라는 것을 매스컴과 정부정책, 사법제도에 의해 가르침 받는다. 이는 특별히 우리의 적들에게는 진실이다. 나를 대적하는 그들은  구제하거나 변화시키기 어려운 존재들로 이미지화된다. 우리의 삶이 전쟁지대이고 타자는 적들이라는 논리에 의해 우리는 갈등을 다루는 유일한 길은 스스로 정당방위로 폭력을 사용하거나 아니면 순응하거나 피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비폭력은 위와 같은 역-폭력, 회피 혹은 순응을 넘어선 철저하면서도 진지한 제 4의 길을 따른다. 그것은 무저항이나 소극적 태도가 아니다. 그래서 ‘능동적’ 비폭력(active nonviolence)이란 단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것은 폭력이 내포한 힘의 숭배와 강자의 논리를 넘어서 창조적인 대안적 실천을 모색하는 신실한 약자의 길이다. 능동적 비폭력은 ‘우리/그들’이라는 이분도식에 의해 “선인/악인, 우등/열등”으로 갈라서 상대를 악마화하는 것을 지양한다. 그것은 두려움과 위협을 사용하는 지배의 논리가 아니라 진실과 사랑을 통한 관계의 논리로 푼다. 비록 시간이 많이 걸릴지라도 적대자 안에서 선의 가능성을 불러내서 상대를 어둠과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고난까지도 감내한다.



예수님의 목회 본질은 샬롬의 통치 곧 비폭력 실천이다


예수의 폭력에 대한 대응은 ‘이에는 이로 눈에는 눈으로’의 옛 율법의 논리에 따라 힘으로 응전하는 역 폭력(counter-violence)은 아니다. 이는 악과 불의에 대한 대응에 있어서 폭력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똑같은 폭력의 사용은 폭력의 악순환과 그 사회적 비용이 크며 그 직접피해는 약자들 다수에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흔히 오해하듯이 폭력에 대한 회피나 순응주의도 아니다. 이는 근본적으로 폭력의 원인에 대한 해답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 예로 예수께서 말씀하신 “다른 뺨을 돌려대라. 속옷까지도 벗어주어라. 일부러 더 많이 짐을 지고 가 주어라”(마5:38-42)는 공상적이고, 피학적이며 수모의 길을 사는 무저항의 길이 아니다. 손등으로 한쪽 뺨을 맞는 모욕을 당함에 있어서 다른 쪽 뺨도 돌려대는 것은 억압자의 비인간적인 힘을 빼앗은 것이다. 겉옷까지 이제는 저당 잡혀야 하는 극도의 가난한 상황에서 자신들을 수치스럽게 만드는 제도와 채권자에게 이길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 속옷까지도 벗어주라는 것은, 그 제도와 인정 없는 채권자에 대하여 벌거벗음을 통해 벗긴 사람에게 수치를 주는 항거이다. 그래서 채권자가 합법적으로 돈을 빌려준 자가 아니라 땅 없고 가난한 자를 굴욕적이게 만드는 무리로 노출되는 것이다. 점령군에게 오리의 강제노역의 의무적인 차출에 대항하여 반란이나 증오가 아니라 오리를 더 가줌으로서 피억압자는 선택의 능력과 인간의 존엄성을 되찾고 강제노역자의 우월성에 당혹감을 주는 새로운 상황을 연출하게 된다.


약자는 악에 저항하고 비협조함으로 악을 닮지 않으면서도 도덕적 주도권을 쥐게 됨으로서 억압자의 변화를 유도한다(채권자-‘제발 속옷은 입으시오.’ 로마병사 -‘이젠 제발 내 짐을 돌려 주시오.’). 이렇게 철저하면서도 창조적인 반응을 무엇이 일으키는 것인가? 제도와 권력이 강자의 편일 때, 억압자의 모욕, 채권자의 강제집행, 무기를 지닌 병사에 대해 약자가 인간으로서의 자기 존엄성을 회복하고 서로 더 깊은 폭력을 경험하지 않으면서 상대의 폭력행위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예수께서는 자기 정체성의 신성함과 자신의 몸인 이웃존재로서 타자에 대한 인식의 변화에서 그 힘이 나온다고 가르친다. 


예수는 다른 독특한 자기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른바 그의 ‘아바(아버지)체험’에 근거하여 자신이 하늘 아버지로부터 기원하고 다시 그에게 돌아간다는 이 자기 정체성으로부터 나오는 증언들과 행동으로 인해 그를 대하는 자들은 그 어떤 신적 현존의 생생한 감각을 필연적으로 느끼게 되고, 강력한 생활변화의 동기를 부여받게 되며, 과거를 단(斷)하고 갱생의 대안적 상상력을 지닌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신적현존의 내주하심에 대한 자기 정체성의 이해는 타자에 대한 인식에 변화를 수반한다. 타자를 한 아버지의 같은 자녀로 보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타자의 고통에 민감해진다. 폭력은 타자의 고통에 대한 예민성의 결여에 의해 일어나며 이는 ‘나’와 ‘우리’에 관계없는 ‘그’나 '그들‘로서의 타자가 정위되어졌을 때, 그들의 고통에 대한 윤리적 민감성을 약화시키고 결국은 타자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는 길이 쉽게 열리기 때문이다. ‘나/우리’ 대 ‘너/그들’의 분리는 가치에 있어서 상하계급적인 사고를 형성한다.


이렇게 구분되어 질 때 ‘힘(power)’은 자연스럽게 열등한 능력을 지닌 것으로 간주된 후자를 통제하는 ‘지배로서의 힘(power-over)’으로 개념화된다. 아버지의 힘은 자녀를 지배한다. 판사의 힘은 피고를 지배하게 된다. 인간의 힘은 자연을 지배한다.... 지배의 힘을 가진 쪽은 지위의 유지와 삶의 능력에 있어서 보다 많은 것과 혜택을 누리는 ‘특권’의 누림을 정당화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우월한 자가 지배와 종속을 정당화하는 지배의 논리를 승인하는 사회체제가 구축되어지고 이는 당연하고 자연스런 사회적 실천으로, 공권력으로, 법으로, 폭력각본이 사회적 구조 속에 작동하게 된다.


한 아버지아래 형제자매로 계급적, 이념적, 종교적 타자를 보는 방식은 상대의 독특성을 인정하고, 그 다양한 독특성의 교제가 서로의 안녕과 통전성을 지원하여 더욱 풍부한 살림의 그물망을 형성하게 된다. 이것이 생태계와 뇌신경계에서 보여주는 진실이다. 타자가 내 존재의 일부임을 알 때 우리는 나의 안녕과 생존은 타자에 철저하게 의존하고 있음을 인정하게 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힘의 숭배 없이, 지배의 논리 없이 오히려 나의 약함과 상처받을 수 있음이 너에게 개방되어지고 너의 약함과 상처받을 수 있음은 나에게 개방되어지면서 상호 의존과 신뢰가 싹트며 우린 서로 손잡게 되고 ‘같이 일함’의 가능성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힘과 무기는 우리를 변혁시키지 못한다.


사도바울의 말처럼 몸의 가장 약한 부분을 우리가 더욱 감싸고, 한 지체의 아픔이 전체에게 전달된다는 몸의 고통에 대한 지각력과 약한 부위에 대한 전체 몸의 즉각적인 공감능력이 몸의 건강상태를 만들고, 건강측정의 표준이 된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철저하게 이런 점에서 사회적으로 배제된 약자들과의 -세리, 창녀, 죄인, 이방인, 과부, 어린이- 우선적인 식탁교제와 치유를 통해 그리고 잃은 자와 섬기는 작은 자에 대한 비유 속에서 비폭력적인 사회적 몸(공동체)을 만들기 위한 실천운동이었다. 몸의 각 지체의 차이를 존중하되 유기적 관계와 소통을 통해 배려와 상호성의 관계를 만들어, 약한 부위의 아픔을 전체 몸의 관심사로 만들어 내는 능동적인 비폭력의 대안사회를 꿈꾸었던 것이다.



비폭력 실천은 구호가 아닌 내적 점화를 요구한다


예수의 산상수훈에서 비폭력 실천에 대한 영감을 받은 마하트마 간디는 비폭력 시위 과정에서 끊임없이 비폭력 훈련을 강조했다. 물레돌리기와 소금 행진은 대영제국의 강제적 힘에 비하면 아주 미소한 행동이다. 그러나 그것이 의식적으로 대중훈련을 통해 일어날 때 영혼의 무기가 되어 총과 칼의 힘을 극복한다. 그는 악에 대한 비협조로서 저항과 선에 대한 협조로서 협력적 프로그램의 중요성을 훈련 덕목으로 제시한다.


시위는 충분하지 않다. 정부의 실책에 반대를 외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각자가 자신의 영혼 내면에서 그가 공모하고 있는 악에 대해 책임을 지기 시작하고,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는 대안을 실천하는 데서 비폭력 행동의 진실이 있는 것이다. 기독교 장로가 대통령이 되고 정부내각의 여러 명이 대형교회의 교인들이며 그들이 새 정부에 들어와 내놓은 여러 국책사업의 실책과 소통부재는 그동안의 성장위주의 한국기독교의 가르침과 수련이 가져온 부메랑효과의 결과이다.


어쩌면 그렇게 하나같이 부동산 투기와 재테크의 귀재들이고 도덕적 무관심과 대화불가능한 일방통행의 정신구조를 갖고 있는 것인가? 촛불을 든 자를 ‘괴담’과 ‘사탄’이란 용어를 서슴없이 쓰고 공공의 프로그램에 사찰을 의도적으로 지워버린 마음의 경직성은 이미 위험수위를 넘은 기독교의 현 주소 아닌가? 이는 공모를 넘어 아예 선에 대한 분별력도 상실한 상태는 아닌가 염려스럽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누군가 기적을 행할 정도로 거대한 일을 벌려도 거기에 현혹되지 말고 오히려 작은 구름 하나가 보일 때 시대의 징조로 받아들이고 그리고 마지막 심판때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행하는 것이 나에게 행하는 것임을 알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필자는 말한다. 이 ‘지극히 작은 것’인 촛불을 시민들이 들 때 한국교회는 정신을 차려 시대의 징조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제 우리는 외면의 촛불을 드는 것을 넘어서서 스스로 촛불이 되어 자신안에 있는 악과의 공모를 정화하고 빛이 밖으로 나가도록  영혼에 내적 점화를 시도하기 위한 결단을 할 때임을 알아야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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