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
글 수 25
 

<<실존적 궁지와 평화>>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 20:19-21)


1)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궁지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평화는 단순한 어떤 존재의 상태만이 아니다. 사는 방식과도 관련되어진다. 요한은 예수를 믿음이라는 대상적 지향으로서의 신앙문제가 아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성육신의 진리가 제기하듯 예수를 내면화하여 그 생활방식을 사는 신앙의 문제를 제기한다. 이는 개념적이고 교리적인 이해를 넘어서서 생수의 근원속으로 돌파해 들어가 생명을 사는 존재로서 기독자의 생의 모습을 요한은 제시한다. 그런데 외면적인 신앙의 껍질을 깨고, 내적인 생명의 취득을 위한 돌파는 어떻게 일어나며, 그러한 갱생의 시작점은 어디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뜻밖에도 요한은 초월, 순수경험, 빛에로의 일치에서가 아니라 추락과 무거움, 상실과 소진함의 경험속에서 새로운 돌파의 경지를 맛볼 수 있다고 전한다.


생명을 온전하지 못하게 하는 세 요소는 어둠, 두려움, 그리고 막힘이다. 평화활동가의 삶을 지치게 만들고, 중간에서 의지를 꺾고, 더 이상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것도 다름 아닌 어둠, 두려움 그리고 막힘인 것이다. 성서 본문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잃고 나서 제자들에게 다가온 실존적 고뇌가 바로 이 세 가지, 저녁(어둠), 두려움 그리고 문이 닫힘이라는 극한 상황이었다고 전해 준다.(요20,19) 예수라는 한 인간이 경험한 신체적인 십자가 형의 경험은 이제 그의 제자들속에 예기치 못한 실존적인 후폭풍을 만들어내면서 존재론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십자가형의 경험-어둠, 두려움, 막힘-을 각자에게 실제적으로 체험하도록 하고 있다. 아무도 전에는 대면해보지 못한 이 실존적 고뇌의 순간이 이제는 끝없는 심원의 깊이에로 무겁게 각자를 빨아들여 침몰시키고 있는 것이다.


어둠은 방향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단순한 신체적 폭력으로부터 시작해서 구조적 폭력, 문화적 폭력에 이르기까지 폭력은 그 범위가 넓고, 심원하고, 중층적인 복잡성을 내포하고 있어서 어떻게 문제를 풀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은 답답함과 무거움을 경험하게 된다. 평택문제는 단순히 농민과 국방부의 싸움이 아니다. 거기에는 개인에 대한 국가의 우위라는 국가폭력, 제국주의의 잔재, 농민이라는 사회적 약자를 희생양으로 삼는 엘리트의 개발논리, 군사주의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어느 하나의 뾰족한 해결책으로 문제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다. 표면의 폭력현상 뒤에는 그물망처럼 얽히고설킨 문제가 클로즈업된다.


두려움은 복잡한 현안을 대면하여 나타나는 개인의 무능력감이다. 그것은 파괴와 분열을 일으키는 대상을 혐오하는 자신이 혐오하는 대상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깨달음에서 오는 자신에 대한 자신감의 상실에서 찾아온다. 분노의 대상과 자기 혐오가 충돌하면서 인간성과 안전감에 대한 신뢰가 동요를 일으키게 된다. 대안사회를 꿈꾸고 저항의 수행을 모색할 수 록, 이익과 경쟁의 자본주의 논리가 얼마나 철저하게 우리의 관계와 존재를 얽어매고 있는지를 몸서리치게 경험할 때, 그 대안실험의 밑바닥에는 아직도 자기 극복대신에 생존의 논리가 입을 벌리며 자기를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응시할 때, 우리는 자신도 어쩔 수 없는 한 사회적 개인이라는 현실에 무너져 저항마저 해제되는 착잡한 쓰라림을 경험하고 만다. 문제는 지배와 분리의 대상이 아니다. 무력감속에서 상처를 바라보고 있는 자신이 존재자이기 보다 사물(a thing)로서 세상의 중력의 지배속에 갇혀있다는 확인, 자기 밖의 악과 더불어 자기 안의 악이 공존한다는 두려움이 전의(戰意)를 상실하게 만든다.     


막힘은 단순히 소통되지 않는 타자(Others)의 벽을 느끼는 것만이 아니다. 열심히 했으나 결과가 파급되지 않는 자기 귀결적인 결과를 가져 오게 되는 노력에 대한 허망함의 경험을 말한다. 체바퀴속의 열심히 달리는 다람쥐처럼 열심의 결과는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한 방울의 물방울이 세숫대야의 물속에 던져져 사라져 버림처럼, 기존의 체제와 시스템 그리고 그 수많은 군중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로 아쉬움 없이 그 물결그대로 흘러가는 것을 보게 된다. 하루 2달러 미만의 수입으로 사는 25억의 인구가 존재하고, 굶주림으로 사망하는 5세 이하의 어린이가 하루에 수십만 명이라는 데이터가, 우리의 과식과 과소비문화가 지구온난화와 환경파괴의 주범이며 한국의 상위 10%와 하위 10%간의 소득격차가 50배라는 사실이  우리가 지금 사는 생활양식에 아무런 불편과 문제의식을 가져오지 않는다. 이렇게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않고 있는 이 소름끼치는 귀먹고 느끼는 심장 없는 세상의 꽉 막힘이 무겁게 내리누르고 있는 데도 탈출구는 보이지 않는다. 


2) 고통(痛)에서 통함(通)으로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어둠, 공포, 그리고 막힘은 평화일꾼을 탈진시키고 추락과 절망에로 몰아넣는 무거운 블랙홀과 같다. 그러나 신앙인으로서 활동가에게는 블랙홀을 통해 새로운 별이 탄생하듯이, 어둠, 공포, 막힘은 새로운 초월을 불러낸다. 기독교 평화활동가는 이 어둠, 공포, 막힘이 가져오는 탈진과 메마름 그리고 자신의 능력에 대한 깊은 무력감을 통해 자아의 에고가 깨어져 나가면서 초월의 실재를 경험하게 된다. 痛이 通으로 변환되는 것이다.


이러한 초월은 위로의 상승을 통해 오는 것이 아니다. 혹은 신적 실재의 선제적 활동(initiating providence)에 대한 신앙의 응답이라는 전통적인 신앙수행의 유효함을 얘기하자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떠돌이 계층인 하비루들이 벽돌공장에서 고역으로 신음하다가 울부짖음을 통해 신을 불러내왔듯이, 어둠, 공포, 그리고 막힘의 중층적인 궁지의 경험은 실존적으로 겉껍질의 자기 존재의 심연에 자리잡은 궁극적 존재이자 힘(틸리히의 표현)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이것이 성서가 말한 바인 것이다. “저녁 때에...두려워 하여..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이렇게 어둠, 두려움, 막힘이 초월을 다가오게 하는 역설의 힘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평화활동가의 명상과 수행의 장소(locus)는 전통적인 공간으로서의 교회라는 건물내가 아니라 일상 세상에서 평화활동을 통해 경험하는 경지(dimension)-어둠, 두려움, 막힘-에 대한 새로운 각성을 통해 신을 만나게 된다. 어둠, 두려움, 막힘이 거룩함의 현존의 영역이 됨으로 평화수행은 활동으로서의 기도이자 예배가 된다.   


3. 보상을 얻음이 아닌 평화의 존재화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화활동가는 대중으로부터 인기나 주목을 받지 못한다. 이는 철저히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을 위해 일하는 자는 오히려 일반인들이 다 쉬워하는 것에 대해서도 낯설고 숙련되어 있지 않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하는 활동이 보상이 있어서 지금 하고있는 평화수행이 세상을 확 바꿀 것이라는 낭만적 희망과 그에 대한 미래를 꿈꾸는 정신적 소유도 철저히 놓아버려야만 한다.


내가 ‘그들’을 바꾸겠다는 노력의 보상심리도 없이, 단지 거짓되고 천박한 것에 대한 저항의 수행(practice of resistance)을 통해, 위로를 기대하지 않고 단지 진리/신을 응시함으로 껍질없는 알짬의 본질 관계로 들어선다. 어둠, 두려움, 그리고 막힘의 한계상황 속에서 자신이 누구이어야 하는가와 무엇을 위한 삶이냐에 대한 궁극물음이 철저해져 오면서 자신을 지탱해온 희망과 은총에 대한 기대마저 사라진 절대의 무화됨 속에서 새로운 변용이 일어난다. 이것이 바로 초월적인 평화이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을지어다.”


기름 짜는 기계 속에 깨를 넣고 압력과 부스러뜨림으로 새로운 변용, 즉 기름이 짜지듯이 평화활동가가 외적으로 대면하게 되는 수많은 고리의 폭력과 갈등상황 그리고 내적인 탈진은 자신 속에 남아있던 세상의 중력을 느끼게 하던 그 어떤 희망, 기대, 성취를 부스러뜨림으로 인해 새로운 열림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한때, 예수를 따라다니며 자신의 생애가 전과 다른 그 어떤 숭고한 것, 새로운 운동을 일으키는 주인공이 된다는 자부심이 예수의 십자가형으로 철저하게 무너지고, 이제야 비로소 어둠, 두려움, 막힘의 실존적 한계경험을 통해, ‘당위(ought)'의 부름에 깃발을 들었던 자신이 이제는 ‘생존’의 한계점에 서서 ‘존재’의 궁극문제에 부닥치게 되는 것이다. 무와 배추가 소금에 절여지듯이 자신 안에 남아있던 거짓된 허영과 기대의 오만함(뻣뻣함)이 어느 순간에 탈진을 통해 철저한 겸비(radical humility)의 수행으로 탈바꿈하여 궁극적인 수용(ultimate acceptance)이 일어난다.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평강이 있을지어다.” 


으깨지고 키질하여 정신적인 모든 기대와 희망마저 박탈당하고 심연의 기저에 닿는 철저한 겸비의 수행을 통해, 존재자체가 절대적인 문제로 다가오게 되었을 때, 놀랍게도 사라져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존재자체로부터 다가오는 궁극의 실존적인 생명력을 얻게 된다. 이것이 다투지 않고(爭) 존재를 통해 열리는 화(和)의 경지 곧 평화의 존재력(power-into)이다. 이 평화(和의 존재력)는 자신이 벗기워지고, 탈진하여 철저한 무의 경지 속에 들어감을 통해 죽지 않고 남아있는 가장 근원적인 알짬에 의해 자신의 존재가 터잡고 있다는 깨달음 속에서 솟구치게 된다.


4. 또 다른 출발: 생존에서  평화의 실존으로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당위’가 존재속으로 용해됨으로서 쓰라림, 굴욕, 증오, 고뇌, 혐오, 박탈, 탈진, 갈등의 경험은 새로운 실존경험으로 나타난다. 평화의 존재력은 자신의 내적인 부정의 경험과 외적인 부정의 경험들인 이들 쓰라림, 혐오, 탈진 등의 경험이 오히려 생명력을 키워내게 된다. 이는 세상의 중력의 무게를 변형시키는 힘으로부터 나오게 된다. 뿌리뽑힘으로 새롭게 뿌리박음이 일어나면서 에너지가 탄생한다.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제자들이 기뻐하더라.”


평화의 존재력은 그러나 세상의 중력의 무게를 벗어버린 저 위의 초월의 경험은 아니다. 언제나 골고다의 경험(손과 옆구리에 못과 창 자국이 있음)을 철저화하고, 그 현장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닌, 그 골고다의 경험에 대한 용해와 승화의 경험을 통해 얻어지는 변혁적 힘(transforming power)로서의 기쁨이다. 자신의 중심(허리)에 창에 찔리움과 하는 일(손)에 못의 박힘이라는 극도의 아픔의 현실을 내면화하고 수용함으로서 신음이 노래가 되고, 痛이 通을 불러내며, 탈진하여 상처받은 것이 기쁨을 잉태하게 된다. 십자가가 부활의 능력이 되는 것이다. 거기서 역사적 예수가 아닌 새 창조의 근원자인 주(Lord)를 보고 활력의 기쁨을 얻는다. 생존을 넘어 기쁨이 흘러나오는 충만의 경험을 하게 된다. 이것이 부활신앙이다. 이렇게 부활의 경험은 역사 어느 때의 한 인간에게 발생한 신체적 소생의 의미를 넘어서서 지금 여기에 현재하는 평화의 존재력이다.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이 평화의 존재력속에서 새로운 ‘당위’가 체득된다. 깨달음이 속세를 등지는 것이 아니라 속세속으로 들어가는 존재력(power-into)을 얻게된다. 이는 고통과 기쁨이, 초월과 세상이, 명상과 행동, 내적평화와 세상평화가 각기 별개의 다른 영역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즉(相卽, inter-becoming)하고 융통(融通, inter-penetrating)함에 평화의 인식론은 근거하고 있기에 그렇다. 그러기에 세상과 세상의 중력속으로 들어감은 저절로 일어나고 자연스러운 행위가 된다. 또한 평화는 결과가 아니고 과정이기에 새로운 과정의 시작은 평화의 존재력을 씨앗단계에서 발아시켜 성장에로 심화시킨다.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세상에로의 보냄’이라는 당위의 재취득은 나의 얻음과 누림을 남에게 나누어준다는 윤리적 민감성에 의한 문제로 귀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보내짐(당위)은 나를 보낸 자와의 관계의 정체성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보내심을 받은 자로 나를 인식함은 나를 보낸 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철저한 관계인식속에서 이루어지며, 이는 타자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포함한다. 이는 곧 나를 보내는 자가 아바, 아버지이고, 나는 그의 자녀이자, 내가 대하는 타자도 같은 신분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존재론적인 상호관계성에 대한 인식을 통해 아버지의 일은 나의 일이 되고 나의 너의 문제에 대한 관심은 아버지의 자기 자녀에 대한 관심의 일치속에서 한 가족(kinship)된 자들의 자기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요한이 제기하였듯이 “아버지께서 내안에 계셔서 자신의 일을 하시는”(요14:10하) 것이 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렇게 어둠, 두려움, 가둠이 신앙인에게는 자기를 초극하고 평화의 존재력을 재 회복하게 된다. 이는 자신의 궁극적 존재기반이 성취와 얻음의 윤리적 당위가 아니라 인격적인 신적 현존속에 뿌리박혀 있음을 인식하게 됨으로 변혁된 생의 모습인 것이다. 나의 기원, 나의 생의 과정, 그리고 나의 끝이 신적현존에 근거 지워져 있다는 이 인식은 우리가 경험하는 실존적 한계상황의 무게를 초극하고 평화라는 존재력을 얻게 된다. 그럴 때, 생의 갈등(못과 창)이 가져오는 찌르는 듯한 고통은 기쁨의 원천으로 변혁되어지고, 나는 보냄을 받은 자로서 해야 할 일에 대한 순전한 헌신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실존적 궁지는 더 이상 견딜수 없는 무신성(無神性)의 한계상황이 아니라, 나를 보내는 자의 현존이 드러나는 곳-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이며, 내적 변혁이 일어나 평화의 존재력을 회복하는 장-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으로 바뀌게 된다.  -끝-

(2006.10.3)

엮인글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영혼이 있는 곳에 하느님도 계시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평화세상 2014-06-29 2706
24 평화성서학세미나로의 초대 2. 3/7-10 평화세상 2017-03-02 435
23 비폭력 실천, 평화영성: 새로운 변화의 기원과 새로운 실재 관리자 2013-03-06 2071
22 비폭력의 눈으로 성서읽기-몰아쳐오는 세상 파고에서 무서움을 넘어서기 메인즈 2013-02-17 1923
21 한처음에 시작이라는 꿈이 있었다(기독교 비폭펵실천가/화해중재자의 성서묵상) 메인즈 2013-01-19 1914
20 복음의 본질은 화해사역이다 메인즈 2010-12-16 2028
19 바울과 평화 메인즈 2010-09-29 1974
18 사도 바울의 평화에 관한 구절들 메인즈 2010-09-29 1972
17 마태 제자직의 근본 수행으로서 평화 file 관리자 2010-09-07 1811
16 폭력에 대한 예수의 비폭력 저항-샬롬 통치의 현실성의 수행 메인즈 2010-07-11 2136
15 기독교인을 위한 비폭력 영성과 실천 -맞서 싸운 상대가 천사로 바꿔지다 메인즈 2010-03-09 2009
14 평화와 자유 (성서공동연구자료) 메인즈 2007-03-19 1885
13 평화와 목회 (성서공동연구 자료) 메인즈 2006-12-07 1935
12 평화관련 공동성서연구모임 안내 메인즈 2006-11-29 1759
» 평화활동가를 위한 성서명상-실존적 궁지와 평화 메인즈 2006-10-09 1980
10 평화와 생명밥상: 물과 공기 <공동성서연구에로 초대> 메인즈 2006-07-09 2076
9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한 신학적 고찰 메인즈 2006-07-03 2065
8 공중의 새와 들꽃을 보라! -기독교 생명평화 일꾼의 길- 메인즈 2006-06-22 2074
7 마가의 폭력구조와 현대 평화학의 적용 메인즈 2006-04-12 1876
6 마가복음내 공간구조에 얽힌 갈등과 평화 메인즈 2006-04-12 1992
박성용박사 | ecopeace21@hanmail.net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