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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교육에 대한 명상

조회 수 3985 추천 수 0 2005.06.11 12:11:33
레오 리오니(Linonni)의 짧은 동화(비데오)에 따른 대안교육에 대한 명상


1. 레오 리오니 동화비데오의 내용

[첫번째]
돌담 속에 살던 들쥐 식구들은 이웃 농부가 이사를 가게 되어 곳간이 비게 되자 열매와 곡식을 모으느라 분주합니다. 잠잠이만 빼고요. “왜 일 안하니?” “난, 햇빛을 모으는 중이야. ” “난 빛깔을 모으는 중이야. 겨울은 잿빛이니까.” “말을 모으는 중이야. 긴 겨울 얘깃거리가 없어질 때를 위해서”
겨울이 되고 눈이 오자 돌담 안에서 처음엔 먹을거리도 풍부했고 이야기도 많았습니다. 차츰 양식이 떨어져갔어요. 이야기도 점점 줄었지요. 누군가 문득 잠잠이 생각을 해냈습니다. 잠잠이는 친구들에게 눈을 감도록 하고 햇빛을 느끼게 하네요. 다시 눈 감고 꽃, 밀, 딸기 이야기를 들으며 여러 가지 빛깔을 떠올리게 했어요. “... 넌 시인이구나...” 친구들이 말했어요. “그래, 나도... 알아...”

[두번째]
세 번째로 태어난 악어 코넬리우스는 꼿꼿이 서서 알에서 걸어 나왔어요. 계속 커가면서도 서서 다니며 딴 악어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았어요. 딴 악어는 그래서 어쨌다는 거냐고 했지요. “난 물고기를 위에서 내려다 볼 수 있다고.” “그래서 어쨌다는 거야.” 딴 악어들은 아니꼽게 대답했어요. 그래서 코넬리우스는 다른 곳으로 떠났지요. 원숭이를 만났어요. “난 멀리 볼 수 있어.” 코넬리우스가 말하자 원숭이는 “난 여러 재주를 부릴 수 있어. 물구나무 서기, 재주넘기.” “나도 할 수 있을까?” “물론이지.” 코넬리우스는 열심히 배웠어요. 물구나무서기, 꼬리로 나무에 매달리기. 다 배우고서 강가로 다시 돌아갔어요. 다른 악어들에게, “난 거꾸로 설 수도 있고 꼬리로 나무에 매달리기도 해.” “그래서, 어쨌단 말야?” 화가 난 코넬리우스는 떠나려고 하다가 .... 뒤를 돌아봤더니.... 모두 거꾸로 서기를 연습 중이었어요. 이제는 강가 풍경이 좀 달라지겠지요?

[세번째]
무지개 연못에 툭하면 싸우는 개구리 세 마리가 있었어요. 하루 종일 서로 말다툼을 했지요. “연못은 내거야.” “이 땅은 내거야.” “공중은 내거야.” 종일 그렇게 계속 싸웠지요. 어느 날 커다란 두꺼비가 와서, “난 건너편에 사는데, 온 종일 너희 싸우는 소리가 들려. 내꺼야, 내꺼야. 내꺼야... 계속 그러면 언잰가는 후회할거야.” 그때, 한 마리 개구리가 지렁이를 발견하고는 자기 거라고 하며 달아나기 시작했어요. 다른 개구리들이 쫒아가고요. 갑자기 번개 천둥이 치고 비가 내리고 물이 불어 섬이 작아졌어요. 겁이 났지요. 점점 성이 줄어 이젠 바위 하나 밖에 안 남았군요. 바위위에 함께 있으니 든든했어요. 근데, 물이 빠지고 보니 그 큰 바위는 두꺼비였어요. “네가 우릴 살렸구나.” 이제는 셋이 함께 다니며 전에 못 느끼던 행복을 맛보았습니다. “이건 우리들의 것이야.”

[네번째] 물고기는 물고기
새기 물고기랑 올챙이는 단짝 친구였어요. 어느날, 올챙이에게 두 다리가 생겼어요. 물고기랑 올챙이는 하루 종일 입씨름을 했지요. “난 이제 개구리야.” “너는 어제까지도 나랑 같은 물고기였는데, 어떻게 개구리라는 거니?” 올챙이는 말했어요. “개구리는 개구리고 물고기는 물고기야.” 이제 앞다리도 나왔어요. 어른이 된 개구리는 땅위로 나갔어요. 새끼 물고기도 큰 물고기가 됐지요. 개구리는 오랜만에 돌아왔지요. 개구리는 세상구경 이야기를 했습니다. 새 이야기. 암소 이야기. 물고기는 물고기 모양에 날개가 달린 새, 물고기 모양에 뿔 달리고 커다란 젖이 주렁주렁한 소 모습을 상상했지요. 사람 모습도요. 물고기는 놀라워했어요. 나도 개구리처럼 세상을 볼 수 있다면. 물고기가 맘을 굳게 먹고 펄쩍 뛰어올라 뭍으로 갔는데. 글쎄, 숨을 쉴 수가 없었어요. 다행히 개구리가 물 속으로 밀어 주었지요. 물속에서 다시 숨을 쉬고 움직이게 되었어요. 햇살이 비쳐드니, 물고기가 사는 이 곳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었어요. 맞아, 물고기는 물고기야.

[다섯번째] 으뜸 헤엄이
작은 빨간 헤엄이들 중 으뜸 헤엄이만 까맸어요. 어느날 커다란 다랑어가 왔는데 숨을 데가 없었어요. 모두를 삼켜버렸지요. 으뜸 헤엄이만 도망쳐 깊은 바닷속으로 갔지만 두렵고 외로왔어요. 무지개빛 해파리, 해초 숲에서 집게발이 달린 동물의 공격도 받았구요. 오징어가 뿌리는 먹물, 사탕 바위에서 자라는 해초 숲. 안 보이는 끈이 조정하는 이상한 큰 물고기들. 커다란 바다 꽃. 꼬리가 너무도 긴 뱀장어. 바위 속 터널. 야광 물고기. 신기한 게 많은 바닷속. 으뜸 헤엄이는 다시 행복해졌어요. 바위 뒤에서 죽은 친구들과 닮은 작은 빨간 물고기들을 만났어요. “같이 헤엄쳐 세상 구경을 하자.” “안돼. 커다란 물고기가 잡아먹을거야.” “그래도 궁리를 해보자... 좋은 생각이 있어. 우리가 가장 큰 물고기 모양을 이루어서 함께 헤엄을 치는 거야.” 거대한 한 마리 모양으로 헤엄을 쳐 갔어요. ... 이리하여 큰 다랑어들을 모두 쫒아버렸답니다.


2. 레오 리오니의 짧은 동화에 따른 대안교육에 대한 개인명상


첫째 이야기- “잠잠이”: 무엇을 희망하는가?


물질적 행복과 정신적 가치는 어디까지 같이 있고 어디에서 자신의 고유영역이 있는 것일까? 열매와 곡식을 모으는 일과 햇살, 빛깔 그리고 이야기를 모음이라는 두 삶은 얼마만큼 정성을 다해 나는 이 둘을 품어왔는가.

부모의 가난으로 수제비와 술찌게를 데워먹고, 밤 열시 열한시에 산동네에서 공동수도앞에서 길게 선 물양동이 옆에서서 새치기한다고 어른들 싸우는 것 보면서 눈꺼풀이 하염없이 무거워진 상태로 물받는 차례 기다리던 어린 시절.

가난은 얼마나 인간을 품위없이 무력하게 만들고 추잡하게 만드는 지를 골수에 박히도록 보고 들은 때가 있었다. 주변의 인생들이 가정과 인간관계가 불화일 때마다 ‘돈이 웬수’라는 없음에 대한 한탄의 소리를 들으며 상고를 선택하고, 청년때의 허무주의에 대한 심한 가슴앓이와 인생의 굴곡을 겪으면서 30년이 지난 지금 딸을 이우중학교에 입학시킨 지금.

아직도 먹고 사는 문제에 있어서 자유롭지 않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가슴에 남아서 괴롭히는 질문은 무엇이 살만한 인생인가이었다. 이른바 자유인이랄까 무애인이랄까에 대한 실존적인 그리움이 그것이다. 디딜 곳 없는 깊은 추락과 익숙해 온 것이 갑자기 낯설어져 영혼이 몸살을 앓고 있을 때, 종교언어로 구원은 아닐 지라도 자신을 추슬러 일으켜 세우고 ‘살아보아야지’하는 각성을 주는 것은 바로 그러한 그리움, 희망하는 힘의 덕택이 아니었는가 생각해본다.

딸이 어떤 직업을 갖고 어떤 영역에서 일하겠는 가에 대해 나는 별로 걱정이 없다. 내가 성장하던 조건에 비해 딸의 재능, 부모의 배려, 주변환경이 나의 옛날보다 낫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그리고 어떻게 하든 다 사는 길은 있으니까. 그러나 어떤 상실, 암흑, 혼돈의 실존적 충격을 대면하게 되었을 때, 어떤 희망하는 힘이 자신을 일으켜 세우게 될 지에 대해 중고등시절에 준비시켜야 하지 않은가 하는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

작은 자(생쥐)의 삶이 때대로 놀라움으로 주목을 받는 것은 그가 누리는 양에 있는 것이 아나라 희망하는 (envisioning) 힘이 품어져 나오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희망을 품고 희망을 벼리는 존재는 궁극적인 것을 품수함으로 자연히 변혁하는 자가 된다. 못이 주머니속에 감추어져도 저절로 그 끝이 드러나듯이, 깃발을 앞세우고 떠들지 않아도 비져너리는 현실변혁을 일으키게 된다. 이게 아마도 리차드 바크가 '먹고 사는' 데서 '날음/비행'의 문제를 조나단리빙스턴 갈매기를 통해 제기한 것이라 생각한다.

비져너리가 되는 것, 날음속에 삶을 녹여내 이를 품수함으로 인해 '있는 그대로'의 일차원적인 삶의 공간이 변형(transformation)을 일으킨다. 먹는 것과 노는 것 그리고 일하는 것의 주된 삶에 빛깔이 주어지고 이야기(story)가 터져 나온다. 이 작은 이야기(story)가 역사(his-story)로 바뀌는 것이다. 꿈꾸는 자로 인해 삶의 공간구조가 달라져 빛깔과 이야기를 품어내면서, 세상이 문득 '매력적'으로 다가오게 된다. 다시 살아보아야지하는 각성을 얻게 되는 것이다.

대안은 눈이 뜨는 것이다. 현실은 있는 것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희망하는 궁극의 상태가 새로운 현실로 보여지는 것이다.

둘째 이야기- 물구나무 서는 악어: 바닥(the bottom)으로부터 삶을 읽기

입학후부터 학부모들간, 혹은 교사와 학부모간에 자주 입에 오르내리던 대안교육의 정체성에 대한 화두는 ‘두마리 토끼’론, ‘지도자양성’론이었다. 이른바 대학입시교육과 인성교육병행론에서 21세기 대안사회를 이끌고 나갈 지도자/엘리트 양성을 위한 교육으로 요약될 것이다. 나 자신도 자식이 그러한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는 과제에 대해 내 자신이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 지는 확신이 아직 완전히 정리가 안된 상태이다.

그런데 이런 화두 뒷배경에는 혹시 영향력, 명예, 활동, 능력, 지위라는 공간구조에서 ‘높이’라는 위(上)의 추구가 암암리 작용하고 있지는 않은지, 이들 화두가 부지불식간에 이러한 위의 추구에 대한 이념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지는 않은지 걱정스럽다. 만일 그러하다면 대안은 사회근본체제의 갱신과 변혁이 아닌 수정과 개량이라는 입장에 서게 된다. 우리사회의 문제점을 진단할 때, 과연 수정과 개량으로 대안사회를 이룩할 수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 제기된다는 것이다.

권력과 지식, 그리고 진리인식에 대한 권력의 영향이 서로 결탁되어 있다는 여러 학자들의 이야기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기존사회의 높이-낮음의 구조문제는 의문시하지 않고 이 구조위에 ‘쓰임’과 ‘효용’을 위한 가치관이 대안교육의 이름으로 자리잡을 가능성에 대해 더 깊은 고민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바닥을 기는 존재(악어)가 세상에 공헌할 수 있다면 바닥을 밀쳐내고 서서 걸어다니면서 높이를 사는 문제가 대안은 아니다. 오히려 물구나무서서 ‘바닥(the bottom)’을 재 인식하는 것, 바닥을 통해 ‘깊이’-높이가 아니라-를 얻는 것, 바닥을 통해 세상이 확연히 달리 보이고 이렇게 새롭게 인식된 실재를 즐기는 것 아닐까.

최근에 니어링의 ‘조화로운 삶’과 ‘조화로운 삶의 지속’을 읽으면서 한가지 인상적인 교훈을 얻은 것은 바닥을 일구는 것, 바닥에 대한 주목이 농사의 근본이라는 것이다. 잡풀, 잡목, 쓸모없는 존재, 버려진 존재, 더러운 존재들의 장소인 바닥, 그들이 어울려 거름이 되고 바닥을 생생하고 윤택한 세계로, 타존재을 위한 살림의 세계로 변형시킨다는 것에 깊은 감동을 받게 되었다.

노자는 배움을 산마루(높이)에서가 아니라 바닥을 통해 인식한다. 바닥과 아래 처하는 계곡과 물의 상징을 통해 유약, 비하, 미천, 추함, 우둔함속에 있는 품음의 덕성이 길(도)을 현시한다고 주장하였다.

대안교육의 목표는 높이를 보는 것인가 아니면 바닥을 다시금 새롭게 보는 것인가.

세번째 이야기- "내꺼야": ‘나아닌 나’의 발견

지난 3월 2주일간 필리핀 민다나오의 토착원주민의 갈등과 고난의 문제에 대한 현지조사차 그들의 촌락(바랑가이)를 방문하고 인터뷰하면서 느낀 강한 인상이 있다. 이는 그들의 땅에 대한 관념인 것이다. 인류문명이 21세기를 맞이하고 있는 이 때도 개인의 땅에 대한 소유관념이 없고 큰 바위, 시내, 강, 호수, 산의 자연적 경계물을 이용해서 특정 경계선없이 각 공동체가 따로 따로 자신들의 땅을 관리하며 소산은 공동체 모두에게 똑같이 돌아가는 것을 본 것이다.

한달 2000페소(미화 1달러가 50페소)도 안되는 가정의 수입의 극빈한 가난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대나무로 만든 마을회관에서 저녁을 먹는 데 손님과 마을어른이 먼저 식사를 하고나서 어린이를 포함한 모두가 똑같이 식사를 적던 많던 같이 먹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저녁식사후 4시간인가 5시간인가를 꼬박 자신들이 당면한 갈등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데 그 긴 시간동안 모든 언어가 상대를 공경하는 언어를 사용하고-오랫동안 서로 익숙히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어느 누구하나 중간에 남의 이야기속에 뛰어들거나 하지를 않는다는 것이었다. 모두가 끝까지 경청하고 끝나면 다른 사람이 자신의 다른 견해를 말하는 데 말속에 담는 것은 신뢰와 배려였다. 그리고 초등학교도 안나온 이들이 사물의 본성과 사태를 제대로 꿰뚫는 감각을 갖고 있다는 데 큰 충격을 얻었다.

이들이 걱정하는 것은 물질의 부재로서 가난이 아닌 불화로 기인하는 신뢰의 상실, 전통의 상실, 댐과 다국적 기업의 대농장, 광산에 의한 산림의 황폐로 인한 이웃자연의 사라짐이었다. 공동체는 단지 인간만이 아닌 시냇물, 나무, 바위, 동물, 곤충들도 공동체의 구성원이고 심지어는 조상의 영도 공동체의 구성원이었다. 이들 모두는 '너'가 아닌 '나'의 다른 모습이었다. 밤새도록 잠을 못자면서 골몰히 생각한 것은 도대체 누가 미개인이고 문명인인가하는 되물음이었다. 자본주의 삶의 양식에 깊이 절여있는 소유양식의 문화와 이들의 타자에 대한 배려와 사물의 신성함에 대한 생활양식사이에서 인간이 진보한 것인지 퇴보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더불어 삶이란 단순히 나와 함께 너의 존재에 대한 인정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너의 존재덕택에 나의 삶이 존재한다는 근본적인 깨달음을 통해 이루어지는 건 아닐까. 다양성은 차이의 존중, 너의 거기 있음에 머무르는 관용으로 끝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네가 우릴 살렸구나”- 바위로 착각한 개구리들이 실은 그 바위가 큰 개구리였음을 알고 내뱉은 탄성이지만, 너(타자)가 바로 나를 살리는 존재라는 근본적인 인식의 전환이 이젠 필요한 것은 아닌가. 너가 나를 살리고 있는 존재이고 너안에 내가 있었고 너의 덕분에 내 존재가 영위된다는 탄성과 이에 대한 경험을 통해 살가죽에 갇힌 나의 정체성이 깨어져 나가고 공동존재성으로서 자아를 발견하는 배움이 대안교육속에 일어나길 기대한다면 이는 단지 꿈일까?

딸을 입학시키고 딸한테 시작한 나만의 제의祭儀(?)가 있다. 아침에 몸이 무거워 일어나기 힘들어하는 딸의 발과 등을 맛사지하고 ‘잘 잤다, 새 아침이어요’의 인사로 잠을 깨우고, 저녁늦게 퇴근하여 잠자는 딸의 귓불에 키스하며 살짝 애무를 해 주는 것이다. 너는 사랑받을 만한 존재라는 것, 인생이 사랑의 힘에 의해 지속되고 자신의 삶은 은총에 의해 주어진 선물이며, 이 선물은 혼자에게만이 아닌 타자와 나눌 만한 크기를 갖고 있다는 것을 은연히 깨닫기를 바램에서 이다.

네번째 이야기- 물고기는 물고기: 성장과 성숙의 한계점

자연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탄생과 성장의 과정을 거친다. 그러나 성장에도 불구하고 그 한계를 갖고 있다. 자기 성장의 꼭 필요한 만큼의 높이와 넓이를 대게 갖는 것이다. 그러나 기계문명을 도입한 인간은 자연적 성장의 한계를 넘어 기계로 그 성장의 한계를 늘여나갔다. 사이버의 세계에 있어서는 자기영역의 확산은 시간과 거리의 한계를 무시할 정도가 되었다.

한번도 아파트생활을 안 해본 나로서 체질적으로 안 맞는 아파트생활을 동천동으로 이사오면서 한지도 벌써 4개월이 넘었지만 아직도 뭔가 마음에 정돈이 안되어서 무엇인지 왜 그런지 그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이우학교 가까운 데로 이사가기 위해 거의 20채 가까운 집을 보고 나서 출근과 통학을 생각해서 이곳 아파트의 10층에로 옮기고 나서 뭔지 마음에 걸린 것이 있어서 그 원인을 생각해 보다가 문득 깨닫는바가 있었다. 그것은 처음에는 전망의 핑계로 얻은 것이었지만 10층 높이로부터 오는 어지럼이었다. 항상 단독주택에 있다가 10층으로 올라오면서 사물들을 ‘내려보는’ 시각을 얻은 것이다. 전에는 문 열고 밖을 보면 내 눈높이와 맞게 자연이 보여서 친근함과 나무가 변함으로 오는 감동을 얻는 경험들이 많았는데, 여기서는 내려보게 되면서 교제의 맛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개구리의 세계와 물고기의 세계는 다른 삶의 영역을 지칭하고 있다. 개구리는 보다 넗은 세계의 경험과 그에 대한 탐구, 무제한적인 물질적 세계의 향유와 더불어 이런 세계화에 맞는 적성을 가진 인간형의 교육이다. 이른바 어느 대기업회장의 말처럼 ‘세계는 넓고 할일은 많다’는 말에 어울리는 인간형일 것이다. 이런 넓은 세계와 그에 적응하기 위해 미명하에 많은 창조성이 개발되어야 하고 그에 따른 능력과 수완이 있는 전문인이 되기 위해 무척 많은 노력이 요구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넓은 세계의 누림과 향유는 무엇을 위한 것이가 이며 그런 넓은 세계의 요구에 맞추어 노력을 강요하고, 준비된 자가 되기 위해 전문적 수완을 숙달하는 게임의 세계에 들어가야 한다.

물고기는 넓은 세계를 누리는 삶보다는 자신이 살아온 삶의 현장을 책임지는 인간형을 추구한다. 제한된 삶의 공간이지만 그곳을 가꾸고 관계 맺고, 땀을 흘리며 향유보다는 투신할 줄 아는 인간형이다. 그가 성장하는 목표는 자기 삶의 공간의 확장이 아니라 책임져야할 현장에 대한 투신할 수 있을 만큼의 정열과 능력을 얻는 정도까지의 성장이다.

기독교 복음서의 겨자씨의 비유를 따오자면 작은 존재인 겨자씨가 자라서 공중에 나는 새들이 와서 깃들일 만큼의 성장인 것이다. 겨자씨의 성장은 땅에서 뿌리뽑힌 존재-공중에 나는 새-를 품어 줄 수 있을 만큼의 성장인 것이며 그 이상은 아니다. 헌신하고 가꾸어야 할 삶의 현장을 발견하고 향유와 즐김이 아닌 타자를 품어주는 존재를 귀하게 볼 수 있는가? 겨자나무는 백향목이나 무화과나무보다 그 멋과 위풍에 있어서 볼품없지만 그 볼품없음의 외형속에 뿌리뽑힌 자에 대한 품음의 삶이 있음을 보고, 이런 볼품없는 인생들을 크게 볼 수 있는 시야를 내 딸이 갖기를 소망한다.

다섯번째 이야기- 으뜸 헤엄이: 작음의 삶의 지속과 공동체 만들기

대안교육은 교수법을 넘어서는 삶의 운동(movement)이다. 명사가 아닌 동사이다. 이 운동은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구조적 폭력에 대해 타협이 없다. 구조적 폭력은 강하고 큰 자(다랑어)의 삶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작은 자의 공간과 삶을 제한시킨다.

큰 자는 이미 그 크기로 인해 이미 작은 자를 억압한다. 지리산 등정을 하다가 길가에 쓰러진 덩치 큰 고목을 만난 일이 있다. 살아생전에 그 큰 덩치로 인해 그늘을 만들어 주변에 다른 나무들이 성장하지 못하게 하더니, 쓰러져 죽은 지 수년이 지났어도 그 큰 덩치로 인해 다른 식물들이 눌리어 휘어져 자라고 있었다. 크기는 그 자체로 폭력일 수 있는 것이다. 존재함만으로도, 죽어서도 그 폭력은 지속되는 것이다.

대안교육은 사회적 약자의 고통과 눈물에 주목한다. 사회를 인간화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눈물 흘리는 자에 대한 주목에서 출발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 눈물은 당연히 약자, 작은 자의 몫인 게 현실이다. 대안교육은 약자를 큰 강자로 만들지 아니하고 약자들이 자신의 약함을 지키고, 상호결속을 통해 강자의 세계에 저항한다. 강자의 먹고 먹히움의 생존논리가 아니라 약자의 상호배려와 정나눔이란 연대의 생활양식을 통해 삶의 지형을 바꾼다.

그 크기는 자신의 몸통불리기가 아니라 작은 자들간의 교제의 크기인 것이다. 큰 자들의 세력을 상쇄시키는 변화의 능력은 작은 자들의 결속은 통해서 생겨난다. 사귐과 상호지원의 공동체를 형성함으로서, 이 새로운 공동체의 크기로 인해 먹고 먹히우는 세력을 무력화하는 현실적인 힘을 얻게 된다. 이 힘은 지배 (power-over)의 힘이 아닌 관계의 힘(power-with)인 것이다.

궁극적으로 큰 다랑어들이 자신의 삶의 방식을 포기하는 것 그리고 우리 모두가 큰 자, 강한 자가 될 필요가 없다는 것- 이 얼마나 놀라운 대안교육의 꿈인가.

(이 글은 2004. 6.20 이우학교 학부모연수회에서 본 동화비데오에 대한 개인의 감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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