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
글 수 25

새로운 변화의 기원과 새로운 실재

(비폭력 실천가이자 서클 진행자의 눈으로 읽는 성서 묵상)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14)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14:6)

 


폭력의 각본
(script)으로부터의 절망과 무기력의 덫

 

우리 삶에 있어서 공공성을 기반하고 시민의식의 재생산의 모체로 기능하고 있는 공적기관들인 학교, 법원, 정당, 병원에서 일반인이 종종 접하는 지배체제의 메커니즘의 현상은 우리의 의식과 일상생활에 깊이 뿌리박히고 프로그램화되어 있어서 이것을 인식하는 것이 힘들 때가 있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조금만 주목하면 쉽게 드러나는 권위와 강제, 길들임과 굴종이라는 메커니즘만이 아니다.

 

전문직이라는 보다 잘 알고 보다 훈련 받은사회계급이 갖고 있는 널 도와줄게. 내가 네 문제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지 더 잘 알고 있어하면서 상대방인 학생, 환자, 내담자, 피고에게 힘과 영향력을 행사하는 구원해주는 신화’(월터 윙크의 용어)가 우리 사회에 퍼져있는 것에 대한 염려가 내 마음속에 있다.

 

비폭력대화와 조정중재 실천을 하고 있는 동료로부터 가정법원의 화해권고위원으로 청소년관련 폭력사례를 다루면서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법관의 형선고나 검사, 변호사의 누가 얼마큼 옳은가가 갈등 당사자의 진정한 의도를 -존중과 소통, 공평함과 자율성- 읽지 못하고 혹은 법적인 옳고 그름의 논리로 인해 관계의 진정성에 대한 소망을 흐트려 놓는지 여러 사례를 듣게 된다. 동료들이 공감적 대화를 통해 쌍방의 관계의 질을 잘 연결하여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데 거기서 일을 뒤틀리게 하는 것이 함께 팀으로 들어온 변호사의 법적인 해석과 정당성의 논리로 인해 관계를 악화시키는 일이 종종 있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널 도와줄께라는 방식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가지 못하는 것이다.

 

학교에서 학생의 왕따나 폭력사례로부터 작은 말다툼이나 핸드폰문자의 비방사건에 이르기까지 교사는 잘 할 수 있건 없건 양쪽의 사건전말을 듣고 판정을 해주거나 자신의 해결책을 들이밀면서 양쪽이 받기를 강요함으로서 사건을 처리하는 게 보통이다. 학생의 갈등 문제에 개입하지 않으면 - 그 처리 결과가 제대로 작동될지는 충분히 고려함없이 - ‘좋은 교사가 아니거나 교사로서의 의무를 태만히 했다는 판단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내가 널 도와줄께는 최소한 그 결과가 만족할지 안할지는 차지하고 자기의 역할과 의무에 대한 최소한의 소임을 다하는 위로 혹은 자기 책임에 대한 이행의 확인으로 본인에게는 이해된다.

 

그런데 문제는 그 해결의 과정과 결과가 가져오는 변화가 어떤 것이냐는 것이다. 나는 다음 세가지 질문이 자신의 전문성이 지배체제를 견고히 하고 있는 지를 분별하는 데 사용되는 근본 물음이라고 본다. 첫째는 누군가 이기고 짐, 옳고 그름, 선하고 악함의 판정을 하는 데로 내가 돕고 있는가? 둘째는 당사자의 최종 선택이 두려움, 죄책감 혹은 수치심의 동기로 이루어지는 데로 이끌고 있는가? 셋째는 대응하는 방식이 맞서기, 회피하기, 굴복하기 중의 그 어느 한 가지 방식으로 서로를 대하게 하고 있는가? 이 셋 중의 하나에 해당하는 것이라면 나의 전문성이 시민을 위해 하는 봉사나 섬김은 의도성은 없었을지라도 실제로는 지배체제를 공고히 하는 공모자로서 당신은 자신의 지위, 영향력, 힘을 발휘하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 나아가도 이 세 가지 질문에 연관된 의식, 태도, 과정 속에서 혼란, 갈등, 손상, 파괴, 다툼을 처리하다보면 마치 다람쥐의 수레쳇바퀴 돌기와 마찬가지로 앞으로 많이 나갔으되 그 결과가 없으며, 피로감으로 누적되어 결국은 다른 상상력을 갖지 못하고 그 쳇바퀴라는 올무에 갇혀 길들여지게 된다.

 

폭력의 각본을 넘기 위한 새로운 실재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 Pax Romana)”라는 검과 힘, 그리고 강제적 법의 통치의 지배체제앞에서 새로운 대안으로서 예수의 바실레이아(하나님나라)운동은 그 기원이 샬롬의 현실성에 관한 것이었다. 그것은 삶의 구체성에 화육하는 인격적이고 실천적인 그리고 이세상적인 차안에서의 초월 (다시 말하면, 초월의 내역사화)의 직접성의 경험이고 이는 진리와 은총의 충만함의 현실성을 말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14)

예수와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본 현실은 팍스 로마나의 현 상태, 도저히 무너지거나 흔들릴 것같지 않은 견고하고 팽창하는 권력과 힘의 지배체제로서 상징되는 로마의 평화의 실재 앞에서 다른 (seeing)’이라는 인식이 있었고 그것이 새로운 현실성에 대한 다른 창()을 가져오게 되었다. 그것은 로고스 (궁극적인 무차별한 관계성)의 우리 현실안에 돌진해 들어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의 신비로운 인식이었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이러한 인식은 경쟁, 다툼, 분열, 소외, 결핍, 몰이해, 저주라는 삶의 방식으로 으레 보았던, 관습적인 삶의 패턴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불러 일으켰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에 초점을 맞춘 이 표현은 우리가...보니라는 집단적 인식과 공동의 가치인식이 깔린 고백이며, 예수 한 개인을 초점으로 삼기 전에 먼저 그들 사이에서 우리 경험("we"-ness)이라는 뭔가 특별한 경험이 일어난 것의 외화(外化)가 일어났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들이 증언하는 것은 예수라는 개별자의 궁극성(신적 존재의 교리적 표명)이 아니다. 그를 통해 본 새로운 현실성인 은혜와 진리의 풍성함이 핵심인 셈이다. 지배, 정복, 분열, 결핍, 힘의 통치라는 지금의 보이는 세계가 다가 아니라 새로운 실재로서 은혜와 진리의 풍성함이라는 현실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비폭력 실천가는 분리, 상처, 손상, 폭력, 강제의 보이는 실재가 주장하는 내 삶에 대한 지배와 소유권에 대해 다른 눈을 갖고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보편적 성육신 곧 은혜와 진리의 풍성함으로 나타나는 로고스(궁극적인 무차별적인 관계성)을 자기 삶으로 내재화, 일상화하는 실재를 보는 눈이다. 사실상 인식과 자각이 실재(보이는 표상)보다 더 중요하고, 인식은 실재를 출현시킨다는 원리야 말로 현 지배상태를 유지하는 견고한 사회구조적 그리고 문화적 시스템에서 변혁을 가져올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식임을 간파하게 된다. 서클 진행자도 직면한 이슈의 혼란, 여러 당사자들의 이견과 차이 그리고 힘의 지배라는 보이는 실재 앞에서 새로운 가능성으로 이것들을 에너지로 전환할 수 있는 근본적인 안전한 공간을 붙잡을 수 있는 힘이 바로 여기 곧 은혜와 진리의 충만함의 새로운 현실성에 대한 인식과 그것에 대한 연결됨(우리는 이를 성육신의 변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에서 오게 되는 것이다.

 

비폭력 실천가와 서클 진행자는 자신의 인식이 무엇을 진정으로 보고 있는지에 대해 명료하다. 비록 혼란, 갈등, 다툼, 파괴, 분열의 눈에 보이는 표상들에 대해 도피하지 않고 직면하고 있으면서 혹은 회복적 서클의 도미니크 바터의 말을 빌리자면 갈등의 폭풍우 속으로 들어가면서도 자신은 해결책이나 대답을 갖고 있지 않을 지라도 그가 보는 인식은 진리와 은혜의 현실성에 대한 집중과 이 보이지 않는 현실성이 작동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에 대한 견고히 붙잡음을 수행한다.

 

우리는 이러한 진리와 은혜의 인식수행을 다음과 같이 실천적 영역에서 두 가지 수행(practices)으로 표현할 수 있다. 진리란 갈등상황에서 당사자들의 관점과 속마음(욕구)이해하는 수행으로 전환된다. 은혜란 연민으로 -사랑 혹은 자비로움으로 감싸안기- 상대방(문제아, 골치덩이, 반대자, )을 보는 수행으로 전환된다. 그렇게 해서 안전한 공간에서 각자의 진정함’(진리)들이 이해되어지고 소통되도록 한다. 그리고 자기의 관점을 넘어 상대의 관점/속뜻이 진실로 들려지게 하면서 여기에서 자연히 일어나는 뭔가 상대방의 진실에 응답하고 연결되는 마음이라는 연민(자비로움)을 불러일으킨다. 이 두 가지 수행 -이해와 연민-을 통해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는 진정으로 당사자들이 원하는 미래를 함께 선택하고 이를 위해 함께 일하도록 기여하게 된다.

 


새로운 현실성을 지속시키기

 

요한 공동체에서 일어난 지배체제에 대항하고 대안의 미래를 향한 각자 내면의 영혼의 불꽃으로서 일어난 새로운 현실성(궁극적이고 무차별적인 관계성의 진리와 은총의 충만함)은 놀랍게도 당시의 신화적 세계관속에서도 경이로울 정도로 실존적으로 방향정위로 이어진다. 여기서 경이롭다는 것은 인간세의 모든 것을 신의 영역에 의해 지배된다는 당시의 세계관에서 특별한 사회적, 공동체적 수행으로 바뀌어졌기 때문에 나로서도 이해불가능하다는 말이다. 그 특징은 타세상적이 아닌 이지상적이며, 교리적이거나 개념적이지 않고 생활적이고, 숭배적이지 않고 실천적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인간의 모든 유혹은 그것이 궁극적인 특이한 경험을 한 사람을 신적 존재로 등극하여 예배의 대상으로 -우리는 이것을 선포하는 자로 오신 예수를 선포된 자로 등극된 그리스도로 전환에서 본다- 올리는 일을 우리 주변의 한국 신흥종교의 교주의 사례들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데 그런 절차를 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한다나는 너희를 종이 아니라 형제로 여기겠다’ ‘스승이며 주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라고 증언하고 있는 요한 공동체의 분위기를 보면 이는 더욱 명확해진다.

 

예수 자신의 개체적 자아에 대한 신성화로 가는 길을 가는 대신에 요한기자의 예수운동 공동체는 새로운 자의식을 갖고 생활수련을 통해 거룩함-곧 신을 경험하는 수행-을 접촉하는 방식을 취한다. 그것은 참나(I-AM)온전히 현존하기하기로 현실상황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은 요한복음에서 나타나는 예수의 자기 표명에 대한 신비진술(“나는...이다”; ego eimi)의 반복에서 볼 수 있다. 다음 7가지가 그렇다.

 

*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이다.

* 나는 세상의 이다.

* 나는 양이 드나드는 이다.

* 나는 착한 목자이다.

*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 나는 이요 진리생명이다.

* 나는 참 포도나무이다.

나는...이다는 모세에게 하나님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에서 받은 나는...이다라는 분이다 (I am that I am)”의 신비어의 문장구조를 요한 공동체, 아니 적어도 요한 기자가 차용한 것으로 궁극적인 것에 대한 경험을 표현한 신비진술이다. 여기에서는 예수라는 개별적 역사적 존재의 개체성에 집중되는 것이 아니라 요한 공동체가 이 신비진술어속에서 그리스도라는 신적 관계성의 현실을 어디에서 경험하는 지에 대한 고백의 현장-, , , 목자, 포도나무-인 일상성과 그 일상성의 깊이에 있는 실천적 수행의 차원- 부활/생명, /진리/생명 -, 이것들이 핵심인 것이다.

 

궁극적인 무차별적 관계성의 상징으로서 나는...이다는 교리적인 대상화로 되어질 수 없는 일상의 현실에서 무제약적 적용력을 갖으면서 관계의 전형적인 상징들인 빵, , , 목자, 포도나무에서 구현된다. 상호연결과 상호지원, 상호 풍성케 하기의 핵심가치와 그런 삶의 방식을 나타내는 빵, , , 목자, 포도나무의 이미지 속에서 우리는 무제약적 책임을 지닌 신적 인격성의 현존을 만남을 고백한다. 그리고 이들 이미지는 전적으로 초-내세적인 것이 아니라 이지상적(mundane, this-worldliness)인 이 땅의 현실, 삶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여기서 한 문장을 예로 좀더 성찰하자. 왜냐하면 이 문장이 그동안 타종교에 대한 정복주의, 배타주의의 핵심 문장으로 이해되어 와서 수많은 전쟁과 폭력, 인종갈등, 종교갈등(, 십자군 전쟁, 30년 전쟁)만이 아니라 종교가 다른 한 가족안에서조차 불화의 진원지로 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 문장은 다음과 같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14:6)

 

이 문장은 다음과 같이 비폭력 실천가로서 내가 하는 해석은 이렇다:

 

신비문법인 나는...이다은 그 알짬을 자신의 문법에 있지 않고 그 문법구조가 담고 있는 내용 , 진리, 생명에 핵심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는..이다가 아니라 길, 진리, 생명이다.

 

나는...이다는 이미 7개의 신비진술문장에서 그리고 로고스에 대한 나의 궁극적이며 무차별적인 관계성이 보여주는 관계성(연결, 일치 -예수의 마지막 제자들을 위한 기도인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17:21-22])이 가장 핵심적인 의미이다.

 

, 진리, 생명은 인격적이고 관계적인 삶의 원형(archtype)을 진술한다. 이것은 한 개인의 삶의 실천영역을 말하는 것이며 길은 닫힘/벽이 아닌 열음/개방이며, 진리는 독선이 아닌 사랑의 눈에 기초한 진정함이며, 생명은 분리/절단/소외/죽임이 아닌 상호 풍성케 하기의 실존적 삶의 차원을 말한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이란 이러한 길/진리/생명의 행위가 존재가 되는 인격적 실존으로서 참자아(에고없는 보편적이고 무제약적인 관계성을 자기 존재의 정체성으로 갖는 참자아)가 아니고는 아버지(무차별적인 절대적 관계성이자 일치이신 궁극자)에게로 갈 수 없다로 해석된다.

 

우리는 여기서 신비 문장에 대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진실로 진실로(truly, truly) 말하거니와...”로 계속하여 말씀하였던 것을 상기할 때, 다음의 한 단어를 이 신비문장에 첨가하면 더욱 명료한 이해를 하게 된다:

 

(<true>)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 나를 거치지 않고는...

 

그러므모 여기서 """나는..이다(I Am)"을 전제하며 이는 인격적 관계성으로서 보편성을 구현한 ''를 의미하기에, 그러한 궁극적 관계성의 인격적 표현으로서 예수의 말을 듣는 제자들은 자신의 에고에 대한 집착에서 무제약적 관계성의 부름에로 자신의 삶을 헌신하는 방향정위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 개별적 역사적인 자아의 목소리였다면 그런 방향정위의 힘이 일어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온전하게 현존하기로서 나는 ..이다” “나는 ...있다의 수행

 

분리, 폭력, 다툼, 화의 현장에서 이해와 연민의 수행을 통해 그러한 자극 상황들이 하나의 골치아픈, 일어나서는 안 되는 문제(a problem)가 아니라, 당사자들이 서로를 더욱 알게 되고, 자기 배움과 공동체의 성장으로 변화되는 기회(opportunity)로 삼는 것이 바로 , 진리, 생명의 수행방식이다. 그리고 그러한 현장에서 자신의 관점과 이득/손실을 넘어 서로 손을 잡고 미래를 향해 뭔가 함께 할 수 있는 것을 제안하는 구체적인 이행 동의나 그 어떤 행동 계획을 적대자들이 만들어 내는 것 그 과정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초월(transcendence)을 본다.

 

여기서 초월이란 이 공간과 시간의 넘어(beyond)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의 관계의 깊이에 대한 것이다. , 분리와 단절이 변화되어 관계성이 발현될 때, 우리는 우리릐 파편적 지식과 자기 정체성의 보더 더 깊고 온전한 숨어있는 온전성(the hidden wholeness; 토마스 머튼의 용어)’를 발견하게 된다. 퀘이커 교육사상가인 파커 파머(Parker Palmer)의 초월에 대한 해석은 이에 도움이 된다:

 

우리는 초월을, 자아와 세계의 실재들로부터 벗어나 위로 혹은 밖으로 도피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일반적인 경향을 거부해야 한다. 오히려 초월이란 사랑의 영이 우리 실존의 심장부로 뚫고 들어오는 것, 불어 들어오는 것, 우리로 하여금 자신과 세계를 전보다 더 큰 신뢰와 희망을 가지고 보도록 말 그대로 영을 불어 넣는 것’(in-spiration)이다. 초월을 경험하는 것은 벗어나는 것이다. 자아와 세계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이 서로를 끝없이 반영하고 결정하는 마주 선 거울들의 방으로부터 말이다. 기도는 우리를 밖으로 끄집어 낸다. 자아와 세계 밖으로가 아니라, 그들의 닫힌 순환 논리 바깥으로 말이다. (가르침과 배움의 영성)

 

요한 기자가 제기하는 관계성의 이미지들- , , , , 목자, 포도나무 그리고 그것이 실천되는 내면의 에너지들 -부활, , 진리, 생명-, 이 모두는 관계(연결과 일치를 통한 화해의 수행)라는 행동을 가리키고 있다. 이를 통해 진리/진정함과 은혜/자비로움의 충만함을 이 현실에서 나의 삶에서 눈으로 목도하고 이것을 생으로 증거하는 (“let your life speak”-퀘이커의 중요한 사회적 증언 격언) 것이 예수운동의 핵심으로 요한은 말한다. 요한 기자는 이것이 실현되는 신뢰의 공동체로서 신앙 공동체 -사회변혁의 핵심주체로서-를 제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런 관계의 행동들이 결핍과 분열의 파편과 상처 이면에 보이지 않는 온전성혹은 궁극적인 무차별적인 관계성을 드러내고 출현시키도록 하게 하는 비폭력실천가의 태도나 자세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러한 관계의 행위들이 가능하게 되는 지금 여기서의 온전히 현존하기라는 깨어있는 의식이다.

 

나는 개체적인, 대상적으로 분리된, 그리고 피부의 껍질에 둘러싸인 (I)”로서가 아니라 나는...이다”(I am)이라는 역동적 관계성에 내 진정한 정체성이 있다는 것을 자각함으로 온전히 현존하기를 수행하는 것이다. 행동의 근저에 존재로 있는 이 방식을 통해 나는 나는 ...이다(I am)”나는... 있다(I am)”와 동시성으로 있을 때 해답과 해결책 없이도 상대방을 돕고, 또한 온전히 현존함을 통해 "Is-ness"(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하나님에 대한 다른 이름)이신 현존의 일치로서 신적 현실성을 만나게 된다. 레너드 제이콥슨(Lenard Jacobson)은 온전히 현존하기를 다음과 같이 수행하기를 제안한다:

 

나는 마음으로부터

현존으로 깨어나기 위해 여기에 있다.

나는 과거와 미래로부터

지금 이 순간으로 깨어나기 위해 여기에 있다.

나는 두려움으로부터

사랑으로 깨어나기 위해 여기에 있다.

나는 분리되어 있다는 환상에서 깨어나

신과 하나임을 경험하기 위해

여기에 있다.

 

(2013.3.5.)

엮인글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영혼이 있는 곳에 하느님도 계시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평화세상 2014-06-29 2705
24 평화성서학세미나로의 초대 2. 3/7-10 평화세상 2017-03-02 434
» 비폭력 실천, 평화영성: 새로운 변화의 기원과 새로운 실재 관리자 2013-03-06 2071
22 비폭력의 눈으로 성서읽기-몰아쳐오는 세상 파고에서 무서움을 넘어서기 메인즈 2013-02-17 1923
21 한처음에 시작이라는 꿈이 있었다(기독교 비폭펵실천가/화해중재자의 성서묵상) 메인즈 2013-01-19 1913
20 복음의 본질은 화해사역이다 메인즈 2010-12-16 2028
19 바울과 평화 메인즈 2010-09-29 1974
18 사도 바울의 평화에 관한 구절들 메인즈 2010-09-29 1972
17 마태 제자직의 근본 수행으로서 평화 file 관리자 2010-09-07 1810
16 폭력에 대한 예수의 비폭력 저항-샬롬 통치의 현실성의 수행 메인즈 2010-07-11 2136
15 기독교인을 위한 비폭력 영성과 실천 -맞서 싸운 상대가 천사로 바꿔지다 메인즈 2010-03-09 2008
14 평화와 자유 (성서공동연구자료) 메인즈 2007-03-19 1884
13 평화와 목회 (성서공동연구 자료) 메인즈 2006-12-07 1935
12 평화관련 공동성서연구모임 안내 메인즈 2006-11-29 1759
11 평화활동가를 위한 성서명상-실존적 궁지와 평화 메인즈 2006-10-09 1979
10 평화와 생명밥상: 물과 공기 <공동성서연구에로 초대> 메인즈 2006-07-09 2076
9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한 신학적 고찰 메인즈 2006-07-03 2064
8 공중의 새와 들꽃을 보라! -기독교 생명평화 일꾼의 길- 메인즈 2006-06-22 2074
7 마가의 폭력구조와 현대 평화학의 적용 메인즈 2006-04-12 1875
6 마가복음내 공간구조에 얽힌 갈등과 평화 메인즈 2006-04-12 1991
박성용박사 | ecopeace21@hanmail.net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