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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25
제 20회 민들레성서공동연구

주제: 평화와 자유
일시: 2007.3.12-14.
장소: 갈산감리교회(서산)
 
첫 번째 마당: 자유를 억압하는 세력과 체제의 분별

본문: 막5,1-20; 엡 6:12 (참조: 엡2,2)

<문제제기>

평 화의 시각에서 자유란 존재의 상태(예, 평온하고 흔들림 없음) 상태이면서 삶의 모습(예, 비폭력적인 생활)과 연관되어진다. 그런데 만일 누군가가 개인이 내면의 욕구에 따라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 자유라고 주장할지라도,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폭력의 구조/제도속에 발을 담그고 있다면 이는 진정한 자유라고 하기엔 어렵다. 오염된 공기를 들여 마시고, 영적이고 물적인 가난을 낳은 구조적 환경 하에서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자유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유를 근본적으로 억압하는 권세>

성 서는 자유의 문제를 인격적인 것을 넘어서 보는 시야를 가진다. 즉, 진정한 자유는 인간적인 것을 넘어서서 소외와 억압의 근본원인인 “권세, 세력의 악신, 암흑세계의 지배자, 하늘의 악령”과의 싸움에서 쟁취되는 역동적인 것이다. 땅과 하늘의 상관관계라는 통합적 세계관을 가진 성서의 세계에서 권세들, 세력의 악신들은 단순히 저위의 하늘을 날아다니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들 시대의 정치, 경제, 문화적 제도와 기구들의 외형안에 있는 실제적으로 있는 영적인 것을 우주의 스크린에 투영하고는, 그것을 하늘에서 지배하는 우주적인 힘으로 인식하였다. 이런 우주적 투영은 진실로 땅에서 악마적으로 인간성을 황폐케 하고 혼돈을 심는 현실세계의 세력과 기구의 실제현상을 판별한 것의 우주적 반사인 것이다.  

이 권세는 저 세계에서가 아니라 이 땅의 현실세계의 구조와 기구를 몸으로 이용해 작동하고 영속되며 드디어는 인간의 힘으로는 통제 불가능하게 되어, 심지어는 자율적으로 움직이게 된다. 그리하여 이 “비인간적이고 억제할 수 없는 힘”은 사회구성원을 위한 봉사자가 되기보다는 지배체제의 노예가 되게 만든다. 지배체제는 말하자면 권세들의 체제로서, 성경은 이를 ‘세계world,’‘시대 aeon,’ '육정flesh'이란 말로 표현한다.        

엡6,12 에서 말하는 우리가 대항하여 싸워야 할 원수들-권세, 세력의 악신, 암흑세계의 지배자, 하늘의 악령들-은 하늘로부터 인간을 공격하는 악마적인 형이상학적 존재가 아니라 이 땅의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구조와 기관들 혹은 체제들의 내면성이자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그리고 문화적 기관들의 타락한 내적인 표현이다. 이 세력으로 인해 개인이 인격적 성장을 원한다하더라도 체제(기구/제도)는 자기증식과 탐욕을 위해 자율적 힘과 기능을 갖게 된다.

개인이 탐욕을 가질 필요가 없이, 체제가 그 대신에 탐욕스럽게 행동하는 것이어서, 만일 개인이 체제의 가치를 거부한다면 이번에는 그 체제에 의하여 그가 축출된다. 권세의 현세적 표현으로서 체제는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선택하게 하고, 그 체제 안에서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 무엇을 중요시해야 하는가를 지시한다. 따라서 싸움의 근본은 우리가 살과 피를 가진 인간들을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이 어두운 현실의 세계를 지배하는 것들과 싸우는 것이다.

<내면화된 권세>

권 세들은 숨겨진 곳에서 활동하며,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활동할 때가 가장 강력하다. 성전과 사람들 속에(막1,21-28, 마12:43-45), 돼지 속에(막5,11-13) 혹은 정치제도들 속에(계12,13)들어와 구체적인 몸을 입는다. 이 권세들은 눈에 뜨이지 않게 주변 환경에 숨거나, 우주의 비밀처럼 신비적인 모양으로 꾸며 보이며, 혹은 우연적이고 비본질적인 구조와 제도를 마치 신이 허락한 것인 양 보이게 함으로써 지배체제를 유지, 강화한다. 내면화되고 구조화됨으로써 권세가 외형화된 체제는 순종을 얻어낸다.

군대 귀신들린 사람의 “무덤에 살며, 쇠사슬이 소용없이 소리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짓찧는” 행위는 개인의 사적인 문제로 드러나고, 여기서 권세는 숨어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활동한다. 권세가 질서의 이름으로 소외된 질서[군대귀신 들린 사람의 격리]를 창조하고  이런 기만적인 체제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소리와 모양이 없는 권세는 기만적 체제의 희생자들이 그들이 어떻게 해서 그 지경이 되었는지에 대해 책임이 있으며 다른 누구에게 그 무엇에게 불평할 수 없이 수용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영혼에 상처를 주고 폭력을 내면화시킨다(내면의 수감자가 된다).

그리고 이를 보는 주변인-돼지 치던 사람들-들은 기만된 질서에 대한 이해없이 자신이 희생자와 구별된 것에 대해 자신은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해 보상심리를 얻으며-어떻게 저런 참혹한 일이? 그렇지만 난 아니라서 다행이야!- 결국은 지배체제의 상황에 대해, 그런 체제에 희생된 사람들에 대해 ‘무감각’하게 된다. 타자의 희생은 통과제의처럼 반복되며 그 상황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자신의 위치와 삶은 영예롭게 생각이 든다. 이렇게 희생자와 주변인들은 체제의 잘못됨을 인식하지 못하게 만드는 체제의 그물에 걸려있게 되고, 희생자는 자신들을 비난하고 그 체제는 다치지 않은 채 남아 지속하게 된다.

결국은 체제를 보호, 유지하는 것이 윤리적 행동의 결정적 판단기준이 되고, 다수의 사회적 안정은 희생자의 피로 대속된다. 희생자는 필요한 것이고, 그런 되풀이 되는 희생자를 통해 자신의 존재의미를 확인하며 ‘다수의 희생보다 한 사람의 희생이 낫다’는 가야바의 법칙이 암묵적으로 통용이 된다. 그리고 그런 희생양 제도를 통해 내가 획득한 부-돼지들-는 더욱 가치 있고 빛난다. 이렇게 내면화된 권세와 보이지 않게 작용하는 지배체제가 된 희생양 제도는 희생과 폭력에 대한 기억상실증을 제도적으로 구조화하게 된다.

희생의 당사자이든 주변인이든 그들은 자신들이 상실한 것의 내면화와 무감각을 통해 상실의 쓰라림을 알지 못한다. 분별의 마비는 충만한 인간의 삶이란 마땅히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기억 상실을 가져와서, 심지어는 기억의 회상 자체를 두려워하게 된다. 생산성의 윤리, 성공의 의무, 적자생존의 도덕질서는 희생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뭔가를 이룩함은 희생의 기반위에 있어야 함을 당연하게 생각하게 한다. 그래서 주변인들은 공범자가 된다. 그래서 우리가 의존하고 있는 권세들에게 순응하도록 자신을 재구성하며,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세계에 항거하지 않고 그냥 놔둔다. 이 세계질서와 평화를 이루기 위하여 역으로 자기 자신들에게 전쟁을 선포한다: “더욱 노력하라, 더욱 스마트해져라. 실패한다면 그건 너의 다 네 탓이니 더욱 일에 충실하라....”

<자유의 시작으로서 악령/권세의 분별>

성서시대의 권세/지배체제에 대한 원형적인 구조는 오늘날에서도 여전히 그 영향력을 가멸차게 발휘하고 있다. 우리 대중문화의 폭력과 갈등현상, 소외와 상처들은 하늘의 악령/권세가 현실화된 지배체제가 끊임없이 강화시킨 가치관의 작동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어린이들은 지배체제의 사회속에 길들여져 모든 악은 자신들 밖에 있다고 믿게 되고, 커서 어른이 되어서도 이세상의 모든 잘못된 것들에 대하여 남들을 희생양으로 삼게 된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복감의 사회적 기준을 고수하고 자기네 그룹의 집단적 정체성을 계속하여 의존한다(군대 귀신들린 자로서 희생자와 거리를 둔 돼지소유주로서의 정체성).

복음은 시대와 사회적 상황이 다름에도 지난 수천 년간 똑같은 문제와 씨름하고 있는 데, 이는 권세와 이것의 현실구조인 지배체제와의 싸움이다. 복음은 억압과 폭력의 그 어떤 한 형태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그런 사회적 모습을 출현시키는 근본으로서 영적인 힘으로서의 권세와 그것의 구체적인 현실로서 지배체제로부터의 해방에 있다. 이들 권세와 체제는 보이지 않는 종교의 위치까지 차지하여 그 추종자들에게 절대적 복종을 요구하며, 그 헌신이 일종의 종교적 경건성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아직 대다수가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것이 종교적인 것으로 안보이기 때문에 오히려 그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지배체제는 기독교의 언어, 상징, 경전까지 남용한다. 기독교인의 자유는 기만과 현혹의 권세와 그 현실구조인 지배체제를 분별함으로 시작한다. 교회는 이들 체제들 뒤에 보이지 않게 작용하는 권세들의 영성을 폭로하고 하느님의 새로운 질서를 강화하는 목회를 요구받고 있다. “우리가 대항하여 싸워야 할 원수들은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세력의 악신들과 암흑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의 악령들입니다.” 기독교인의 자유는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다. 하늘의 싸움에 참여하는 문제이다.

토론을 위한 질문:

1. 본문을 서로 다른 번역본으로 읽고 차이를 주목하며 그 의미를 음미하자. 자신에게 살아있는 메시지로 다가오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서로 나누자.

2. 자신이 생각하는 자유관이란 무엇이었으며 오늘 성서의 본문은 이에 대해 어떤 도전을 주는가?

3. 군대귀신들린 사람과 돼지를 소유한 사람들 간에 차이점과 공통점은 무엇인가? (자유와 억압이란 관점에서)

4. 오늘 우리 삶, 우리 교회가 대면하고 있는 권세와 악신의 구체적인 모습은 무엇이며 이를 대처할 기독교인의 방안은 무엇인가?


두 번째 마당: 크리스천 자유의 의미와 그 목표

본문: 롬 6:5-19  엡6:13

<자유의 근원: 하느님의 영>

복음이란 이 세상으로부터 개인을 구원하는 메시지가 아니라, 그 가장 기초적인 구조에 이르기까지 변형된 세계에 대한 메시지다. 그리고 구원과 관련된 자유는 실제로 권세들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되는 것, 자기 자신의 죄와 권세들과 공범관계임을 용서받는 것, 그리고 권세들이 우상화되지 않도록 해방시키는 일을 뜻한다. 예수께서는 그 당시 지배체제를 비난하고 하느님의 통치가 도래함을 선포하였는데 하느님의 통치란 곧 현실의 모든 측면, 심지어는 개인이 속한 사회적 뼈대까지 변혁시키는 것을 말한다. 그 예가 권세의 피해자들-창녀들, 세리들, 죄인들, 땅이 없는 사람들-을 들어 올리는 하나님 나라의 비지배적구조의 확립이다. 이렇게 예수운동은 권세들의 체제에 대항하는 근본적인 혁신운동을 가져왔다.

낡은 질서의 횡포로부터 해방된 사람들은 새로운 거룩한 영을 받게 된다. “그 영은 지배체제cosmos의 영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온 영이며”(고전2,12) 이 새로운 영은 믿는 사람들을 새로운 실재와 다시 교제하게 한다. 그런 영을 받아서 바울은 “나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써 지배체제 kosmos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한 체제-는 나에게 대해서 죽었고, 나는 그 체제에 대해서 죽었습니다”(갈6,14)라고 승리를 기뻐할 수 있었다. 요한기자의 증언도 마찬가지다. “너희는 낡은 체제에서 고난을 당하겠지만, 용기를 내어라. 내가 그 지배체제를 이겼다”(요16,33). 하느님의 새로운 실재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단지 새로운 가슴과 새로운 영을 받는 것만이 아니라, 세상과시간과 심지어는 자신의 몸에 대한 변화된 관계를 받는다.

<새로운 삶으로의 전환: 십자가수행>

출애굽사건으로부터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계시에 의해 눈이 떠진 사람들이 이제는 다른 실재, 즉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되었다.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소수의 사람들에 의하여 다수의 사람들이 착취당하는 보편적 실상-보이게 되었고, 심판되었으며, 무엇이 결핍된 것인지 발견되었다. 이런 새로운 통찰력을 갖춘 사람들은 예전 같으면 “세상”의 소외된 모습을 형성하였을 현혹과 기만에 이제는 더 이상 자신들을 예속시킬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권세를 전복시키는(upside down) 십자가, 그것은 예수의 ‘십자가에 못박힘’이 제자들에게 주는 통찰이다.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당신을 낮추어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빌2,6-8)함으로 모든 종속을 끝장낸다. 이렇게 이루어진 통치는 지배적 계급조직이 아니라 남에게 권능을 부여하는 질서, 혹은 잠재능력을 실현시키는 질서다. 그것은 신적인 독재자가 통솔하는 것이 아니라, 벌거벗은, 무방비 상태의 진리-십자가에 못박힌 자-가 통솔한다.

십자가는 인간이 그 권세들과 공범관계임을 폭로하고, 그리고 이익을 받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유를 처분하려는 우리들의 완악한 마음을 폭로하였다. 십자가는 또한 권세들이 예수로 하여금 그들이 원하는 사람이 되게 만들 수 없음을, 혹은 그의 사람됨을 중지시켜 버릴 수 없음을 폭로한다. 그들이 예수 속에 살아 있던 것을 죽일 수 없었으므로 십자가는 또한 죽임의 무력함을 폭로했다. 죽음의 두려움에서 자유롭게 된 사람들은 그 결과의 하나로 폭력의 악순환의 사슬을 끊어버릴 수 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는 자진하여 전체 체제의 폭력을 그 자신이 짊어졌다. 바로 이처럼 자신을 비우는 행동을 통하여 예수는 우리를 권력 피라밋의 꼭대기에서가 아니라 그 밑바닥에서 만나준다.

십자가는 하느님이 또 다른 예상치 않은 방식으로 승리하는 것이다. 즉 권세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폭로하는 행동을 통하여 그를 처형하는 권세에 복종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서 그들을 비우상화, 비절대화, 그리고 상대화하였다. 십자가는 권세들에 대한 하느님의 승리인데 까닭은 이 사건에서 예수 안에 성육신되고 인간화된 그리스도의 원리가 그에게 끌린 모든 사람들에게 인간됨의 원형이 되도록 해방되어 보편화되었기 때문이다. “예전의 낡은 우리 자신은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죄에 물든 육체는 죽어버리고 이제는 죄의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롬 6:4,6).

<자유의 수행: 하느님의 탈지배적인 질서>

예수는 기존 질서에 대한 무장한 위협을 가하지 않음에도 기존의 체제 유지자들이 죽여야만 하였던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그와 그의 추종자들이 지배체제를 지원하는 권력, 부, 명예와 같은 가치를 지원하는 기관과 체제를 비판하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높은 자는 섬기는 자(눅22:24-27), 팔복음과 치유 그리고 식탁교제에서의 가난한 이의 편드심, 탈 지배적 구조로서 (메시야, 스승, 노예보다는) 인자로서 ‘벗’되기(요15,15), 혈육중심의 가족이 아닌 하느님 말씀중심의 가족(막3,21,31-35)과 한 분이신 하늘 아버지, 거룩의 울타리를 치는 특권층의 지배 이데올로기로서 안식일과 정결법보다 추방된 자들에 대한 자비와 해방의 우선성 등에서 보듯이 지배, 구분, 특권의 자리를 거부함으로써 예수는 지배가 없는 새로운 질서를 조직화한다.

하나님의 통치는 하늘 높은 곳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이 땅 위에서 조용히 눈치 채지 못하는 가운데 일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왕, 칼, 군마 등의 군대들이나 군사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밭, 밀가루반죽, 여인, 가정 등의 보통 사람들 가운데서 아래로부터 자라나는 것이다. 지성소의 커튼이 찢어지고 나서 우리의 공동의 몸이 성령의 성전(고전 6:19-20)이 됨으로 거룩/세속의 구분이 철폐되고 거룩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몸으로부터, 생활로부터 발원된다. 십자가위의 예수의 죽음과 암흑은 우주의 블랙홀이 새로운 별을 생성하는 것처럼 참된 사람을 생성하게 된다.

<자유의 출발: 권세들에 대해 죽기>

권 세와 지배체제의 죽음의 힘으로부터 풀려나는 것은 사도바울에 따르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 가능해진다.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지배체제(세상)의 근본적인 원리들에 대해 죽었다면 어찌하여 아직도 그 체제에 속하여 사는 것처럼...규정에 묶여 있습니까?”골2,20) 우리가 지배체제에 의해 사회화되어 사는 동안 우리는 죽은 삶을 사는 것이다. “여러분도 전에는 죄와 잘못을 저질러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이 죄에 얽매여 있던 때에는 지배체제를 따라 살았습니다”(엡2,1-2).

자신의 소외와 타인들의 소외속에서 공범자로 연루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죽어갔다. 우리의 속박을 사랑하고, 그 속박을 합리화하며, 정당화하고, 급기야는 그 속박을 옹호함에 따라 우리는 죽어갔다. 이렇게 우리를 속박하고 죽이는 권세와 지배체제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 사도바울을 일종의 동종요법 (homeopathy)을 사용하여, 혹은 두꺼비가 뱀에게 삼키어져 새끼를 까듯이, 우리를 죽인 것을 삼키는 죽음, 곧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을 경험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진정한 자신이 되기 위해, 권세와 지배체제가-되풀이 되는 낡은 녹음테이프처럼 우리 두뇌와 삶속에 형상화한- 의식속에 만들어 놓은 내적인 자아에 대해 죽어야만 한다. 그리고 또한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죽음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익숙한 지배체제의 사회적 환경에 대해서도 우리는 죽어야만 한다.

특권과 풍요속에 태어난 사람이나 기득권의 혜택을 누리는 자들은 자기중심주의에 대해 죽어야 하고 가난과 고통속에 자란 사람은 자신들의 숙명론과 침묵에 대해서도 죽어야 한다.

예수는 이렇게 권세들에게 죽어주는 과정을 그의 사역의 중심적 역설로 설명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우리의 자아는 사회적 관습이 내면화된 집단 무의식을 지니고 있으며, 지배체제에 의하여 타율적 외부 신념들에 의해서도 우리의 정신이 지배되고 있다. 자기의 자아에 대해 죽는다는 것은 권세들에 대해 죽는 것을 포함하지 않는 한 온전한 인격이 되지 않는다. “죄에 물든 육체는 죽어 버리고 이제는 죄의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롬6,6).

<자유의 새로운 과제: 정의를 위해 살기>

사도바울에 따르면 기독자의 자유는 자아의 중심이 전적으로 하느님을 향하여 새롭게 방향 정립하는 것이다. “나는(ego)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이제는 내가(ego)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the self)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갈 2,19).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심으로써 지배체제(kosmos)는 나에게 대해서 죽었고 나는 지배체제(kosmos)에 대해서 죽었습니다"(갈 6,14) 에고가 죽고 참자아가 다시 태어남으로서 삶에 대한 거짓 소유권 증서를 찢어버리고, 자신과 모든 것이 하느님께 속했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이렇게 내면이 갱생됨으로써 하느님의 다스리시는 행동에 의하여 부패된 사회속에서 새로운 실재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는 신성한 것에 대항하는 이 세상 권세들과 겨루시는 하느님이 투쟁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여러분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으로서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고 여러분의 지체가 하느님을 위한 정의의 도구로 쓰이게 하십시오”(롬6,13하). 하느님의 사회의식이 그 자신을 불태우는 정열이 되는 것이다. “이제는 온 몸을 정의의 종으로 바쳐 거룩한 사람이 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롬6,19) 우리가 권세에 대해 죽어야 하는 것은 우리 영혼속에 적과 싸우다 적을 닮아가는 전염을 방지하고자 함이다. 그러나 이것은 궁극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은총의 지배를 받아 정의의 도구가 되는 헌신을 강화시킨다.  이를 위해 자발적으로 자신의 생명을 건다. 이를 위해 기독자의 자유는 단련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지금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무장을 하십시오”(엡6,13).

토론을 위한 질문:

1. 본문을 서로 다른 번역본으로 읽고 차이를 주목하며 그 의미를 음미하자. 자신에게 살아있는 메시지로 다가오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서로 나누자.

2. 본문에는 여러 대치되거나 상반되는 의미, 위치, 방향, 경지를 나타내는 단어들이 나온다. 이를 찾아 보고 그 뜻을 서로 생각해 보자.

3. 사도 바울의 ‘죽어서 다시 살아남’에 대한 이해를 자유의 문제와 연관시켜 무엇에 대해 죽고 무엇에 다시 살아남인지 서로 이야기 해 보자. 자신의 삶에서 이런 전환점을 주는 사건의 체험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고 삶에 대해 어떤 영향/방향을 가져왔는가?

4. 바울이 자유의 경지로 제시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으로서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고 여러분의 지체가 하느님을 위한 정의의 도구로 쓰이게 하십시오”(13절)에 대해 교회는 어떻게 이에 구체적으로 응답할 수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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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용박사 | ecopeace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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