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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과 평화

조회 수 1974 추천 수 0 2010.09.29 12:58:46
바울과 평화

박성용대표/비폭력평화물결



사도바울이 회심하게 된 배경은 그가 속한 유대경건주의의 흐름을 간직하고서 스데반의 죽음의 충격(돌로 맞아 죽어가면서 평화로운 그의 얼굴과 확신)과 다마스카스 길에서의 ‘바닥(bottom)'으로의 낙마의 경험에서 비닐이 눈에서 떨어지면서이다. 회심의 내용은 비닐같은 것이 눈에서 떨어졌다는 상징에서 표현되는 데 그것은 뚜렷하게 드러난 평화의 주라고 고백되어진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사로잡힌 자로서 자신의 삶에 대한 소명을 갖게되고 이는 거룩에 이르는 새로운 길에 대한 깊은 확신으로서 화해와 평화의 길을 제시한다. 이것이 그의 회심의 궁극적 터전인 것이다.  

그의 회심이 얼마나 독특한가하는 점은 유대문학에서는 오직 한번(다니엘5:2)만 나오는 평화의 하나님이 -주로 '만군의 하나님'이 대세였다-이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서신을 통해 '평화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하면서 이를 통용시킨다. 바울에게 있어서 평화는 하나님의 존재와 행동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형태를 묘사하는 현실성(actuality)이자 힘(power)인 것이었다. 그러나 생각해보아야 하는 점은 평화의 하나님에 대한 그의 소개는 단순히 그의 내적인 회심의 결과에 의한 주관적인 확신에서 출발하는 것만은 아니다.

이미 예수 공동체에서 보여준 그의 제자들과 추종하는 소수의 무리들이 보여준 거룩한 친교식사와 그 친교의 정점인 “평화의 키스”의식의 목도와 그들이 이미 그렇게 살고 있는 삶의 모습에 의한 충격과 공감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즉 사도바울의 '평화의 하나님' 그리고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란 고백은 개인의 확신에 의한 창작물이 아니라 부활후 초대교회의 실제 생활모습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서신의 머리말과 결어 부분에서 “은혜/자비와 평화”의 문안과 기원에서 보여지는 증거들이 이를 확신시킨다 (예; 롬1:7, 고전 1:3, 고후 1:2, 갈 1:3, 빌 1:2, 살전 1:1 살후 1:2, 몬 1:3, 엡1:2, 골1:2, 딤전 1:2, 딤후 1:2, 벧전1:2, 벧후 1:2, 요2 1:3 유다서1:2 롬 15:33, 고후 13:11, 갈6:16, 살전 5:23, 살후 3:16, 엡6:23, 벧전5:14 등).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계시된 하나님이 은혜와 평화의 기원과 근원이 되며 평화의 능력은 하나님으로부터라는 특별한 인식을 갖고 있다. 때문에 평화를 사랑하고 완성하며 보존하는 것이 하나님의 종의 직책이라는 의식을 가진 바울은 그의 편지를 통해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증오가 극복되는 재창조(“새로운 피조물"; new creation)를 주장할 수 있었고, 그런 재창조는 신의 선제적 활동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또한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화해의 삶을 살아가도록 회복과 순종이 그 안에서 자라나는 축복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제안하는 새로운 피조물이란 자신의 존재와 행위를 일치시켜 화해와 평화에로의 능력을 보여주는 자였고 그것이 그에게는 "새로움" 혹은 "좋은 소식/복음"의 진실성의 핵이 된다. 이로써 기독자의 삶은 화해/평화의 중심성, 평화의 주이신 그리스도, 성령의 역사로서 평화, 그리고 통치자와 권세에 대한 저항이라는 탈지배적인 적극적 비폭력 수행이 그의 사상의 핵심으로 자리 잡게 된다. 예로서, 로마에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자신의 서신을 통해 하나님 나라는 곧 의, 평화, 기쁨이며 이것으로서 하나님과 이웃을 기쁘게 한다는 것이며 이것이 로마의 평화에 길들여지지 말고 그리스도의 평화에 전렴하라는 권고가 예증이 된다.  이런 근본인식이 있었기에 바로 초대 공동체가 신, 세상, 인간 그리고 신앙 공동체에 대해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나은 거룩한 길로서 평화와 화해의 제자직 수행을 제시한 '새로운 길'(복된 소식)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1. 평화의 하나님과 화해와 평화로의 제자직

하나님에 의해 의롭다함을 받는 길은 하나님과 평화를 유지하며 사는 삶이며 평화가 우리를 하나님깨 나아가는 길을 연다(예; 롬 5:1-11). 따라서 제의의식이 아니라 화해가 하나님에게로의 길을 연다는 것은 예수와 더불어 사도바울의 공통된 그러면서도 당시와 현재에도 파격적인 선언이 된다.  그리스도의 사역의 핵심은 바로 화해의 사역이며(갈3:15-18) 십자가의 길은 바로 부정의 세력을 거세시키는 부정의 부정으로서 '화해의 사역'의 길이며 그를 통해 죄인과 원수된 우리가  하나님과의 화해를 이루었고, 자유함의 능력을 받는다. 그리고 성령께서 그러한 능력을 주신다(롬 8:6-“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화”; 갈5:22). 즉 하나님과의 평화(롬5:1)는 하나님의 영을 통한 평화와 맥을 같이한다(롬8:6). 평화의 하나님, 화목케 하시는 주에 대한 근본 이해와 이에 대한 존재론적인 통찰이 그리스도인들도 그러한 윤리적인 삶을 살도록 부르신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롬12:18) 이는 고전7:15에서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다른 예; 고전15: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성령은 “의와 평화와 기쁨”(롬14:17)의 삶을 가능하게 하고 평화는 또한 성령의 9가지 열매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따라서 평화는 우선적으로 하느님의 능력(뒤나미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렇게 평화를 이루는 하나님의 사역은 부활을 통해 더욱 확실히 드러났다. “사람들은 예수를 죽였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살리셨다” 예수의 부활이 바로 사도바울에 따르면 예수의 부활은 예수의 신성에 대한 징표이기 보다는 평화의 길을 확증하는 하나님의 결의를 보여 준 사건으로 인식된다: “우리 주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화의 하나님이...”(히13,20). 죽은 자로부터 처음난 자이신 예수를 통해 이 세상을 구성하는 근본요소들은 재구성되고 또 확증되었다는 것이다. 즉 화해와 평화의 길은 궁극적이다.

부활은 어둠과 혼돈의 지배질서가 아닌 하나님의 샬롬의 통치의 현실성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신적 신분에 대한 확인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뜻으로서 샬롬의 지배의 궁극성이 확증된다.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 안에서 하나님의 선한 창조가 재정립된다. 원래의 창조의도-"보시기에 좋았더라"-가 갱신되고 존재적 질서의 회복과 더불어 평화 능력이 덧붙여져서 회복이 이루어진다.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처음 난 자라는 신앙의 인식은 평화의 능력에 대한 근본통찰과 연계되며 이는 생명을 주시는 능력에 대한 확신인 것이다. 따라서 사도바울에 있어서 부활은 그 초점이 예수의 육체적 소생이 아니라 평화능력의 회복과 그 확증이며 이것이 그가 말한 육과 다른 썩지 않는 '몸'이란 표현의 중심의도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사람들은 오로지 부활과 성령으로 말미암아 평화의 사역자, 평화의 사신이 될 수 있다. 그러한 평화의 능력은 사도 바울이 표현한 ‘육신’ ‘죄’ ‘죽음’이라는 혼돈(chaos)의 권세에 대한 궁극적 승리이자 탈지배, 탈분열, 탈폭력의 새로운 질서(cosmos)로서 새 피조물로 이끄신다.

이러한 확증의 배경은 바로 예수께서 평화의 본을 보여 주셨다는 것이다. 예수는 평화의 사역자이시다(엡2,14).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라는 이 확신은 그러한 평화에로의 길에 대한 제자들의 “뒤따름”이라는 헌신을 요구한다. 그것이 또한 교회가 해야 할 일이다:“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화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빌4,9) 이에 대한 또다른 예증으로서 고린도 교회에 바울은 말한다: “...하나님은 화평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고전 7:15). 그리스도의 지체이자 몸으로서 교회의 존재 목적은 이렇게 평화에로 부름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이 뒤따름의 권고는 근본적인 신학적 확신에서 이루어진다. 첫째는 우리가 아직 죄인이자 하나님의 원수였을 때 이미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화해의 길을 여셨다는 것이다. (롬5:1-11;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로 있을 때에도 그분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다고... 지금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졌습니다.”10-11절)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는 것이다(롬12:18) 이는 더욱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롬12:17);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0-21) 이러한 철저한 윤리적 비전은 오직 평화가 하나님, 주, 성령의 본질과 하시는 일의 공통된 핵심임을 이해했기 때문에 그 자연스러운 발로이기도 하다.  

2. 하늘과 땅의 모든 피조물을 위한 평화에로의 궁극 비전

예수께서 평화에 대한 영적인 불길을 지피고, 사도바울이 이에 장작을 더 넣어 화해와 평화에 대한 현실성을 신학적인 통로를 통해 확실한 자리매김을 하였다면 바울후기의 제자들인 골로새와 에베소 저작자들의 신념은 이에 대한 우주적 지평을 확대하였다. 에베소서와 골로새에서는 예수와 바울이 준 영적 통찰이 얼마나 놀랍게 우주적 하모니로 승화되어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엡 2:14-18)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골 1:19-20)

에베소서와 골로새는 평화에 대한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한다. 평화는 단순히 제자들, 예수의 추종자들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평화의 권능은 “세상을 자기와 화목케 하는”(에베소) 데로 나아가며, 또한 그 ‘세상’은 만물이라는 우주공간에로까지 확대되어진다(골로새). 하나님의 화목 사역의 비전은 하늘과 땅의 모든 피조물을 통하여 평화를 이루는 행동인 것이다. 여기에는 모든 분리와 적대가 의미를 잃는 평화의 새로운 현실성과 그 충만성이 표현된다. 이것이 하나님이 뜻하시는 평화의 우주론적 보편성이요 창세기에서 보여준 만물을 가라사대 사건으로 불러서 안식일을 창조의 으뜸으로 정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하신 원창조의 갱생과 회복인 것이다.

예수의 부활에서 하나님의 재창조의 행동은 하늘에 있는 모든 것과 땅에 있는 것이 창조주의 화목활동을 통하여 이룩된 평화의 중재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와 부활로 이루어지는 새창조는 원창조를 강화하면서 단순히 ‘존재하라’라는 자연생명이 아니라 평화와 화목에 기반한 만물간의 친교(코이노이아)에서 절정에 달한다. 더 이상 지배, 분리, 증오가 없는 평화가 바탕이 된 사회, 평화가 전달되고 평화를 보존하는 사회 그리고 평화로 충만한 우주만물의 친교에 대한 비전이 여기서 보여진다. 이들 에베소 교회와 골로새 교회는 이러한 새로운 비전과 현실을 형상화하는 미션을 받고 있다. 평화의 충만성을 향한 우주적 인간 공동체로서 광의의 교회(에클레시아- 이는 원래 건물의 개념이 아니라 ‘모임(gathering)'을 뜻한다)안에서 만물이 그 구성원이 되고 여기서 대립과 증오가 없는 친교와 일치 그리고 지속적인 화합이 이루어진다. 이것이 “만물안에서 만물을 충만케하시는 자의 충만”(엡1:22-23)이며 하나이신 그리스도의 몸의 성장에 대한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새로운 통일체이자 그 충만성은 평화의 확장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3. 평화사역의 저항성: 통치자와 하늘의 권세와의 투쟁

이렇게 샬롬의 우주적인 인간공동체에 대한 방향설정은 평화의 역량과 능동적인 비폭력 투쟁없이는 승리할 수 없다. 정확하게 평화의 도구로써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투쟁에 가담함으로써 비로소 “평화의 복음” 선포가 준비되는 것이다.(엡6:15) 그러므로 이들은 평화의 하나님과 평화이 주에 대한 비전에 있어서 신의 개입을 수동적으로 기다릴 만큼 순진하지 않다. 오히려 예수에 대해 그들이 행한 것에 대한 교훈은 죄, 육체, 죽음의 권세의 집요함과 그 규모에 대한 심각성을 일깨워 준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평화이시고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이 탈지배적인 사회체제의 해독제(십자가)로서 그리고 능력(부활)으로서 작동한다면 싸움의 목표는 단순히 겉으로 보이는 꼭두각시로서의 “혈과 육”(엡 6;12)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어둠과 허공의 통치자들과 권세들(principalities and powers)와의 강력한 대응을 요청한다. 이는 모든 권세의 굴레로부터 모든 피조물의 궁극적인 해방을 향한 바울의 열망(롬8:18-25)과도 일치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라고 고백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이러한 저항의 의지와 용기 그리고 지혜를 시작하게 하고 역동적인 힘을 선사한다.

예수와 바울에서 기인한 평화에로의 제자직은 이 세상 지배체제를 움직이는 주범인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thrones, powers, principalities, authorities)에 대한 식별과 변혁에 대해 매우 날카로운 후각을 지니고 있다. 먼저 골로새서 2:13-15절의 평행댓구법의 병행구조를 분석해보자. 여기서 ㄱ 과 ㄷ은 분사형으로 ㄴ을 꾸며주며 ㄴ은 핵심어로서 행동어(동사)이자 선언적 형태를 보여준다. .

ㄱ.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ㄴ.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셨다

ㄷ.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ㄱ.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ㄴ. 제하여 버리셨다

ㄷ.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ㄱ.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ㄴ.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셨다

ㄷ.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본문이 보여주듯이 이 세상권력과 허공의 권세는 패배하였고 공개적으로 드러나진다. 제국과 이 제국을 뒷받침하던 혼돈의 하늘 권세는 무력화되고 그리스도가 승리자로 그들을 이기신다. 따라서 우리는 궁극적으로 외칠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는 주시오 승리자이다.” (고전 15:24-38; 데후2:3-11)

에베소서 6:12이하는 말한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이제 “평화의 복음”은 단순히 말과 선언만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갑옷”이라는 평화로의 전략(strategy)과 도구(tools)를 갖춘다. 현실의 엄격성과 악의 권세의 활동에 대해 단순히 비둘기의 온유함만이 아니라 뱀의 (능동적인) 지혜라는 예수의 요청에 대해 평화의 제자직은 이를 위한 훈련을 요청받는다. 화해직은 이 세상 권세의 증오를 일으키기 때문에 이에 대한 더욱 적극적인 전신갑주, 이세상과 같은 종류의 힘과 그들과 같은 종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싸울 대상은 겉으로 보이는 꼭두각시나 앞잡이라는 2차 대상이 아니라 정확히 증오, 분열 그리고 혼란을 일으키는 허공의 지배세력과 권세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독교 화해중재자의 목표는 악의 근원을 응시한다. 악의 현상을 꿰뚤고 그 뒤에서 조종하는 근본적인 세상의 가치관과 그것들의 영적 권세들에 맞대응하는 데 있다. 그렇게 함으로서 진정한 만물의 주되신 하나님의 주권(lordship)을 모든 공간과 시간위에 세우게 된다. 단순히 기도와 예배하는 시간과 교회라는 공간만이 아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보편적이어야 한다. 만물을 꿰뚫고 만물위에 서야 한다. 모든 적들이 하나님의 발아래 놓여져야 한다. 그러나 그 수단은 상대가 가진 같은 종류의 힘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의 자비와 신실성에 근거를 둔 비폭력적인 강력한 실천으로 이루어진다. 개인의 내면성만이 아니라 공적인 체제와 구조, 법과 정치형태속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들 속에서 권세의 영적 형상을 분별하고 하나님의 발아래 복속시키는 변혁의 과정이 필요하다. 이것은 군사적 전쟁이 아니라 영적 전쟁인 것이다.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이것은 하나님의 싸움이고 우리가 의지하는 것은 하나님의 무기이다. 이것은 중세의 십자군을 요청하는 것도 아니다. 구원, 의, 진리, 평화, 성령은 비무장적지만 강력한 비폭력적인 훈련의 무기이다. 이런 전신갑주가 제대로 내 몸에 맞을 때 악에 대항하여 서는 것이 가능해 진다.

하나님과의 평화와 이웃과의 평화가 유지되려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는 영적인 투쟁과 맞섬은 기독교생활에 중심이 되어야 한다. 이 저항은 결코 폭력, 군사적 힘, 혹은 지배를 사용하지 않는다. 진리는 오직 진리에 의해 그리고 평화는 오직 평화에 의해서만 건설된다. 그리고 기독교인은 정사와 권세에 대항하여 서라고 요청을 받고 있다. ‘평화의 복음’은 이렇게 사탄을 발로 누르는 평화를 성령을 통해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선물로 부여받게 된다. 평화를 위해 사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화를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3:15) 평화는 그러므로 하나님의 제자직에 대한 축복인 것이다. 그러므로 환란속에서도 기뻐하고 감사하는 자가 된다.


(기독교와 평화운동 수업 자료/201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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