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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조영성과 그 목회적 적용 가능성 모색


                                     박성용 비폭력 평화물결대표


           --- 목 차 ---


          -시대의 징조로서 위기와 변화의 긴급성          

          -위기의 시대에서 기독교 신앙의 재성찰

          -지속가능한 미래사회를 위한 기독교 신앙에의 새로운 도전

          -창조영성의 의미    

          -창조영성에 기초한 목회의 전망

          -맺는 말




시대의 징조로서 위기와 변화의 긴급성


2000년대 이후에 들어와 전 지구적으로나 자신이 사는 지역에서 우리가 피부로 느낄 만큼 위기에 대한 의식이 점점 뚜렷해지고 실감을 할 정도가 되고 있다. 최근의 미국에서 기원한 금융위기,  배럴당 20여 달러하던 것이 이젠 100달러로 급등한 기름 값으로 인한 각종 수입농산물과 원자재의 비용 상승과 생필품의 상승압박, 더욱 심해진 폭염과 태풍의 잦은 피해를 가져온 지구온난화의 어두운 결과들이 멀리서 희미하게 보이던 것이 바로 내 주변에 바싹 다가와 현실이 되면서 안전에 대한 두려움과 절망이 유포되고 있는 것이다.


엘 고어의 ‘불편한 진실’이란 영화에서 이야기 하듯이 개구리가 뜨거운 물에 들어가면 위기를 즉각 간파하고 튀어나오지만, 아주 서서히 불을 달구기 시작하면 위기를 느끼지 못해서 움직이지 않는다는 비유를 통해 그만큼 서서히 달궈지는 환경위기는 이미 뜨거운 상황이 되어도 우린 아직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위기의 상승과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할 변화의 요청은 이제 이 시대의 징조가 된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환경위기는 사실상 또한 우리 기독교의 영적위기의 바로미터가 된다. 왜냐하면 외적인 행동의 결과는 언제나 안에서 일어난 것을 투영시키기 때문이다. 세상과 자연과의 결속을 상실하고, 우주적인 고독속에서 인간중심의 거만함과 자연파괴를 가져온 무기력증은 바로 기독교의 자기 존재의 근거인 신비적이고 예언적인 감각의 상실(창조영성의 상실)에서 오기 때문이다. 이것이 지금 열대우림을 베어내고, 미래세대를 죽이면서도 자기 홀로 경건하고 행복해 할 수 있었던 이유인 것이다. 



위기의 시대에서 기독교 신앙의 재성찰


기독교 신앙의 참된의 기준과 실천 에너지의 근원에 대한 판단의 세 패러다임적인 축은 창조사건에 대한 이야기(존재론적 측면), 출애굽 사건에 대한 이야기(윤리적 측면) 그리고 그리스도 사건에 대한 이야기(전망적 측면)의 접합점에서 이루어진다. 성서의 증언에 따르면 기독교 신앙공동체의 존재근거는 하나님께서 먼저 행하신 샬롬의 질서화에 있다. 창세기 서두는 혼돈과 어둠(카이오스)에서 “있으라” 하신 창조주 하나님은 먼저 그분의 의지에 의해, 만물들이 자기 삶의 공간을 갖게 되었고, 다양성, 풍족함, 상호의존의 평화로움에 기초한 샬롬의 질서화에 대한 존재적 근거를 제시한다. 신은 그들의 이러한 다양성, 풍족함, 상호관계성에 의해 ‘보기에 좋았다’는 심미적 충격과 기쁨을 드러내면, 창조자로서 경외로운 우주만물에 흡족하며 안식하신다. 샬롬의 질서화의 가장 궁극 상태인 이 ‘안식’은 '존재의 근거/힘’이신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주는 궁극의 선물이다. 또한 인간은 ‘하나님 형상’에 근거하여 신의 자비와 신의 뜻을 실행하는 능력을 품수 받으며 생물에 ‘이름을 짓는’ 행위를 통해 상호교제를 통해 샬롬의 질서화를 대리한다.


하나님백성의 태동에 대한 시원적 사건(primordial event) 출애굽기 서두는 샬롬의 질서화에 대한 윤리적이며 사회구조적 근거를 제시한다. 억압, 고역, 지배, 폭력의 에집트로부터 자유, 해방, 평등의 가나안으로의 여정을 통해 이들은 정체성의 변화(떠돌이 밑바닥 집단인 하비루가 이스라엘이 됨)를 얻게 되었고, 그 정체성의 확증으로서 십계명에 대한 약속 즉, 삶의 신성함에 대한 헌신(1-4계명)과 형제자매로서의 상호의존성(5-10계명)에 대한 계약(covenant)을 통해 해방공동체안에서의 샬롬의 질서화를 가시화한다. 특히 출애굽 사건이 중요한 것은 어떤 하나님을 계시받았고, 그들은 누구를 섬기며, 어떤 삶을 지향해야 하는가에 대한 근원적 경험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신음하는 자들의 고통과 신음을 ‘보시고 들으시며 행동하시는’ 분이시라는 것과 자기자신을 윤리적, 사회적 어둠과 혼돈에서 샬롬의 질서화로 불러 내시는 분이시고 이에 대해 이스라엘은 책임을 갖고 있고 이에 대한 헌신의 계약으로서 우리의 삶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실현의 목회는 샬롬의 질서화에 대한 재표현(re-present)이자 전망에 대해 확증한다. 즉 존재적 근거로서 혼돈(케이오스)으로부터 샬롬의 질서화(코스모스)로, 그리고 사회구조적 근거로서 억압, 폭력, 죽음, 고역 그리고 지배질서로부터 샬롬의 질서화(해방공동체의 형성)는 예수의 목회에서 극명하게 초점을 이루게 된다(신의 자비로움에 근거한 샬롬과 돌봄 공동체의 형성). 예수께서는 신의 통치(신의 현재적이고 역동적 활동으로서의 통치/지배)를 선포하고 안식의 최고점인 ‘주님의 은총의 해’(눅4:18-19; 묶인 자에게 해방, 눈먼자가 눈뜸, 억눌린자의 자유)를 목회의 알파와 오메가로 삼는다.


그의 하나님 나라 목회는 비유, 치유, 식탁교제를 통해 가시화된다. 생태적 비유를 통해-들의 백합/공중의 새, 겨자씨, 문, 양, 빛/소금, 밭의 보화, 무화과나무, 누룩 등등- 존재하는 사물에 내재된 신성을 드러내어 삶의 거룩성과 약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증거하며, 치유를 통해 이세상에서의 온전한 실존과 육체성에 대한 관심, 고통과 분리에 대한 극복을 보여주시고, 사회적 약자들과의 식탁교제를 통해 하나님 나라에서의 친교와 돌봄의 전망을 여신다. 비유는 샬롬의 질서화에 대한 인식론적 변화를(“이건 새로운 권위인데”), 치유사건은 고통받고 상처받기 쉬우며, 빈궁한 몸에 대한 샬롬의 질서화의 확대와 그 철저성을, 그리고 추방된 자들과의 식탁교제는 생명의 향연에 대한 비전을 제시함으로서 샬롬의 질서화에 대한 미래적 전망을 제시한다 (빈궁한 생명을 포함되는 포용적<inclusive> 이고 비계급적<non-hierarchical>인 생명의 향연과 풍성함 그리고 그 기쁨-‘보기에 좋았더라’의 재 표현). 이렇게 예수의 하나님나라의 목회 -샬롬의 질서화-는 만물 안에 계시고, 만물을 통하여 계신 우주적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로운 가난한 자인 생태적 타자와의 친교와 돌봄의 우주적 목회로 확산되는 것이다.  



지속가능한 미래사회를 위한 기독교 신앙에의 새로운 도전


창조사건, 출애굽 사건 그리고 그리스도 사건에 대한 성서의 근본적인 비전(the root visions)이 바로 위기의 시대에 21세기 인류가 모색하는 지속가능성의 문제인 인간, 미래세대, 그리고 자연간의 샬롬의 비전과 연결되는 신앙적 기초를 제공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던’ 창조질서의 회복에 대한 근본전망으로부터 21세기 기독교인은 지구적 샬롬의 질서화를 위한 보편적 책임성이라는 새로운 자기 실존의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이제는 70년대 이후 지구공동체가 국제환경회의를 통해 제시한 인류의 새로운 덕목인 ‘지속가능성’에 대해 책임을 지고, 인류의 새로운 계약인 ‘지구헌장’이 출현하게 되었다. 이 ‘지구헌장’이 제기하는 새로운 신성한 믿음으로서 “지구의 생명력과 다양성과 아름다움을 지키는 것”에 대한 요청은 기존의 기독교 신앙생활에 대한 새로운 도전을 가져오고 있으며 이들 도전의 특징들은 다음과 같다.


* 신앙의 관심영역이 교회 내부와 개인의 영혼의 문제라는 좁은 관점에서 지구가 문제가 되는 신앙훈련에 대한 재 방향설정이 필요하다 (세상에서의 참살이-wellbeing- 심화).

* 환경파괴의 시급성과 수정가능한 시간의 제한은 ‘변화’를 가져오는 신앙훈련이 요구되어진다(선택, 개입, 변혁을 통한 변화를 가져오는 신앙인의 삶).

* 지구의 생존은 상호관계성, 공동협력, 대화, 보편적 책임성을 강조하는 지구 윤리에 의존한다(지구시민이 되는 보편적 신앙덕목의 재발견).

* ‘더불어 사는 삶’이 가능한 갈등해결 능력을 갖춘 기독교 제자직 훈련이 요청 된다 (소수자의 인권존중과 사회적·생태적 타자와의 공존능력 강화).

* 마음의 변화와 사회구조의 개혁은 생명을 섬기는 신념과 가치를 내재한 종교적 상징의 재활성화를 전제한다(상징의 힘 부여 능력 화복).    

* 위기상황의 빠른 대처, 의사결정의 민주적 수렴 그리고 시민단체와의 공동사업과 파트너쉽을 강화하는 신앙수련이 중요해졌다(샬롬의 통치를 위한 협력적 지도력의 강화).



창조영성의 의미


기존의 신앙의 패러다임이자 어거스틴과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완성된 타락-구속(fall-redemption) 모델은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 영혼 속에서 일하시는가 하는 내향성을 강조함으로써 인간중심주의의 사고틀을 형성하고 이는 토양살해, 생태살해 등의 죄를 적발하는 데 무능하였고, 원죄를 강조함으로써 우리 인생의 이지상성, 육체성, 아름다움, 축제에 대한 감각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얻었다. 이는 생에 대한 냉소, 무관심 그리고 따분함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결국은 지구 파괴에 대한 인간의 책임과 자기결단의 창조적 능력을 북돋는 데 무력해지고 말았다.   


어거스틴보다 더 오래된 성서전통으로서 창조영성은 공간과 시간의 피조물들에 대한 관계회복이라는 영성에 관한 것이다. 공동관계로서 모든 존재는 상호 관련됨, 교제함, 응답함속에서 정체성을 지닌다. 신의 거룩성은 이 관계를 통해 표현된다. 창조영성은 야휘스트 기자의 “좋았다”는 선언처럼, 생을 선물로 즐기고 나누며 감사하며 이에 대한 심미적 표현을 긍정하게 된다. 존재한다는 놀라움과 경외를 각성시킴으로 사소함, 산만함, 중독 등에 덜 종속시킨다. 신의 의지에 따라 모두의 기원은 거룩하며, 따라서 우리의 운명도 타자에 의존해 있고, 모두가 구원받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창조영성은 생에 대한 신비주의를 부활시켜 하나님(예, “isness” 이신 하나님-에크하르트)의 자비와 만물의 상호관계성을 회복시키며, 사물에 대한 깊은 경외, 이 세상에 대한 긍정, 쾌활성과 유머, 그리고 마음을 각성시켜 힘을 부여하게 된다.


창조영성에 기초한 목회의 전망


* 예배- 우리의 경외는 하나님의 선한 창조력을 통한 창조질서의 아름다움과 우주적 깊이를 맛봄으로 시작한다. 존재하는 것에 대한 “매우 좋다”하신 은총과 축복에 대해 감사의 응답으로 우리는 동참하며,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해 더욱 깊이 존중하며 사적인 소유화하지 않고 인간중심적인 언어사용을 넘어서서 다양한 생명들의 존재함을 경축한다. 존재하는 것의 선함과 선물로서의 생에 대한 찬양은 우리가 경험하는 비탄과 슬픔을 극복한다. 은총이 모든 존재 이전에 먼저 있었다. 우리가 은총의 감각을 회복할 수 있게 되면, 또한 다른 이와 다른 존재들에게도 은총을 베풀 수 있는 치유의 작업과 진정한 노력들이 생겨난다.


이 무조건적인 사랑에 의해 넘치는 풍부성의 감각은 은총의 희소성에 따른 소유와 경쟁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한다. 여기서 우리의 기도는 이제 생명에 대한 철저한 응답이 된다. 생의 거룩함과 선함에 대한 철저한 긍정(신비주의)과 더불어 신의 은총을 제한하는 어떤 어둠과 억압에 대한 부정(예언)의 힘이 ‘솟구치는 샘’을 맛본 영혼들의 공동표현을 통해 형성된다. 그리고 생명들은 이러한 은총의 동역자로서 존재하며, 예배는 선물로서의 삶의 거룩함과 신비를 경외하는 데 있어 그 ‘깊이, 넓이 그리고 높이’가 확산되어지게 된다.


* 선교/봉사- ‘보기에 좋았다’는 하나님의 세계에 대한 심미적 감동과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은 우리의 땅에 속함(the earth-ness)에 대한 각성을 불러일으키며, 세계를 하나님의 몸으로서, 성사적인(sacramental) 것으로 보게 한다. 세계를 성사적으로 본다함은 하느님이 모든 것 안에 그리고 모든 것이 하느님 안에 있음을 보는 것이다. 즉 신의 은총과 자비의 보편성을 통해 우리 모두가 연계되어 있고 우주는 하나의 공동체가 된다. 그러기에 조화, 아름다움, 정의가 요구되어 진다. 이 보편성속에서 개인화된 이원론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존중이 싹튼다. 이를 통해 신의 자녀라는 인격존엄과 하느님 나라 건설에 대한 책임에 대한 보편적 자각이 이루어지게 된다. 왜냐하면 그분의 자비가 우주에 편만하기 때문이다.


이 자비를 통해 우리는 타자의 고통에 개방되며, 비움, 침묵, 어둠을 통해 신적 깊이에로 잠겨들어 간다. 우리가 은총의 선재성을 인식하면, 실제로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다는 통찰의 기회를 얻게 되며, 따라서 우리는 해방에 투신할 수 있게 된다. 은총 안에서 자기겸허를 통해 여러 마음의 무장들이-경쟁, 성공, 소유, 능력의 확보- 해체되는 삶의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 친교-지배와 고역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이미지이자 공동창조자로서의 우리의 정체성을 회복에 대한 축제와 친교는 전에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한다. 파괴적이고 비극적인 죽임의 삶이 아름다움과 놀라움, 경이와 정의, 부드러움과 즐거운 놀이를 창조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내면의 심리학에 머물러 희생과 무거움에 둘러싸여 있던 우리는 춤추는 자이신 하나님의 춤이 되어 교제하고 긴장을 풀며 즐거움을 발견한다. 이 놀이와 교제를 통해 자기방어 없이 상처받을 수 있음에 대해 더욱 개방적이게 된다. 그래서 타자와 낯선 자는 위협과 경쟁이 아니라 힘과 생명을 주는 파트너가 된다. 이들의 친교는 사회적·생태적 약자의 존엄과 정의 그리고 그들의 축제를 포함한다. 약자들의 상상력을 강화하고 신적 에너지를 부여하여 새로운 자기 세계를 창조할 힘을 얻는다. 왜냐하면 친교는 우주적 상호의존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이 상호의존 속에서 신의 자비가 품어져 나오고 타자에게 줌은 자연스런 표현이 된다. 여기서 무력감, 냉담과 분열이 치유되고 불의로 고통받는 희생에 대한 회복적 정의에로의 열정이 창조된다. 그리하여 새 창조, 즉 하느님의 백성의 새 탈출과 새로운 해방으로 변혁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 샬롬의 질서화는 구약의 창조사건과 출애굽 사건에서 예표되고 그리스도 사건에서 실증되며 보혜사 성령의 사역을 통해 궁극적 미래에 실현될 것에 대한 선취가 된다. 이는 바로 더 이상 어둠과 혼돈이 없는 샬롬의 질서화로서 교제와 그 창조의 면류관이자 궁극 표현인 안식이 바로 그것이다. 


* 교육 - 창조영성은 하나님의 형상이자 공동창조자로서의 우리의 내면을 발전시킨다. 기존의 모델은 죄로 인한 인간의 불완전함과 두려움의 강조를 통해 이러한 신의 형상을 억압하고 상상력을 거세하였다. 그리하여 영혼이 왜소해지면서 폭력적이게 되고 권태를 증가시켰다. 따라서 창조영성의 교육의 근본은 우리안의 신적인 창조성에 대한 각성을 통해 우리의 신성에 대한 잠재성(하나님의 형상)을 현실화하고 이를 성장시키는 데 노력한다. 그러한 수련을 통해 우리는 치유하고 일치시키며 힘과 지혜를 길러내고 사회의 변혁에 공헌한다.


은총과 자비의 선제권-하나님께서 먼저 하셨고 우리와 함께 하신다/성육신-에 대한 각성으로서의 신앙수련은 삶의 선함과 존재들의 가치를 식별하고 삶의 의미에 대한 전망과 의미를 재창조할 수 있는 인격혁명을 가능케 한다. 절망과 냉소 그리고 분노가 자유와 정의의 새 창조의 길로 변혁된다.


맺는 말


창조영성에 있어서 신의 자비와 은총은 치유와 축제 그리고 정의를 실천할 수 있는 에너지를 가능케 하고 대안의 지속가능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론적이고 실천적인 에너지원이자 원리로 이해된다. 즉, 신의 자비는 사적이며 감상적이고 도덕적인 성격을 넘어서서 정의를 실천하고, 축하하며, 자기사랑과 타자사랑을 하나로 하는 상호의존적이며 실천적인 영성의 핵심인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인간다움의 생활방식이 되고 사회변혁의 행동방식이 된다. 그것의 결여로 사회는 식량과 에너지 문제, 과학의 비인간화, 실직과 불필요한 사치와 소비품의 증가, 삭막한 관료주의, 냉혹한 경제학, 메마른 일과 지루한 교육활동, 자연에 대한 폭력 등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에 반해 창조영성의 목회에로의 초대는 생의 거룩함에 대한 신비체험을 강화하고, 엘리트 영성이 아닌 민중의 영성을 지향하며, 사회적·생태적 약자를 위한 평화, 정의 그리고 해방의 길을 열어 주며, 메마른 현대교회의 목회를 일과 놀이 그리고 축제와 연결시킴으로서 새 영혼, 새 땅 그리고 새 하늘의 출현에 기여하게 된다.


창조사건, 출애굽 사건 그리고 그리스도 사건안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것은 ‘샬롬의 질서화’에 대한 신의 의지와 이에 관여하는 신의 자비이다. 우리의 목회가 구원을 개인 영혼안에서만 일어나는 것으로 오해함으로써 신의 통치를 세상에서 인간의 심리적 영혼의 문제로 국한함으로써 그동안 악의 통치는 세상에서 그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렇기에 환경의 위기는 곧 신앙의 위기요 영적 위기이기도 한 것이다. 구속적 영성(redemptive spirituality)이 창조영성(creation spirituality)안에 근거 지워지고 우리의 목회가 샬롬의 질서화라는 존재론적이고, 사회적이며, 생태적인 영역을 회복할 때 환경문제는 새로운 돌파구를 얻게 되고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가능성을 얻게 된다. 21c 한국 감리교가 사회적 지도력을 얻고 영적 근원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은 바로 이러한 샬롬의 질서화라는 성서비전을 투철하게 하는 생명평화목회를 회복할 때 가능하게 될 것이다.    -끝-

2008. 3.7. 기독교대한감리회 환경위원회 모임에서 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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