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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민족음악가 윤이상 서거 10주년을 맞아 그와 한 길을 갔던 미국의 로광욱선생님이 생각나 로선생님에 대한 방문기를 수록한다. 이 글은 원래 미국에서 통일운동에 참여하면서 잠깐 발행한 <통일>지에 97년에 기고했던 글이다. 미주통일운동에 대한 약간의 소개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싣는다. - 2005. 11. 4.-

<<통일을 향한 열정을 안고 평생을 살아온 로광욱 선생님. 그는 겉으로는 매우 부드러운 성품을 지녔으면서도 안으로는 강인한 민족주의자의 길을 걸으며 분단이 주는 민족의 한을 숭고한 통일의지의 음악으로 승화시키고 있었다.>>


북미주에서 통일운동에 참여해 오신 분들의 이야기가 사라지기 전에 채록하여 미주통일운동사를 정리하고자 로광국 선생님을 찾아 뵙기로 하였다. 선생님에 대한 충분한 사전지식도 없었고 탐방인터뷰라는 경험조차 없었지만 뜻만 가지고 전종훈, 류선경 부부와 함께 일요일 오후에 워싱톤 DC로 향하였다.

우선적으로 떠오르는 궁금증은 일제시대부터 역사의 소용돌이를 헤치고 나오면서 혼자 버티고 살기도 힘들었던 시대에 통일운동이라는 또 하나의 과제를 안고 살았던 선배들은 어떤 성격들과 생활관을 갖고 있겠는가 하는 질문이었다. 서로 간에 안면은 이미 있었어도 개인적인 대화를 해보지 못한 나로서는 그가 통일운동에 어떤 굵은 역사적 발자취를 남겼겠는가하는 궁금증보다는 우선적으로 그의 인간적인 면모에 대해 호기심이 일었다. 이는 소수민으로서 이민생활을 하는 것이 만만치 않은 좌절과 역경의 경험을 주고 있음을 알고 있기에 주변인(the marginalized)으로서 자기 생계와 문화적 소외를 견디어 내는 생활도 작은 일이 아닐 텐데 어떻게 미주에서 통일 운동하는데 의지가 남아있을까 하는 궁금증 때문이었다.

그는 Maryland의 Fort Washington에서 Potomac강의 지류가 연못처럼 흘러 나가는 전원주택에서 살고 있었다. 그의 집은 무슨 작은 박물관처럼 고풍스런 자기와 동양액자 그리고 사기접시들, 음악관련 서적들, CD와 테이프, 각종 음악관련 서류뭉치들이 있었고 50년대 초반의 빛바랜 사진들 속엔 그 당시의 한인유학생들이 모임과 저녁을 함께 한 모습들이 보인다. 그리고 실내 공간공간마다 잘 배치되어 있는 관상수들과 미닫이 창으로 시원스럽게 뚫린 전경 한가운데로 포토맥 강지류가 호수모양을 띠고 오후 햇살을 물결속에 담고 있었다. 음악, 책, 나무들과 호수들이 풍겨주는 조용하고도 고요한 분위기를 통해 이미 느껴지는 로선생님의 외유내강한 성격과 잘 조화되어 단아한 이미지로 집안팎이 둘러쳐 있었다.

그러면서도 필자에게 묘한 여운을 주는 것은 바로 외형은 현대풍 양옥집이면서도 내부는 민족시인, 작고가들의 음반과 서적, 노래집 그리고 윤이상씨의 곡인 “나의 땅 나의 조국”(無調曲)이 액자로 거실 한가운데 걸려 있었고 - 그와 윤이상씨는 친분이 꽤있는 사이이다 -한국이 이미지화된 장식품들로 인해 내부는 완전히 이 땅 미국과는 다른 세계의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었다. 겉은 미국풍인데 내부는 완전히 한국적인 공간으로 형성되어 있는 이 묘한 이질적인 역설이 곧 그의 삶을 말해주는 듯 하다.

선생님(1922년 평남 진남포출생)은 이미 40년대 청년시절 초부터 본 직업은 치과의사이면서도 사실상 그의 주된 삶은 음악으로 미쳐있었다고 한다. 당시 김순남씨와 더불어 조선음악가동맹을 결성하였으며 해방이후 민족음악에 대한 열정이 불타 결국 경성치의전을 졸업하던 43년에는 부민관에서 첫 독창회를 치룰 정도였다. 민족음악활동과 더불어 그는 여운형계 중도좌파의 ‘좌우합작’이념을 민족의 분단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신조로 삼았었기에 여운형씨가 저격당한후 장례식에서 운구를 직접들면서 많은 눈물도 쏟았다고 한다.

-선생님은 당시 주류가 이승만류의 극우적 북진통일론이거나 박헌영류 좌파의 거대한 물결속에서 어떻게 여운형의 입장을 옹호하는 근로인민당에 있게 되었습니까? 세력도 무척 작았을 테인데요.

“여운형씨의 죽음 이후로는 그 세력이 거의 없어지고 말았지만 당시 생전에는 나는 그분의 길(‘좌우합작’노선)만이 나에게는 최선의 해답이라고 해서 따른 것이지 나중을 생각한 것은 없었네. 생각해 보오. 이승만의 북진통일이 얼마나 허황된 것이오? 난 그 길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따른 것뿐이었소.”

로선생님의 이념적 활동 때문에 그리고 민족음악가동맹의 사회주의에 대한 옹호의 성격 때문에 이 딱지는 계속 따라붙어 결국은 그의 생이 적잖은 고초를 겪게 된다. 좌익인사를 대상으로 한 “보도연맹”에 강제 가입되어 요시찰의 대상이 된 것이 그 일례인 것이다. 결국 좌우이념대립이 극한이던 그 시절에 그는 결국 좌익 쪽에게는 우익이요 우익 쪽에서는 좌익이었기에 어디에서도 그가 설 곳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일생을 결정적으로 전환시키는 분기점은 바로 한국전쟁이었다. 당시 인민군의 남하와 더불어 젊은이들을 소위 의용군이란 이름으로 징용하여 전선으로 보낼 때, 로선생님은 인민군협주단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별다른 큰 활동도 없이 지내다가 UN의 인천상륙으로 북진하는 때 탈영을 하였다. 당시 우익 청년단의 난폭한 지역활동으로 그들을 피해서 우연히 미8군 의무실 군속으로 일하게 되었다. 이미 인민군으로부터도 탈영을 한 존재이기에 북이나 남에서도 살 수 없게 돼 버린 그는 결국 한창 휴정협정이 막바지에 이르던 53년에 미국에로 떠밀려 올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선생님은 결국 민족사의 가장 큰 비극을 스스로 경험하시게 되었는데, 남과 어느쪽에서도 받아들일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나서 미국행을 선택하신 당시의 기분이 어떠했습니까?

“난 미국에 올 생각은 꿈에도 없었지. 어떻게 나와 같은 사람이 여기에 올 생각이나 먹을 수 있었겠소. 이렇게 얽히고 저렇게 섥혀지고 나니 누구라 단련 안되는 사람이 있었겠소? 전쟁당시 난 단지 생존이 가장 큰 문제였기에 그 당시 상황에선 나의 최선을 다해 상황에 대처한 것이요. 그런데 문제는 전력을 들추어 좌냐 우냐는 이분논법으로 사람색깔을 보았기에 휴전후 내가 있을 곳이 없다는 당연한 결론이 따라왔던 것이었지.”

50년대 초에 미국이민이라면 한국인으로서는 거의 초기에 속하고, 극소수의 한국인들이 미국에 발을 들여놓을 때였다. 따라서 그의 미국이민 초기의 생활은 당연히 어려웠을 것이란 것은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는 비자시효가 만료가 되었음에도 그의 전력 때문에 수년간을 불법체류자로 남게 되었고 당시 맥카시즘이 몰아치고 있어서 더욱 어려웠던 때였다. 그래도 그는 뉴욕과 Alabama에서 치과대학을 졸업하고 워싱톤으로 내려와 살게 되면서부터 그의 민족주의 혼은 다시 불이 붙어 박정희 3선개헌 반대운동을 전개하였고(69년) 조국평화통일 재미촉진위원회(72년)를 결성하여 통일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선생님의 통일운동의 성격에 대해 듣고 싶은데요.

“통일운동 하기위해 내가 통일운동한 것은 아니었지. 통일운동한다고 생각하여 한 것은 아니었단 말일세. 그냥 자발적으로 한 것이었고, 남들이 나를 통일운동한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지. 생각해 보게! 달나라도 가고 비자 없이도 해외에 나가는 데 남북이 왕래를 못한다니 문제가 아닌가 말일세. 더구나 남들은 줄달음치며 나가고 있는 데 우리는 아직도 비생산적이며 소모적인 일들만 하고 진척이 없으니 얼마나 답답한 일인가?”

로선생님의 통일운동은 미국유학초기부터 친교를 맺게된 한 인물과 각별히 만나면서 구체화되었다. 63년 그는 워싱톤에서 미주지역 통일운동의 선구자였던 김용중씨이다. 그는 여운형의 좌우합작론을 발전시켜 중립화통일론을 제안한 장본이기도 하다. 로선생님의 70년대 활동은 미주 민주국민회의 상임고문으로 그리고 와싱톤 민족자주통일협의회 의장직(78년)으로 이어진다. 이른바 그와 김용중, 이행우, 림창영, 지창보 등의 여러 선생님들이 바로 미주 통일운동의 선배, 곧 통일운동 1세대가 된다. 이들 중에 몇몇은 평생을 미국시민권을 받지 않고 통일운동하느라 미국CIA로부터 그리고 한국대사관으로부터도 요시찰인물로 많은 고생을 하였으나 그 불편함과 고통을 달게 받고 살았던 것이다. (미주통일운동 1세대의 이러한 옹골찬 의지로 인해 그의 자녀들이 많은 고통을 함께 겪게 되었고 아버지의 한국에 대한 관심과 자녀들의 미국생활에 대한 관심과의 괴리가 때때로 가정 내의 삶을 힘들게 하는 경우도 있게 된다)

특별히 70년대 미주통일운동사에서 남북양측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던 것이 바로 74년 6월 20일 (바로 7·4남북공동성명직전)에 서명되어 각 대사관에 팩스로 보내진, 조국평화통일 재미촉진위원회의 이름으로 발간된 “한국동포들에게 보내는 호소문”이었다. 이 호소문의 내용은 바로 민족분단의 비극으로부터 벌어지고 있는 아픔의 상황과 민족통일의 당연성 그리고 이에 대한 해결로서 민족의 힘을 배양하자는 호소와 남북평화협상의 촉구가 그 주된 요지였다.

그 강령과 행동목표를 기술하자면, 첫째 자주, 자립, 자위의 주체사상을 실질화함으로써 통일을 앞당기자. 둘째, 자주적 평화통일은 민족전체의 공통된 염원이다. 남북적십자회담을 성의껏 추진하여 이를 정치협상에로 발전시킴으로서 공동운명과 공동이해를 가진 우리들의 합의점을 발견하자. 셋째, 남북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며, 상호 불가침조약의 체결로 모든 역량을 조국건설에 돌리자. 넷째, 평화를 사랑하는 한미 양국민의 우의를 배양하여 조국과 미국과의 자유로운 호혜교환을 증진시킴으로서 조국통일에 이바지하자. 다섯째, 한국동포들은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의 성취를 위하여 남북간의 정치, 경제, 문화면의 자유로운 교환과 이해를 증진시키자였다. 여기에 서명한 이들은 바로 의장단인 림창영, 전규홍, 김용중, 강용흘, 류영한이었고 위원장은 로광욱선생이었다.

- 그 문건을 각 대사관에 발송하고 나서 반응들이 어떻던가요?

“대단했지. 난리가 난 셈이었지. 문제는 북에서 쓰는 주체사상이란 단어를 썼다는 것 때문에 정부와 이곳의 제도언론으로부터는 완전히 친북인사로 낙인이 찍힌 셈이 되었지. 그래 주체사상이 어디 북한 전유물인가? 그것은 철학용어이며 우린 자주적으로 우리의 힘으로 하자는 뜻에서 한 것이지 북한의 것을 보고 한 것은 아니었어. 어쨌든 그 이후로는 철저히 빨간 색칠을 당해서 전화협박도 받고, 그동안 사귀던 많은 사람들로부터도 자연히 거리를 갖게 되었지. 문제는 항상 좌냐 우냐는 경직된 이분논리였지. 극우편에서 중도는 여전히 좌파인 셈인 것이지.”

초기 미국에 발을 디딘 한국인들은 대게 유학생들이나 관공서 인사들이 주로였다. 그중 유학파들이 한국의 여러 어려운 상황으로 인해 눌러 있게 되었고 그 뒤를 이어서 독일의 탄광이나 간호사로 일한 한국인들이 재이민하게 되었고, 월남전 때 베트남에서 돈을 벌던 사람들과 한국을 이런저런 이유로 떠나온 사람들로 미주한인사회가 구성되었다. 통일운동은 주로 양심적인 유학파그룹에서 형성되어왔고(위에 거론한 통일 1세대부터 통일운동 2세대인 지금의 통일학연구소 한호석 소장 등), 헤게모니는 베트남에서 재 이민온 상인들과 이런저런 이유로 실패의 삶이었던 고국을 등지고 성공의 꿈을 안고 들어온 한인들이 그 후에 차지하게 된다. 독재정권하의 해외공관의 일이 한인들을 감시하고 힘과 재력의 논리에 복종시켜 온 시스템이었기에 대부분의 큰 도시에 몰려있는 한인사회는 항상 분열의 모습을 보여 왔다. 양심적인 유학파중의 통일운동가들은 당연히 이들로부터는 그 가치관이나 삶의 모습에 있어서 외로운 소수일 수밖에 없었다.

머물기로 한 예정시간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화제를 돌려 선생님의 음악세계를 간단히 알아보기로 했다. 왜냐하면 그가 빨갱이로 몰려 친구도 떨어져 나간 가장 어려운 시기에 몰두한 것이 바로 음악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음악가동맹의 기본원칙은 바로 일제의 잔재청산으로서 민족음악을 되살리는 것이었지. 지금의 가라오케의 뽕짝은 전부 일본식 가락이야. 한국가락은 선과 같이 끊어지지 않고 긴 리듬 형태를 가지고 있지. 난 곡을 쓰기위해 쓴 것은 아닐세. 단지 저절로 우러나와 곡이 쓰여진 것이지.”

그의 노래는 기교로만 불러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혼과 정서가 일치되지 않으면 민족음악의 가락이 나올 수 없었기에 미주의 현실로서는 불러줄 수 있는 가수나 장소도 없어 그의 작품들은 거의 사장될 뻔하였다. 더구나 그의 사상전력 때문에 한국에서도 불러질 처지가 못되었다. 그러나 그의 노래는 정말 우연히도 재일동포출신의 세계적으로 유명한 오페라 가수 전월선씨가 작곡자가 누군지도 모르는 채로 로선생님이 70년대 말에 작사작곡한 “고려산천 내사랑”을 부르면서 재일동포사이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다. 전월선씨는 작사·작곡가가 누군지도 모른 채 수년간 이 노래를 부르다가 후에 그 작곡자가 누군지를 알게 되어 94년 일부러 미국에 와 로선생님과 해후하여 뜨거운 눈물을 같이 흘리게 된다. 해외 이민자로서 사는 그들의 가슴과 혼에 잔잔히 흐르는 한민족으로서의 한과 아픈 정서가 이들을 뜨겁게 하나로 만나게 한 것이었다.

53년 고국을 떠나 어언 40여년의 삶을 낯선 땅, 낯선 문화에 살면서도 영혼과 가슴속에는 시들지 않고 흐르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서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로선생님의 민족음악에 대한 남다른 애정은 그가 86년 그의 작곡집 “꽃꺽어 그대 앞에”에 실린 작곡자의 변을 보면 알 수 있다.

“나는 평생의 나의 음악수업에서 언제나 우리나라 예술부문에서도 특히 음악이 시대감정에 무관심하다는 아쉬움으로 해서, 무엇인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와 생활에 관련된 절실한 것이 음악에 반영되었으면 하는 것이, 1940년대 이래의 나의 간절한 소망이었다. 우리가 다같이 겪고 있는 절실한 것이란 국토의 분단이고 그것을 재결합하려는 민족공동의 의지가 문학, 미술 등 여러 분야에서 뿐만 아니라 음악분야에서도 나올 만 하지 않는가?

오늘 저녁 부를 가곡들은 78년 이래, 절절한 민족시들을 읊조리다가 느낀 감동을 곡으로 적어 본 것이고, 그거다 보니 그 감동을 서로 나누고 싶은 욕망으로 다듬어서 써 본 것이다. 예술이 인간체험의 집중적 표현일진대 음악도 우리민족이 겪고 있는 쓰라린 몸부림이 반영되어야 할 것이고, 그 애정으로 하여 민족애로 서로 얼싸 안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우리가 진정한 민족의 통일된 독립국가를 형성하려면, 남북을 통한 민족전체가, 민족주의라는 홍역을 치루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오늘 부르는 나의 노래도 그 열병을 앓고 있는 하나의 읊조림이라고 생각한다.”

윤이상씨의 “꽃꺽어 그대앞에”에 대한 평은 다음과 같았다.

“이 노래들은 홍난파, 채동선, 박태준, 윤극영 등등의 민족적 시정신을 이어받고 있으며, 구태어 민요조를 쓰지 않고도 한민족의 양심을 노래하고 있다. 이 노래들은 우리 민족의 혈맥속에 젖어 있는 “한”과 “고난”의 흔적이 보이지만, 결코 그 표현은 비탄에 빠지지 않고 낙천적이며 격조있게 부르고 있다. 선택한 가사들은 모두 민족시들로서, 이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여기에 로광욱형의 평생의 민족의 지조가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모든 곡들은 상징적이건, 또는 추상적이건 한가지 정신에서 출발하고 또 한가지 정신으로 집결한다. 즉 “민족” 그것이다.”

로선생님이 윤이상씨의 글을 읽기전, 이미 테이프로부터 흘러나오는 선생님의 노래를 듣는 순간에 내가 느낀 감동을 표현하자면 “애련의 승화”라고나 할까? 분단의 아픔이 정제되어지고 그리움이 희망으로 자리매김하는 노래들이었다. 그 예로 “고려산천 내사랑”을 들어보면 애련과 더불어 이를 넘어서는 님(“그대”인 조국)에 대한 일치와 의지가 저절로 풍겨져 나온다.

남이나 북이나 그 어데 살아도
다 같이 정다운 형제들 아닌가
동이나 서이나 그 어데 살아도
다 같이 그리운 자매들 아닌가
산도 높고 물도 맑은 아름다운
고려산천 내 나라 내 사랑아 -

그토록 수 십년을 정치적, 사상적 박해와 고립속에 있었어도 이 노래에는 그 어디에서도 절망, 분노, 혹은 어둠의 흔적은 볼 수가 없다. 그의 통일운동은 가슴속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체질적이고 생리적인 것이었고 이론은 머리에 있었기 때문에 수 만리의 낯선 땅에서도 그의 노래는 이토록 민족 본연의 정서와 맥을 같이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이 곡을 듣고 있노라면 왜 그리 눈물이 찡하게 나는 것인가? 노래자체가 슬픈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역만리 미국땅에서 조국애로 형상화 시킨 그의 노래가 주는 감동 때문만도 아니었다. 남과 북으로 갈라진 조국은 태평양 밖으로 그를 밀어내었고, 언제나 냉정했을 뿐만 아니라, 전력시비로 몹시도 그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였다. 그의 한국방문이 처음으로 허락된 것은 바로 한겨례 신문사의 “겨레의 노래”에 “고려산천 내사랑” 노래가 발표된 1990년이었으니 무려 40년 만에 겨우 고국의 땅에 발을 놓을 수 있었을 정도로 조국은 그에게 차가웠다.

그런데 보라. “고려산천 내사랑”에 흐르는 조국에 대한 짝사랑을! 그리고 더 나아가 “그대”로 표현되는 조국앞에 “꽃꺽어”(이 생명 바쳐) 드린다는 그 마지막까지의 지조를. 연인은 이미 수십년전에 등 돌렸건만 그는 사랑으로 지조를 지켜왔고 이제는 더욱더 그 사랑이 사무쳐가고 있었으니 이를 듣는 나는 심금이 저리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게 된 것이다. 척박한 땅에서 홀로 서있는 것만으로도 힘드는 데, 사랑하는 님으로부터 분열과 따돌림을 철저히 당한 반세기의 삶. 그러나 그의 가슴은 사랑으로 식지 않고 있었으니... 그의 집 거실 유리창밖으로 포토맥 강을 따라 저만치 태평양이 보이고, 그 너머에 보이지는 않지만 고국산천은 저 넘어 어딘가에서 진달래와 단풍을 피워내고 있을 것임을 육의 눈이 아니라 영혼으로 날라가 맛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헤어져야 할 시간은 훨씬 넘었기에 그에게로부터 들을 수 있었을 여러 이야기는 생략한 채 작별의 아쉬움을 가져야만 하였다. 그가 지닌 많은 소장문서와 역사의 기억들은 제대로 언급도 못한 채...

출처: <통일>제 2호 1997년 10월 기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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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용박사 | ecopeace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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