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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25
 제 19회 민들레 성서공동연구

일시: 2006.12.4.-6.


주제: 평화와 목회


성서공동연구 I: 평화목회의 의미


본문: 출 1:8-20; 3:7-10


<목회의 정의>

목회(ministry, diakonia)는 모든 지도력의 은사를 묘사하는 포괄적인 용어로 초대교회에서는 직분(성직자, 평신도)보다는 은사를 소유하여 봉사의 기능을 가진 사람들-새언약의 일꾼(고후3,6), 그리스도의 일꾼(고후11:23)-과 관련된 용어이다. 모든 봉사의 은사들은 성령에 의해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는”(고전12:11) 것으로 그리스도의 지상사역과 관계되어 이해되었다. 초대교회에는 여러 직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만 이들 모두가 “하느님의 일꾼”(골 1:7;4:7)으로 평등하면서도 각각의 위치가 있었다. 그러나 2세기말 몬타니즘과 영지주의의 도전은 교회지도자의 합법성문제를 낳았고 이어 콘스탄틴의 기독교로의 회심으로 인한 제국교회/국가종교로의 변화는 성직의 지위가 높아지면서 사회적 지위와 권위를 갖는 감독제이하 상하계급적 직분이 강화된다.


그러나 원래 목회(ministare=serve ‘섬기다’)의 의미는 하느님 백성의 시작으로서의 출애굽 사건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운동안을 연계하는 크리스찬의 사역에 있으며, 그 중심은 ‘해방시키고 자유롭게 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활동’인 것이다. 이는 출애굽사건에 있어서 종살이 애굽의 삶에서 탈출공동체로 이끄시는 해방하시는 하나님 경험과 그리스도 사건안에서  죄와 옛자아의 죽음과 하느님 나라를 위한 새 자아와 새 언약공동체의 경험속에 일관되어 녹아있는 종말론적 비전(치유와 회복의 기대)을 지닌 해방에의 실천(지배와 종속을 변혁)을 담지하는 공동체 사역인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에클레시아(교회; 하느님자녀로 모인 무리들)는 다가올 바실레이아(샬롬의 통치)를 희망하면서 이를 향하여 뜻과 열정을 모아 공동의 몸을 이루어가는 실천운동이라 볼 수 있다.


<시대적 성찰과 희망의 징조>

성서본문이 보여주는 이스라엘백성은 바로왕의 폭정과 고역으로 신음하고 있다. 지배와 위로부터의 강제, 권력과 군사, 그리고 폭력이 이들을 누루고 있다. 바로의 부를 축적을 돕는 곡식저장도성을 짓기위해 할당된 고역을 감수함으로써 아무 이름없이, 목적없이, 누군과의 관계도 없이 사는 삶이다. 무분별한 생산성(더 많은 벽돌의 생산)에 대한 댓가로 고깃덩이를 지급받는다. 고착된 획일화와 고정화된 삶에 의해 신음을 하고 있다. 권력에 의한 지배와 부에 대한 집착, 칼과 군사에 의한 폭력으로 인해, 삶에 대한 비전과 상상력의 차원, 감격하고 놀랄 수 있는 능력, 전혀 새로운 방법으로 변화될 기회가 보이지 않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작은 희망의 실마리가 찾아진다. 이는 산파들인, 시브라와 부아의 공조(共助)를 통해 새로운 출구가 생긴다. 빈곤화되고 무기력화된 상황속에 반전(反轉)의 틈이 열린다. 시브라와 부아는 ‘죽임’을 강요하는 지배문화에 적응하지 않고, 죽이라는 바로의 명령을 거부하기로 공모한다. 이스라엘의 처지가 너무나 열악하고 산파들의 힘은 극히 제한적이었지만 그들은 담대하게 행동했고 이 행동이 결국 그들이 당시 예상하지 못한 희망적인 결과를 낳았다. 그 지배의 체제에 대한 변화의 가망이 없어 보이고, 변하지 않을 것만 같고 종종 비참과 비극을 몰고오는 것들이 만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산파들의 행동에는 결국 모든 것을 잃는 것은 아니라는 전복적인 암시가 들어있다. 권력의 억압체계가 행사되는 주변부(the margin)에서는 언제나 그 냉혹한 현실에 대항하는 숨은 저항이 있기 마련이다.


<산파로부터 배우는 목회>

죽이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이스라엘 민중들이 ‘새로운 생명’을 낳는 데 조력을 한 산파들의 이미지는 오늘날 목회의 방향을 새롭게 조명한다. 지배와 폭력의 사회체제가 지니고 있는 권력의 거대함앞에 산파의 권한은 매우 나약하고 제한적이었으나 바로왕의 죽임의 계획을 수행하기 위해서서는 그들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고 산파들은 자신의 힘을 저항하는 데 사용하기로 선택하였다. 그들이 지닌 생명을 보호한다는 의도가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고 위험도 뒤따랐지만 이스라엘 민중들의 생명을 섬기기 위한(serve=ministare) 결정을 내렸다.


산파의 <생명을 돌보기>에 대한 재치와 위기극복은 오늘날 목회현장에 깊은 시사점을 제시한다. 오늘날 ‘죽임과 폭력의 시대’에 살면서 자신의 힘과 특권, 기회를 우리는 어디에 사용하는가? 산파들은 지배체제하에 자기 생존-안녕, 생존, 명성, 성공에 관한 염려-이 아니라 저항과 돌봄으로서의 섬김(목회)에 대한 재 고려를 촉구한다. 이들 산파가 그런 결정을 하게 된 것은 성격적으로 강인하고 용감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의 흐느낌과 고통에 공감할 수 있도록 이스라엘 민중의 삶의 현장에 누구보다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다. 공조(conspiration)란 ‘함께 숨을 쉬다(con +spire)’란 뜻이다. 함께 숨을 쉬는 공조란 해산할 때 산고를 이기기 위해 산파는 산모와 함께 숨을 쉬는 호흡연습에 비유할 수 있다. 이렇게 같이 생명을 낳는 민중과의 호흡 고르기라는 실천경험을 통해 이들 산파들은 바로의 계획을 망치기로 공모하였고 바로의 꾸짖음에 대해 함께 협력할 수 있었다(그들이 이르기전에 해산하였더이다 -1:19).


<생명돌봄과 협력으로서의 목회>

목회는 저항과 변혁의 사역이다. 이는 폭력의 지배와 위로부터의 강제, 권력과 군사주의라는 압제의 고역을 넘어서서 새로운 샬롬과 은총, 비폭력과 일치의 섬김공동체를 지향한다. 탈출공동체로서 우리는 죽음의 시대를 살면서도 제한적이지만 창조적인 방법으로 이 시대의 ‘정사와 권세’에 저항하는 방법을 발견해 낼 수 있다. 이는 부와 힘의 자리에서 밀려난 주변인(the margin)과 ‘함께 숨을 쉼’을 통해 그 지혜와 용기를 얻을 수 있다. ‘함께 숨을 쉬는’ 목회는 먼저 신음하는 목소리를 알아차리고 귀를 기울이고, 폭력과 죽음을 자행하는 자들을 두둔하는 구조적인 폭력을 폭로할 수 있는 저항하며, 생명을 출산하는 데 공조하는 지혜와 힘을 추구한다.


우리 삶의 주변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는 자신의 언어를 갖고 협력자를 부른다. 열정과 분노속에서 발해지는 이 목소리는 변할 것 같지 않은 것에서 변화를 모색한다. <생존의 언어>가 <변혁의 언어>로 바뀌고 인간의 목소리는 하늘의 소리를 불러낸다. 이 신음이 하늘에 전달되어 자비의 하느님이 행동하신다. “내 백성이 고생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신음소리를 들었다...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에집트에서 건져 내어라”(3:7,10). 이러한 변화는 그냥 오는 게 아니다. 주변부의 고통의 경험을 통해 통찰(awakening)을 얻고, 폭력과 지배에 대한 억압적인 내용에 대해 저항의 수련(practice of resistance)을 하고, 변화를 몰고 오기 위해 함께 일하기(collegial works)를 통해 새로운 변화의 가능성이 현실화될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형성은 약속의 땅으로 가는 도상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약속은 독특하게 광야(wilderness)를 통하여 이르는 것이며 때때로 광야에의 체재가 길어지기도 하였다. 광야 40년 기간을 통해 애굽에서의 지배와 고역의 종살이 삶에서 벗어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시작했고, 자신의 경험에 대한 대안적인 목소리를 갖게 되자 새로운 책임(십계명을 통한 윤리적 삶)이 부여된다. 억압이 해체됨으로 선택과 책임이 따르게 되는 것이다. 그 비전은 광야를 행진함으로 주어지게 되며 탈출공동체로서의 자기 정체성이 명료해지는 것이다. 이반 일리치는 말한다. “오직 에집트의 고기남비를 거부한 사람들에 의해서만 제국의 우상을 섬기는 폭군으로부터 구함을 받을 수 있다.”





성서공동연구를 위한 질문


1. 본문을 다른 번역으로 읽고 다가오는 구절에 대해 잠시 묵상하자. 말씀을 읽는 것을 넘어 말씀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게 하자. 그리고 느낀 점을 서로 이야기 해 보자.


2. 우리가 살고있는 시대에 대한 목회적 상황은 어떠한가?  오늘의 애굽의 상황은 어떤 특징들이 있는지 자신의 구체적 경험이나 주변의 경험을 통해 이야기를 나누자.


3. 2와 관련하여 출애굽을 위한 기회를 줄 수 있는 자원이나 방법은 무엇이 있는가?(개인과 자신의 교회의 입장에서)

4. ‘함께 숨을 쉬는’ 산파로서의 기독교인의 사역에 대한 구체적인 적용의 예들을 들어보자.













성서공동연구II: 평화 목회의 지평


본문: 막 5: 21-43


<출애굽사건의 재해석자 마가>

출애굽사건이 광야에서 샬롬의 인간, 샬롬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있다는 주제는 복음서중 먼저 써진 마가에서 재출현한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를 통해 ‘길을 여는(making a way)' 삶에로의 초대가 그것이다. 마가가 전하는 예수의 사역의 중심은 언제나 광야(기도처)와 ‘길 위에서(치유와 하나님나라 비유의 전수)’였으며 도시와 회당 그리고 성전은 오히려 적대의 장소로 등장한다. 샬롬의 인간으로서 기독자는 벽돌공장의 무사안일의 노예상태에서 고깃가마는 없지만 평화의 수행(길을 닦고 고르게 함)을 실천하는 자이다.


마가가 전하는 예수의 사역은 언제나 도시와 광야가 주는 두 이미지(중심<the center>과 주변부<the margin>)에 있어서 놓여있다. 중심에 있는 우리와 주변에 있는 그들간의 관계속에서 예수는 주변부의 재 중심화(re-centering of the margin)라는 하나님 나라운동을 실천한다. 그러므로 제자직도 그것이 기득권이 되고 중심이 될 때에는 사정없이 뒤엎고 바꾸신다(trans-position, 轉位) 그 예로 중심으로서의 회당의 악령의 존재(1:21-28) 베드로에 대한 꾸짖음(8:2738)과 그의 배반이 있고 주변부인 호숫가에서의 오병이어사건, 하느님나라 설교, 향유 깨뜨린 여인의 사제직 수행(14:3-9)그리고 구레네 시몬의 십자가지기(15:21)와 백인대장의 십자가예수에 대한 하나님 아들의 고백(15:39)이 예로 들 수 있다(성전회당의 비신성화대 일상의 신성화 대비). 관심과 주목의 대상이 되지 못한 주변부-사람, 장소-는 이렇게 샬롬의 사역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함으로서 기득권의 위치에 있던 거룩한 장소와 제자직에 逆轉이 일어나게 된다.  


<‘저편’으로서의 비인간화된 상황>

마가에 있어서 호숫가는 중심의 주변부의 역할을 하지만, 오히려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길의 확장에 있어서는 중심의 위치를 차지한다. 즉 이 호숫가에서 하느님 나라에 대한 비밀이 전수되며(4장) 하나님 나라 확장의 수행이 심화된다. 그 수행은 ‘저편으로 건너가자(4:35)’고 재촉하시고 직접 저편으로 건너감의 모범을 보여주시는 예수의 호수위 걷기를 통해 구체화된다. 저편에 있는 레기온 귀신과의 대면을 통해 우리는 출애굽사건과 레기온귀신(식민지 착취가 개인적인 차원에서 귀신들림으로 구체화)의 치유간에 유사성 곧 노예화하는 세력이 압도되고, 무덤가에서 새로운 인간의 회복되는 출애굽사건-억압에서 자유로의 삶-이 재현되는 것이다. 비인간화의 세력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 ‘멀쩡한 정신’(5:15)을 가진 삶이 회복된 것이다. 분열되고 제정신을 빼앗기 사람들이 새로운 삶을, 아무것도 아닌 자가 자신의 정체성과 삶을 얻게 되는 것이다.


본문은 예수께서 저편으로 다시 건너감으로(“건너편으로 다시 가시사”; 5:21) 예수의 샬롬사역의 의미를 중층화한다. 유사한 사건이나 행동이 재차 반복되는 것은 마가가 그 행위나 사건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예, 두 번의 오병이어의 사건과 호숫가를 제자들과 두 번 건넘 등). 저편에서는 야이로의 딸이 죽어가고 있었다. 여기서는 죽음의 위협이 문제였던 것이다. 본문이 의미심장한 것은 예수께서 처음에는 야이로의 청으로 자신의 길을 가시다가 유대 정결법에 가장 더러운 자의 상징인 혈루병에 걸린 여인이 갑자기 나타나 그의 길을 막는다는 것이다(기다리는 사람들은 얼마나 초조해할지 상상해보라). 예수는 본래 목적으로 가던 ‘길에서’ 지체하여 이 ‘부정한’ 여인을 치유하고 그동안에 소녀는 죽게 된다. 


<저편으로 가는 길에서 생긴 사건>

본문 이야기 구조는 마가의 강조방식으로서 이중 사건을 특이하게 배치해 놓았다는 것이다. 즉 두 개의 치유사건을 다른 이야기처럼 병렬로 놓지 않고 겹쳐 놓아서 야이로 딸 이야기속에 혈루병에 걸린 여인이야기를 집어넣어 -같은 것은 12살, 12해, 두 여인- 이야기를 ‘야이로의 딸 이야기로 시작해서 혈루병에 걸린 여인 이야기가 들어와 그 여인이 병으로부터 건강해진 후에야 다시 야이로 딸 이야기로 진행되어진다. 주변<이름없는 여인>에서 치료가 중심<야이로 회당장의 딸>에서는 죽음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여인이 치유된 후에 예수는 야이로의 딸을 되살린다. 마가 기자는 주변이 치유되어야 중심이 치료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서 하나님 나라 백성의 의미와 사역의 범위에 대한 지평확대를 열어주고 있다.


본문은 ‘이편/중심/聖’의 회당장의 12살 소녀의 죽어감과 ‘저편/주변/俗’의 12년 동안 하혈을 해 온 여인의 절망을 비교하면서 ‘건너감’과 ‘길을 열음’에 대한 의미를 드러내주고 있다.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자의 자식-오늘날의 교회-이 죽어가고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치유가 필요하다. 그런데 더 오랜 고생을 하고 있는 저편의 사람들이 출혈을 하고 있다. 야이로의 딸은 공동체 안에서 배려받고 있으며 하혈증 여인은 공동체 밖에서 돌보는 자 없이 잊혀져-이름없이-있다. 전자의 치료는 물리적/신체적 치료에 국한하나, 후자는 사회적 관계의 변화라는 치유가 하나 더 요청된다. 그것은 하혈증의 여인은 질병의 문제만이 아니라 불결, 고립, 거부라는 인격적이고 사회적인 낙인이 더 추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사회가 거리를 두었던 자가 예수와 접촉함으로 기존의 권위와 특권에 대한 사회적 경계선이 무너진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스도는 주변으로 밀려난 자들 중 하나를 불러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eirenen=shalom=평화) 가라”고 말한 후에야 신앙의 딸에게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라고 말한다. 놀랍게도 신앙인이란 신분상의 특권이 여기서는 배제가 된다. 교회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주변부에서 유린당하고 있는 이들이 우선적으로 치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변인이 <불결, 고립, 거부>라는 사회적 격리에 의한 고통으로부터 평화를 얻고야 중심인이 치유된다. 먼저 저편/주변이 평화의 상태를 회복하고 나서야 이편/중심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다. 평화의 경험이 치유의 경험에 선행한다.


<인식과 실천의 확장으로서 건너편/맞은편>

“우리의 딸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신앙인으로서 나와 관계된 자의 죽어감/상처는 큰 고통을 동반한다. 그리스도는 이에 대해 관심을 갖고 길을 떠난다. 그런데 문제는 그리스도는 가던 길을 딴 일로 지체한다. 그리고 죽은 딸에 대해 ‘울며 불며 떠드는’(5,38) 중심과 관련된 이들에 대해 꾸짖고 ‘왜 떠들며 울고 있느냐?’고 하시고 죽은 것이 아니라 잠자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주변부의 딸을 치유-삶을 샬롬화/평화화-하고 나서 그리스도는 신앙의 딸-교회-에게 ‘달리다굼’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의 행동과 그 메시지는 참으로 교회가 거룩한 공공성(sacra publicus)의 보증인과 수호자됨 대한 믿음을 지닌 우리들을 당황스럽게 만든다.

그동안 우리의 목회는 출애굽기의 바로의 ‘곡식을 저장해 둘 도성 비돔과 라므세스’(1:11)와는 형태는 다르지만 결과적으로는 자기 방어를 굳게하기 위해 세워진 도성/요새를 건설해 온 것은 아닌가? 세상의 풍조와 흐름에 위기를 느끼고 신앙의 강화를 위한 더 굳센 제도와 조직 그리고 영성훈련 이름하의 도성/요새를 건립하고, 그리스도가 누구인가에 대한 개념적·교리적 가르침(기독론설명)에 치중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반성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길을 가는’ 그리스도-실천의 모습을 거의 잃어버려 소통의 능력을 상실함으로써 예상외로 ‘죽어가고 있는’ 상황은 아닌가 염려가 된다.


광야로 순례하는 하나님의 백성(출애굽사건), 길을 가는 그리스도(그리스도사건)이 보여주는, 세상에서의 고통에 대한 관심과 세상에서 상처받고 피흘리는 자에 대한 기독자의 사역을 위해 성문을 열고(“그러므로 우리도 영문 밖에 계신 그분께 나아가서...히13:12) ‘저편’의 더러움, 무기력, 고통을 감싸는 문제에 고민을 제기한다. 야이로의 딸(교회)이 죽어가는 긴박한 상황을 아심에도 불구하고 그는 길 위에서 세상의 이름없는 여인의 상처문제로 지체하신 그리스도, 죽은 딸을 보고 울며 아우성치는 사람들(신자들)에 대해 ‘왜 떠들며 울고 있느냐?’고 도전하시는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어떤 도전을 주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성서공동연구 질문


1. 본문을 다른 번역으로 읽고 다가오는 구절에 대해 잠시 묵상하자. 말씀을 읽는 것을 넘어 말씀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게 하자. 그리고 느낀 점을 서로 이야기 해 보자.



2. ‘죽어가고 있는 (야이로 회당장의) 딸’과 ‘하혈증을 앓고 있는 여인’의 차이는 무엇이며,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가?



3. ‘하혈증을 앓고 있는 여인’이 그리스도의 옷에 손을 대는(그리스도와의 접촉) 기회를 우리는 어떻게 만들 수 있는가? 접촉한다는 의미는 무엇이고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4. 죽은 야이로 회당장의 딸을 향해 그리스도께서 그 아이의 손을 잡고 달리다 굼(소녀야 일어나라)고 말씀하신다. 나와 교회는 어떤 죽음(혹은 잠)-심리적, 사회적, 영적으로-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며, ‘달리다 굼’이 나와 교회에 어떤 의미(혹은 충격)를 주는가?




성서공동연구III: 평화목회의 전망과 도구


성서본문: 요 13: 1-11, 31-35, 14:27-31



<건너감으로서의 유월절 식사>


본문에서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함께 한 시간이 유월절(“pass-over")이며 아버지께서로 가실 때(13:1)로 보도한다. 제자들과의 공동식사는 이 두 개의 ‘건너감’-유월절과 아버지께로 돌아감-이 중첩되어 의미를 상호강화한다. 보통의 유목민식사와는 다른 유월절 식사는 회중 전체가 참여하는 공동식사로서 서로를 하나된 공동체로 묶어주는 기능을 하며, 임박한 출발을 준비하도록 하는 상징이 된다. 이 공동식사를 통해 옛 땅(이집트)으로부터 하나님의 약속의 땅으로 ‘건너감’을 준비시킨다. 이 공동식사는 이집트제국의 불의·불평등의 경제와 억압과 착취의 구조로부터 제공된 빵이 아니라 새로운 평등공동체로서 종말론적 기대를 가지고 새로운 출발을 하는 전환점을 확인해 준다.


유월절 식사는 하나님의 초월과 약속을 실제 역사의 상황속에서 경험하는 교제의 행위였으며, 이를 통해 불평등, 억압, 거짓 가치의 사회구조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공동체로서의 하나님 백성이 되는 것에 대한 자각과 약속의 땅을 향한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는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유월절 식사의 강조점은 ‘이집트로부터의 탈출(exodus from)’보다는  ‘약속의 땅을 향한 탈출(exodus for)'에 있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날에 제자들과 함께 하신 공동식사는 이러한 약속의 땅을 향한 탈출공동체로서 새로운 이스라엘의 출발을 확증하신다. 그 예로 식탁에서 주님은 이제 종이 아니라 벗으로 부르겠다고 말씀하신다(15:14). 예수께서 식탁교제를 통해 보여주시는 바실레이아(basileia; 하나님의 통치)는 새로운 형태의 권력(사랑의 힘)과 통치(섬김)의 문제를 제기하며, 바실레이아는 어느 장소가 아닌 하나의 과정이자 삶의 방식임을 제시한다.


<바실레이아의 실현으로서 평화목회>

주님의 당혹스러운 부재 앞에서 그리고 그 결과로 인해 초래되는 방향감각의 상실과 혼란이 예상되는 상황앞에서 예수의 고별로서 공동식사는 지금까지의  예수의 삶과 말씀을 집약하고 심화시킨다. 일일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고, 사랑의 새 계명을 주셨으며, 협조자 성령과 평화를 주실 것을 말씀하셨다. 예수의 하나님 지배(바실레이아)는 전적으로 그 영역이 그의 인격에로만 귀결되는 것이 아니다. 바실레이아는 굶주리고 격리된 ‘몸’의 차원에서 시작했으며 치유와 식사를 통해 ‘함께 나누는 공동체’로, 즉 영적 자원과 물질적 자원을 모든 사람이 차별과 구분 또는 계층 구조없이 이용할 수 있는 섬김공동체로 나타났다. 따라서 바실레이아는 생활방식으로 실현되고 몸소 실천함으로서만 그곳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겉옷을 벗고 무릎을 꿇음’으로서 노예가 하는 시중을 통해 수직적인 차별(무릎을 꿇음/바닥에로의 접근)과 수평적인 분열(겉옷을 벗음/씻고 닦아줌)을 넘어서서 새로운 인간관과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비전을 구체화한다. 양식의 나눔과 상호 교제의 생활 방식을 통해 예수께서는 ‘선포된 하나님 나라의 비유’가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준 하나님 나라의 비유’를 보여주신다. 바실레이아의 특성인 양식의 나눔과 상호 교제는 식탁에 초대된 자들로 하여금 강력한 윤리적 응답을 요청한다(‘너희도 그대로 하라고 본을 보여준 것이다.’-13:15). 이를 통해 장차 오실 메시야 때의 공동체 모습과 지금 이 세상에서 만들어져야 할 공동체의 모습이 동시에 계시된다.


식사는 인간관계를 시작하고 유지하는 기본적인 방법이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함께 무엇을 어떻게 먹느냐는 것은 곧 몸의 정치(the body politic)에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사회의 성격을 규정한다. 누가 포함되고 어떻게 대접받는가는 대접받는 자의 정체성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렇게 식사는 감정과 관계들을 상징화하고 사회적 신분과 권력을 매개하고 집단 정체성의 경계성을 나타내 보여주는 행위이다. 식탁위의 교제는 경제적인 차별, 사회적 계급체계, 그리고 정치적 차별을 가름케 해주는 지도가 된다. 예수의 식탁교제는 경제와 소유에 기초한 개인주의나 친척과 성에 기초한 집단주의를 넘어서는 공동체적 가족의 형성이라는 확대된 가족의 의미를 제공한다(누가 포함되는가). 그리고 축소된 형태의 새로운 이스라엘로서의 예수의 공동체는 상호호혜와 섬김이라는 대안적인 평등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어떻게 대접받는가).


기나긴 유대-로마 전쟁과 수많은 농민봉기의 와중속에서 스스로 메시야/왕이라고 자처하는 공개적인 반항운동들과는 달리, 예수의 은밀한 그리고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저항으로서 공동식사(table-fellowship)는 강자앞에 약자들의 근본적인 변혁운동을 지시한다. 식탁을 통해 말씀하신 사랑(13:31-35) 평화((14:27-31) 그리고 일치(17장)는 바실레이아를 사는 제자들의 근본적인 생활방식이다. 이것이 기존의 혈연공동체와 정치공동체를 넘어서는 대안공동체의 모습이다. 우리는 다른 실재를 위하여, 다른 질서를 향하여 먹고 마신다. 식탁에서의 먹고 마심은 하늘을 모시고(侍天) 하늘을 기르는(養天) 문제뿐만 아니라 삶으로 표현하고(體天), 사회구조를 바꾸는(活天) 생활수련으로서 저항과 변혁으로서의 하나님나라운동(바실레이아)의 실천을 보여준다. 그 이유는 기존 질서와 구조가 함께 먹음과 교제를 불가능하게 하는 권력과 통치체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평화목회의 수단>

함께 먹고 마시기-샬롬의 이해는 주님의 식탁을 통해 심화된다. 식탁의 주인(호스트)이신 예수께서 우리 모두를 손님으로 초대한다. 손님으로서 우리는 나눔과 교제를 통해 생명과 기쁨을 경험하도록 초대되었다. 그러므로 식탁교제는 샬롬작업과 연관된다. 성만찬은 노예, 좌절, 억압 그리고 분열에 대항한다. 그것은 지배와 억압의 바로의 권력과 통치하에서 얻어먹는 고기와 떡과는 차원이 다르다. 성만찬은 떡과 포도주의 변화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변화이자 공동체의 변화에 그 의미가 있다. 지배에서 섬김으로, 노예에서 하나님의 자녀/벗으로의 변화가 그것이다. 함께 먹고 마심은 새로운 관계맺음으로서의 삶의 변화를 요청한다.


수건과 대야-가난한 자의 일상적인 삶의 도구로서 수건과 대야는 주님의 샬롬목회의 수단이다. 우선적으로 이것은 상식적인 의미에서 어떤 권력과 통치의 상징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수건과 대야는 권력과 통치로서의 힘이 아니라 감싸줌과 씻어줌이라는 돌봄과 연결으로서의 힘(power as care/connection)을 상징한다. 이는 또한 서민의 땀과 노동이 있는 이 세계와 연결을 상징한다. 수건과 대야는 세계의 고통과 상처를 향한 도구이다. 그것은 간디의 물레처럼 일반 서민들과 함께 하는 삶과 일상에서의 변혁과 연관되어 있다. 유능성, 효율성으로 대표되는 엘리트 지배문화와는 달리 수건과 대야는 아무것도 아닌 자들의 나약성과 소박함을 감싸는 섬김의 문화를 대표한다.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심(13:4)으로써 예수께서는 신성의 매개자이자 스승으로서 존경의 외적 상징(옷)을 벗어던지고 섬김의 사람(수건을 허리에 두르심)으로 낮추신다. 무릎꿇음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다르게 나타내신다. 신성(神性)의 의미를 존재론적인 입장에서 밀의적(esoteric)이고 마술적인 저위의 세계의 현현이 아니라 윤리적인 입장에서 계시한다(“하나님 나라는 성령을 통해 누리는 정의, 평화, 그리고 기쁨이다”-롬14:17). 즉 무릎꿇음에서 하늘과의 관계가 형성되고, 초월은 타자에로의 섬김을 통해 드러낸다.


에클레시아는 바실레이아의 실현에서 그 존재의미가 있다. 선교란 단지 신앙과 희망을 확장하는 것만이 아니라 생활을 역사적으로 변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세상에서 관계의 재창조는 하나님 나라운동을 지시한다(“땅에서 매면...하늘에서도 매여 있을 것이요....”마16:19).  ‘창조적 제자직’은 이미 주어진 것의 종교적인 뒷받침이 아니라 만들어야 할 질서와 그 가능성과 미래성의 역사적 구조를 인식하고 헌신을 요구한다. “나는...아버지께서 분부하신 대로 실천한다는 것을 세상에 알려야 하겠다. 자 일어나 가자.” 요14:31)


성서공동연구 질문


1. 본문을 다른 번역으로 읽고 다가오는 구절에 대해 잠시 묵상하자. 말씀을 읽는 것을 넘어 말씀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게 하자. 그리고 느낀 점을 서로 이야기 해 보자.



2. 초대교회의 목회는 예배와 성만찬(공동식사)가 중심이었으나 오늘날 공동식사에 대한 신학적 실천적 부분은 많이 사라져 버렸다. 오늘날 우리의 목회현장에서 초대교회의 성만찬적인 공동체를 회복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성만찬이 가지고 있는 영적/사회적/정치적 의미)



3. ‘겉옷을 벗음’과 ‘수건과 대야’가 평화목회의 방식과 도구(수단)에 대한 이해에 실마리를 제공한다면 이를 우린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4. 발을 씻지 않으면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된다(13:8)고 하신 주님께서 내가 한 일을 그대로 실천하라고 하신다. 우리의 목회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가? 내년도에 이를 실천하기 위한 구상이 있다면 발표해 보자(개인과 교회차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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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용박사 | ecopeace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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