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
글 수 25
 제 17회 공동성서연구 : 2006년 5월 15일-17일, 민들레 성서연구원



성서공동연구 I: <성전의 물, 회복의 물>


성서 본문: 에스겔 47:1-12, 막1:9-11



1. 물에 대한 신학적 고찰

여행사들이 지상의 마지막 낙원이라 광고를 하는 몰디브는 그 아름다운 해저의 산호초와 주변의 바다의 경치로 인해 마치 ‘수중사원’을 방불케 한다. 그러나 이곳이 해수면의 상승으로 조만간에는 지구상에서 사라질 것이라는 사실로 주민들은 국제회의 때마다 호소를 하고 있으며, 작년에는 엘리뇨의 이상기온으로 곳곳이 백화현상의 “수중묘지”로 화하는 피해를 보게 되었다. 몰디브의 경우에 주목할 현상은 누가 범인인지를 가려낼 수 없다는 점이다. 제 1세계의 불특정다수인의 화석연료사용으로 야기된 이 문제는 생태적 피해가 눈에 보이지 않는 원거리 타자(distant Others)에 의해 야기되며, 그들은 자신의 삶의 방식이 희생자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의식을 전연 갖지 않는다. 그리고 희생자는 지구상에서 엉뚱한 다른 곳의 가장 약자들이 받게 된다는 점이다. 수혜자는 가장 비-생태적으로 사는 사람들이며 피해자는 가장 생태적으로 사는 사람들이라는 이러한 윤리적 모순은 개발문제, 토착민문제, 핵폐기장 및 쓰레기장 건설문제 등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며, 생태학은 따라서 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차원의 윤리적·영적 민감성의 문제-악과 죄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성서에 따르면 하느님은 생명을 일으키고, 창조질서를 유지시키며 인간은 이 창조질서를 돌볼 책임을 지닌 존재로 부름을 받는다. 그리고 하느님은 자신이 창조한 모든 피조물로부터  공감하시듯-“보기에 좋았더라!- 우리도 공감할 수 있는 존재로 부르신다. 이 공감속에서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춘다”(시85,10)‘고 말한다. 특히 성서는 물을 거룩한 것으로 본다. 천지창조의 한 처음에 있어 하늘과 땅이 지어질 때 가장 먼저 거룩하게 언급된 것이 물임을 주목해야 한다. “땅은 아직 모양을 갖추지 않고 아무 것도 생기지 않았는데, 어둠이 깊은 물 위에 뒤덮여 있었고 그 물 위에 하느님의 기운이 휘돌고 있었다.”(창1,2) 물과 ‘하느님의 기운’과의 연계성은 물이 생명이자 태초의 힘과 관계되어 있다는 존재론적 거룩함을 암시한다.


물은 어머니의 뱃속-양수-에서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식수- 우리와 동행한다. 과거에는 어떤 문화권에서든지 물을 어떤 특별한 것, 거룩한 것으로 보았다. 인류의 모든 경전들은 물에 인간의 몸과 정신과 영혼을 정화시키는 힘이 있다는 사실을 확증해준다. 아프리카 토착민에게 있어서 비가 온다는 것은 커다란 축복이며 우사(雨師)는 ‘하늘의 목자’로 존경받고 신의 수장으로서 공동체에 봉사한다. 이는 비와 신이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가 오면 그들은 ‘신이 떨어져 내린다’고 말한다. (존 음비티, 아프리카 종교와 철학) 창조신학자 매튜폭스는 말한다. “우리는 우주적 은총의 양수 속에서 살고 있다.”(우주적 그리스도의 도래) 중세 신비가 에크하르트는 말한다. “하나님은 아무도 막을 수 없고 아무도 멈추게 할 수 없는 거대한 지하의 강물이다.” 우리 조상들은 바다와 강, 호수에 영이 살고 있다고 믿었다. 오늘 우리는 이런 ‘미신’을 비웃으려 개울과 강과 바다에 온갖 쓰레기를 갖다 버린다. 미국에서만 1년에 4천만톤의 유해 쓰레기가 지구의 젖줄, 물에 유입된다. 물에 대한 존재론적 거룩성에 대한 인식은 사라진지 오래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엄청나다.


2. 물의 오염과 그 심각성

물과 관련된 생태적 파괴의 심각성-이미 수십 년 전부터 점차로, 소리없이 가속화된 심각성-의 예를 들어보도록 하자.


-수많은 강이 그 오염으로 수영이 금지되었고, 해안지역의 오염가속화로 어류와 패류의 안전성이 문제가 되고 있다. 특히 도시민들의 대부분은 자연순환의 깨끗한 물이 아니라 정수공장의 산업생산품으로서 물-몇 차례의 화학처리과정을 거친 수돗물-을 마시고 있다.

-우리가 마시고 음식을 만드는 데 필요한 물은 3리터이다. 씻고 설거지는 26 리터, 독일인은 하루 127 리터, 미국인은 하루 400 리터, 한국인은 하루 370 리터이다. 자동차 1대 만드는 데 물은 60-70톤이 들어가며, 스테이크 소고기 1KG은 20,000리터, 골프장 하나는 1000명이 사용하는 물보다 더 많이 들어간다. 

-2002년 말 현재 폭풍우의 피해, 침식, 범람으로 해안을 지키고 5억 인구에게 편익을 제공하며 개도국 어획량의 1/4을 생산하는 먹이 번식장소인 세계 산호초 30%가 심하게 손상되었다. 이는 인간의 산호채취, 연안개발, 폐기물 투기, 내륙의 삼림벌채, 지구온난화에 기인한다.

-인류의 1/5이 안전한 물 공급에 접근할 수 없으며, 2/5는 위생에 부적합한 물을 이용한다. 아시아에서는 7억 인구가 깨끗한 물 공급을 받지 못하고 있다. 불행히도 식량과 개발에 따른 물수요가 급등하여 물 부족에 대한 압박이 점점 더 보편화되고 있고, 현재로서는 과학자들도 기후재난보다 물 비상사태가 더 확실한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세계 인구의 40%가 국경을 통과하는 강 유역에 살고 있어서 증가하는 물 수요에 따른 분쟁도 예측되고 있다.

-지구상의 습지 절반 이상이 과거 100년 안에 사라졌다. 지하수공급, 물흐름조절, 홍수조절, 다양한 생물군집 서식장소, 독성물질의 제거, 생태계 오염의 완충역활, 지구상에서 가장 생산적인 생태계 역활을 하는 습지가 개발로 사라지고 있다.

-지하수[대수층]는 오염물질로 하수구가 되어가고 있다. 4천년가량 존재해 온 지하수는 1년에 30m정도 움직인다. 심층 지하수는 전체 지하수의 약 80%를 차지한다. 지하수는 전 세계 인구 15-20억의 주요 식수원이다. 지하수 고갈문제는 인도,중국, 미국, 북아프리카, 중동 지역에서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또한 지하세계는 항상 하수, 쓰레기, 시체, 우리가 폐기해야 하는 모든 것을 버리는 하수구가 되어 치명적으로 지하수가 위협을 받고 있다.

- 물에 든 화학성분이 새, 물고기, 인간의 번식장애를 일으키고 있다. 제지공장과 화학공장에서 사용하는 혼합독극물인 벤젠, 크실렌, 톨루엔 그리고 농업지역에서의 살충제, 제초제, 질산염, 암모니아 등은 임산부에게도 침투하고 있다. 지난 50년간 세계 남자들의 정자수는 절반으로 감소하였고, 바다, 강, 호수에 사는 많은 동물들이 후손을 보지 못하거나 기형의 자손을 낳고 있다. 우리가 사용했던 많은 화학물질은 아주 오랫동안 토양과 물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남아 어느 곳에서든 모든 동물과 인간의 조직 속에 축적될 것이다.

-대수층의 규모는 어마어마하기에 일단 오염되면 인간이 접근하기도 힘들고, 정화하기도 거의 불가능하다. 매립, 정화조, 하수처리 등 쓰레기와 폐기물을 숨기기 위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이 오히려 지하수를 화학적으로 오염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해왔다. 심층 지하수의 남용은 엄청난 재난을 야기한다. 목초지와 하천이 마를 뿐 아니라, 건물에 손상이 오고, 숲과 동식물이 소리없이 차츰차츰 멸종된다. 그리고 온실효과와 물부족사태가 엄청난 생태난민-월드워치는 약 5억 명을 추산-향후 10년 15년 안에 만들어 낼 것이다.

3. 물에 대한 성서적 고찰

이렇게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는 인류와 생명에 대한 안전에 대한 위협은 급속히 감소하는 삼림, 댐으로 가로막힌 강, 말라가는 습지, 독성및 잔류성 물질의 대량확산, 불안정한 기후 등의 복잡한 생태적 그물망이 찢겨져 나감으로 생기는 결과이다. 이는 물에 대한 새로운 인식, 새로운 수자원정책, 새로운 물 윤리없이는 지구의 치유가 불가능함을 보여준다.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물에 대한 인식의 전환으로서 존재론적 차원에서 물의 재-거룩화(re-sacralization)가 중요하다.


창세기의 시작은 ‘물위에 하느님의 기운이 휘돌고’ 있음을 통해 이미 물이 단순히 H2O가 아님을 보여준다. 이미 거룩함의 존재적 특성이라는 근원적 신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며, 생명의 힘을 지니고 있다. 바벨론 포로기의 예언자인 에스겔이 예언자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고 그의 손에 붙잡힌 것은 바로 “그발강가”(1,1)에서였고, 그가 예언자로 일어선 것은 ‘북쪽에서 폭풍이 오는 광경’(1,4)에 사로잡혀, 하느님의 영광을 ‘비오는 날 구름에 나타나는 무지개처럼’ 보이는 불빛(1,28)에 의한 체험을 통해서이다. 에스겔의 환상의 가장 독특한 부분은 바로 본문인 하느님이 계시는 성전 밑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을 주는 물에 관한 것이다.


이 물의 영향력은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완전한 변형이며, 그 생수의 근원은 성전 자체이다. 새롭게 세워질 성전의 정적이미지(겔40장-47장)는 변형되어 역동적인 움직임으로 바뀌며, 성전에서 솟아나오는 물은 점차 불어나서 강이 되어 자신의 거룩의 울타리를 넘어서 ‘사해의 물을 단물’로 바꾸고, ‘이 강이 흘러 들어가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생명이 넘치게’(겔48,9) 변화시킨다. ‘그 물이 성소에서 흘러 나오기 때문에 다달이 새 과일이 나와서 열매가 끊어지는 일이 없다. 그 열매는 양식이 되고 그 잎은 약이 된다.’(겔47,12) 주목할 사실은 이 물이 하느님의 거룩한 처소로부터 출발하고, 거룩의 울타리를 넘어 어디로 흐르든 생명을 일으키는 변화의 힘을 갖고 있어서 엔게디에서 에네글라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어부들에게 양식이 되는 고기들이 넘치게 하고, 새 과일을 내는 양식과 약을 주는 이파리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는 명백히 요한 게시록에게도 그대로 영향을 미친다. “그 천사는 또 수정같이 빛나는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 강은 하느님과 어린 양의 옥좌로부터 나와...달마다 열매를 맺고 그 나뭇잎은 만국 백성을 치료하는 약이 됩니다.”(계22:1-2)  


물은 생명의 힘을 가진 거룩한 것이란 성서의 메시지를 재 확인하는 예는 바로 예수의 요르단강에서 세례 받으심이다. 학위받고 한국으로 들어오기 직전에 머물렀던 퀘이커의 펜들힐수련센터에서 유대여성랍비로부터 유대교의 시각에서 복음서를 읽으면서 인상깊은 점은 바로 유대신비주의에서 회복과 갱생은 물(water)과 관계된다는 설명에서였다. 그 본분이 바로 예수의 요르단 강 물속으로 들어감에 대한 본문을 가지고 그 예로 설명하였다는 점이다.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갈라지며...‘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하는 소리가 들려왔다.”(막 1,10-11) 이렇게 물은 ‘본성적 인간’을 변화시켜 ‘사랑하는 존재’로 변화시킨다.


프란츠 알트는 그의 책 「생태주의자 예수」에서 예수는 요르단강강가에서 세례를 받을 때, 몸이 물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새로운 하느님 체험-자유와 신뢰안에 있는 새 삶의 경험-을 내면으로부터 경험함으로써 새로운 인간으로 변형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물은 이중적 성격 즉 물질적 차원뿐만 아니라 정신적, 영적 차원을 갖고 있으며 물의 치유능력에는 언제나 신적인 것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요르단강의 물속에서, 근원적인 것의 흐름에 대한 접촉을 통해 하늘 아버지와의 접촉을 함으로서 하느님의 사랑의 에너지가 예수에게 파도처럼 밀려왔고 그것이 그를 변화시켰다. 하늘이 ‘열리고’ 예수와 하느님 사이에 근원적인 신뢰가 싹트게 된다. 이렇게 인생의 결정적인 변화를 체험함으로써 생태주의자 예수는 말한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내게로 와서 마셔라. ..그의 배에서 생수가 강처럼 흘러 나올 것이다.”(요 7, 37-38) “아버지께서는...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않은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마5,45)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샘물처럼 솟아 올라 영원히 살게 할 것이다,”(요4,14하)  근원적 신뢰의 뿌리 -하나님의 음성을 내적으로 ‘들었고’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4. 물을 통한 영혼의 재생

에스겔과 예수는 땅위에서 하늘을 보았다. 이 둘은 참 종교는 겉 치레가 아니라 삶의 중심에서의 개조 즉 하나님이 한 인간의 삶 속에서 뭔가를 일으키는가, 일으킨다면 그것이 어떻게 일어나는가에 따라 전적으로 판가름 난다. “정화수를 끼얹어 너희의 모든 부정을 깨끗이 씻어 주리라... 새마음 넣어 주며 새 기운을 불어 넣어 주리라. ...돌처럼 굳은 마음을 도래내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넣어 주리라.”(겔 36,25-26)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신앙의 대상으로만 믿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뜻을 철저하게 실천하며 사는 것이다. 에스겔은 거기에 하느님이 거하신다고 한다. “야훼 삼마-하느님께서 거기 계시다”(겔48, 35). 생태평화가 예수는 말한다. “내말을 믿어라...굳이 장소를 가리지 않아도 될 때가 올 것이다...하느님은 영적인 분이시다. 그러므로 예배하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참되게 하느님께 예배드려야 한다”(요4,24).

이렇게 인류의 생존은 정신과 영혼의 철저한 방향전환에 달려있다. 자연과의 평화없이 세계 평화는 없다. 에스겔과 예수가 원한 것은 새로운 종교가 아니라 새로운 삶이다. 성서에 따르면 물은 하느님의 신성이 깃들여 있고(창 1장), 거룩한 곳으로부터 유래하며(겔 47장), 하느님 나라의 에너지원이 된다(막 1장). 이렇게 물은 창조질서의 유지체가 된다. 생태주의자 예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너희도 생수의 근원이 되어라!” 이는 고행이나 포기가 아니라 생의 기쁨, 더 충만한 생명(요10:10)을 얻는 길이 된다.



<토론을 위한 질문>


1. 본문을 각기 다른 번역으로 읽자. 그리고 느낌을 서로 나누자.

2. 물과 관련된 자신의 기억, 체험을 서로 이야기 해 보자. 그 체험속에 물은 어떤 기능을 하고 있었는지 확인해 보자. 

3. 물은 현재 우리의 삶에서 어떻게 쓰이고 있는가? 물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4. 생태적 방식으로 물을 사용하는 구체적 실천에 대한 방법을 간구해보자. 이를 개인가정, 교회, 지역(산업, 농업)의 범주로 나누어 생각해 보자.

성서공동연구 III: <공기로 거듭난 생명>


주요본문: 겔37:1-10;요3:3-12


들어가는 말: 또 하나의 잃어버린 근원적 힘-바람

베어 하트라는 미국인디언의 책 「The wind is my mother(인생과 자연을 바라보는 인디언의 지혜로 번역됨)」에는 다른 인디언 아기처럼 자신이 태어난지 제 3일에 어머니가 자연의 요소들-동서남북 네방향, 지구어머니, 해 할아버지, 바람, 물, 불, 달과 별-에게 자신의 자식을 소개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중 바람에 아기를 안기고 이렇게 애기한다. <이 아이를 받아주십시오. 때로는 당신이 강하게도 불고 때로는 아주 부드럽게 불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가 자라면서 늘 당신의 존재를 소중히 여기며 이 지구에서 살게 해주십시오.> 자연과 함께 사는 이들은 이렇게 바람, 물, 불은 근원적인 존재로서 신성한 힘을 지니고 있다고 믿는다.


산업사회이후 지난 수백 년간 기독교가 잃어버린 것은 자연이 계시의 차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세까지만 해도 성스런 샘물과 우물들을 소중히 여기고, 능력의 장소들에 대한 순례와 인간의 공동체를 자연의 순환과 연계시키는 계절적 축제들에 대한 경축이 이루어졌었다. 성서의 지혜서에는 근원적인 상징으로서의 물과 바람이 갖고 있는 신비로운 능력을 증언한다. 전도자의 세상만사 헛됨에 대한 깊은 통찰도 바람과 강의 운행(전도서1,5-7)을 통해서였고, 인간실존의 고뇌에 대해 절망하던 욥이 폭풍우를 통해 하느님을 만나 생의 의미문제에 대한 대답을 얻었던 것(욥38:1)처럼 바람을 통해 정신적이고 영적인 깨달음과 힘을 얻는 것은 이상하고 낯선 일로 여겨지게 되었다. 창조신앙의 신비가 에크하르트는 말한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에 대한 책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이후 자연세계는 영적능력을 결여하고 인간역사의 뒷 배경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1. 공기의 비성화(非聖化)에 따른 온 생명의 위기 문제


공기가 신성한 에너지임을 우리가 잃고 인간역사의 뒷배경으로 사라지고 난 그 결과는 어떠한다. 현재 우리가 들이마시는 공기는 산업화, 에너지 오염, 쓰레기 소각, 비행기와 자동차 때문에 심각하게 오염되어 있다. 삶의 질은 물과 더불어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의 질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지금까지 에너지원인 석유, 석탄, 천연가스, 핵에너지는 모두 공기와 관련되며 환경에 해롭고 위험하고 시끄러우며 기후에 큰 장애를 일으킨다. 지금 현재 전 인류를 위협하고 있는 세가지 환경문제인 오존층 파괴, 지구 온난화, 핵겨울 모두가 공기의 문제인 것이다.


오존층 파괴는 냉장고, 냉난방 장치에 있는 냉각제, 악취 제거제, 간단한 헤어 스프레이안에 쓰이는 액화가스(염화불화탄소를 포함한 약 95개 화학물이 파괴의 원인)가 원인이다. 최근에 가 이 지구에 위협이 된다. 그 심각성의 예는 오존층 파괴로인한 자외선으로 호주에서는 매년 14만 명의 피부암 환자가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지구 온난화문제는 자동차 매연, 산업가스, 가정의 폐기가스로 인한 대기오염이 주범이다. 화석연료사용에 의한 이산화탄소의 배출이 온실효과를 가져와 기후킬러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 결과는 허리케인, 집중호우, 산불의 발생이다. 땅이 메말라버림으로 생명권에 가장 중요한 탄소 저장고가 없어지고 있고 지구의 ‘푸른 허파’인 열대림이 사라짐으로 기후재난을 가져온다. (1분에 29헥타르, 축구경기장 40개가 사라짐) 숲이 사라짐은 자연공간, 휴식공간, 기후조정, 토지보호, 식수저장, 공기정화, 천연연료 보관, 일자리와 수입원의 기능이 사라짐을 뜻한다. 그 결과로 거의 매년 ‘백년만의 홍수’가 터지고 사막은 늘어가고, 오존 구멍은 점점 커지며, 다양한 생명체들이 멸종되고 있다. 가뭄이 혹심해지고 온실효과는 날로 심해지며, 가축이나 인간의 불임 확률도 늘어나고 있다. 토양황폐와 수질오염은 화학에너지를 집중적으로 사용한 결과다.


‘공포의 균형 전략’이 빚어내는 핵무기(2000년 기준 세계 5대 핵강국의 핵탄두수는3만 1,535기, 비축량의 폭팔력은 5,000메가톤)에 의한 근원적인 저주인 핵겨울은 엘리트 인간들의 비인간화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이들에게는 수백만명의 죽음이 가능성은 단지 통계적 수치에 불과하다. 단지 한 두세대의 편리를 위해 사용된 핵방사능폐기물은 그 완전한 분해가 10만년이상-10만년이면 예수 이후 인류역사의 50곱이다-이 걸리며, 그 저장탱크의 수명은 불과 몇 백 년에 불과하다(현재 전세계 440여개의 핵발전소가 존재). 보이지 않는 곳에 저장함으로써 우리를 안심시키는 눈속임에 우리는 윤리적으로 무감각한 셈이다. 아우슈비츠와 더불어 히로시마와 체르노빌은 인간 지식의 위험성-그 재앙의 심각성-앞에 일반 대중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자연이 수백만 년에 걸쳐 모은 소중한 자원을 우리가 불과 몇 십년 만에 굴뚝의 연기로, 자동차배기관(2000년 현재 5억3,200만대, 2020년 11억대로 증가)에서 품어져 나오는 연기로 날려버렸으니 우리의 자손들이 현세대를 볼 때 인류역사의 암흑시대로 볼 것이다. 우리의 근본적으로 잘못된 에너지 정책 탓에 우리 자녀들의 미래를 태워 없애고 있다. 자연은 파괴하지 않고 변화시킨다. 그러나 수백만 생물종중 오직 한 종인 인간만이 파괴와 걸어다니는 쓰레기통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범죄에 가까운 에너지 생산과 소비를 줄기차게 정당화하고 있다. 강박적인 발전과 석유 때문에 얼마나 더 많은 전쟁이 앞으로 일어날 것인가? 우리가 땅, 공기, 물, 기후와 평화의 약속을 맺지 않는 한 인간들 간의 평화도 불가능하다.

인간이 기후에 미치는 영향은 무서운 기세로 증가하고 있다. 이에 대해 손쓸 시간이 얼마 남지 않고 있는 것이다.


3. 성서에서의 공기/바람


바벨론이란 제국의 포로생활속에서 에스겔은 환상을 통해 철저한 인간의 죄성을 보았다. 그리고 그 회복의 가능성을 바로 마른 뼈 골짜기의 환상, 성전에서 나오는 물, 하나님이 창조한 성읍인 야훼삼마에서 본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황폐한 광경. 그 골짜기에는 뼈들이 가득하며 그 뼈들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다. 해골의 잔재, 그것도 마른 해골의 잔재로 가득한 이 죽음의 장면은 마치 체르노빌, 히로시마가 상징하는 재앙이나 기후온난화로 초래된 백화현상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핵재앙이든 환경재앙이든 마르고 바래서 희어진 뼈들로 가득찬 골짜기를 다시 활기찬 생명의 골짜기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사방에서 불어온 숨(ruah= 바람= 영; 그리스어, pneuma)에 의해서이다. 뼈들이 서로 움직여 붙고 살이 붙었어도 생명이 되는 것은 바로 생기(ruah)에 의해서였다. “숨이 불어왔다. 그러자 모두들 살아나 제 발로 일어서서 굉장히 큰 무리를 이루었다.”(37,10)  바람은 생명의 가장 여린 숨결로 간주된다. 바람은 생명에너지다. 이는 우주적이고 영적인 에너지여서 미래를 연다.


예수에게 자연은 이미 그 자체로 기적이었다. 예수에게는 전혀 기적이 필요하지 않았다는 것이 기적이다. 이것이 니고데모가 한밤중에 기적이야기에 초점을 맞출 때, 예수께서 질문을 바꾸어 “바람-움직이는 공기-을 아는가?”라고 말한 이유이다. 생태주의자 예수께서는 바람과 대화를 하기를 권고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은 창조의 숨, 창조의 능력을 머금고 있다. 비유로서의 바람은 물리적 현상이면에 바람이 지시하는 신성의 영토, 그 흐름을 함축하며, 영/바람에 사로잡힌 자는 명사가 아닌 동사, 객체를 넘어서는 활동, 즉 움직이고 있는 에너지로서 삶을 추구한다. 니고데모가 사색의 길에서 객관적 증표인 기적을 묻고 있음에 반하여, 예수께서는 바람이 의미하는 에너지화된 삶, 즉 우주적 창조성이 활동(하느님 나라는 공간개념이 아니라 활동개념임)하는 동적인 성질을 지시하고 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요3,8)  생태주의자 예수는 어거스틴이후 신의 자리를 인간의 내면성안으로 제한한 것을 넘어서서 우주안에서 자기 자리를 발견하는 것이 신앙임을 역설한다. 우리는 우주안에 있고 우주는 우리안에 있다. 우주 자체가 성사적이요, 하느님으로 충만해 있다. 그가 역설하는 것은 새 종교가 아니라 새로운 삶의 길, 곧 이 지상에서의 삶의 실제에 기초한 영성의 길(mundane spirituality)이다. 물질화되지 않고 에너지화되는 삶이다. 물질을 소비하지 않고 에너지를 만드는 삶을 배우는 길이다. “생명을 주는 것은 푸뉴마(영, 바람)이다.”(요6,63) 전체가 각각을 경계없이 관통하며 만유가 상관되어 있다. “만물은 그분을 통해서...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속합니다”(골1,16하-17) “모두가 운동중이고 모두가 운행중이며 모두가 움직이면서 노래하고 춤추고 있고 놀람에 차 있다.” “바람에너지는 우주적이고 신적인 힘이다. 태양과 바람과 물, 그리고 식물과 나무에 저장된 태양에너지는 우리가 지금껏 내팽개쳐 두었던 신적인 에너지, 하늘의 선물이다.”(프란츠 알트, 생태주의자 예수)

4. 양심화의 파트너로서 바람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인간의 토양살해, 생태살해는 인간중심주의로 창조계에서 고립됨으로 일어난다. 삶은 소유가 아니며 하느님의 무상의 선물이다. 무상의 선물에 대해 자신을 개방하여 일치시킴으로 생명의 길, 황홀과 깊이를 맛보는 우주적 여행이 시작된다. 무상으로 주어진 것-물, 공기-을 주의 깊게 듣고 민감하게 주목함으로 신성의 흐름이 존재하기 시작한다. 그 일이 일어나도록 놓아두기, 베어하트의 어머니처럼 바람에게 자신을 그냥 맡기는 근본적인 신뢰가 필요하다. 무상(無償)의 것을 바라보고, 이를 신뢰하며 자신을 투신할 때 에너지와 창조성이 나온다.


예수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말한다. “...땅은 열매를 저절로 맺게 하는 데...”(막4,26-29). 예수는 인간의 의지가 아닌 하느님의 주권이 다스린다는 근본적인 신뢰를 지니고 있었다. 바람은 저절로 불고 물은 저절로 정화되며 나무는 저절로 자란다. 오직 인간이 해야 할 한가지가 있다면 무상으로 주어지는 것을 해치지만 않으면 된다. 그러기에 예수는 우리 영혼의 깊이를 향해 묻는다. 바람을 아는가?  바람처럼 생태적으로 가볍게 살라. 생태발자국을 남기지 말고... 뭔가를 만들어서 쓰레기를 만들지 말라. 저절로 다가오는 태양, 물, 바람은 쓰레기를 남기지 않는다. 인간이 진보와 개발이란 이름으로 만든 것은 핵폐기, 공기오염, 물오염, 토지의 산성화라는 생태적 부담을 남긴다. 생태주의자 예수께서는 말한다. “눈으로 보고...우리가 아는 것을 증언한다... 땅의 일을 알지못하고...” <보고, 알고 땅의 일>이란 이지상의 것에 대한 주목이 <기적>이 포괄하는 하늘의 징표, 초월이 의미없다는 선언을 한다. 이는 매우 의미심장한 말이다. ‘바람’을 알지 않고 신을 알 수 없다.    


하나님 나라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활짝 꽃피우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도록”(요10,10) 왔다고 하신 것이다. 그 생명의 풍성함은 국가, 인종, 동물, 식물의 차이가 없다. 뭇 생명이 하느님을 모시고 있다는 이 근본적인 신뢰가 우리를 변화시킨다. 하느님으로부터 거저 받은 무상의 존재들 -물, 공기, 흙, 음식-은 우리의 삶을 양심화하고, 본래적 삶을 우리 각자가 살고 있는지를 알게하는 중요한 바로미터이다.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가? 물과 공기는 우리를 부드러운 혁명가로 만든다. 물과 공기를 통해서 우리는 다시 근본적인 신뢰를 배워야 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강하게 말씀하신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 물과 성령(프뉴마= 바람)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요3,5). <참조: 헬라성서원전에는 우리말 표현 성령이 단순히 바람인 프뉴마로 기록되어있다>참으로 두려운 경고이다. 물과 바람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그대가 아무리 종교적 삶을 잘 한다하더라도 하느님 나라와는 관계가 없다. 신앙의 가장 궁극적 문제인 <새로 나는 문제; 중생; 거듭남>을 물과 바람과 연결시키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깊은 충격을 받게 된다. 



<토론을 위한 질문>


1. 본문을 각기 다른 번역으로 읽자. 그리고 느낌을 서로 나누자.

2. 바람, 공기로 인해 불쾌하거나 행복했던 경험이 있는가? 서로 그 경험을 나눠보고 그때 바람/공기는 어떤 존재로 자신에게 다가왔는지 이야기해보자.

3. 오늘의 본문은 마른뼈를 살리는 하느님의 숨, 바람을 통한 거듭남, 물과 성령(바람)으로 거듭나야 하느님 나라로 들어간다고 한다. 이 본문의 메시지를 통해 바람, 공기에 대한 어떤 인식의 변화나 도전을 받고 있는지 생각해 보자.

4. 바람, 공기가 치유와 갱생의 힘을 지니고 있다고 믿는다면 오늘날 오염되어가는 공기를 어떻게 구체적으로 되살릴 수 있을까? (개인의 노력, 공동체의 노력, 법적·제도적인 노력)

엮인글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영혼이 있는 곳에 하느님도 계시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평화세상 2014-06-29 2705
24 평화성서학세미나로의 초대 2. 3/7-10 평화세상 2017-03-02 434
23 비폭력 실천, 평화영성: 새로운 변화의 기원과 새로운 실재 관리자 2013-03-06 2070
22 비폭력의 눈으로 성서읽기-몰아쳐오는 세상 파고에서 무서움을 넘어서기 메인즈 2013-02-17 1923
21 한처음에 시작이라는 꿈이 있었다(기독교 비폭펵실천가/화해중재자의 성서묵상) 메인즈 2013-01-19 1913
20 복음의 본질은 화해사역이다 메인즈 2010-12-16 2028
19 바울과 평화 메인즈 2010-09-29 1974
18 사도 바울의 평화에 관한 구절들 메인즈 2010-09-29 1972
17 마태 제자직의 근본 수행으로서 평화 file 관리자 2010-09-07 1810
16 폭력에 대한 예수의 비폭력 저항-샬롬 통치의 현실성의 수행 메인즈 2010-07-11 2136
15 기독교인을 위한 비폭력 영성과 실천 -맞서 싸운 상대가 천사로 바꿔지다 메인즈 2010-03-09 2008
14 평화와 자유 (성서공동연구자료) 메인즈 2007-03-19 1884
13 평화와 목회 (성서공동연구 자료) 메인즈 2006-12-07 1935
12 평화관련 공동성서연구모임 안내 메인즈 2006-11-29 1759
11 평화활동가를 위한 성서명상-실존적 궁지와 평화 메인즈 2006-10-09 1979
» 평화와 생명밥상: 물과 공기 <공동성서연구에로 초대> 메인즈 2006-07-09 2076
9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한 신학적 고찰 메인즈 2006-07-03 2064
8 공중의 새와 들꽃을 보라! -기독교 생명평화 일꾼의 길- 메인즈 2006-06-22 2074
7 마가의 폭력구조와 현대 평화학의 적용 메인즈 2006-04-12 1875
6 마가복음내 공간구조에 얽힌 갈등과 평화 메인즈 2006-04-12 1991
박성용박사 | ecopeace21@hanmail.net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