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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7.3. 기독교환경연대 정책위원회모임에서 발제 초안)

                                                               
                                                                           
박성용/비폭력평화물결 공동대표


서 론

1. 제국주의와 이스라엘 백성: 신앙의 근본토대로서 출애굽 사건

2.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라는 제국종교의 출현

3.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예수 그리스도

4. 지구화에 대응하는 변혁적 교회를 향하여

결 어


서 론


신학을 하는 것은 그 시대의 징표를 읽어내고 이에 대한 하느님의 뜻과 의지를 실현하고자 하는 분별의 훈련(discipleship of discernment)이다. 따라서 신학자는 개념화로서의 신학적 담론보다는 신과 세상과의 관계속에서 적절히 응답하는 양심화의 문제에 투신하게 된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시대의 표징은 무엇인가?


현대인이 직면한 위기의 상황은 폭력과 갈등, 빈곤과 사회적 안전망의 해체, 질병과 환경파괴 등의 세계화라는 파고가 우리 삶에 구석구석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점차로 많은 사람들이 피조물의 파괴와 가난한 사람들의 희생을 토대로 한 부의 편재, 엄청난 살상무기의 증강이 그대로 계속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평화문제는 훨씬 더 절박하고 보편적인 요청이 되었으며 교회로 하여금 행동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도전이 되고 있다.


사도 바울이 신화적 표현으로 말한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으로서 “권세와 세력의 악신들과 암흑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의 악령들”(엡6,12)이 구조적 폭력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나타나고 있다. 이는 이른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1)라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등장한다. 그 결과는 2003년 7백7십만 명이 일백만 달러 이상의 부를 소유했으나 15억 명이 하루 수입 1달라 이하의 수입을 갖고 생활한다. 세계인구의 상위 20%가 86%의 자원과 서비스를 소비하고, 전세계 인구의 1%인 최고의 부자들의 수입은 가장 가난한 이들의 57% 연 수입과 같다. 최소 24,000명이 기아와 영양실조로 매일 사망하고 있으며, 세계의 생물다양성의 30-70%가 20-30년 이내에 사라질 전망이고 군사주의와 폭력이 일상화되고 실업이 급증함으로 인간의 삶과 지구가 중대한 위협을 받고 있다.


이 문제는 이차적인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핵심문제로 자리 잡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과 맘몬, 교회와 반교회, 신앙과 불신앙 사이의 투쟁이다. 이런 점에서 본 글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한 신학적 통찰을 서술하고자 한다.


1. 제국주의와 이스라엘 백성: 신앙의 근본토대로서 출애굽 사건


성서적 메시지는 구원 사건에서 발생한다. 이 구원사건은 신학의 출발점이다. 신학의 근본토대로서 출애굽사건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하느님의 해방계획의 표명으로서 신학적 상상력의 “뿌리자료(root source)”이자, 하느님, 세상,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관점과 통찰을 제공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공사 감독들을 두어 이스라엘 백성에게 강제 노동을 시켜 파라오의 곡식을 저장해 둘 도성 비돔과 라므세스를 세웠다... 에집트인들은 그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이스라엘 백성을 더욱 혹독하게 부렸다. 그들은 흙을 이겨 벽돌을 만드는 일과 밭일 등, 온갖 고된 일을 시키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혔다.”(출1,11,14)


하비루는 민족개념이 아니라 나일강 지대 죄수, 노예, 천민, 떠돌이들, 이주자들 등을 통칭하는 사회적 계층으로 억압받은 사람들이다. 그들의 상황은 정치적·사회적 억압으로부터 발생한다. 제국주의 이집트의 왕 파라오의 경제적 수탈(곡식저장소 건설)에 강요된 흙벽돌노동으로 인해 생긴 억압과 종속의 상황속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여기서 억압자는 자신의 부와 이득을 위해 다른 사람들의 고통받는 현실에 무감각하며, 더 심한 폭력으로 마음이 굳어지게 된다. 억압자는 억압받는 자없이는 ‘살 맛’을 느끼지 못한다. 지배자로서 그들을 필요로 한다. 강제 노역없이 위대한 지배자가 될 수 없다. 재앙에 대한 긴 보도를 통해 제국주의자의 권력에 대한 이기주의가 점점 증폭되는 모습을 우리는 보게 된다. 이와 반대로 억압받는 자들은 신음하며 고통으로 울부짖는다.  하비루들은 자신들을 “해방시킬” 어떤 가능성이나 변화도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상황속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은 “신음하고,” “울부짖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해방자 하느님의 자기 “현존”이 드러난다. “나는 보았다...나는 들었다.” “나 이제 내려가서 에집트인의 종살이에서 손아귀에서 빼내리라.”(출3,8) “내가 너희를 에집트의 종살이에서 빼내고 그 고역에서 건져내리라.”(출6,6)


신앙의 원사건(originating event)으로서 출애굽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하느님의 자기 현존을 처음으로 나타낸 곳이 바로 사회·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억압상황이었다는 것이며, 여기서 그분이 어떠한 분이신지(해방자로서 하느님)에 대한 계시를 우리가 알게 된다는 것이다. 자기 이름을 야훼로-“존재하게 만드는 자(I shall be that I shall be)”- 파괴된 자기 백성을 다시 창조하는 해방자로 드러낸다.2) 이들은 최초로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증언자들이다. 그리고 출애굽 사건을 시발로 하여 다양한 억압받는 계층인 하비루가 자유에로의 소명을 받고 탈지배공동체의 건설이라는 과제를 갖고 40년의 광야수련기간을 거치게 된다. 즉 출애굽 사건은 민중들이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부름이라는 거부할 수 없는 소명과 자기 존재의 의미성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들은 조직되었고 행진을 하기 시작하였다.  출애굽의 정신은 과월절, 안식년, 희년제를 통해 원형적 사건이 실존적 현재로 재 ‘의식’되며 생활과 사회 속에 구현된다. 이는 성취된 자유라기보다는 해방되는 과정으로서 끊임없는 정진과 구현의 과제로 주어진 원형적 사건인 것이다. 그리고 그 출발은 억압의 상황에서 일어난다. 모든 후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조들의 이 출애굽 사건을 연장하라는 부름을 받고 하느님의 그의 백성에 대한 ‘약속’으로서 자신의 삶에서 실존적으로 재해석, 재적용해야 한다는 소명을 받게 된다. 실존적인 재해석을 통해 약속은 다시 새로운 사건으로 고지하게 된다.


우리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신학적 고찰을 위해 출애굽 사건을 다시 살펴보는 것은 우리의 과제에 대한 몇 가지 통찰을 던져주기 때문이다. 이는 첫째로, 이스라엘의 형성은 제국주의 이집트에서의 억압경험에서 출발한다는 점이다. 자신의 부, 힘, 그리고 소유를 위해 많은 사람들 폭력적인 억압체제하에서 신음하게 된다. 둘째로 이 폭력적인 억압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시스템으로 협력자들(“공사감독들”)의 협조가 그 지배를 구조화하고 안정화한다는 것이다. 파라오의 질서는 억압과 강제로 이루어지는 질서이며 이 질서는 공사감독들에 의해 주도면밀하게 감시됨으로 효과를 얻는다. 그리하여 수많은 다수를 희생자로 만든다. 이 지배의 원인은 소수 특권층의 경제적인 ‘부의 독점’을 위한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해 파라오는 공사감독들을 부리는 ‘유능한 관리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리고 그 유능한 관리능력은 노역자들의 신음과 고통에는 무감각하다. 셋째로 사회적 폭력에 대한 척도의 문제이다. 기본 욕구의 충족을 넘는 ‘부의 축적’, 그리고 고통 받는 자의 울음소리 속에서의 ‘부의 추구’는 사회적 폭력이다. 필요가 아닌 만족을 위한 생산소비는 사회적 폭력이 된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삶에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한 신학적 전망을 함에 있어서 상황이 다른 것은 과거에는 억압자가 명확한 사람으로 나타나지만 지금의 경제적 자본지배는 대게 ‘간접적’ 형식으로 지배자로서 나타나기에 우리로서는 본래의 ‘지배자’를 전혀 파악할 수 없고, 따라서 파라오는 나중에 하비루를 풀어주는 윤리적 결단을 했지만, 이 얼굴없는 지배자로부터는 그러한 윤리적 기대를 할 수 없다는 심각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억압자의 수단으로서 ‘공사감독들’도 사람이 아닌 학교, 정치체제, 국제기구, 결사체 등으로 비인격화됨으로서 지배를 구조화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파악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강한 제국 이집트의 권력아래서도 시브아와 부아와 같이 민중으로부터 새로운 저항이 있는 것처럼,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한 새로운 대안모색이 세계사회포럼에서 보듯이 새롭게 조직되고 있다. 이는 언제나 지배가 있는 곳에 저항이 있다는 제임스 스커트(James C. Scott)3)의 말을 확인해 준다.


2.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라는 제국종교의 출현


우리 신앙의 선조인 이스라엘 백성이 싸운 이집트 제국주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당면한 새 천년의 제국주의는 ‘신자유주의의 세계화’이다. 신자유주의(neoliberalism)는 국가독점자본주의가 제한하고 있는 자본에 대한 재갈을 풀어 정치, 경제, 군사, 이념적 힘이라는 다면적 권력 구조의 집중화를 합법화하는 이데올로기로서 전면에는 금융의 세계화, 좌측에는 군사주의, 그리고 우측에는 신 보수주의의 물결을 불러 일으키는 에토스로 작용한다.  신자유주의는 국제기구, 국가정책, 기업, 투자관행, 개인행동의 상호 그물을 통해 권력/힘과 지배를 확대하는 경제적 지구화의 기획을 위한 이념적 틀을 제공하게 된다.


폴 틸리히는 종교를 ‘궁극적 관심에 의해 사로잡힌 상태’로 정의하여, 종교에 대한 정의에 있어서 편협한 개념을 넘어선다.  여기서 궁극적 관심이란 “어떤 것에 관하여 궁극적 심각성 곧 무제약적 심각성을 가지고 대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우리의 존재 자체, 전 인간 실재, 실존의 구조, 의미 및 목적 등을 멸하거나 구원할 힘이 있다고 믿는 것에 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며, 이런 점에서 신자유주의도 종교의 영역에 들어가게 된다. 여기서 세속주의적 이념성을 가진 신자유주의가 종교적 기능을 갖는 다함은 그것이 오늘날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영향력과 그에 대한 우리의 궁극적 심각성에 대한 문제 때문이다.


전통적인 종교는 신(신앙의 대상), 신앙(자신보다 더 위대한 힘에 대한 믿음), 종교지도자(신앙의 길을 결정), 종교적 기구(종교의 지속적인 조직을 가능케 하는 것)으로 구성된 신조와 실천의 시스템로 볼 수 있다. 종교는 또한 신학적 인간학(인간이 된다는 것을 정의함), 가치(종교가 승낙하는 표준/기준들을 세움), 신학(신앙의 이론적 정당화) 그리고 계시(신이 자신을 세상에서 나타내는 다양한 방식)에 대한 이해를 갖는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제국종교로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이유는 이러한 전통적인 종교의 신조와 실천 시스템을 다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교리(이익), 윤리적 원칙(시장의 법칙), 예언자/사제들(국제금융기구, 다국적기업), 성전(할인대형마트, 샤핑몰), 제의(주식거래) 제단(시장), 희생제물(배제된 다수)이라는 종교적 교의와 실천의 내용이 있게 된다.4) 이를 좀 더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신은 신앙공동체의 궁극적 관심이 되며 신앙인에게 자신의 전 생을 이 신에게 복종하케 하며 그를 추구하도록 한다. 그리고 신앙인은 자신의 본질과 정체성의 근거를 이 신에 둔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종교의 신은 집중된 독점금융자본이다. 이 신은 한 나라 안에서의 사적 소유의 한계를 넘어 세계적 무대속에서 소수의 손안에 있는 독점금융자본이라는 궁극적 관심을 구현한다. 독점금융자본이란 부를 향해 추종자들은 절을 하고 이를 얻기 위해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추구하게 한다. 이 신은 어떤 개인, 기구, 경계에 대한 제한이 없이 지구상에서 최고의 이윤을 내는 곳을 순회하는 초월성을 갖는다.


이 신을 알기 위해서는 영지주의적 특성을 지닌다. 즉 내부의 정보, 서로간의 네트워크, 힘에 대한 직접적인 접근의 방식을 통해 이 신에 대한 지식을 얻는다. 이 영지주의적 내부 소통을 통해 누가 속하고 배척되는 지에 대한 의사결정이 내려진다. 그 신봉자중 소득배분이 많은 자는 사제직의 역할을 한다. 세계인구의 가장 부유한20%가  전세계 수입의 83.7%를 점유하며 가장 가난한 20%는 1.4%만 갖는다. 세계 가장 부자인 225명이 세계인구 47%에 해당하는 연수익 1조달러를 챙긴다. 이들 사제들은 부와 생산수단을 사유화하고 통제하며 배분하는 역할을 갖는다. 이들 사제들을 돕는 종교기관들은 국제은행(IMF, WB), 다국적 독점자본기업, 그리고 WTO로서 이들은 독점금융자본이 국경을 넘어 원활하게 흐르도록 독점금융자본이란 신이 효험을 갖도록 역할을 한다.


이 신관에 연관된 종교적 인간학은 참된 인간이란 지구적 규모 가장 집중화된 금융부의 축적을 가진 인간을 이상화하며, 종래의 신에 의해 창조된 인간으로 가치가 이제는 무엇을 소비하는 가에 따라 그 사람의 가치가 매겨진다. 삶과 죽음의 문제가 부에 대한 소유권과 연관되어진다. 이 신에 대한 학문으로서 신학은 신의 속성에 대한 이해와 인간의 윤리적 실천을 규정하며, 신에 대한 신앙을 합리화한다. 그 교의/신조는 시장 개방에 대한 강조, 사유화, 탈규제를 주요 가르침으로 삼는다. 그 가르침을 통해 다국적 독점기업이 개발국가안으로 무제한적으로 침입하게 되며, 사회적 서비스의 사유화와 자연자원에 대한 방해없는 접근과 국가의 권한축소가 일어나게 된다.


집중화된 독점금융자본이란 신이 그 신봉자에게 보여주는 이 신의 힘에 대해 알려주는 것(계시)은 세계를 통한 모든 시장의 통합과 개발도상국을 국제차관에 의존시키는 힘이다. 이 통합시스템에 들어가면 끊임없는 빛과 자본누수의 순환을 밟게 되며, 수출을 위해 국내농산물을 대 농장화된 환금작물(cash crop)로 변환시킴으로서, 혹은 국제분업에 따른 소수 비교우위산업에 국내 산업을 재편시킴으로서, 이 게임에 익숙하지 않은 인구의 대다수를 빈곤화에로 전락시킨다. 또한 노동의 전 지구적 분화에 따라 노동력을 전 세계로 이주시킴으로써 국제 분업에 따른 이주노동자를 양산하고, 대금결제문제로 지역통화를 저평가하게 된다. 또한 다국적기업의 등장으로 보건, 복지, 교육 등에 대한 지역 국가의 주권과 의사결정권을 약화시켜 공공선을 줄이고 이를 사유화하는 체제로 탈바꿈시키게 된다. 다국적기업은 부동산세, 판매세 그리고 소득세의 감면과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다국적기업에 대한 특혜 등으로 민중의 힘은 엘리트금융자본가의 힘으로 대치되게 된다. 이 힘은 위성, 방송국, 소프트웨어 등에 의해 그 힘을 순환시키게 된다.


제단(altar)으로서 시장(market) 안에서 몇 가지 신앙생활의 규범이 생산된다. 즉 재산을 가진 자만이 멤버십을 얻게 되며, 이익에 의해 세계는 움직여지며, 자유로운 시장을 통한 경제성장에 대한 신앙관, 그리고 신앙덕목으로서 모든 것과 사람들의 노동은 시장의 가격으로 소유되고 변환(상품화)되어야 그 가치를 인정받으며, 성장을 위해서는 창조적 파괴(구조 재조정)도 미덕이 된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으로서 시장은 국가보다 더 효율적이고,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모든 이의 이득을 가져다 줄 것이며, 개인이나 국가보다 지구 경제로의 통합은 모두에게 큰 이익이 될 것이라는 섭리에 대한 믿음이 그 멤버십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요구되어진다.5) 


이렇게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제국종교로서의 구성요건들- 신, 사제, 제단, 성전, 교의-을 갖춤으로써 이집트라는 제국주의가 행한 바알종교의 기능을 넘어서는 역할을 하게 된다. 예를 들어 소수 지배 엘리트 창고에 부의 축적과 이들의 권력과 이익을 위한 민중의 신음과 고역은 공통되지만, 규모면에서 국가, 인종의 경계를 넘어 전 지구적이란 점과, 시장이란 매개를 통한 강제보다는 형식적인 자의적 동의를 통해 그 지배를 강화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양상을 보인다. 한때 지구상에 존재했다가 멸망한 공룡의 시대에 대한 교훈을 잊고, 공룡화된 개인과 기업이라는 몸 부풀리기의 경쟁이 사회적 약자와 생태적 약자들의 삶을 약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집트의 제국주의이든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라는 제국주의든, 공통적으로 지배질서가 안고 있는 문제점은 샬롬의 결여에 대한 3 가지 현상을 보여준다. 첫째로 물질적 신체적 복지와 번영의 결여로서 경제적, 신체적 억압 현상이다. 둘째로 사람과 사람, 사람과 인간간의 관계에 있어서 왜곡문제이다. 긍정적인 상호의존이 아닌 경쟁과 지배 종속 관계가 개개인의 인간됨을 비틀어버린다. 셋째는 인간화하는 데 근본적인 도덕성의 상실이다. 희생자를 경멸과 무기력에 빠뜨리는 정치경제문화 체계는 부와 소유를 축적하고자 하는 탐욕과 소비생활이 양심의 가치를 무력화시킨다.



3.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그리스도


지금까지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에서 가장 중요한 업적중의 하나는 예수를 탈정치화한 시각에서 보던 해석방법에 대한 비판이다. 이는 특히 평화운동의 관련된 신학자들의 시각을 통해 명확해진다.6) 이들의 통찰은 복음서의 이야기가 새로운 출애굽의 사건의 재현, 즉 그리스도 사건은 출애굽 사건의 케리그마를 ‘포함하면서도 확대시켰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 즉 예수의 하느님 나라 선포는 당시 로마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의 과정속에서 나온 것이며 그 멧세지는 명확히 ‘통치자에 대한 심판’과 ‘이스라엘의 갱신’으로서의 하느님 나라라는 것이다.7) 그리스도 사건의 중심에는 항상 인간들을 낡고 철저한 억압으로부터 이끌어내서 자유라는 새로운 광야로 인도하신다는 체험이 담겨져 있다.


로마의 샬롬은 위로부터의 강제, 칼, 권력과 군사에 의한 지배와 폭력에 의한 것이며 예수께서 소개하는 새로운 샬롬으로서 하느님 나라는 신의 은총, 아래로 향한 섬김을 위한 비폭력과 일치의 힘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도 사건(예수를 통한 하느님 나라 경험)은 창세기의 “있으라”고 한 가라사대(bara)의 사건과 모세에게 보여주신 “있게 하시는 분 (I shall/will be that I shall/will be)"이자 “야훼(‘내 백성을 가게 하라’의 축어)” 하느님의 자기 계시라는 출애굽 사건과 연계되어 있고 심화시킨다. 이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인 샬롬에의 부름이 “생육하고 번성하라”(창세기), “내 백성을 가게 하라”(출애굽기) 그리고 예수의 사역- “생명을 얻되 더 풍성하게”(요10,10)-속에서 일맥 관통하여 흐르는 것이다. 로마의 제국주의에 의한 불의, 착취, 억압, 무질서에 대항하여 예수의 하느님 나라 운동은 ‘더 풍성하게 존재하라’는 신의 선제적 활동을 노출시킨다.


로마의 제국주의는 아랍, 시리아, 유다를 포함한 ‘동양인들’ 정복을 통한 세계적 패권을 확립함에 의해 이루어 졌고, 신의 위치에 까지 오른 아우구스투스를 통해 전 세계는 로마의 지배에 종속되는 ‘통치의 세계화’를 이루어 내었다. 조직적인 군사정복을 통해 이룬 이 제국의 유지를 위해 군단병력을 각 지역에 배치하고, 로마에 충성을 바치는 권력조직인 지역의 후견인(patron-client)과의 결합을 통해 국경을 넘는 세계적인 사회적 통치 피라미드를 형성함으로서 그 권력의 안정화를 꽤하였다. 공공장소에서 평화와 번영을 가져온 황제를 위한 신전과 신상들을 세웠으며, 황제는 정복을 통해 얻은 전리품을 통해 부의 제국을 건설하였으나 농민들은 군대징집에 의한 참전으로 농장을 떠나게 되어 피폐해지고 귀족채권자의 소작인으로 전락하게 된다.


로마의 장군과 황제들은 로마제국의 국가안보를 위해 이민족을 정복할 때는 초토화하고 살육하여 약탈하여 살아남은 자로 하여금 로마의 제국적 질서에 공포와 위협을 느껴서 묵종시키고, 반란을 일으킨 자들에 대한 공공장소에서 십자가형을 통해 나머지 사람들에게 ‘전시효과’를 줌으로써 승리자의 권력과 패자의 치욕을 아낌없이 보여주었다. 마가복음 5장에 나오는 레기온(사단병력의 군대)귀신들린 자의 모습은 그러한 로마의 약탈에 대한 한 개인의 사회적 경험의 내면화가 반영되어 있다. 예수의 군대귀신 축출은 출애굽 사건과 연결되어 있어서 죽음, 노예화의 세력, 억압에서 자유와 새로운 생명에로의 전환함으로 ‘멀쩡한 정신’의 인간성으로 회복시킨다. 벽돌공장과 무덤으로부터 출애굽 사건과 군대귀신의 탈예속의 사건의 연결성을 통해 이해하게 되는 것은 예수의 하느님 나라 운동이 모든 억압된 형태의 삶속에서 사는 제 정신을 빼앗긴 사람들을 멀쩡한 정신으로 가지게 하고, 아무것도 아닌 자를 취하여 그를 존재케 하신다는 것이다. 예수의 악령축출과 치유사역은 개인에 대한 자비를 넘어서 공동체의 사회적 몸의 치유를 향하고 있었다. 이는 부유한 권력층을 위한 제국의 질서를 넘어서서 탈지배의 공동체의 복원을 위한 것이었다.


아무 것도 아닌 자 - the least, the lost, the last -를 존재케 하시고, 온전하고 풍성한 삶으로 변환시키는 하느님 나라 운동은 예수의 창녀, 세리, 버림받은 자들과의 특별한 관계회복의 ‘식탁교제(table fellowship)'을 통해 명확히 드러난다. 이는 하느님의 약속에 기초한 모두에게 주어진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일치관계, 친교와 연대성에 대한 최고의 표현이다. 같이 식탁에 앉아 빵을 나눔속에서 하느님의 보편적 은총을 체험한다. 이는 그의 가르침 곧 첫째가 아니라 꼴찌로서의 섬김이라는 탈지배의 수련에 대한 제자직의 의미와도 상통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역사개입에 대한 막연한 기다림에 있던 서기관들이나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예수는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확신을 통해 로마의 제국적 지배질서에 대응하는 대안적 사회적 갱신의 프로그램을 시작하였다. 그는 제국의 영향을 치유하고 갈릴리 민중들이 자신의 공동체 생활을 재건하도록 일깨우는 작업에 몰두하였다. 제국주의적 악마의 세력과 연관된 ‘더러운 귀신’들-초인간적인 파괴의 세력-에 대한 추방을 통해 악령들린 자를 사회로 복귀시키며, 12살난 소녀, 12해를 하혈증을 앓고 있는 여인의 치유를 통해 12지파 이스라엘의 백성을 새로운 생명에로 초대하고 있다. 그가 가르친 곳은 마을 공동체였으며, 이 공동체들에 대해 ‘사랑의 계명’을 통해 연대성과 서로 돌봄의 새로운 계약 공동체로 살것을 촉구하였다. 이는 제국군대가 마을을 황폐시키고 가족을 파괴시키며, 세금에 의한 경제적 압박의 상황에서 예수의 선교는 군사적 폭력과 경제적 착취로 인한 영향력을 치유하고, 내면적으로 자신을 비난하고 무능력한 생을 일으켜 -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했다- 자신으로부터의 솟아나오는 생명력 -네 속으로부터 나오는 생명수-을 풀어 솟구치게 하여 주체로서 다시 서서 가난과 절망을 극복하며 계약공동체로서 서로 도울 수 있도록 하였다.8) 다시 말하거니와 예수의 하느님나라 운동은 종교적 운동의 울타리를 넘는 로마의 지배체제에 대항한 대안사회운동이었던 것이다.


지배사회가 아닌 협력사회의 창출로서 하느님 나라 운동은 세상의 길과 하느님의 길사이의 명확한 구별이 존재한다. 예수의 하느님 나라운동이 보여주는 탈지배적 질서는 이집트와 로마가 보여주는 지배 체제와 다른 구별을 아래와 같이 보여준다.9)


사회적 형태            지배체제                                  하느님의 탈지배 질서


성별차이                가부장적/다름은 우월의미        성평등/다름은 차별이 아님

권세                    군림 통제 파괴로서 권세             베풀고 양육하며 지원하는 권세

정치                    정복의 정치/관료주의/권위주의   권능부여/탈중심적/외교적

경제                    착취 탐욕 특권, 불평등                나눔, 충분함, 책임성, 평등

종교                    남성신/분노 처벌 율법                여성신/포용적, 사랑, 동정

관계                    지배를 위한 위계설정/우리-그들  연결을 꾀함/우리-우리

변혁의 형태            폭력, 강제, 전쟁/갈등억제        비폭력적 대결, 협상

생태학적 자세          착취, 통제, 경멸                     조화, 협력, 존경

논리                    이것/저것이냐 선택, 분석적          이것도/저것도 둘 다, 종합적

자아의 역할            자기 중심적                            제휴 지향적

교육                    사상 주입식                                능력 부여식

종말론                  현상유지, 권력유지                     문화적 변혁, 하느님 통치



4. 지구화에 대응하는 변혁적 교회를 향하여


우리는 흔히 성서의 메시지를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옳고 그름의 문제에 제한시키려는 경향을 가져왔다. 우리는 신앙을 개인화하고 순결과 정직이라는 개인적 덕목으로 생각한 오랜 역사를 지녀왔다. 그러나 성서의 근본 메시지는 출애굽의 사회정치경제적인 공적 차원에 관심을 둔다. 파라오의 문제는 개인의 탐욕보다는 제도상의 구조적인 지배체제의 문제이며 새로운 제국종교로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현 세계의 무질서와 혼란은 제국에 의해 유지되는 극단의 복잡하고 비도덕적인 경제 시스템에 근거한다. 여기서 제국이란 강대국들이 자신의 이득을 보호하기 위한 지배체제를 구성하는 경제, 문화, 정치, 군사적 힘이 함께 모아지는 것은 말한다. 더 큰 권력, 더 많은 이득, 더 한 소유에 대한 갈증을 기반으로 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지배와 희생의 그물망에 대한 비판이 국제시민사회(예, 세계사회포럼)를 통해 분출되고 있다. 국제시민사회운동은 현재 시장과 국가의 두 세력과 독립된 제 3의 섹터로서 조직운동을 전개하고 있으며 새로운 대안적 세계질서를 틀지우는 데 능동적으로 관여하며 저항과 대안의 담론을 형성하고 있다.


이에 따라 WCC도 1998년 Harare 총회에서 경제적 지구화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고 “어떻게 지구화의 상황에서 우리의 신앙을 살 수 있는가?”에 대한 신학적 실천적 고찰을 하고 지구화의 도전이 WCC 활동의 중심적 강조가 되어야 한다는 권고를 하기에 이르렀다 (Together On the Way, WCC 1999:183). 이에 따라 2006 WCC 총회에서는 “사람과 지구에 적합한 대안적 세계화(AGAPE, Alternative Globalization Addressing People and Earth)”를 추구하는 신학적 방향이 설정되었다.


WCC는 신자유주의적 지구화라는 죽음을 향한 패러다임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oikoumene"의 생명을 긍정하는 비전 곧 서로간의, 모든 창조물과 하느님과의 정의로운 관계를 사는 지구 공동체에 대한 비전을 창출하고 교회가 참으로 해방적인 것을 상상하고, 발견하고 껴안으며 육화하는 데 앞장 설 것을 권고한다. 교회는 불의의 구조에 적응하기 않고 새로운 창조를 고지하기 위해 부름을 받았기에 하느님이 행하시는 “새 일”을 고지하는 대안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대안적 비전, 대안적 공간, 대안적 영성, 대안적 경제 사상과 실천들이 포함된다.


지구에 미치는 신자유주의의 충격은 피조물과 인류간의 정의로운 상호행동에 대한 긴급한 요청을 하고 있다. 이에 대응한 변화를 위한 출발은 기존의 실재와 진리들이 힘을 다시 갖고 변혁의 씨앗을 품도록 하는 데 있다. 그리고 풀뿌리 차원에서 사람들이 정의롭고 지속가능한 공동체에서 존엄성을 갖고 생명에로의 공통의 여행을 하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그동안 무시되었던 여성, 가난한 이, 토착민, 다른 제외된 사람들로부터 분출되어 나오는 대안들을 실천하고 새로운 대안들을 촉진해야 한다. 왜냐하면 바닥과 주변에 몰린 이들이 지배권력으로부터 가장 희생을 당하고 있으며, 그만큼 변혁에 대한 열망도 강하고 실질적인 노력의 모습도 치열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지배와 착취의 경제에 대항하여 생명과 연대의 경제(an economy of life/solidarity)를 위해 교회가 앞장서야 한다. 이는 협력, 상호성, 네트워크에 기초한 경제로서 모두의 선을 위한 사람과 자원의 이용, 수입과 부의 정당한 재분배, 공동체의 생계를 책임지는 역량강화(capacity-building), 사회적 분열의 극복, 윤리적 책임성에 기초한 소비생활, 생태정의의 실현, 자본대신 노동과 창조성을 경제활동의 추진력으로 삼는 시스템의 구축이 필요하다. 그리고 풀뿌리 차원의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의 공생적 연대에 기초한 대안적 세계화의 건설이 요구되어 진다.


결 어


오늘날 전지구적 지배체제로서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위기라는 시대적 징표앞에서 교회는 샬롬을 향한 모험의 길을 떠나는 실천의 장으로서 하나님 나라 운동을 재각인 하는 ‘해방시키는 교회의 존재방식’을 투철하게 구현해야 할 필요가 생긴다. 폭력의 두 양태인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착취라는 지구적 상황에서 억압받는 인류와 피조물과의 연대를 통해 권력체제를 거부하고 이를 변혁하기 위한 하느님과의 계약에 대한 책임성과 하느님의 위임하심에 대한 두려움을 지니고서 살기를 우리의 상황은 기독자에게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샬롬은 엄청난 선물일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사명도 강력히 요구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신앙을 고백의 문제로 보던 입장이 이 세상에서 충성의 문제로 다시 보아야 하고 인식에서 의지로 나아가는 길을 모색할 때이다.


사회적으로 그리고 생태적으로 가난한 자를 격려하고 대항사회를 건설하는 증언집단으로서 교회와 개인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탈지배의 공동체를 위한 하느님 나라운동에 대한 새로운 헌신이 일어나야 한다. 이는 오늘날 인식-확인-책임이라는 공동의 수행 방식(collective practice)이란 새로운 형태의 수련이 요구되어진다. 인식이란 폭력, 억압, 착취의 질서를 가져오는 지배체제에 대한 이해와 분석이다. 지배의 원인과 메카니즘을 찾고 이에 대한 대응책을 모색하는 것이다. 확인이란 이 인식속에서 나타난 결과들을 신앙의 문제와 연결하고 신학적 가치판단과 입장을 세우는 것이다. 책임은 불의한 구조에 대항하는 투신과 행동을 어떻게 이루어 낼 것인가를 모색하는 것이다. 가난과 사회적 해체는 숙명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사회의 구조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비판적 인식을 통해 이 현실을 하느님의 정의와 샬롬에로의 구원의지에 대한 확인을 통해 해방의 실천전략이 모색되는 것이다. 


기독자와 교회의 존재이유는 이 세상에 이미 도래한 하느님 나라의 자리를 인지하고 이를 세속의 공공생활영역에서 심화시키는 것이다. 예수께서 선포한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하느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는 말씀처럼, 하느님 나라는 엄연한 현재의 사실이며 이를 듣는 이들에게 철저한 응답을 요구하는 능동적인 현실이 된다.(마3,2; 4,23; 눅10,9;11,20, 17,21) 복음서에는 하느님 나라 선포에 뒤이어 제자가 되라는 부름이 온다. 이는 제자직이 세계 한 가운데서 변혁하시고 세상의 권세들과 투쟁하는 하느님의 선재적 행위에 대한 책임과 응답임을 보여주고 있다. 악의 영과 세력을 분별하고 공적영역에서의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한 헌신이라는 분별과 투신의 신앙 행위는 기독교 전 역사를 통해 증언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가장 근본적인 존재방식이다.  자유케 하시고 해방시키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구원의 의지와 진리에 대한 굳은 신념, 탈지배 공동체의 건설자로서 스승과 모범이 되신 그리스도의 분열과 치유의 사역에 대한 우리 자신의 헌신, 은총을 통해 우리에게 열려진 하느님의 생명의 능력의 힘을 우리가 누리고 있으며 또한 장차 미래에 이루실 신의 선하신 섭리의 역사 대한 우리 삶의 투신은 신자유주의의 세계화라는 제국종교에 대항하는 신앙운동의 핵심이 된다.


사도 바울은 말한다. “우리가 대항하여 싸워야 할 원수들은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세력의 악신들과 암흑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의 악령들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무장을 하십시오...”(엡 6,12-13상) 이렇게 한 인간 파라오를 넘어서 지배체제의 초월적 힘 -하늘의 악령-에 대한 분별과 하느님 나라운동에 대한 투신 없이는 지금 여기의 하느님 나라의 현존에 대한 은총의 경험도 상실하게 될 것이다.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계 21:5)


미주:

10) 신자유주의는 1980년대 이후 등장한 새로운 자본축적 전략이다. 시장경쟁의 강화, 국가 개입의 축소, 최소 국가 원리를 핵심으로 하는 신자유주의는 자본의 증식과 경쟁논리에 사회 전체를 종속시키고 시장경제 질서로 사회를 재편하려는 움직임이다. 신자유주의의 이상은 이윤추구를 위한 기업 자유의 극대화이며, 그에 방해가 되는 모든 정치적?사회적 제약의 완전한 철폐이다. 초국적기업과 금융자본이 주도하는 오늘날의 세계화는 바로 이러한 신자유주의의 세계화에 다름 아니다.


11) W. 브루지만, 「기독교와 평화」 홍철화 옮김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8).


12) James C. Scott, Domination and the Arts of Resistance (New Haven and London: Yale University Press, 1990).


13) Mary John Mananzan, "Five Hundred Years of Colonial History: A Theological Reflectin on the Philippine Experience" in Voices From the Third World, v.21, n. 1, June 1998.


14) Dwight N. Hopkins,  “Religion as a Globalization" www.theotherjournal.com


15) 예를 들면 다음의 책들을 참고하라. 리차드 호슬리, 「예수와 제국」김준우 옮김 (서울, 한국기독교연구소, 2004); 월터 윙크「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 한성수 옮김 (서울, 한국기독교연구소, 2004); U 두흐로, G. 리드케 「샬롬」(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9).


16) 리차드 호슬리, 「예수와 제국」36.


17) 상게서, 178이하.


18) 월터 윙크「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 9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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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용박사 | ecopeace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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