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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칠순 이야기

조회 수 3998 추천 수 0 2005.07.18 14:18:36
어머니 칠순에 얽힌 생각과 고백


일찍 찾아온 호우성 장마로 빗방울이 간밤에 줄기차게 내리더니
아침인 지금은 개어 앞의 광교산 자락에 걸쳐서 올라가는 힌 구름 모습이 한결 한가롭고 투명하다.
간밤의 비로 불어난 문앞 냇물소리가 요란한 소리로 흘러가고 있다.
바람을 타고 들리는 거센 물소리너머로 새롭게 드러나는 맑은 꽃들과 나뭇잎들.
간밤의 빗방울로 씻겨져 더욱 생동거리는 모습으로 다가온다.
옥수수대가 살짝 살랑이고, 해바라기는 벌써 피어 제 무게를 힘겨워 고개를 내려 함지박 웃음이다. 빗줄기로 맑아진 존재들.
그렇다면 가슴에 그토록 오랫동안 내린 빗물로도 인생이 맑아질 순 있는 걸까?

전에는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를 못했는데 최근에 칠순잔치를 치룬 후 어머니가 매우 늙으셨구나하는 느낌이 갑자기 들게 되었다. 걸으시는 걸음에서 그리고 숨이 차다는 모습을 가까이 지켜보면서 어느덧 칠순이라는 단어가 가슴에 파고든 것이다. 용인에 대안학교에 애를 보내느라 우이동에서 가족이 이사한 후 어머니는 텃밭일, 산에 다니는 친구들과 교회에 정든 사람들이 있어서 홀로 남으신 것이다. 게다가 아내가 힘들어하는 모습도 있어서 따로 떨어져 가끔씩 찾아뵈어서 늙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다가오지 않았는데, 요즘 들어 가까이 있다보면 문득문득 퍽이나 이제 세월은 숨길 수 없구나하는 무거운 마음이 들게 된다.

어른이 된 지금도 나는 사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님을 절실히 느끼고 있지만, 어려서부터 청년이 될 때까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아버지 알콜중독에서 오는 생활무능력으로 인해 혼자 가족의 생계를 꾸려나가야 하는 버거운 삶의 연속에 대한 것들이었다. 어머니는 군인인 아버지를 따라 다니느라 나를 낳고서는 강화도의 고향에 있는 외가집 할머니할아버지께 맡기셨고 국민학교 입학 전까지 가끔씩 찾아오곤 하였으나 내 기억에는 없었다. 입학 직전에 군인가족으로서 강원도 철원의 어느 아주 깊은 산골로 어머니를 따라 들어간 후, 나는 산 능성이를 불로 태워 밭을 일구던 모습, 충북 보은에서의 옷가지를 머리에 이고 이 마을 저 마을로 다니다 늦은 저녁에 지친 걸음으로 들어오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옷 팔고 그 대금으로 받은 쌀을 더 무겁게 내려놓으시는 모습에서 난 뭔가 어리광부릴 처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했다.

스무 살이 넘도록 심한 알콜 중독증 아버지에 대한 미움과 이로 인해 나타난 인생살이의 힘든 고역을 떠안고 사는 어머니는 때때로 ‘너희 아니었으면 벌써 죽었거나 다른 데로 나가 버렸다’는 푸념을 장남인 나에게 쏟아놓곤 하셔서 사춘기 때 이미 나는 누구엔가 부담을 주며 사는 인생이라는 깊은 무거움을 안고 살았다. 그래서 웃는 일이 별로 많지 않았고 주변으로부터 ‘애아범’이라는 별명까지 얻을 정도였다. 초등학교 5학년이후 무슨 사업인가 하다가 사기로 돈을 다 날린 퇴직한 군인가족으로서 이른바 도시빈민들이 모여 사는 삼양동 돌산 꼭대기에 무허가 슬레트 집에서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여름의 장마가 좀 왔다 싶으면 다닥다닥 붙어있는 집들 사이로 하수처리 제대로 안되어 변소의 오물들이 흘러내려 곳곳에 냄새가 나고, 겨울엔 집집마다 작은 굴뚝으로 나오는 연탄 냄새로 머리가 어지럽던 그 시절이 이제는 아득하게 느껴진다. 나는 돌산 맞은편 산 넘어 있는 염광중학교에 다니면서 집사정이 그래서 산에 있다가 저녁 늦게 돌아오기가 일쑤였고, 그 때에는 가까운 친구들에게도 집이 어디 있는지를 알려 주지 않을 정도로 집과 가정에 대한 콤플렉스가 깊었었다. 그 예민한 시절에 그나마 교회생활이 어느 정도의 심한 우울증을 막아냈고 자기 정체성을 서서히 키워내는 계기가 되었다.

그때 어느 때부턴가 어머니는 목욕탕에서 일하시면서 물집이 나 있는 발에 고약을 바르시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되었고 집에 누어있는 아버지의 술 냄새와 더불어 사춘기의 내 가슴에 어둔 그늘을 내리게 하였다. 내가 어머니를 도울 수 있는 일은 집안 청소와 함께, 밤늦게 나오는 공동수도에 줄을 서서 졸리운 눈으로 물동이를 지켜 섰다가 물 받아 오는 일이었다. 세상을 모질거나 약삭빠르게 사는 법을 모르는 어머니는 오직 자신의 손과 발의 힘에 의존해서 10년이 넘도록 그 일을 해 오셨던 것이다.

덕수상고를 나와 한일은행을 다니게 되고나서 몇 달인가 지나 월급을 갖고 가족이 처음으로 외식을 한 때가 생각난다. 좋은 데 가자고 해도 만류하며 간 곳이 종로 5가 뒷골목의 어느 비빔 떡볶기촌이었고, 이정도 가지고는 안 되겠다 싶어, 다시 입가심으로 아버지 이북 생각나게 하는 평양냉면 한 그릇씩 먹고 나서 포만감으로 버스를 탔을 때, 몰려 온 오열을 잊을 수가 없다. “이까짓 얼마 되지도 않는 걸가지고 우리 가족이 바깥 식당에 제대로 한번 가보지도 못하다니......” 떡볶기와 냉면 모두 합쳐 3-4만원도 채 되지 않았는데, 그 정도의 생활여유조차 없어서 지금까지 가족 모두가 외식을 한번 못하고 살아 왔다는 깊은 아픔이 차를 타고 오면서 절여온 것이었다. 그 후 폐결핵이 계기가 되어 신학공부로 접어든 후에도 어머니는 가끔 돈벌이를 마다하고 딴 길로 빠진 것에 매우 섭섭한 표정이었고 졸업 후 조령산 문경새재로 첫 목회를 떠난 후로 나는 내 생활에 전렴하게 되었고 유학을 하게 되면서 가끔씩 찾아뵙는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신앙생활을 통한 아버지의 삶의 변화와 더불어 어머니도 점차로 자신의 삶에 대한 안정을 찾으셨다는 것이다.

6.25 전후의 격동의 시대를 지내오면서 강화도 벽지의 초등학교 겨우 졸업한 민초로서 세상을 살아가기에는 쉽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철들고 직장과 대학생활을 하면서 그동안 자식한테 퍼 부었던 싷은 소리들 이면에 오직 손과 발 그리고 건강이라는 것 이외에 가진 것없던 한 여인이 본능적으로 끈질기게 삼남매를 키워내고, 술주정을 받아내며 지내온 인생의 무거움이 있었던 것이다. 이를 이해하고부터 나 자신도 힘들었던 인생의 고비마다 문득 어머니를 보게 되고, 한 평범한 여인으로서 숨 가쁘게 걸어온 그 아린 길들에 대해 나도 모르는 통증과 함께, 그동안 가슴깊이 파묻어 둔 어머니에 대한 섭섭함과 미움들이 풀어져 나가면서 서서히 화해의 삶으로 바뀌고 그냥 어머니 모습 그대로 보는 여유가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돌이켜보면 칠순잔치에 참석자들에게 소개한 대로 어머니는 강화약쑥처럼 사셨다고 생각이 든다. 끈질긴 저항의 터전인 강화도의 한 민초이자 여인으로서 어머니는 강화약쑥처럼, 꽃핌 없이 천박한 땅에 힘겨운 뿌리를 박고 그 작은 존재를 일으켜 세워 시대의 바람과 무거움을 견디어 온 것이다. 그리고 쓰디 쓴 경험들로 채워진 몸이 이젠 남을 섬기는 데 바쳐져 사라지는 끝에 거의 다가서 계신 것이다. 그러나 그 힘든 긴 여정에도 불구하고 자식들에게 공통으로 남겨준 덕성이 있다면 남에게 아픔과 상처를 주는 삶은 살지 않도록 키워 오신 것이다.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기억이 하나있다. 돌산 무허가 집에 함께 살던 이웃이 너무나 어려워 그냥 겨울 날까 싶어 11월 어느 날 배추 몇 십 포기를 더 사와 이웃에게 주던 모습이 생각난다. 자식들에게는 돈 몇 백 원이라도 쉽게 주지 않고 돈 쓰는 데 무서워하던 분이 배추 몇 십 포기를 아웃마당에 갖다 놓는 것을 보고 놀라워했던 것이다.

아직도 발과 팔등지에 군데군데 남아있는 상처들을 보다가 때론 가슴에 파고들어 응석이라도 부리면 “얘야, 징그럽다”고 밀쳐내는 어머니의 기운이 현저히 약해져 있음이 느껴진다. “아하, 세월이 벌써 이토록 흘러간 것이구나!” 그러고 보니 내 머리에도 이미 힌 머리가 제법 무성해져버렸다. 자신은 돈 쓰는 것이 아까워서 식사를 하시는 것을 보면 주로 밭에서 뜯어온 야채 중심이다. 그래도 들릴 때마다 자식들 생각해서 담으신 김치와 나물들을 내놓으신다. 지난겨울엔 기름값 아깝다고 구들장 보일러를 안트시고 작은 전기담요에 의지해 자는 것을 발견하고는 제발 그러지 말라고 애원을 하다시피 하였다. 그래도 저녁이면 약간씩 틀고 자고 그 정도로도 견딜만하다고 듣지를 않으셨다.

어머니와 관련하여 85년 학부졸업때 쓴 졸업소감을 졸업식에 오신 목사님께 드린 글이 일기장에서 발견되었다. 그 때 최완택 목사님은 내 글을 ‘때밀이 신학’이란 제목을 붙여 사전에 얘기 없이 민들레주보에 내 보내었는데, 20년이 지난 지금을 돌이켜 보니까 지금의 나의 분위기를 만들어 준 것의 많은 부분이 이미 여기 글에 담겨져 있었구나하는 확인을 하게 되었다.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는 절망감에 파묻혀 있지를 않는다는 점이다. 미국에서 여러 밑바닥의 경험과 퀘이커가 운영하는 펜들힐(Pendle Hill)에서 한 학기동안의 체험이 절망의 꼭지를 떼게 했기 때문이다.

************** (85년 졸업 소감)**************
존경하는 목사님!
졸업식장에 나가기 2시간이 남아 이렇게 펜을 듭니다.
아무래도 나 자신을 정이해야만 졸업의 의미를 새삼 깨닫게 될 것 같고 그동안 제가 얼마큼 컷는지 이제는 스승님께 알려들릴 때가 된 것 같기도 해서, 쑥스럽지만 생각되어지는 대로 기술하겠습니다.(아마 편지로서는 처음으로 목사님께 드리는 것 같습니다)

신학공부로만 꼬박 6년, 짧은 것 같으면서도 실상은 길게 느껴진 기간이었습니다. 신학교 2학년, 대학생활 4년에 배운 것이라곤 눈물, 부끄러움, 목마름, 좌절뿐이었습니다.

대학 생활 4년 동안 머리에 떠나지 않고 나를 움직여 온 것들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3.1운동 선배들에 대한 송시의 첫 부분 “그때 밤 깊어 어둡고 적막할 때/ 겨레 이미 기진해 쓰러져 잠들었을 때/ 혼자서 깨어있어 기도하던 이들이여...”이었고 도서실에 걸려있는 피카소의 ‘게르니카’라는 그림이었습니다. 폭력 맞은 게르니카 마을의 울부짖음, 폭력의 횡포, 그 속에서 뚜렷하게 빛나는 증언자의 눈 하나...... 저는 이 그림 속에서 제시하는 폭력(비인간화의 세력)에 대한 아무런 해답도 찾지 못한 채 그 그림과 씨름하여 4년을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목사님의 ‘자유혼’이 언제부터인가 내 속에 깊이 박혀 있었다는 사실을 4학년 올라와서야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신약성서 비평을 배우면서 ‘선포자’로 오신 예수님이 그 제자들로 인해 ‘선포된 자’로 승격되어진 것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예수님을 신앙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사랑의 대상으로 삼아야 된다는 사실을 내 나름대로 깨닫는 순간, 새로운 눈이 열림을 경험한 것입니다.

성서에 나타난 예수 이야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혼’--시대적 제약과 운명의 제약 속에서도 인간 존엄과 가치를 지닌 예수의 자유정신과 사랑에로의 끊임없는 의지--만이 중요하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목사님께 참으로 죄송합니다만 어쩌면 우린 이미 진 싸움을 시작하고 있는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적인 드라마를 연출해야 하는 것이 사제의 길이요, 진리, 순결, 생명을 향해 어둠속을 끝까지 걷는 것(이미 승산이 안보일지라도)만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기독교 복음의 의미는 저 나름으로는 생명을 불러일으키고, 가꾸고, 완성시키는 곳에 있으며 삐뚤어진 생명의 방향을 본래의 모습대로 바꾸는 데 있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혼’은 생명을 불러일으킴이었다고 느껴집니다.

세 번째로는 어머니가 저의 가장 훌륭한 신학교육자였다는 사실입니다. 초등학교밖에는 못나온 전형적인 한국의 어머니로서 그 분은 목욕탕에서 근 10년을 일하시면서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보내주신 것입니다. 목욕탕 청소와 남의 등까지 밀어주는 이른바 ‘때밀이’의 직업. 하필이면 그런 직업이냐고 지난 10년 동안 끝없이 어머니를 싫어했고 아직까지 가정에 대해 친구들에까지 이야기하지 않은 채 우울하게 지내왔던 것입니다.

그런 어머니를 편히 모시지도 못하면서 장남으로서의 나는 공부를 하겠다는 이 처지가 나를 용남하지 못하게 했고 ‘자식의 도리’와 '나의 이상‘사이에서 얼마나 끊없이 괴롭혔는지 모릅니다. 그분은 아침 6시에 나가셔서 저녁 11시쯤에 들어오시는 게 하루의 일과였으며 우리 아침식사 준비를 위해 5시에 일어나시는 분입니다.

이런 어머니의 직업이 졸업을 하는 나에게 깨닫게 해 준 것은 신학은 ‘때밀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몸과 영의 때를 밀어 없애는 것이 신학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저는 어머니를 부둥켜 앉고 한참이나 울었습니다.

이젠 누가 뭐라해도 어머니야 말로 나에게 가장 소중한 분이시며 누구 앞에서도 부끄럽지 아니하고 자랑스럽습니다. 나의 어머니는 못 배우셨을 지언정 남 속인 일 없으며 순리대로 사신 분이며, 없으신 중에도 옆집에서 김장을 못한 것을 안타까워 김장재료를 사다 주신 분이기에 나에겐 가장 소중한 분이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앞으로 제대로 편히 못 모실 것 같으니 가슴이 아플 뿐입니다.

살아야 할 용기를 얻지 못한 채 지난 6년을 참으로 많은 방황을 했습니다. 이제는 살려고 노력해야겠습니다. 정성껏 살아 보려고 합니다.
‘하느님이여 제발 나로부터 당신을 거둬가소서’라는 기도문을 기숙사방에 써 붙인 친구와 ‘이 병든 시대에 아웃사이더로 남아 한 줄기 성실한 목소리가 되자’는 친구들이 있어서 사는 데 조금은 위로가 됩니다.

‘하느님 그리워 아픔으로 살기’--이것이 제가 추구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요새는 서구신학보다 한국인의 심성에서 느껴지는 하느님, 한국인의 삶, 멋, 사상에 대해 관심을 갖고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제가 어떤 인간이 될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부끄럽지 않도록 살 생각입니다.

교회에 깊은 절망을 느끼는 요즈음, 전 왜 이리 주위를 맴돌며 엉거주춤 서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차피 가야 할 길이라면 기쁘게 받아들여만 할 텐데 무거움과 슬픔만 느껴지니 왜 그럴까요? 차가운 바람맞는 느낌입니다.

P.S.: 졸업식이면 기쁠 줄 알았는데
지금 심정은 몹시도 착잡하고
더욱 무거운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이 ‘겨울지내기연습’을
끝까지 맛보고 회피하지 않을 것입니다.

1985. 2. 11. 11시

제자 박성용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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