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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아쳐오는 세상 파고에서 무서움을 넘어서기

 

예수께서 곧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태워 건너편으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 동안에 군중을 돌려보내셨다. ........

그 동안에 배는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역풍을 만나 풍랑에 시달리고 있었다.

새벽 네 시쯤 되어 예수께서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셨다.

예수께서 물 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본 제자들은 겁에 질려 엉겁결에 "유령이다!" 하며 소리를 질렀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나다, 안심하여라. 겁낼 것 없다." 하고 말씀하셨다.

.......

예수께서 "오너라." 하시자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를 밟고 그에게로 걸어갔다.

그러다가 거센 바람을 보자 그만 무서운 생각이 들어 물에 빠져들게 되었다. ...

예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왜 의심을 품었느냐?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함께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쳤다.

(14:22-32)

 

거대한 태풍의 시대적 징조속에서

기독교평화전통의 비폭력훈련가로서 필자가 요즈음에 느끼는 시대적 도전들은 매우 심각하다. 먼저 몰려 오는 위기의 파고들을 간단히 음미하자면 이렇다. 그간 얼어붙은 남북관계는 얼마전의 남북 각각 나로호와 은하 3호의 이름으로 우주선 발사와 북의 핵실험으로 그렇잖아도 섬 분쟁으로 균열이 가고 있는 동북아정세에 큰 지진을 가져오고 있다. 이는 2013년을 중심으로 조국통일대전 혹은 최후대전을 향한 북과 핵지배력의 종주국과 한반도 분단관리를 통한 동북아 지배력을 지키고자 하는 미국간에 첨예한 무력위협과 최종결판이라는 대결양상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지구적으로는 지구온난화의 새로운 상황에 덧붙여 그동안 세계질서를 이끌었던 미국은 재정절벽이라는 거대한 암초와 EU는 회원나라들의 국가부도사태의 내부 상황으로 버거워하고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틴을 포함한 중동의 화약고는 민주화바람과 이란의 핵무장으로 더욱 복잡한 불안정한 상태를 고조시키고 있다. 국내로 보면 4대강사업의 4만명 일자리 선전이 오천명도 안되는 일자리와 매년 수천억이 들어가는 총체적 부실의 감사원 진단, 원자력발전소의 위기 문제 그리고 대선의 결과로 나타난 분명한 진보와 보수간의 정치적 세력화의 고착, 소통 안 되는 힘 숭배의 조직문화가 교육, 종교, 기업, 정치에서 재생산과 확산을 거듭하고 있다.

인간이 이성적 동물이라는 게 무색할 만큼 그리고 개인들이 모인 공동체와 사회가 더욱 분리, 상처, 폭력, 손실로 돌진해 나가는 이 집단적인 어리석음과 자연과 사회의 약자들의 고통들에 대한 눈멀음이라는 잔인함들을 어떻게 우리는 이해해야 하는가? 개인으로서 자신의 바램과 가치에 위반되고, 만족스럽지도 않으며 엄청난 사회적 비용이 들어가는 비효용성 그리고 결과가 전혀 즐겁지도 않은 데도 우리는 왜 개인, 집단, 공동체 그리고 국가의 영역에서 똑 같은 일을 자꾸 반복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인슈타인은 제정신이 아님(insanity)에 대해 같은 혹은 유사한 일을 계속적으로 반복하면서도 다른 결과를 보고자 하는 것으로 정의를 내렸다. 개인의 삶, 단체와 공동체, 지역사회 그리고 국가의 정책결정과 그 행위가 제정신이 아닌 것만이 아니라 이제는 거대한 위협과 부메랑이 되어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결과가 도래하고 있는 데도 우리는 그 고통의 비용에 대해 무섭게도 태연한 사회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을 정당화하는 것은 저 놈이 나쁜 놈이기 때문이다라는 단순한 이유에서이다.

 

적은 상대방이 아니라 위협과 두려움 그 자체이다

필자가 성서본문 중 거센 바람을 만나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나타난 예수님의 이야기를 통해 새롭게 확인하는 것은 거센 풍랑에 무서워 떨지 말고 자기의 좁은 배에서 안전을 추구하지 말고 거기서 나와 물을 걸으라는 주님의 초대이다. 거대하게 몰려오는 사회, 국가 그리고 지구적 문제들의 폭풍우속에서 어떻게 무력감으로 움츠리지 않고 바람직한 미래를 세우는 가능성을 선택할 수 있는가의 고민 앞에서 필자가 얻은 해답이자 나 스스로의 활동 원리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 폭풍우속에서 길을 만들어 가는 주님의 자리를 분별(discernment)하는 것과 물속으로 뛰어드는 참여(engagement)를 신앙의 수행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여기서 분별이란 일, 관계, 사람, 상황의 폭풍우속에서 자신을 나다(I am)”라고 신분을 노출한 주님을 확인하는 것이며, 이는 상대방의 말, 태도, 행위에 대해 적대적 감정을 갖고 위협과 무서움의 논리로 사는 것이 아니라, , 관계, 사람, 상황 속에서 의견과 사상 그리고 신념의 차이를 넘어 , 진리, 생명에 기여하는 게 무엇인지 항상 그 속에서 알아차리며 그것의 진실에 응답하는 것이다. 직면하고 있는 일, 관계, 사람, 상황 속에서 , 진리, 생명에로 이바지 할 수 있는 나의 진실을 말하고 상대의 진실을 듣는 그것이 그리스도의 현존을 경험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란 강제, 판단, 평가를 통한 고통을 주고받기라는 자동응답이 아니라 그 갈등의 폭풍우속에서 “I-AM”이라는 진실의 현존(presencing)이기 때문이다.

I-AM이라는 진실의 온전한 현존으로서 그리스도는 갈등의 폭풍우속에서 무제약적 현존으로 서 계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오라고 초대를 하신다. 그리고 나는 일, 관계, 사람, 상황 속에서 오라는 초대를 깨어 의식하면서 I-AM의 무제약적 현존앞에 자신을 개방하여 -오해와 분노 그리고 위협과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i-am"이라는 개방적 현실성으로 자신의 유약성과 상처받을 수 있음을 방어하지 않고 있음으로서 다른 안전(security)의 감각을 얻게 된다.

그리고 참여란 세상의 폭풍우가 갖고 있는 권세와 어둠의 주관자 그리고 하늘의 악한 영의 통치에 대해 두려움을 갖지 않고 샬롬의 통치라는 신의 주권성을 폭풍우속에서 세우는 것이다. 이것이 프란체스코, 마틴루터 킹, 마더 데레사, 도로시 데이 등이 보여준 세상의 작은 자속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찾는 신앙의 행동이었다. 우리는 이 참여를 화해의 사역이라고도 부른다. 이는 공감과 연민의 가슴으로 세상을 만나는 것이다.

아쉬운 것은 한국 기독교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보수주의자들은 -전통(ortho-doxy: 올바른 가르침)을 지키는 자들이 원래 의미임- 신의 주권성을 세상 파도가 없는 안전한 교회(보트)속에서 찾고 거기에 머물러 있다. 그래서 세상의 파도와 폭풍우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두고 거기에 들어가는 것은 자기 정체성을 벗어나고 진보의 일인양 - 여기엔 약간의 타당한 논리도 있다. 이를 테면 진보주의자들이 지닌 시니컬한 태도, 무신적인 경향에 대해 마음이 안드는 경우가 그것이다 - 이분법의 논리를 갖고 있는 것이다. 나는 진보나 보수에 대한 논쟁에 관심이 없고 오직 관심은 이것이다. 신의 주권성을 어디까지 어느 정도까지 세울 것인가? 영혼속에서만, 교회에서만, 일요일 혹은 예배시간이라는 제한된 시간안에서만인가?

세상의 파도가 거칠 때는 그것을 건너도록 주신 조그만 보트(교회)에서 안전을 구하며 무서움으로 떨기 보다는 그 파도 위를 걸으며 오라고 하신 주님의 음성을 듣고 우리가 움직일 때임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주님이 거기서(풍랑) 자기 존재를 드러내시고 앞서 걸어가고 있기 때문이며 또한 우리를 부르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럴 때 거친 바람은 이들이 물속으로 뛰어드는 것에 놀라 멈추고 만다. 어떻게 그렇게 멈추었는지는 신비로 남지만 그렇게 된다. 역사의 수많은 무력갈등과 지배체제가 그러한 물속에 뛰어든 소수에 의해 전환이 되고 새로운 평화의 질서가 형성되어졌다.

그러나 그 뛰어드는 데는 거대한 폭풍우여서 무모한 뛰어듦과는 겉으로는 분간이 안 되는 하나의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것은 의도와 목적의식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거대한 풍랑속에서 나다(I am)”라고 말씀하신 분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풍랑의 에너지를 , 진리, 생명의 에너지로 변화시키려는 무제약적 현존으로서 그리스도의 참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안전한 공간을 넘어 새로운 눈을 얻기

눈뜬 자이기에 행동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목격했기에 저절로 행동이 수반되는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에게 자명하며 그것이 자기 행동의 정당성을 스스로 입증한다. 그리고 그 무모함은 역사의 결과로 나타난다. 거대한 폭풍우가 멈추고 갈 길에 어느 새 닿게 된 것으로 알게 된다. 그 결과는 미리 입증할 수 없다. 뛰어듬에서 일어나는 과정이 순간순간의 결과적 과정을 창조하고 그 뛰어듬의 경험으로 인해 그는 새로운 시야를 얻게 된다.

폭풍우속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물에 뛰어들음을 하는 이유는 그래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만나는 것은 주님이 있는 저편의 안전한 공간이 아니다. 우리가 대화의 안전한 공간을 서클 모임이나 공동체에 있도록 확보하는 것에는 의지의 노력이 들어간다. 갈등 당사자 둘이나 혹은 그보다 더 많은 집단적 갈등의 상황에서 소통시키려는 의지의 노력과 그것이 가능하게 하는 안전한 공간의 확보가 화해사역자나 회복적실천가의 핵심은 아니다. 갈등의 폭풍우속에 뛰어듦의 궁극적인 안전한 공간은 저편에서가 아니라 뛰어듦속에 자기를 내던진 자기없음(selflessness)전적인 현존하기(wholly presencing of this moment)’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전적인 현존하기에서 I-AM의 존재론적 궁극성과 i-am의 윤리적 현실성은 공유되면서 무제약적 현존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부여받게 된다.

그렇게 되어질 때 외부의 거친 폭풍우와 파도가 변혁적인 에너지와 방향을 주게 되고 나는 이미 건너편없는 도달한 존재로서 아니 도달할 것이 없는 존재로서 자유로워지게 된다. 즉 공간이 안전을 주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눈이 안전을 준다. 새로운 눈을 통해 새로운 실재는 열려진다. 이것이 기독교 평화사역자이자 비폭력실천가로서 나의 확신이다.

국내와 지구적인 폭력의 폭풍우속에서 그 모든 폭풍우를 잠재울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작지만 중요한 선택 하나는 자기 내면의 참 목소리를 듣는 분별과 시대적 요청에 대한 나 자신 나름의 선택에 의한 참여라는 행동을 서로 연결하며 사는 것이다. 그것의 구체적인 표현은 개인마다 속해있는 상황마다 다를 수 있지만 언제나 이 분별과 참여의 창조적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온전히 현존하며 경험하는 삶을 사는 것을 통해 뭔가 다른 실재에 대한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는 신념을 2013년도 구정을 보내며 새롭게 다짐하고 있다. (2013.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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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용박사 | ecopeace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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