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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 생명평화여름캠프 교사워크숍 주제강연 초고)

성서본문: 마태 6:25-34


서론을 대신하여


“나무에 그 잎이 떨어지면 그 모습이 어떠합니까?”

“나무는 그 본체가 드러나고 천지에 맑은 바람이 가득하지”

                                         (벽암록에서)


이 글은 기독교인으로서 생명평화일꾼이 된다함이 무슨 의미("참살이에 대한 실존각성")를 지니고 있으며, 그 생명평화로의 수행의 관점("타자로부터 들음"), 그 수행방식("타자가 나에게 묻는 것을 허락하기와 공감하기") 그리고 최종적인 존재의 상태로서 약자의 충만성과 신적 현존의 공존으로서의 평화에 관해 성서본문이 주는 메시지를 탐구해 보고자한다. 일반적인 생명평화활동가와 기독교란 이름하의 생명평화 활동가간의 정체성에 대한 차이가 있음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며, 기독교 생명평화 활동가는 갈등해결이나 변환을 넘어서서 사회적/생태적 약자의 "풍성한 생명"(요10:10)의 향유와 이를 통한 신적 현존의 경험이 육화됨이 기독교적 평화 즉 하느님의 바실레이야(통치)가 실현된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인 것이다.

1. 실존개명(實存 開明)의 계기: ‘생존’의식에서 ‘실존’의식으로의 전환


예수께서 보여주신 신앙의 길은 종교적 인간의 추구를 넘어서서 ‘참살이’에 대한 근본인식과 이에 따른 전면적인 생활양식의 변화이다. 우리는 이를 본래적 실존에로의 개명/각성과 그에 따른 자유존재로서의 충만한 삶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이 예수께서 설교하신 근본 주제인 영토(domain)로서가 아닌 경지(dimension)로서 ‘하느님의 통치’(the Reign of God)가 의미하는 것이다.


본래적 실존으로의 개명(開明)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로 표현되는 생존의식(consciousness of survival)이 결국은 자신을 자기 중심적 폐쇄성안에 머물게 하여 생을 지탱시키는 은총, 초월, 사귐을 차단시킨다. 바울은 이를 옛 사람, 겉 사람, 육의 사람의 존재양태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소유(havings)'의 논리이며, 얻음과 잃음, 축적과 방어라는 “자기-확대”의 생활양식으로 몰고 가게 되며, 그 결과는 영혼이 느끼는 ‘무거움’과 ‘막힘’의 경험이다. 이 자기확대의 생활양식이 바로 폭력과 지배에 대한 에너지와 가치관을 제공하게 된다. 당연히 여기에는 힘에 대한 추구가 자리 잡게 된다. 이것이 바로 비-본래적 자아의 모습이다.


영혼의 근본 태도로서 생존의식과 소유열망이 가져오는 비본래적 자기 실존-불안, 염려, 힘의 추구-은 결국은 자기 초월성의 상실이라는 영혼의 막힘뿐만 아니라 타인에 대한 죽임을 불러들인다는 점에서 그 사람만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바울이 새 존재, 속 사람, 영의 사람이란 신화적 표현으로 나타낸 참 실존으로의 부름은 생명의 생명됨, 존재의 본래적 실현의 경지를 말하며,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평화의 근본과제인 ‘충만한 생명’의 향유를 의미한다.

문제는 생존의식으로부터 실존의식으로 실존개명이 이루어지는 계기를 어디서 발견할 것인가이다. 자기-중심(ego-centeredness)에서 실재중심(the reality-centeredness)으로의 전환은 어떻게 찾아오는 것인가?   


2. 본래적 자아회복을 위한 수행:  타자와의 실존적 사귐


모든 존재의 자기 정체성은 공동관계(inter-being)성을 통해 이루어진다. 즉 각 생명 존재는 상호의존적이며 상호관계적이다. 생물학의 시스템 이론에 따르면 각 세포의 건강은 세포 자신의 능력과 힘이 건강성을 유지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타 세포들과의 소통능력(capacity of communication)이 건강과 평형을 찾아주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각 생명이 갖고 있는 독특성(자기-정체성)은 이러한 소통능력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한다. 이는 본래적 자아정체성의 회복이 자기 영혼 내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타 존재와의 실존적 사귐/소통을 통해 이루어 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인간이 이성의 우위라는 오만에 근거하여 기계문명의 가속화를 통해 얻은 결과는 편리함과 자기확대 욕망으로 인해 타자와의 소통능력을 상실함으로써 전례 없는 지구적 문제-빈곤, 환경재앙, 핵위기-를 낳게 되었다. 한때 지구상에 살았던 공룡의 시대와 이들의 전멸에 대한 교훈을 새기지 못한 인류는 미래 생존의 불확실성이라는 부메랑의 효과를 스스로 받고 있는 처지가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위기 앞에서 많은 환경단체, 평화단체들이 죽어가는 타자-사회적 약자, 생태적 약자-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청지기(care-taker)의 역할과 책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본문을 통해 좀 더 근본적이고 철저한 생활양식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그것은 자기의 본래적 자아 회복을 위해서는 타자에 대한 배려(care for Others)를 넘어서서 타자로부터 들음(listening from Others)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공중의 새들을 보아라, 들꽃이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 보아라.” 우리는 수많은 시간을 타인에게 말함(speaking)에 익숙해 왔지 타인으로부터 들음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이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자기 확대는 이렇게 자기가 말함에 근거한다. 자기의 이야기, 나의 것에 대한 의식이 타자의 이야기, 타자의 존재에 대한 들음과 조화를 이루지 못할 때 이는 지배, 폭력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지배와 폭력은 자신을 비인간화, 비-본래적 삶으로 가두어 두게 되는 것이다.


생명평화로의 수행(practice for eco-peace)은 근본적으로 타자를 주목하고, 타자로부터 경험하며, 타자의 삶과 이야기를 듣는 데 있다. 이것이 생명평화의 영성이다. 특히 이 영성은 사회적 타자, 생태적 타자의 잃어버린 얼굴을 찾아내고, 그들이 말을 걸어오게 자신을 개방하며,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민감성을 요구한다. 그리하여 사귐을 통해 눈이 떠지고, 힘이 아닌 관계를 통한 생활양식으로 전환한다. 왜냐하면 사귐과 관계는 자기 정체성의 근본토대이며 생명의 본래 모습이기 때문이다.   


3. 생명평화 수행의 방식들


생명평화의 수행방식, 또는 생명평화의 신앙생활방식은 예수가 말하듯이 힘을 축적하는 것-음식, 옷, 창고-과는 전연 다르다. 이는 근본적으로 강자의 자기 확대의 생활방식이다. 생명평화의 수행방식은 자기를 중심(centering of the ego)에 넣지 않고, 주변과 바닥(the marginal/the bottom)에 있는 자의 잃어버린 얼굴을 면대면(fact-to-face)하고, 이들의 사라진 목소리를 되찾는 타자의 재 중심화(re-centering of Others)를 수행방식으로 채택한다.


잊혀지고 침묵하는 타자의 얼굴과 목소리를 되새기는 이 수행방식은 생태여성신학에 의하면 “교만의 눈”(the arrogant eye)을 통해서는 이루어 질 수 없다. 즉 타자를 나의 관점으로 재단하고 분석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사랑의 눈”(the loving eye)를 필요로 한다. 자기 겸손과 동정(com-passion)이 요구되어지는 것이다. 바닥과 주변에 있는 약자-공중의 새, 들의 꽃-가 수행의 중심으로 들어와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때 국가의 안전이란 이름으로 개발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사회적 약자와 생태적 약자에게 가해지는 많은 것들이 실상은 또 하나의 거대한 폭력임을 알아차리게 된다.


바닥과 주변에 있는 약자 - 공중의 새, 들의 꽃 -은 자신과 사회의 본래성을 찾게 하는 양심화의 바로미터이다. 이들의 존재에 대한 인식없이는 ‘참살이’에 대한 어떤 감각이나 윤리적 민감성도 회복할 수 없다. 그래서 이들은 나의 비본래적 생활상태와 바른 미래에 대한 전망을 깨닫게 해 주는 하늘의 전령들이다. 이들은 창조자의 의지를 제대로 인식하게 해 주는 신의 선물인 셈이다.


이들이 나를 질문하게 하기! 신앙은 어설프게 하느님에 대해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로부터 나로 향하는 질문함으로부터 시작한다.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라는 에덴 동산의 신의 부름이 신앙의 근본 태도이다. 이들 약자를 통해 “너 어디있느냐?”라고 하는 나를 향하는 질문을 철저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시 말하거니와 생태평화수행은 인식의 패러다임 전환을 요구한다. 신에 대한 설명, 대답을 추구하기가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에서 나에 대한 질문-00야 어디있느냐?-으로 변화이다.


공감하기! 생명평화의 수행은 사고의 길이 아니라 공감의 길이다. 공감이란 타자의 입장으로 가서(passing-over) 그의 위치에 서보고 다시 돌아와(coming-back) 심화된 자기인식을 갖는 것이다. 이는 인식대상을 추상화되고, 거리를 둔 지식이 아닌 육화된 지식(embodied knowledge)-접촉하기, 맛보기, 감싸안기, 말걸어오게 하기-을 통해 아는, 자기 속으로 체험하는 방식이다. 느끼지 못하면 인식하지 못한다. 인식하지 못하면 사귈 수 없고, 사귀지 못하면 타자는 쓸모의 대상으로, 무관심의 영역으로 멀어지게 된다. 그럴때 내 마음대로 타자를 처분할 수 있는 가능성-폭력과 지배-이 높게 되는 것이다. 



4. 신적 현존의 경험으로서 평화


나를 본래적 실존으로 부르시는 초월자는 신체성으로서 직접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초월자는 비대상적 존재이므로 대상적 인식으로서는 파악할 수 없다. 그리고 장거리 전화를 받듯이 초월자의 음성을 듣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는 세계의 모든 것을 통해 모든 것 안에서 나를 부른다. 우리가 타자에 주목하고 이들의 목소리를 들음으로써 우리는 ‘존재 그 자체’이신 초월자를 대면하게 되고 은총안에 주어진 선물로서의 삶-경쟁의 삶이 아니라-을 알게 된다. 


무한이 유한 속에, 영원한 세계가 일시적인 세계 속에 자신을 드러내는 통로가 될 수 있다.
공중의 새, 들의 꽃은 ‘사랑의 눈’이라는 수행을 통해서 신의 현존의 암호가 된다. 공중과 새의 관계, 들과 꽃의 관계를 통해 드러내지는 ‘새’와 ‘꽃’의 자유와 초연함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된다.  손가락이 없이 달은 드러내지 않는다. 거기 이미 있음에도 불구하고 달은 이 손가락에 의해 그 현존이 알아차리게 된다.  손가락으로서 새와 꽃은 그 자체가 변형(transformed)되어 '거기 있는 그 것'이 아니라 '말씀을 현시하는 존재'로서 상대는 나에게 말을 걸어오고, 주목과 들음의 수행자인 나는 이렇게 타자가 말 걸어옴을 통해 현시되는 무한성과 궁극성을 체험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드러나지는가이다. 공중, 들, 새, 꽃의 거기 있음 자체가 아니라, 공중과 새 사이의, 들과 꽃 간의 관계와 사귐이 만들어 내는 새로운 경지-자유와 초연함, 걸림없음과 환함 등-를 통해, 그 관계와 사귐의 깊이로부터  신적 현존, 신의 은총이 열려지게 된다. 공중의 새, 들의 꽃이 내재하고 있는 충만성과 초월성을 통해 무제약적인 거룩한 분을 만나게 된다-‘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생명평화 활동가로서 예수는 이렇게 사회적/생태적 약자로부터 들음과 공감하기의 수행을 통해,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는 대상들 곧, 문, 겨자씨, 길, 양, 밭, 바람, 어린이, 동전, 뱀, 비둘기, 누룩 등을 통해 말걸어오고 공감하기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경지-이들 속에 본래 잠재되어 있던-인 무제약적인 신의 현현을 노출시킨다. 이 들 존재는 자신으로 남으면서 신적 투명성(Divine Transparency)이 이들 존재성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다.  


결 어


기독교의 생명평화는 이렇게 생존에서 본래적 실존으로의 전향이며, 이는 나/인간중심의 사고에서 사회적 약자, 생태적 약자와의 공감이란 수행방식을 통해 실현된다. 그 실현의 목표는 공중의 새, 들의 꽃이 보여주는 온 생명의 상호관계성을 통한 자족성과 충만성 그리고 그 안에 존재의 힘이신 신의 현존이다. 이는 두 개의 원이 아니라 한 중심을 가진 두 개의 원인 동심원인 것이다. 존재함과 초월, 새/꽃과 하느님, 타자와 신적현존, 명상과 행동, 생명과 평화는 그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 이어져 있다. 공중과 새, 들과 꽃의 충만한 관계, 그리고 이것이 드러내는 투명한 ‘하느님 나라와 그의 의’의 경지-이것이 기독교 생명평화운동가의 궁극적 경지이다. 

"나무에 그 잎이 다 떨어지면 그 모습이 어떠합니까?"
"나무는 그 본체가 드러나고 천지에 맑은 바람이 가득하지."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까라는 비 본래적 실존이 떨어져 나가면, 남는 것은 알짬의 실재이며, 맑은 바람을 가득 가슴으로 느끼는 신적 투명성의 경지-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가 오롯이 열려진다. 이럴때 갈등, 염려가 닿지 못하는 충만한 존재성으로서 평화가  존재의 중심이 된다.  내가 평화를 소유한 것이 아니다. 나는 평화이다. 그것이 나의 정체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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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용박사 | ecopeace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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