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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교육학 및 SEL

글 수 108

(비폭력 실천가/기독교 화해사역자의 눈으로 보는 성서)

윤리적 응과응보를 변혁시키려는 신의 선제적 의지의 원초성

카인은 고개를 떨어뜨리고 몹시 화가 나 있었다. 야훼께서 이것을 보시고 카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왜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느냐? 네가 잘 했다면 왜 얼굴을 쳐들지 못하느냐?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잘못 먹었다면 죄가 네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릴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그 죄에 굴레를 씌워야 한다.”

오늘 이 땅에서 저를 아주 쫓아내시니, 저는 이제 하느님을 뵙지 못하고 세상을 돌아 다니게 되었습니다. 저를 만나는 사람마다 저를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 “그렇게 못하도록 하여 주마. 카인을 죽이는 사람에게는 내가 곱 갑절로 벌을 내리리라.” (4:6-7;14-15)

  

삶의 질서와 활력의 기초로서 관계

인생의 가장 큰 떨림과 활력 그리고 기대감 넘치는 시작은 관계 곧 연결하기로부터 비롯된다. 우정이나 사랑이 싹트고 그 시작을 알리는 것은 관계맺음 곧 쌍방의 연결에서 온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세계의 삶의 원리이기 전에 자연 존재의 생명을 증식하고 번성하는 근본 원리이기도 하다. 모든 세포, 유기체, , 자연물은 자신의 건강과 생존력을 얻는 방식은 자기 개방과 타 세포, 유기체, , 자연물과의 정보교류와 순환을 통해 곧 관계맺음과 연결을 통해 이루어진다. 자기 개방과 연결이라는 두 요소로서 관계맺음이 어려워질 때 질병, 쇠약, 죽음이 찾아온다. 그 단적인 예가 바로 암이다. 타 세포와의 관계없이 자기 증식이 일어나는 대표적인 사례가 그것인 것이다.

비폭력 실천가로서 혹은 화해사역자로서 근본적인 태도와 물음은 갈등 당사자들에게서 누가 더 정당하고 어떤 해법, 조언을 제시하는가보다는 어떤 관계가 깨어졌는가, 관계의 역동성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에 초점을 두고 쌍방의 대화를 인도한다. 크리슈나무르티의 말처럼 궁극적인 것은 관계를 통한 변화라는 말은 비폭력 실천가와 화해사역자들이 유념하는 경구이다. 왜냐하면 모든 변화는 대립과 논쟁으로 등을 돌린 당사자들이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서로의 눈을 응시하는 연결하기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처음을 여는 것은 관계이다. 태초에 말씀은 관계를 불러내어 실재(reality)를 만들었다. 관계이전의 상태는 혼돈(chaos)이었고 관계가 있음으로 정체성과 의미라는 질서(cosmos)가 있게 되었다고 성서는 증언한다. 빛과 어둠, 하늘과 바다, 물고기와 나무, 초목과 동물들이 자기 공간과 관계맺음을 통해 풍성한 삶으로 초대된다. 이것이 삶의 근본적 토대이다. 그러한 관계가 온전히 현존함으로 있을 때 우리는 에덴을 맞이한다. 이것이 타락과 죄가 없는 원형의 상태이다. 타락과 죄는 서로 연결되지 않음, 관계없음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윤리적 응보형 삶의 비극

인간이 에덴으로부터 쫓겨났다는 것은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세상 삶의 실재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 아님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상상에서만 있는 잃어버린 고향이 아니다. 우리가 에덴을 기억하는 것은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고 정상적이라생각하고 있는 지금의 현실에 대한 진지한 도전들을 현재화시키게 만든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너는 나에게 있어 어떤 의미인가?’ ‘타존재와 직면하여 나는 어떤 행위를 선택해야 하는가?’ ‘우리 각자가 경험하는 두려움, 모호함, 상처에로의 노출은 어떻게 극복될 수 있는가?’ ‘내가 좌절하지 않고 일어서서 살아봐야지 하는 마음은 어디로부터 올 수 있는가?’... 이 모든 질문의 핵심에는 관계(inter-related-ness)에 대한 근본인식의 문제가 놓여있다.

네가 만일 마음을 잘못 먹었다면 죄가 네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릴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그 죄에 굴레를 씌워야 한다.

많은 신학자들과 종교학자들은 다툼과 전쟁의 기원에 대해 가인과 아벨이 신에 대한 예배의 차이로 인해 다툼이 벌어지고 있는 창세기 4장을 즐겨 인용하여 신에게 예배드리는 것 차이가 그런 다툼과 전쟁을 일으켰다는 그럴듯한 설명들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여기서 파생하는 이론들이 신의 저주와 강제 그리고 징벌이라는 응보형 처벌의 논리들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런 논리에 근거하여 신의 이름으로, 올바른 정통의 이름으로 -“신이 그러하므로 우리도 00하는 게 가능하다”-이제는 한 개인 혹은 한 그룹은 타자, 타 그룹을 처단하고 억압하고 배제하는 행동을 정당화하고 신념화한다.

비폭력 실천가이자 화해사역자로서 필자가 읽는 본문은 전연 다른 두 가지 중요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준다. 첫째는 이미 가인 개인의 내면에서 일어난 관계의 단절이다: 네가 만일 마음을 잘못 먹었다면... 마음에서 일어난 관계의 단절, 연결의 끊어짐은 필연적이고 자연스런 결과를 초래한다: ...죄가 네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릴 것이다. 죄는 그러한 관계의 단절, 연결의 끊어짐에서 발생하는 필연적인 결과이다. 그것은 자기충족예언의 법칙처럼 자동적으로 오게 되는 예측된 결과일 뿐이다. 이것은 기독교 윤리가들이 말하는 것처럼 어둠은 그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빛의 단지 결여일 뿐이라고 한 것과 연결된다. 빛이 없으면 당연스런 어둠의 결과가 오게 된다. 관계의 맺음이 없으면 그 당연스런 결과로서 죄는 필연적인 것이다.

둘째로 죄에 대한 신의 태도가 징벌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그 죄에 굴레를 씌워야 한다. 신의 태도와 입장이 죄에 대해 징벌에 있지 않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처럼 쉽게 넘어갈 수도 있지만 지금의 교리에 철저히 물들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당혹스럽고 근본적인 지진을 경험하게 하는 폭탄적인 말처럼 들린다. 왜냐하면 이 징벌론을 전제하여 기독론(대속자 그리스도)이 정교하게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많은 크고 작은 십자군 전쟁이 역사속에서 국가간에 공동체간에, 관계속에서 나와 타자 사이에, 그리고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이 응보형 징벌론으로 그동안 함께 있었던 공동체 구성원조차, 한 가족의 형제자매까지도 처벌하고 배제하는 끔찍한 일들이 정당하고 자연스러운 것처럼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신의 입장은 다르다. 징벌이 아니라 그 죄의 굴레를 씌우는선택을 상대가 하도록 설득하고 권면하고 있다.


관계의 단절에 의한 폭력 각본의 사회화

모든 전쟁, 폭력 그리고 갈등의 충돌은 -조심스러운 것은 갈등은 문제가 아니다. 갈등에 대응하는 방식으로서 충돌이 문제가 된다- 신의 응보적 행동에 대한 확인되지 않은 신념에 의해 그 정당성을 부여받는다. 그리고 그 정당성의 근본토대로서 신의 죄에 대한 응보형 태도는 의심스럽다는 게 나의 주장이라면 도대체 그 응보적 행동은 어디에서 기원하는 것일까라는 질문이 남는다. 신으로부터 기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나의 주장은 어디에 그 근거를 갖고 있으며 그렇다면 죄에 대한 신의 근본적 태도는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생기게 된다.

저를 만나는 사람마다 저를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

한 때 적지 않은 기간 동안 도대체 성서는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고 가인과 아벨을 낳게 했는데 이들 외에 저를 만나는 사람들은 어디서 기원했는가라는 농담석인 질문에 주석가들이 고민해온 적이 있었다. 필자가 설명하고 싶은 것은 다른 의미에 대한 이해이다. 그것은 이 구절이 관계의 단절이 가져오는 폭력의 각본의 보편성과 그 작동에 대한 근본적인 패턴에 대한 성찰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존 하워드 요더는 어린양의 전쟁이란 책에서 이 구절을 폭력에 대한 원시적 정의(定義)”로 규정하였다.

관계의 분리로서 카인의 행동은 보편적 원리로서 작동하며 그러한 패턴을 유발하기에 그러한 동질적 경험(‘저를 만나는 사람마다’)은 동일한 행동패턴(‘저를 죽이려 할 것’)을 가져온다. 분리된 정체성을 지닌 라는 에고는 집단과 공동체에서 그리고 국가간에 죽임의 생활양식을 끊임없이 창조한다. 이러한 폭력의 각본에 의해 응보형 행위는 도덕적으로 정당화되고, 정치적으로 실용화되며, 법적으로 합법성을 얻으며, 종교적으로 신념화되어 우리의 삶과 관계속에서 규범화되고 사회화되어 스스로 작동하게 되어진다. 그리고 우리는 사회화되고 신념화된 폭력의 문화 전통에 의해 양육되면서 정상적으로 이것을 배우고 행동하는 기준이 된다.

처음엔 개인 내면에 시작된 마음을 잘못 먹은 것이 죄가 너를 노리는개인적 응보형 결과를 넘어 이제는 집단적으로 사회화되고 구조화된 폭력 각본은 저를 만나는 사람마다 저를 죽이려고하는 공동체와 사회에서 집단 유형과 사회문화로 발전시키고 악순환의 고리를 창출한다. 그래서 폭력의 신화는 -폭력에 맞서서 정당한폭력으로 해결하는 폭력 구원론- 그 사회와 문화 속에서 검증 없이 작동되게 된다. 그리고 국가안보의 이름으로 희생자들을 정당화하고 숭고화하며, 상대방 진영의 총 없는 민간인을 폭격하여 살해하는 것도 적의 형제, 동료이기 때문이라는 폭력의 정당화와 자기변호를 가능하게 한다. 왜냐하면 이제는 저를 죽이는것이 나의 안보와 복지를 강화하는 데 연결되기 때문이라는 논리를 의심 없이 심어주기 때문이다. 또한 무섭도록 가슴쓰리는 진실이지만, 희생자들도 의심 없이 이러한 정당화와 숭고화(sanctification)하는 방식에 의해 자기 위로와 어쩔 수 없는 받아들임으로 폭력의 희생에 대한 수용을 하게 된다.

 

신의 선제적 의지의 핵심

이렇게 개인의 마음을 잘못 먹음에 시작된 죄의 시작이 만나는 사람마다 서로 죽이는집단적 폭력성의 각본으로 사회화되고 구조화되는 것에 대해 우리는 어떤 대안적 태도를 취하고 이를 극복할 힘과 그 정당성은 어디서 얻을 것인가? 기독교 화해사역자로서 필자는 결국 신의 본성과 그분의 의지에 대한 통찰에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못하도록 하여 주마. 카인을 죽이는 사람에게는 내가 곱 갑절로 벌을 내리리라.

여기서는 잘못과 죄에 대한 신의 근본적인 태도를 알 수 있다. 나는 이를 신의 선제적 의지라 표현한다. 태초에 일어난 살인사건에 대해 신의 근본적인 의지를 알 수 있으며 이는 신의 구원사 그리고 그 후대의 기독교역사에 있어서 잘못과 범죄에 대해 신앙인으로 어떤 잣대에 의해 어떤 방식으로 대응할 것인지에 대한 예표이자 범례(archetype)로서 그리고 평가지침으로 삼아야 할 것이 바로 이 신의 선제적 의지이다. 그것은 바로 범죄자에 대한 죽임이 아니라 관계의 재설정과 복원이라는 것이 핵심이다.

우리는 앞서 네가 만일 마음을 잘못 먹었다면 죄가 네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릴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그 죄에 굴레를 씌워야 한다는 데서 마음의 잘못먹음이 신의 개입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연결의 끊어짐이 자기충족적 예언의 법칙으로서 자기 행동이 스스로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 지 명료한 설명을 하고 그러므로 스스로의 잘못된 죄의 행동에 굴레를 씌우라는 신의 촉구를 읽었다. 이것은 경고나 강요가 아닌 인간 스스로 자기 행동의 결과를 관찰하도록 하는 객관적 진술의 서술식 문장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제 죽이는 사람에게 곱절로 벌을 내리리라는 경고를 통해 살인자와 범죄자에 대해 인간 스스로 응보형 대응을 하지 못하게 하는 신의 선제적 의지가 강하게 표출되어 있다. 여기서 신이 요청하는 것은 신의 곱절로 내리는 벌의 심각성이 아니다. 요더는 이렇게 표현하였다: “야훼 자신은 복수에는 관심이 없다....그러나 중요하게 여겨지는 신적 발의(divine initiative)야훼가 보편적으로 가해지는 보복 행위에서 가인의 생명을 보호하려고 개입하신다는 것이다. 보호의 표시는 가인의 몸에 새겨진 표시이다.”

우리는 여기서 인간사에 있어서 신의 개입의 근본적 목적, 신의 계시의 근본적 목적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생명을 보호하고 관계를 복원하는 것이 그것이다. 신의 보편적인 선제적 의지는 악과 잘못을 뿌리 뽑고 제거함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이 선으로, 생명으로 전환되게(transforming) 하는 것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선과 생명으로의 관계의 회복이 바로 비폭력 실천가나 화해사역자가 갖는 근본적인 태도이다. (2013.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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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용박사 | ecopeace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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