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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에 대한 예수의 비폭력 저항
-샬롬 통치의 현실성의 수행-

"하나님 나라가 다가왔다"는 우리 현실에 있어 새로운 샬롬의 통치의 실재에 대한 예수의 비전과 그에 대한 삶으로서의 철저한 헌신은 새로운 능동적인 비폭력과 사랑의 공동체를 탄생하였다. 그와 그의 추종자들이 함께 형성해 나간 이 비전은 당시 유대교의 신을 만나는 길로서 성전/회당에 의한 거룩한 제의적 공동체나 대안의 주류였던 시온니즘의 무력적 투쟁이라는 열심당 혹은 타락한 세상과의 거리를 두고 자신의 정결과 '빛의 자녀'로서의 영적인 수행을 추구한 제 3의 무리인 엣세네파와도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변혁적인 현실을 자신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모시는 것이되, 좀더 적극적으로 산상수훈의 공동체 이상을 따라 삶에서 폭력과 증오의 독을 뽑아낸 적극적인 저항과 변혁의 방식, 곧 자비의 현실화라는 방식으로 통해 "마음이 교만한 자를 흩으심, 권세자를 내치심, 보잘 것 없는 이의 높이심, 배고픈 자의 대접과 부요한 사람을 빈손으로 만드심'(누가복음의 마리아 찬가)과 같이 삶에서 실제적인 변화의 증상을 몰고 오는 새로운 현실성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예수 공동체가 이렇게 직접적으로 무기를 들고 대항을 하진 않았더라도 그가 몰고온 새로운 변혁적 현실로서 삶의 방식과 타자와의 관계방식은 이미 통치자에게 위협이 되었고 그는 현 체제의 전복자로서 이미 낙인이 찍혔고 결국은 다른 반란자들 사이에 정치적으로 형집행을 당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의 행위가 지금의 우리 대부분이 추종하고 있는 개인 영혼의 구원이라는 영적 수행의 모범이 아니라 가장 비폭력적인 그의 비전과 실천은 역설적으로 가장 정치적인 위협과 도전이 되었다는 사실은 그의 폭력에 대한 적극적인 저항-그러나 비폭력적인 방식으로-이 "예수 운동(Jesus movement)"의 핵심이었고 그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거룩한 길에 대한 혁명적인 통찰을 제공하는 것이다. 즉 영혼의 내면에서 신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화해와 비폭력의 생활실천-"회당과 성전이 성소가 아니라 삶의 방식이 성소(sanctuary)이다"-은 정치사회문화에 샬롬 통치의 증거(witness)자로서 거룩함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그의 샬롬 통치의 새 현실성이 얼마나 혁명적인 특성-무리가 놀라 새로운 권위였다고 고백함-을 지녔는지는 다음과 같은 사실로 명백해 진다.

샬롬 통치의 현실성에 대한 가장 극명한 상징적 실마리는 그의 식탁교제(table fellowship)이었다. 정결법을 어기는 그의 추방된 자들과의 식탁교제는 신적 비전의 철저성과 아버지이신 신의 사랑의 팔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보여준다. 이것은 모두를 한 테이블에로 환영하고, 폭력의 한 형태로서 어떤 종류의 배제에도 비판하는 세계관을 창조한 하나님의 포괄적인 사랑(inclusive love of God) 에 대한 예수의 비전과 헌신의 핵심을 보여준다. 그가 “죄인들”과 “세리들” 그리고 그 당시 사회가 배제한 이들과 함께 공동 식사를 함으로써 가름과 배제의 폭력에 대한 비폭력적인 저항을 실천하였다. 예수의 비전에는 우리가 모두 하나님의 모두를 포괄하시는 사랑에 의해 유지되는 한 몸의 모든 지체들이다. 이러한 포괄적 비전은 서로를 신을 한 아버지로 둔 형제자매로 만들고 따라서 '적대자'를 형제자매로 감싸고, 약자에게 힘을 부여하는 비폭력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그의 샬롬통치에 대한 비폭력적 실천은 타자와 주변자(the marginalized)에 대한 보편적 치유에 대한 그의 비전에 의해 심화된다. 생에 대한 이러한 접근은 타자의 기본적인 복지에 대한 희망을 포함한다. 예수는 항상 돌봄의 서클 바깥으로 내던진 이들을 발견하고 그들을 치유의 문을 통하여 공동체 속으로 되돌아오도록 초대하신다. 그는 공동체의 복지와 안녕은 각각 구성원의 복지와 안녕과 상호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니 오히려 가장 약한 자의 안녕과 복지에 의존되어 있다는 사실을 가르쳤다.

예수는 개인의 불행과 병이 폭력적 지배와 배제의 이념으로 작용한 불행과 병에 대한 인식 개인적 죄의 잘못이나 그 결과가 아님을 가르쳤다. 눈먼 소경은 자기 죄가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함"(요 9:3)이고 나사로의 죽음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위함"(요11:40)이라는 주장을 통해 예수는 치유와 거룩한 힘을 세상의 거부 받고 접촉할 수 없는 이들에게 확대하였다. 그들은 징벌받은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 자비의 수여자라는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의 주체인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누구든 복지의 서클밖에 있지 않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뿐만 아니라 진정한 치유와 회복은 단순히 육체적 몸의 회복만이 아니라 공동체로 불러들임으로서 상호 연결(interconnection)에 있다는 것고 이 상호연결이 거룩함의 알짬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보여주셨다. 상호연결이 있는 곳에 신이 있고, 상호연결이 거룩의 길임을 각인시켜 주신 것이다.

예수의 능동적 비폭력을 통한 샬롬의 통치의 또 다른 예는 그의 설교에서 나타난 하나님에 대한 그의 이해와 그분에 대한 접근의 길에 대한 이해에 있다. 십계명에 아직도 흐르는 저 위 하늘의 유일한 만군의 신이자 '우리 신앙 공동체'내에서 타자에게 폭력을 휘두르지 말라는 것을 더욱 철저화시켜 그는 신이 사랑이시고 무제한적인 타자에 대한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셨다. 이렇게 예수가 하나님 안에서 본 철저한 사랑의 종류는 인간의 삶이 보복하시는 하나님에 아첨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응답하는 것이며 그것은 성전의 공간을 넘어 또한 우리의 일상과 세상에서 전일(全一)적으로 하는 이 지상적 수행(mundane practice)로 초대하셨다. 그 핵심은 "양이 생명을 얻되 더욱 풍성히 얻는"(요 10:10) 길에 있다. 이것이 그 근본 뿌리에 있어서 폭력을 정화시키는 영성이다. 늑대와 여우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발톱을 날카롭게 하여 자기 방어와 힘의 논리로 세상을 사는 것이 아니라 양으로서 있으면서 모든 형태의 죽음과 죽임 그리고 폭력에 확고한 대항을 하며 생명을 위하고 이것이 충만하도록 삶을 투신하는 것이다.

그가 주장하는 예배의 날, 안식일은 따라서 인간 공동체를 섬기는 데 있어야 하며 사랑의 하나님과의 이러한 관계를 반영해야 한다. 치유가 필요한 자가 있을 때 치유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 응답하는 장소와 시간 그리고 그 방식에 대해 예수는 근본적인 질문을 제시한다. 그러한 특권적인 날, 성소와 같은 헌신하는 장소에서 어떤 종류의 활동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기쁘시게 하는 것인가? 이는 우리가 하나님은 어떤 분이라고 생각하는 가에 달려있다. 예수는 인간의 고통에 무관심한 예배의 폭력에 반대하는 입장에 선다. 그는 또한 예배드리기 위해 모인 이들의 공동체 삶의 질에 관심을 갖는다: 그들은 진실로 한 테이블을 공유하며 모든 이의 복지를 추구하는가? 예수에게는 사람들이 예배를 적절하게 볼 수 있기 전에 공동체내에서의 화해에 대한 긴급성이 먼저이며 이 화해가 진정으로 예배라는 사실을 주장한다. 예배하기 전에 이웃과의 갈등이 있다면 뒤로 돌아 즉시 가서 먼저 화해를 이루라는 것이다(마 5:23-24). 이것은 단순한 윤리적 권고가 아니다. 이는 하나님의 본성과 관련이 있다. 하나님의 포괄시키는 보편적 사랑-비와 햇빛을 누구에게나 허용-에 근거하여 그에 대한 유일한 응답의 길로서 사랑을 요구하는 것이다. 사랑이 사랑을 가져오고 평화가 평화를 가져온다. 증오와 배제가 거룩을 세우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첫 번째이자 궁극적인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인 것이다.

지금까지 진술을 요약하자면 예수는 식탁에 모두를 포함하는 것, 모두의 복지와 안녕을 회복하는 치유, 그리고 생명과 평화의 하나님에 대한 삶으로의 응답으로서 예배라는 새로운 제자직으로서 사랑의 공동체에 대한 비전을 열어주셨다. 이것은 자비, 겸손, 비-보복, 용서, 진실추구, 화해 그리고 자신의 적을 포함하여 타자에 대한 사랑에 헌신하는 생활양식을 의미한다. 이것의 단초는 기부, 금식, 기도, 신뢰, 그리고 우리의 가슴을 하나님의 지배에 두는 것으로부터 성장한다.

예수가 제시한 사랑의 공동체에 대한 비전을 갖는다는 것은 그 길이 쉽거나 성공적인 실재가 금방 나타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이미 예수는 우리가 극도로 적대적이고 폭력적인 세상에 놓여져 있으며 당신 자신이 그것의 희생 제물이 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의도는 완전한 유토피아 사회에서 쉽게 할 수 있는 사랑에 대한 꿈을 꾸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성공의 여부와 상관없이 신실하게 폭력의 현실 한 가운데에서 비폭력적인 세상을 건설하도록 초대한다.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의 사역에 사랑으로 응답하면서 우리는 성공하는가가 아니라 신실함으로 응답하며 그 과정에 있어서 필요하다면 자발적인 고난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렇게 비폭력적인 세상을 건설하는 중요 요소들 중에는 물리적인 폭력, 법적 소송 그리고 강요된 징집(마 5:39-42)을 대면함에 있어서 보복적인 활동을 종식하는 것이 포함된다. 예수는 전체를 희생하는 한 그룹이나 한 국가의 파괴적인 자기-이익의 폭력적 수행에 대해 능동적으로 저항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의 능동적인 비폭력에로의 부름은 그 응답이 폭력적인 행동과 맞대응하기라는 순환의 방식이 아니다. 그의 샬롬통치의 제자직에로의 부름은 누가 관계를 깨뜨리는 데 책임이 있든 지간에 화해를 시작하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이에는 이로, 눈에는 눈으로'라는 정당한 대의하에서 폭력에 대항한 보복과 징벌이 아닌 치유와 관계의 회복이라는 화해를 제시한다고 해서 타협적이고 순응적인 결과를 기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예수가 비폭력적인 반면에 그는 동시에 확고하게 대결적이었고 그의 대결적인 행위는 위협적인 결과를-전복과 변혁을- 가져왔다. 그는 일반인이 그를 묘사하듯이 그의 단순한 선행이 악마적인 사람들의 악행들로부터 반대를 일으키게 된 타협적인 희생자는 결코 아니었다. 복음은 예수의 비폭력 수행이 결코 수동적이고 개인적인 것이 아님을 명확히 보여준다. 오히려 그로 하여금 그 시대의 어떤 실천에 대항하는 도전을 개시하도록 하는 그런 확고한 끈기가 있는 변화의 실천이었다. 그는 대중을 선동하고 정치가들을 불안하게 하였다.

몇 가지 점에서 예수는 그의 "혁명적 비폭력"(revolutionary nonviolence-존 하워드 요더의 용어)과 그가 살고 있던 죄 된 세상의 잔혹한 폭력 간에 다가오는 충돌을 명확히 보고 있었다. 이미 사건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를 알고 있으면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그의 결정은 비폭력에 대한 그의 헌신의 깊이를 드러낸다. 왜냐하면 그의 반대자가 그를 거기서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있었고 공개적으로 그들이 그의 삶을 위협하고 있음을 말하였기 때문이다. 폭력의 아가미속으로 자발적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무모한 용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신과 그에 대한 무제약적 책임성으로서-성공여부와 관계없이- 자신을 내어주는 신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의 행위였다.

죽임과 죽음을 촉진시키고 죽임과 죽음의 구조를 지지하는 체제에 대해 기꺼이 자발적인 고난을 통한 죽음의 수용을 통해 죽임과 죽음에 대한 그들의 동맹을 단절시키는 신의 명령에 대해 신실한 응답의 표현인 것이다. 죽음에 대한 비폭력적인 수용에서 예수는 치유하고 해방하는 방식으로 행동하고, 정확하게는 그가 경험한 증오와 폭력의 살인적인 지배/통치를 역전시켰다. 예수는 저주받고, 주먹으로 맞고, 조롱받았다. 심지어 고뇌가운데서도 그는 그에 대해 사용된 똑같은 폭력에 의지하지 않았다. 그는 배신당하고, 친구에 의해 거부당했으며, 징벌 받았고, 옷을 벗기웠으며, 벌거숭이로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비폭력적인 응답과 자발적인 고난은 새로운 각성과 신의 뜻에 대한 분명한 '눈에 비늘이 벗겨지는' 명료함이라는 부활을 가져온다. 신의 고난과 예수에서 나타난 신의 보편적 사랑의 철저성은 새로운 영혼의 불꽃을 점화시켰다. 그리스도의 영은 제자들에게 옮겨져서 그들은 이 화해와 평화 만들기를 지속적으로 하게 되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서 나타난 폭력에 대한 신적인 반응에 대한 그의 제자들의 이해는 이제 자신을 얽매였던 죽음과 두려움을 넘어서 사랑과 진리의 영의 부여받음과 선물로서 자기 생에 대한 자각이라는 신념공동체의 탄생과 더불어 새로운 사명으로서 평화를 만드는 인간 공동체에로의 부름에 대한 전적인 헌신이 일어나게 되었다.

201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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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용박사 | ecopeace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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