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
글 수 25

복음의 본질은 화해사역이다

2010.12.16.                                                                                                     박성용 비폭력평화물결대표

참고본문: 마태 18:15-20

[#M_ more.. | less.. | 

15.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16.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_M#]


마태공동체가 기존의 유대교와 로마가 지향한 사회적 질서와 이념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오게 된 것은 바로 군사적 정복과 지배에 의한 부와 질서로 대표되는 로마의 평화(Pax Romana)나, 거룩를 향하는 길로서 종교적 제의에 치중한 유대교와는 다른 제 3의 길로서 거룩에 대한 비전을 예수로부터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이 세상에서 화해, 비폭력, 평화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거룩한 길의 발견인 것이다.

산상수훈은 화해의 제자직에 대한 핵심을 표현하고 있고 단순히 일반적인 진술로서 '이웃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점점 더 구체적으로 그에 대한 방법과 과정을 설명함으로써 서기관과 율법학자들보다 나은 '의'로서 화해에 대한 제자직의 사명을 삶으로 실천하도록 요구한다. 대게 예수의 담화는 비유를 통해 모호하게 전달되지만 화해에 대한 권고는 매우 직접적이고 명료하다. 그 중의 하나의 예가 바로 5장 44절의 "네 원수를 사랑하고 너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라는 말씀이다.

마태가 가르치는 예수의 제자직의 핵심이자 가장 힘든 훈련과정은 바로 화해사역에 달려있다. 소금과 빛, 제단앞에 오기전에 갈등의 해결, 상대방 판단이전에 자신의 들보를 보라는 등의 예화에서 보여지듯이 화해의 사역은 새로운 예수 운동의 정체성의 근본이 되었다. 그리고 이는 18장에서 더욱 철저해지고 구체적이게 되며 분명해진다. 그것은 예수의 제자들의 삶의 목표는 화해를 이루는 삶에 달려있고, 갈등과 분리된 자들의 관계를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사역에로 부름을 받았으며 이를 통해 하나님을 만난다는 명료한 인식의 공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예수의 가르침 중에 가장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말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교회는 예수가 화해에 대한 실천의 타당성을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목회현장에서는 가장 실천 가능성이 낮는 과제로 설정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신앙생활에서는 가장 등한히 다루어지는 게 바로 이 화해에 대한 것이다. 더욱이 이 본문은 그동안 '두 사람이라도 합심하여 구하고... 두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이는" 것의 목표가 마치 작은 규모라도 교회의 존재성에 대한 지지로 해석하는 잘못된 오류를 범해왔지만 실제로 이것은 다름과 차이를 지닌 갈등 당사자들의 화해에 대한 사역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본문은 실제로 갈등과 분쟁에 대한 화해의 중요성과 그 실천 방법 그리고 단순히 문제해결에 대한 윤리적 권고를 넘어선 새로운 거룩의 길로서 화해가 하나님을 대하는 방식이라는 초대교회의 새로운 통찰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우리는 본문에 따라 아래와 같이 갈등해결과 화해사역에 대한 통찰을 이해할 수 있다.

1. 상대를 향해 직접 나아가기: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우리는 갈등을 직면할 때 상대에 대한 비난과 적 이미지를 갖게 됨으로써 상대를 만나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상대를 만나는 것이 불편하고 비난의 행위를 마주한다는 것이 어려운 고통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경찰, 사법당국)가 대신 처리해주기를 원한다. 그렇게 됨으로써 내가 받은 상처에 대한 이유나 내 고통에 대해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게 된다. 그리고 상대방도 이를 통해 배워야 할 삶의 교훈이나 인간적인 고통의 나눔을 잃게 된다.

갈등의 상대/적과의 등 돌리기가 아니라 직접 상대를 향해 나아가는 기회로 가지라는 것은 따라서 매우 어려운 과정을 포함하며 이는 그리스도의 요청이다. 여기에는 상대를 적으로 이미지화하거나 비난하는 메커니즘을 단절하는 인식적 실천적 요구가 담겨있다. 상대를 향해 나아가기는 갈등과 충돌에 직면하여 우리가 본능적으로 자동 응답하는 맞싸우기, 회피하기 혹은 얼어붙기와는 다른 적극적인 비폭력적인 대응인 것이다.

상대방을 향해 직접적으로 나아가기는 증오와 폭력의 근본인 적 이미지의 고착화에 대한 치유를 전제로 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쌍방향의 인식적 공감이 따라온다. 하나는 불안과 두려움이라는 내 자신의 감정과 선입견을 자각하고 이를 인식하기를 통해 자기 연결(self-connection)과 자기 공감(self-empathy)의 실천이 요구된다. 또 하나는 상대방에 대한 나의 편견과 감정을 인식하고 낯선 자, 적으로 이미지화하는 적 이미지 과정(enemy image process)를 해체하여 상대와 연결하는 쪽으로 자신을 방향지우는 과정이 또한 요청된다. 이렇게 자신안에 있는 두려움과 불안 그리고 상대에 대한 증오와 비난의 이중적인 판단작용을 정화시켜서 자신에 대한 연결과 상대에 대한 연결을 갖는 것이 첫 번째 상대방에게로 다가가기에서 이루어지는 갈등 해결의 작업이다.

회피하기, 맞서기 혹은 얼어붙기가 아니라 자신의 진정한 본성과 적이미지 없이 상대에게 나아가기는 어려운 거대한 도전이다. 자기 방어와 비난 그리고 정죄의 태도가 없이 상대방과 연결하기를 시도한다는 것은 따라서 "기도로 충만한 연약성"(Prayerful Vunerability- 존 폴 레더락의 『화해를 향한 여정』에서 사용한 용어)없이는 불가능하고 이는 하나님이 주시는 내적인 영적 훈련인 것이다. 양심(conscience)이란 용어가 말해주듯이 나와 상대의 눈으로 보는 (con-science= see together) 영적 훈련을 통해 하나님의 공간을 허용하는 새로운 의식(들음과 배움의 자세)을 창조하게 된다. '직접가라' 이것을 행하는 것은 지상의 삶에서 깊이를 드러내는 영적 과정이며 이 깊이는 상대방과의 만남을 통해 온다.


2. 증인들을 세우기: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증인을 갖는다는 것은 좀더 폭넓은 분별로 연결하기로 인도한다. 여기서 증인이란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과 앞으로 되어 질 일에 대한 더 나은 분별을 위해 함께 일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하나의 몸을 만든다는 것이다. 이는 평가나 판단, 조언과 설명하기 등과 같은 일반적인 판단의 논쟁 집단 형성과는 다르다. 여기서 증인됨은 반성과 이해 그리고 경청이 일어날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의 형성을 말하는 것이다.

갈등은 나와 상대방이 서로 솔직해지고 투명해 질 수 있는 기회가 되며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자비가 작동될 수 있도록 그리고 서로의 입장이 그대로 존중받고, 판단보다는 경청과 이해가 허락될 수 있는 상호연관의 안전한 공간이 작동될 수 있게 된다. 증인됨은 판단과 시비해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 연결과 존중에 무게의 초점이 있다. 이것이 수백 년간 퀘이커가 지속해 온 "명료화 모임(cleanness committee)"의 본질이다. 비난과 두려움 그리고 위협이 없이 서너 명이 모인 증인들은 '정직하고 열린 질문'을 통해 당사자가 스스로 자신의 문제 해결을 하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지 분별할 수 있도록 마치 '작은 새가 스스로 날 수 있도록 지지해주는 감싸 안은 손'처럼 전적으로 순수한 지지(holding)를 해주는 둥지가 된다. 그럼으로써 각자 안에 있는 신성한 빛이 스스로를 일깨우고 문제의 본질을 명료히 보도록 안전한 공간을 형성한다.

잘못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경청과 수용의 공간을 증인들이 창조함으로써 각자의 내면의 신성한 빛과 서로 연관된 증인들의 정직하고 열린 질문을 통한 반영해주기가 그 신성한 빛을 더욱 작동되도록 돕는다. 그럼으로써 분별과 이해 그리고 배움이 일어나도록 돕는다. 여기서 증인들은 인도(leading)하는 이가 아니라 수용하고 따르는(following) 역할을 하게 됨으로써 어떤 외적인 조언과 첨가 그리고 설명도 부과하지 않고 전적으로 일어나는 것을 기다리는 '존재로 있기(be fully present)'에서 머물게 된다. 그렇게 될 때 그런 공간은 그 자체가 거룩의 공간이 된다. 여기에서는 증언자로 있기가 그대로 영적 훈련이 되고 그러한 존재로 있기가 영적인 수행이 된다. 갈등에 참여함은 놀랍게도 영적 수행의 깊이로 들어가는 수행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대게 증인이 된다고 함은 누가 옳은 자리에 있는 지 판별하고 가르기 위해 초대받았다는 생각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비의 임재를 위한 공간을 창조하는 거룩함의 현존의 도구가 되기보다는 심판의 도구로 생각해왔다. 그러나 여기 증인이 된다함은 전적인 '존재로 함께 있기'를 말하는 것이며 판단이 아닌 연결과 투명함의 공간을 형성하는 상호책임의 직임을 뜻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결과보다는 과정(group processing)을 통해 능동적 경청에 따라 상호이해와 명료함 그리고 신뢰의 깊이로 안내받는 길이 된다.

3. 화해는 교회의 사명이자 존재의 목적이다: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로마제국하에서 일반인의 이슈를 토론하기 위한 회합모임으로서 원래의 에클레시아가 기독교인들에 의해 변용을 거쳐 차용되었을 때, 그것이 로마의 악명높은 십자가형틀이 종교적 상징으로 기독교인들에게 차용되었던 것과 똑같은 방향에서 그 의미가 달라졌다. 그것은 바로 적대자와의 논쟁을 통한 갈등의 해결이 아닌 화해와 일치를 통한 신뢰 공동체로서 교회의 이미지가 그것이다. 새로운 에클레시아는 서로 투명해지려는 실제적이고 영적인 친교와 신뢰의 안전한 공간을 창조하며 여기서 차이가 있는 각자가 서로를 만나는 장소로, 그리고 그러한 세속적 공간이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로 변형되어진다. 여기서 교회의 의미는 단순히 문제를 해결하고 합의에 이르는 것이 아닌 개인과 전체 공동체 구성원으로 하여금 갈등의 비방어적이고 비폭력적인 공감적 소통을 통해 상호 더 깊은 이해와 배움을 일으켜 성장을 돕는 더 커다란 믿음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다.

아흔 아홉 마리의 양보다 잃은 양 한 마리에 대한 목자의 심정은 교회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를 밝힌다. 그것은 논쟁자와 갈등자를 배제와 소외 그리고 단절과 거리두기가 아니라 갈등의 공감적 해결방식을 통해 거룩한 친교를 이루어나가는 데 교회의 존재 의미가 있게 된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십자가를 정복의 무기로 그리고 기독교를 제국종교로 바꾸기 이전에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는- 특히 마태 공동체에 있어서는- 교회라는 곳은 갈등을 어떻게 다루는가에 의해 전적으로 일반 사회와 로마의 원로회의 등과는 전적으로 질이 다른 조직구조를 형성하였다. 그것은 갈등을 어떻게 다루는가에 대한 교회의 은사적 구조가 달랐다는 것이다. 전체는 개인의 갈등과 고통에 대해 예민한 민감성을 갖고 있었으며 성령의 은사인 자비의 실재적인 역동성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교인은 친절과 정숙해야 하고 갈등은 있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갈등이 일어나면 이것은 교회의 문제로 인식되기 십상이다. 그리고 그것의 전통적인 해결은 불행하게도 사제들의 권력과 지배구조를 통한 일방적인 해결방식과 평신도의 입 다물기 그리고 갈등자의 배제였다. 그러나 원래 본문이 제기하듯이 우리가 잊고 있던 것은 갈등에 대한 사역이 교회의 본질적인 사역이자 그것은 영적인 훈련의 방식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화해는 교회의 사명이기 때문이고, 화해와 갈등에 대한 사역은 본질적으로 영적인 것으로 예수의 제자들은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의 모임인 에클레시아는 갈등을 제대로 다루고 이를 위해 함께 일하고 변형시키는 장소가 된다. 이것이 초대교회가 믿음을 곧 거룩의 길에 대한 이해를 종교적 제의에서 찾지 않고 일상적인 삶에서 일어나는 갈등의 격리, 구별됨, 배제, 차이를 잇는 화해를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예, “너의 원수를 사랑하고 너를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라. 그래야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5:44) 영적 실천으로 삼은 이유이다.

배제와 차별 그리고 거리두기와 타자의 얼굴을 지우기라는 지배의 수행(practice of dominance)에 대해 화해를 위해 부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인 에클레시아는 그러한 소외와 고통 그리고 두려움으로부터 잃은 자, 작은 자, 마지막 된 자들을 친교와 신뢰의 안전한 공간으로 초대하여 회복, 이해 그리고 성장에로의 변혁을 일으켜낸다. 이것이 세상에 있으면서 세상에 속하지 않은 기독교인의 이 지상에서의 영적 수행(spiritual practice in our mundane life)인 것이다. 초기에 직면한 교회 지도력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자 지금까지 존재하는 평화교회전통은 갈등자들을 불러 화해의 과정속으로 인도하고 이들을 지지하고 화해에 대한 올바른 과정을 밟게 하는 기술과 영적 훈련에 관한 것이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준 신의 인간에 대한 화해로서 성육신(incarnation), 그리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모든 이들의 지체와 몸으로서의 (화해의 상징인) 교회에 대한 인식에 깊이 배여있는 근본적인 태도이다.

4 집요하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라: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이방인과 세리같이 대하라는 말은 대부분의 이해에는 이제는 할 만큼 했으니 포기하고 죄인 취급하라는 말로 인식되어왔다. 직접 찾아가고, 증인을 세우고, 교회에서 말하도록 하였어도 말을 듣지 않는 이들에게는 우리 자신들을 스스로 분리해서 서로 간에 선을 긋고 그들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말처럼 오해될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그러한 이해는 본문 18:15-20의 앞뒤에 배치되어 있는 예수의 말을 보면 전혀 맞지 않는 말임을 이해하게 된다. 이 본문 앞에는 바로 잃은 양 한 마리에 대한 두려운 그리스도의 권고가 있다: “너희는 이 보잘 것 없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 하나라도 업신여기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하늘에 있는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를 항상 모시고 있다는 것을 알아 두어라”(18:10) 그리고 이 본문 뒤에는 가장 실행하기 어려운 예수의 직접적인 강력한 권고가 위치한다: “일곱 번뿐만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18:22)

그렇다면 화해할 수 없는 사람을 "이방인과 세리"로서 취급하라는 의미는 무엇인가? 사도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전한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고 자신의 몸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을 서로 원수가 되어 갈리게 한 담을 헐어 버리시고 화해시켜 하나로 하신”(엡2:14) 분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바울의 개인적인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에만 근거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초대교회의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다. 사도바울의 이해에 있어 유대인과 이방인의 화해가 가장 중심이라는 점을 유념하고, 본문의 잃은 양 한 마리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끊임없는 용서속에 본문을 배치한 것을 깊이 고려하면 결론은 하나로 귀결되어진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화해의 정신에 따라 서로를 다시 보고 연결되는 방법을 계속해서 다시 찾으라는 부름인 것이다.

신뢰와 친교의 공동체 밖에 있는 이들의 대표적인 상징으로서 “이방인과 세리”들을 향하여 그러한 신뢰와 친교의 공동체 밖에 있은 이들을 찾는 길을 선택하고 이들과 관계를 맺고 연결하기를 포기하지 않고 지속하라는 새로운 시작을 예수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권고하고 있고 이것이 마태 공동체가 추구했던 제자직의 중심 흐름이었다. 어떠한 형태로든 이들 ‘보잘것없는 사람들’(18:10)을 업신여기지 않고 다시 관계에로 잇는 연결하기를 추구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선적으로 그들을 대면하고 있기 때문이다(즉, 예수께서 명확히 지목하신 것처럼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를 항상 모시고 있다는 것을 알아 두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화해, 비폭력, 평화의 능력이며-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시다”(엡2:14)- 따라서 논쟁자, 적대자, 원수라 할지라도 관계와 연결하기를 통해 교제를 이루어 내야 한다. 왜냐하면 단절과 소외는 오해와 무시, 폭력과 다툼을 가져오는 악의 지배의 현실화를 가능하게 하는 반면에 관계와 연결하기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선을 행하도록 하는 인간성(하나님의 형상)을 촉발시키기 때문이다. 우리가 갈등을 피하지 않고 서로 동의하지 않아도 갈등을 향해 나아가는 이유는 에클레시아는 화해의 존재의미를 담고 있고 거기서 갈등은 배움과 성장을 주는 영적 에너지로 변화되기 때문이다. 적대자와 논쟁자가 갈등을 통해 화해하는 그 뜨거운 눈물과 감동의 현장이 하나님의 신실성과 자비의 실재를 경험하게 하는 영적인 곳임을 체험하게 하기 때문이다.

화해의 목적은 관계를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회복은 원래 상태로의 복원과는 다르다. 이는 고통의 근원과 잘못된 것 그리고 그것을 나타내는 구조적인 것에 대한 이해와 관계에 대한 헌신을 통해 변형되어진 실재에 대한 인식이 달라진다. 곧 하나님, 자신, 그리고 타자에 대한 이해의 패러다임이 달라지고 깊어진다. 그 이유는 관계의 치유의 경험을 통해 진리에 근거한 배움과 성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예수의 제자직에 있어서 화해사역은 근본적인 정체성을 지닌다. 예수는 뚜렷한 어조로 말하였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이 지상에서 매고 푸는 것이 하늘과 연관되어 있고, 갈등에 대한 화해사역은 영적 훈련과 이어져 있으며, 그러한 인간적인 일이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일이 된다. 이는 예수의 말씀에서 다시 강조되어진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이 지상에서 합심하여 구하는 것은 바로 자본주의적인 그 어떤 소유나 기존의 교회의 기복적 기도의 내용에 대한 들어줌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화해사역에 있어서 논쟁자, 적대자, 원수를 향한 관계와 연결을 향한 간절하고도 끊임없는 간구이며 화해를 통한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한 화해사역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 비록 둘 셋이 모일 지라도.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이것은 적은 숫자가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지상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새로운 거룩의 길을 따르지는 않고 그에 대한 이해조차 못하지만 예수의 정신에 따라 자신의 삶을 여기에 헌신하기로 선택한 소수의 사람들이 하는 치유, 회복 그리고 화해를 구하는 일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강력한 메시지와 예수의 사역의 중심이 여기에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매는 것과 푸는 것은 우리의 일상에서 화해의 삶을 상기시키며, 이 화해사역이 바로 “하나님이 함께 한다”는 임마누엘의 영적 체험이 된다는 명백한 선언을 예수께서 직접 자신의 입을 통해 증거한다. 이는 말씀그대로 진실이다.

갈등이 거룩을 만나는 장소가 된다. 갈등은 거룩한 땅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것은 갈등이 나 자신과 이웃을 만나는 것만이 아니라 진실로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 되기 때문이다.

엮인글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영혼이 있는 곳에 하느님도 계시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평화세상 2014-06-29 2705
24 평화성서학세미나로의 초대 2. 3/7-10 평화세상 2017-03-02 434
23 비폭력 실천, 평화영성: 새로운 변화의 기원과 새로운 실재 관리자 2013-03-06 2070
22 비폭력의 눈으로 성서읽기-몰아쳐오는 세상 파고에서 무서움을 넘어서기 메인즈 2013-02-17 1922
21 한처음에 시작이라는 꿈이 있었다(기독교 비폭펵실천가/화해중재자의 성서묵상) 메인즈 2013-01-19 1913
» 복음의 본질은 화해사역이다 메인즈 2010-12-16 2028
19 바울과 평화 메인즈 2010-09-29 1973
18 사도 바울의 평화에 관한 구절들 메인즈 2010-09-29 1971
17 마태 제자직의 근본 수행으로서 평화 file 관리자 2010-09-07 1810
16 폭력에 대한 예수의 비폭력 저항-샬롬 통치의 현실성의 수행 메인즈 2010-07-11 2136
15 기독교인을 위한 비폭력 영성과 실천 -맞서 싸운 상대가 천사로 바꿔지다 메인즈 2010-03-09 2008
14 평화와 자유 (성서공동연구자료) 메인즈 2007-03-19 1884
13 평화와 목회 (성서공동연구 자료) 메인즈 2006-12-07 1934
12 평화관련 공동성서연구모임 안내 메인즈 2006-11-29 1759
11 평화활동가를 위한 성서명상-실존적 궁지와 평화 메인즈 2006-10-09 1979
10 평화와 생명밥상: 물과 공기 <공동성서연구에로 초대> 메인즈 2006-07-09 2075
9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한 신학적 고찰 메인즈 2006-07-03 2064
8 공중의 새와 들꽃을 보라! -기독교 생명평화 일꾼의 길- 메인즈 2006-06-22 2074
7 마가의 폭력구조와 현대 평화학의 적용 메인즈 2006-04-12 1875
6 마가복음내 공간구조에 얽힌 갈등과 평화 메인즈 2006-04-12 1991
박성용박사 | ecopeace21@hanmail.net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