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
글 수 25
 (기독교비폭력실천가/화해중재자의 성서묵상)
한 처음에 시작이라는 꿈이 있었다

 땅은 아직 모양을 갖추지 않고 아무 것도 생기지 않았는데, 어둠이 깊은 물 위에 뒤덮여 있었고, 물 위에 하느님의 기운이 휘돌고 있었다. 하느님께서 빛이 생겨라하시자 빛이 생겨났다. (1;2)

 

혼란과 어둠의 지배하에서

20여년을 한 부부로서 살아왔던 삶의 여정에서 40대 여성이 직장도 전문직이며 집안 형편도 괜찮고 해 놓은 가구와 집들도 남보기에 부러워할만한 위치에 있음에도 갑자기 남편과의 소통의 단절과 무미건조한 응답으로 속에서 차거운 한기를 느끼며 실존적인 어둠을 경험하고 있다. 어떻게 시작이 가능한 것인가?

그토록 믿고 친밀하다는 단체 동료로부터 자신이 사적인 모임에서 한 말이 다른 사람인 책임자에게 전달되어 자기 자신에 대한 판단과 프로젝트 진행에 대한 불이득으로 돌아왔을 때, 그래서 자신이 말한 것이 안전하게 보호되지 않고 화살로서 자신의 심장에 꽃혀 심장에서 피가 흐르고 있음을 알게 되고 분노와 좌절이 일어날 때 어떻게 시작은 가능한 것인가?

초등학교부터 친한 친구였던 AB중에, 활동량이 많은 A가 내성적인 B와 여러 차례 사소한 부딪침이 있다가 결정적인 한 사건으로 A로부터 B가 깊은 수치심을 느끼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학교폭력의 범주에 해당하는 A의 자극하는 행위로 인해 B로서는 불의하다고 느끼고 분노로 폭발하였지만 학교가 조치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상황에서 양 부모가 아이들 문제로 서로에 대한 불신과 보복성의 대화가 오고가고 이것이 학부모들에게 전파되어 살어름판처럼 학급분위기가 변질되었다. 어떻게 시작은 가능한 것인가?

전쟁은 나라와 나라사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우리는 총 대신 수많은 비난과 강제의 언어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크고 작은 전쟁을 치루고 있다. 그리고 그것에 익숙해지고 자연스러워져 정상적인 것처럼 살아간다. 원수는 저 멀리 다른 나라에 있는 것이 아니다. 수시로 그대가 사랑하는 대상, 동료, 파트너가 적으로 다가오고 그로 인해 고통과 좌절에 빠지게 된다. 보복하기, 도피하기, 침묵으로 굴종하기가 임시로 위로가 될지는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계속적인 전쟁상태를 내면과 관계에 유지하게 만든다.

 

시작을 어렵게 하는 방식

땅은 아직 모양을 갖추지 않고 아무 것도 생기지 않았는데, 어둠이 깊은 물 위에 뒤덮여 있었고, 물 위에 하느님의 기운이 휘돌고 있었다.

기독교 화해자의 시작은 해답을 갖고 문제에 직면하는 것과 다르다. 그 어떤 긍정적인 조짐과 안전한 자원의 전제조건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모양도 갖추지 않고 아무 것도 생긴 것이 없는그 혼란한 상황만이 우리에게 삶의 맥락으로 주어질 뿐이다.

처음에는 아무런 해결의 가능성을 볼 수가 없다. 과거의 그 어떤 해결의 패턴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진단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두 사람의 과거 스토리의 잘못됨의 뿌리 역사를 들추어내고 스토리의 과거를 깊이 탐구하여 여러 사실들이 나타나도 그러한 진단으로서는 해결이 되지 않는다. 만일 모양도 갖추지 않고 아무 것도 생기지 않은 전적인 혼란, 혼돈, 어둠의 실존적 상황에 상대방이 있다면 기독교 화해자로서 중재자로서 그대의 조언, 가르침, 그대의 과거의 해결의 이야기, 그대 나름의 과거의 유사한 해결 스토리에 대한 들려주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 어둠이 매우 깊은 물처럼 심연속에 상대의 영혼이 있을 때, 그 어떤 탐구의 질문도 또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남편이, 상대방이 혹은 A가 그렇게 한 행동에는 무엇이 원인이라 생각하나요?” “~라고 생각하는 데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지요?” 혹은 아이쿠, 저런! 정말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인가요?”라는 동감도 소용이 없어진다. 상대방은 침묵하기, 스토리 반복하기, 적대적 감정에 의해 억울함과 무력감으로 흐느끼기, 중재자와 상대방간의 독백-질문과 피상적인 응답-의 흐름만이 있으면서 그 상처와 어둠은 계속 심연처럼 아가미를 벌리고 있다.

그리고 중재자로서 나의 조언을 듣고 있는 것 같고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있을 수도 있지만 실제의 대부분은 마음속에서는 다른 생각을 하기가 보통이다. 혹은 내 삶의 경험을 상대방에게 투사하는 것이기에 상대방에게 능력을 부여(empowering)하는 방식이 되지 않고 내 견해에 따르게 하는 보이지 않는 지배의 방식을 행사할 뿐이다.

아무리 비슷한 과거의 사례들의 다룸이 있었다 하더라도 개별 존재가 가진 삶의 미묘한 관계의 역동성과 내면세계의 민감성으로 인해 그 어떤 해결과 조언의 대답이 별다른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기독교 화해자, 실천가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어둠, 절망, 혼돈, 갈등에 대해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

 

시작은 어떻게 가능한가?

기독교 화해자, 중재자가 취하는 진정한 태도는 먼저 고통, 어둠, 실패, 혼란을 일어나서는 안되는 문제 (a problem)으로 인식하지 않도록 돕는다. 그렇게 할 때 제거, 분리, 배제, 정복, 설복의 내면적 태도가 생기게 되고 이는 말하지 않아도 내 몸과 비언어적 소통을 통해 상대방에게 전달된다.

우리의 태도는 화해자이든 직면한 당사자이든 그것과 온전히 현존하기(presencing)에 있는 것이다. 문제로 판단하지 않고 온전히 현존하기로 그 문제를 끌어안고 직면하여 자신을 개방하고 있을 때 새로운 가능성이 일어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성서가 증거하는 바이다:

어둠이 깊은 물 위에 뒤덮여 있었고, 물 위에 하느님의 기운이 휘돌고 있었다.

 성서의 전 66권을 함축한 복음의 진수인 이 구절이 시사하는 바는 어둠이 심연처럼 뒤덮고 있을 때 그 위에 하느님의 기운이 휘돌고 있다는 알아차림으로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실존의 어둠, 추락, 무의미, 실패에 대해 기독자로서 취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태도이자 신앙의 핵심이다.

어둠, 추락, 지침, 분열, 심연의 나락, 고통, 혼란은 적어도 내가 부정의 판단으로 서지 않고 전적으로 온전히 그것에 현존하는 한 기이한 방식으로- 이성이나 논리 혹은 추측이 가능하지 않은 차원이라는 점에서 기이한 방식으로- 전환(trans-forming)이 되면서 의미와 질서가 출현되어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런 어둠, 고통, 혼란, 추락, 지침들을 해결하려는 실행모드로 뭔가 행하는 것이 아니라 초대하고 환대하여 같이 온전히 있을 때 다른 차원, 뜻밖의 해결책 혹은 새로운 가능성이 출현되어진다는 점이다: 물위에 하느님의 기운이 휘돌고 있었다.

 

열려지는 시작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제정신아님(insanity)을 정의하기를 똑같은 일을 계속 반복하면서도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이라 정의하였다. 지금 고통과 상처를 호소하고 있는 상대에게 대단히 미안한 일이지만, 우리가 경험하는 다양한 심연의 어둠을 다루는 기존의 방식들이 분열, 상처, 파괴, 그리고 만족할 수 없거나 기뻐하지 못하는 결과를 되풀이 되풀이 가져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결과를 기대한다는 것은 제정신이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이런 실수를 거듭거듭 저지른다.

내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어둠의 다른 선택의 대응이다. 즉 신성한 기운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를 치유한다. 어둠, 추락, 지침, 분열, 심연의 나락, 고통, 혼란, 갈등은 신성한 기운을 맛보는 거룩한 길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은 그런 어둠, 추락, 고통과 혼란들이 교훈을 주는 몽학선생이 된다는 것이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진정한 뜻이 아니다. 최소한 우리는 그 상황에 대한 반응에 있어서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할 뿐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당신은 그 상황이 오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며 받아들이고, 그것에 대응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전적으로 당신의 선택이 존재한다.

만일 자신이 행한 일이 정당하고 상대가 전적으로 잘못을 행한 경우에 내가 지금 하는 말에 대해 항변하며 이렇게 대응할 수도 있다: “와우, 정말 당신은 고리타분하고 순진한 비폭력주의자이시군요! 내가 화를 내고 상처를 받고 힘들어 하는 어둠이 있는 데는 그만한 타당한 이유가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상대가 그런 원인을 제공했구요. 어떻게 그렇게 쉽게 다른 선택이라는 것으로 점프할 수 있단 말입니까? 당신은 비실제적이어요!”

화해중재자로서 나는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그런 경험의 진실에 대해 의심을 하지 않는다. 전적으로 그 진술이 진실하다고 인정하고자 한다. 그러나 내 경험에 따르면 그러한 타당성이 어떤 결과를 그대에게 지금 가져오고 있는지 눈여겨 보라는 것이다. 상대방에 대한 당신의 판단의 그 타당성 혹은 정당함은 지금 어떤 식으로 작동하고 있고 어떤 결과를 가져오고 있는가? 당신이 타당성의 이름하에 옳음의 이름하에 대응하고 있는 방식이 분리, 제거, 고통주기, 두려움이라면 그 타당성은 그대의 덫이 되어 탈출구 없음 No Exit’의 궁지에 놓게 된다.

 

어둠의 변형(transforming)으로 시작함을 배우기어둠의 실상에 맞서서 소멸되거나 상대를 정복하기, 갈등과 혼란을 뒤로 미루는 도피하기를 통해 내면에 항상 전쟁을 지니며 살거나 혹은 굴종하기를 통해 미래의 보복을 위한 증오의 불씨를 조용히 태우고 있기의 방식이 아니라 다른 선택의 가능성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과 상대방을 악으로가 아니라 선으로 대응할 수 있다면, 지금의 상황에서 상대방을 쳐서 없애는 방식보다는 미래에 일어나기를 바라는 방식으로, 삶에 기여하는 방식으로 선택하는 것에 알아차림으로 있는 것은 현존하기로 인해 가능하다는 것을 임상경험을 통해 말하는 것이다.

심연과 어둠위에 신성한 기운이 휘돌고 있다는 존재론적 각성은 윤리적 알아차림으로 연결된다. 그러한 온전히 현존하기와 공감은 심연과 어둠위에 있는 신성한 기운을 작동시킨다. 그러한 새롭게 출현하는 실재를 그대는 사전에 예측할 수 없다. 공감으로 전적으로 상대방의 말에 귀기울여 반영하며 인도하기(leading)가 아니라 상대방의 감정과 욕구에 맞추어 뒤따름(following)하며 연결의 끈으로 있을 때, 갑작스럽게 상대방은 모호하던 혼란속에서 그 무언가가 변화되었음을 발견한다.

빛이 있으라 하자 빛이 생겨났다.

오병이어의 기적처럼 어떻게는 화해중재자도 모른다. 적대적인 당사자들을 조정중재할 때 온전히 현존하기로 쌍방을 연결하며 앉아 있을 때, 심연의 어둠과 고통을 갖거나 타자에 대한 분노와 아픔으로 찾아오는 사람을 그렇게 현존하기로 연결되어 단지 온전히 거기 있을 때, 일정정도 시간이 지나면 갑작스럽게 이해소통이 열리면서 빛이 들어오는 경험을 목도할 뿐이다.

기독교 갈등 중재자가 상대방이 개인이든 집단이든 간에 도울 수 있는 것은 어둠에 직면할 때 빛이 있으라라는 가능성을 신뢰하면서 해결책이 아니라 진행되는 과정속에서 어둠의 현실과 신성한 기운이라는 실재, 이 둘에 대해 자신을 개방하고 온전히 현존함으로 있는 것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에서는 보리떡 5과 물고기 2마리라는 그 미천하고 모자란 것에 대해 예수께서 온전히 현존하여 그것들을 들어 축복(blessing)'으로 이루어졌던 것과 같다. 오천 명의 현실과 들어 축복함이라는 신성한 기운의 연결은 예측하지 못한 새로운 가능성을 출현시키는 것이다.

 기독교 갈등 중재자는 어떻게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출현된 가능성/실재에 대한 증언만이 있다는 것은 이성에 대한 불신이 아니라 그 사람을 갈등과 폭력에 대한 중재의 직분을 자기 겸비의 수행으로 실천하도록 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는 고백하고 싶다. 실제로 학교폭력과 관련된 학생, 학부모, 교사들과의 만남에서 혹은 가정의 문제로 고민하는 당사자들이나 한쪽 개인을 만날 때, 그 해결책은 비슷한 사례이면서도 다른 방식으로 풀려지고 그 변화의 징조는 사람마다 그룹마다 다 다르다. 그리고 그 전환점을 진행자는 전혀 예측할 수가 없다. 그러나 갑자기 터널이 종식되거나 안개가 사라지는 경험을 통해 국면이 전환됨을 목도한다.

그래서 조심스러운 확신은 모든 존재는 -심지어 어둠조차- 신성한 기운이 그 처음부터 부여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문제를 가진 자가 그것을 해결할 지혜도 갖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에 도달하게 된다. 그 존재론적으로 이미 부여받은 신성한 기운과 하나님 형상으로 인해 사물이든 사건이든 혹은 사람이든 간에 혼란(chaos)에서 질서(cosmos)와 의미로 전환하는 숨겨진 지혜가 주어져 있고 화해중재자는 없는 것에 뭔가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잠재성(“아직 모양을 갖추지 않고 아무 것도 생기지 않음의 상태)에서 시원적 가능성(“하느님의 기운”)을 통해 새로운 현실성(“빛이 생겨남”, 존재와 질서의 출현)이 출현되는 것을 증거하게 된다.

분리, 단절, 좌절 그리고 익숙함의 반복에서 새로운 한 처음의 공간을 여는 길은 신성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 어떤 사회적 지위, 학문적 소양, 전문직에 의해서 안전하게 확보되지 않는다. 그토록 외면적으로 태연하고 정상적으로 보였던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삶의 모호함, 혼란, 어둠, 심연의 나락의 고통을 호소함을 직면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어둠의 현실과 신성한 기운두 차원에 자신을 개방하여 온전히 현존하기(to be fully present)로 있는 것이다. 그럴 때 그러한 현존은 선물이 되어 다른 가능성, 빛의 출현을 뜻밖에 경험하게 된다.

50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가장 힘든 것의 하나가 바로 새로 시작함임을 점점 강하게 느끼고 있다. 성서는 말한다. 한 처음에 시작이 있었다고. 그 시작이 아무 것도 모양을 짓지 않은 상황에서 그리고 어둠의 깊은 물에서 그런 시작이 가능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은 언제나 일어나는 존재론적이며 윤리적인 현재적 변형 사건이라고 말한다. 거기서 뜻밖에 기대하지 않았던 존재론적 선물을 부여받게 된다: ‘빛이 있으라.’

갈등과 혼란은 삶에 있어 공통적이고 늘상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반면에 공통적이지 않은 것은 어떻게 우리가 나올 것인지 이다. 그것이 비범한 것이다. 상황에 온전히 현존하면서 신성한 기운에 대한 감각을 잃지 않고 공감으로 연결되어 있을 때 우리는 뭔가가 뜻밖의 것이 출현하게 됨을 경험적으로 알게 된다. 그래서 갈등중재자가 오직 궁극적으로 의식하고 있는 질문은 이것이다: “이 혼란과 어둠에 직면하여 영이 여기서 무엇이 일어나기를 원하고 있고, 어떻게 나/우리가 도울 수 있는 것인가?”

어둠의 심연은 우리를 좌절과 두려움 그리고 무력감으로 휩쓸리게 만든다. 포기하고 싶게 만들고 도망하거나 단절 더 나아가 파괴하고 보복하고 싶은 충동을 갖게 만든다. 어떻게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어떻게 우리는 익숙한 자연스러운 태연함이라는 분리의 경계선을 넘어 다시 말을 걸고 진심을 나누고 손을 잡을 수 있을까? 어떻게 새로움으로 나아갈 수 있단 말인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신비를 경험하게 한다. '한 처음'이라는 갱생과 살맛의 시간과 공간을 창조하게 된다. 그 어둠의 깊이와 신령한 기운에 온전히 자기를 개방하여 도덕적 판단없이 그것과 함께 현존해 있기를 통해 시편 기자가 말한 "내가 존재한다는 이 놀라움!"이 갑작스럽게 엄습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전적인 빛의 경험이다. 존재할 수 있는 용기가 영혼에서 솟아오르게 된다.


(2013.1.18)

엮인글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영혼이 있는 곳에 하느님도 계시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평화세상 2014-06-29 2706
24 평화성서학세미나로의 초대 2. 3/7-10 평화세상 2017-03-02 434
23 비폭력 실천, 평화영성: 새로운 변화의 기원과 새로운 실재 관리자 2013-03-06 2071
22 비폭력의 눈으로 성서읽기-몰아쳐오는 세상 파고에서 무서움을 넘어서기 메인즈 2013-02-17 1923
» 한처음에 시작이라는 꿈이 있었다(기독교 비폭펵실천가/화해중재자의 성서묵상) 메인즈 2013-01-19 1914
20 복음의 본질은 화해사역이다 메인즈 2010-12-16 2028
19 바울과 평화 메인즈 2010-09-29 1974
18 사도 바울의 평화에 관한 구절들 메인즈 2010-09-29 1972
17 마태 제자직의 근본 수행으로서 평화 file 관리자 2010-09-07 1811
16 폭력에 대한 예수의 비폭력 저항-샬롬 통치의 현실성의 수행 메인즈 2010-07-11 2136
15 기독교인을 위한 비폭력 영성과 실천 -맞서 싸운 상대가 천사로 바꿔지다 메인즈 2010-03-09 2009
14 평화와 자유 (성서공동연구자료) 메인즈 2007-03-19 1884
13 평화와 목회 (성서공동연구 자료) 메인즈 2006-12-07 1935
12 평화관련 공동성서연구모임 안내 메인즈 2006-11-29 1759
11 평화활동가를 위한 성서명상-실존적 궁지와 평화 메인즈 2006-10-09 1979
10 평화와 생명밥상: 물과 공기 <공동성서연구에로 초대> 메인즈 2006-07-09 2076
9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한 신학적 고찰 메인즈 2006-07-03 2065
8 공중의 새와 들꽃을 보라! -기독교 생명평화 일꾼의 길- 메인즈 2006-06-22 2074
7 마가의 폭력구조와 현대 평화학의 적용 메인즈 2006-04-12 1876
6 마가복음내 공간구조에 얽힌 갈등과 평화 메인즈 2006-04-12 1992
박성용박사 | ecopeace21@hanmail.net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