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
글 수 12
‘뒤따름’에서 ‘우정’으로 -최완택목사님 회갑에 붙여

2004년 봄

인생이란 길을 가면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여러 만남의 사건을 통해 자신의 걸어가는 방향을 바꾸고 그 바꾸어진 방향이 이제는 선택이 되고 결국은 운명으로 수용하게 만드는 경험을 갖고 있을 것이다. 만남이 자신이 계획한 인생 스케줄이 아닌 외부로부터 예기치 않게 부여된 사건의 경험이라 한다면 선택은 그 사건을 의미화 하는 자신의 결단인 셈이요, 운명은 그 사건을 맛들이고 살아가는 삶의 근본태도라 볼 수 있다. 나에게 있어서 북산과의 만남은 단 한번의 사건이기 보다는 매우 긴 느린 여정의 결과이고 이 느릿한 관계는 멀리도 지나치게 다가섬도 아닌 적절한 거리를 두고 성장해 왔다고 볼 수 있다.

아버지가 직업군인을 그만두고 나서 우리 가족이 강원도 구철원에서 이사와 삼양동 돌산중턱 무허가 산동네 집에 둥지를 튼 것은 내 나이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였다. 당시 가난으로 인한 어머니의 불평과 아버지의 심한 알코올중독증이 내게는 별다른 기쁨의 기억을 남기지 못했다. 중학교 2학년때 친구의 소개로 찾아간 신일교회에서의 학생부활동이 그나마 의미있는 추억거리로 남아있다. 교회생활후 얼마 안되어 담임자이셨던 최원택목사가 미국으로 떠나고 동생 최완택전도사가 부임하면서 내게는 북산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중·고등학교 당시의 북산은 내게 있어서 대하기가 꽤나 어려웠다고 기억된다. 그는 일반적으로 기대되는 목회자 틀 속에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칠은 들사람의 분위기가 있었고, 눈에 힘이 들어가 있어서 때로는 매섭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말은 눌변쪽에 가까워서 따라잡기가 힘든 편이었며, 신에 대한 확신의 설교보다는 고민하는 한 인간의 모습을 보는 쪽에 더 가까웠다. 북산자신이 나중에 회고하면서 신일교회에서의 목회가 가장 열심히 한 시기에 속한다고 했는데, 북산에 대한 추억은 주로 원산도, 광릉 등에서의 여름학생 수련회, 설교에 대한 단편들 그리고 고등학교 때 따라다닌 그의 공동성서연구 참여를 통한 그에 대한 기억들이다.

지금도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가 신에 대한 믿음의 강요나 확신을 우리에게 주려고 애쓰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갈등과 고민의 시절에 확신이나 말씀에 대한 감격이 있어서 자신이 일찍 정리되었으면 더 나았지 않았는가 하는 당시의 갈급함도 없지 않았으나 그렇지 않았음에 대해 매우 감사하게 된다. 참 철없이 살았어도 훈계 없이 그대로 수용되었고, 수련회도 꽤나 노는 분위기였다. 몸으로 읽는 성서란 이름하의 공동성서연구는 찬송가이외의 민중가요가 불리워지고 그룹별 토론연구로 진행되어 모두 각자와 우리의 생각을 모으고 같이 결단하는 식이었다. 때로는 조잡한 생각들이었어도 제 스스로 생각하고 자신들의 고백을 엮어내는 이 작업은 그 때는 별 의미 없이 뒤따른 행동이었지만 나중에야 비로소 일반적인 교회관습체제에 길들여지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게 되고 또한 독단적 교회지도자에 대한 체질적인 저항이 몸에 배게 되었다.

당시에 킥킥 웃고 떠들며 때로는 혼나며 진행된 ‘몸으로 읽는 성서’라는 공동성서 연구 스타일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내 의식의 깊이에서 체화된 삶의 양식으로 자리 잡으면서 몸으로 사는 신앙에 대한 고민이 싹트기 시작하였고 이것이 내 영혼이 개화되기 시작한 토대가 되었다. 처음에는 가난문제로 상업학교를 가서 은행생활이라는 무지랭이의 삶 속에서 진리문제로 고민하게 되면서 일상적인 안주의 삶의 과제로부터 힘든 이탈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결국은 신앙의 초점이 믿는다는 지적체계가 아닌 온 삶, 온 존재로 응답하는 길을 모색하게 되었으며, 몸이 상징하는 육체성-갈증, 땀, 피, 고뇌-없는 신앙의 길은 허상이라는 삶의 자세를 갖게 되었다. 이로 인해 성공, 편안에 대한 내 내면의 욕구가 어느 정도 재갈을 물리게 되면서부터 진리체험을 향한 정착하지 못한 주변인으로서 방황을 하게 되었다. 이미 이루어놓은 것, 익숙한 것에 대한 ‘낯설음’이란 밤의 동료가 찾아와 터전이었다고 생각한 것을 뒤흔들어 놓는 것이었다.

그의 설교의 단편에 있어서 내가 오랫동안 간직하고 살아온 것은 ‘자유혼’의 정신이었고 그에 대한 목마름/갈증이었다. 신의 은총에 채워져서 노래를 부를 수 있지는 못했어도 목말라하는 인상은 확실히 보여주었다. 가장 남는 이야기는 그가 졸업설교 시간에 했던 문제의 설교, “자유혼”이었다. 결국 이로 인해 그다음부터는 졸업설교시간이 폐지되고 말았다고 하지만 거룩의 이름으로 갖는 허위성에 대한 깊은 그의 저항과 절망은 그대로 나에게도 전염이 되어버렸다. 신에 대한 담론에 빠져서 텅빈 종교언어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말하던 샘키인의 ‘춤추는 신’이나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희랍인 조로바’처럼 인간적인 것을 간직하고, 미완성과 제약성속에서 땅과 육체성을 통해 영원을 목말라하는 벌거벗은 인간형을 추구하였다. 이 벌거벗은 인간형은 이미 구원받은 자로서 환희의 노래를 부르는 지경에 도달을 하지 못했지만, 목마름의 절대경험도 삶을 지탱시키는 근거이자 에너지가 될 수 있음을 그는 보여주었다. 이는 마치 모든 것을 상실한 탕자가 지침과 절망 속에서도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일어서서 계속 걷게 하는 에너지가 바로 귀향에 대한 목마름이었던 것과 같았다.

자유혼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변형된 형태로 그의 설교 속에서 들려지곤 했었다. 그는 구유에 누운 아기예수의 탄생설화를 ‘먹이(음식)로 오신 예수’로 해석하면서 지극히 인간적이면서 자유혼을 지닌 존재를 성육신(incarnation)의 과제로 보았던 것이다. 이는 후에 나에게는 매우 놀라운 깨달음으로 다가왔었다. 마치 김지하가 천도교의 한 수령이 제시한 제사에 있어서 귀신을 모시는 향벽설위를 인간을 모시는 향아설위로 바꾸는 데서 새로운 문명사적 패러다임의 전조를 보았던 것처럼, 크리스마스의 중심주제와 관심의 대상이 ‘저 멀리 위의 신’에서 이 땅위에서의 자유혼과 인간화라는 인식의 변환의 문제를 제기하였기 때문이다.

북산의 자유혼에 대한 갈망은 북한산 어느 기슭에서 산길을 가다 만난 공초 오상순의 묘비의 글에 대한 언급에서도 극명하게 나타난다. “흐름위에 보금자리 친 나의 영혼.” 어둠과 허무의 시인 공초의 ‘흐름위에 보금자리’라는 자유혼의 이야기는 최근에는 순명(順命)에 대한 권고로 나타나고 있지만 적어도 20여 년 전에는 이는 비판적 저항의식의 발로였다. 비르질 게오르규의 풍란이야기-작은 존재로서 땅에 살수 없어 하늘 허공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풍란- 그리고 노예 스파르타쿠스의 저항과 초저녁 어둔 하늘의 개밥바라기(샛별)이야기는 아직도 귀에 맴돌고 있다. 최완택목사는 내 학생부시절에는 사팔뜨기 혹은 옆으로 가는 게로 통했었다. 이는 기존의 종교적 권위에 대해 삐딱하게 대하는 그의 태도에서 기인한다. 심지어 산행을 할 때도 그는 무리들이 가는 길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험한 길이어도 호젓한 길을 일부러 찾았으며, 쉽게 갈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손잡이대도 의지하지 않을 정도로 고집스럽게(?) 자유의식을 살고자 했다.

나는 상고를 졸업하고 은행생활을 할 때, 미국에서 돌아온 형 최원택목사가 그 교회로 오면서 북산이 다른 곳으로 가게 되어 수년간을 뵙지 못하고 지내게 되었던 적이 있다. 한 3년을 직장 생활하다가 폐결핵이 걸려 에덴기도원에서 요양을 하고 작심하여 이제는 없어진 사직터널 근처의 감리교신학교에서 입학시험을 치룰 때 성경시험감독을 하게 된 북산을 뜻밖에 만나 짧은 인사를 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2개월인가 지나서 내가 근무하는 곳에 나를 만나러 들리셨다. 학생부시절부터 다른 동료들보다 나는 왠지 북산을 매우 어려워하였던 터라 한편으로는 놀라기도 했지만 그에게 별로 가치있는 인물이 아닐 나를 일부러 찾아와 주었다는 데 대해 매우 감사한 경험으로 갖고 있었다. 그 인연인지는 몰라도 그 후 나는 계속적으로 용광교회, 민들레교회에 발걸음을 하게 되었다. 내가 북산의 인간에 대한 사팔뜨기 관점에 주목을 하는 것은 나를 찾아와준 경험에서 보듯이 소위 성공적인 사람이나 잘 나가는 목사에 대해서는 철저한 경계심과 비판을 가하면서도 내가 느끼기에는 실지로 별 영양가없다고 생각되는 인물들에 대한 스스럼없는 포용을 한다는 사실이다.

철부지 때부터 그는 교회담임자로 부임하면서 내 스승의 역을 했지만 나로서는 그게 쉽사리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다. 내 수줍은 성격과 그의 독특한 옹고집 분위기는 그리 잘 어울리는 편은 못되었기에 새김질하는 긴 시간이 걸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못난 이에 대한 친화력은 나를 그의 삶의 자장 속에 끌어넣는 인력으로 작용하였다. 이는 1980년 12월 9일자로 박성용군에게 라고 써진 빛바랜 그의 첫 수상집 “아름다운 순간”을 읽어보면서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즉, 그 수상집에 깊이 흐르는 일관된 관점이 있다면 그것은 그의 반편 인생들에 대한 깊은 품음이었다. 뒤쳐진 자, 작은 자들의 삶을 통해 영원의 징조를 읽어내는 그 능력은 목마름을 통해 얻어진 개안(開眼)에 의해서라고 믿는다. 목마름이 승화되어 이야기가 터져 나오게 되었고 이 작은 이야기들로 인해 우리가 목축임을 받게 되었다. 결국은 그 이야기로 인해 더욱 목마른 자들을 많이 만들고 말았지만. 일상의 질박함속에 담긴 이슬 같은 작은 메시지에 감명을 받은 것은 목마름으로 텅 비워진 내면의 울림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미국에서의 10년간 유학생활을 청산하고 2001년 겨울에 들어와서 뵙게 된 최목사님은 많이 변화된 모습이었다. 세월이 주는 인생연륜만이 아니라 눈에 힘이 들어갔던 사팔뜨기의 단호한 목소리는 부드러워지고 눈도 따사로워졌으며, 설교시간에 쉽게 보지 못했던 웃음을 이제는 간간히 보게 되었다. 수십 년의 세월 속에 거의 언제나 같은 수의 교인들을 대하는 그의 변함없는 ‘내버려 두는(?)’ 목회와 더불어 수많은 자유혼의 홀씨를 사방에 날려 보내는 그의 거침없는 삶의 모습을 본다. 몸으로 산을 만나 흐름을 살고 그 흐름속에서 만남을 이야기하며, 거듭 삭혀서 전해지는 음력 24절기 메세지속에 보듯이 ‘생명과의 감응’의 세계로 저만치 훌쩍 건너신 것 같다. 두어 달 전쯤인가 민들레 주보에 에덴기도원에서 나뭇잎을 훑으며 지나는 바람 소리에 사무치는 심경으로 밤을 설쳤다는 글을 읽었다. 그 정도의 인생경륜이라면 어느 정도 정착도 했을 법한데, 아직도 이룩함과 쌓음의 힘보다 무화(無化)시키는 소리에 자신의 전존재가 떠는 ‘흐름의 生’인 것이다.

10대의 소년이었던 나는 어느 새 중년이 되었고 아직도 북산을 만나면 철부지 애가 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가 내게 대해주는 것도 많이 달라진 느낌이다. 이 글을 쓰면서 최목사의 우리 부부에 대한 주례사를 테이프로 다시 들어보았다. 결혼식때는 경황이 없어 놓친 메세지중에 그가 중학교 때 가르치고 지켜본 내가 이제는 ‘같은 길을 함께 가는 우정’을 나눌 수 있게 되었다는 그의 축사를 새삼 듣고 생각에 빠지게 되었다. 처음 만남이후 뒤따름과 길들임의 삶을 지나, 신학생 신분이 되고나서부터 지금까지의 긴 신학적 사색의 여로에서 최완택은 최완택이고 나는 나이어야 한다는 자기 삶의 추구에 대한 내면의 긴장이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었다. 제 눈, 제 소리를 갖는 자유혼에 대한 추구가 여러 차례의 위기와 방향전환을 가져왔고 오래 지속된 내면의 긴장은 다행히도 귀국하기 직전 퀘이커의 생활관 펜들힐(Pendlehill)에서 6개월간 보내면서 무언가 꼭지가 떨어져 나간 듯한 경험을 체험하면서 그 긴장이 없어져 버렸다. 무거운 중압감이 없어진 후로 참으로 기쁘게 그를 바라 볼 수 있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가 자신을 낮추어 같은 길을 가는 우정을 나눌 수 있게 되었다는 스승에 대해 나 또한 소중하게 이 운명적인 만남이 이제는 우정 속에서 승화될 것으로 믿는다.

지금 고백하건대 중학교 시절부터 북산을 알고 지내왔다는 것이 그동안 내게는 자랑보다는 고민과 무거운 짐이 되었던 것은 철부지 어린 시절에 너무 일찍 다가와 지워준 자유혼이란 과제 때문이었다. 그때부터 줄곧 스승과 제자사이였으니 이 오랜 불공평(?)한 관계로 인해 사실 가까이 있었어도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이제는 종이 아닌 벗으로 부르겠다고 하신 예수님처럼 그가 내게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존재로 나를 ‘놓아준’ 것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한다. 참으로 기이한 인연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또 하나 있다. 어려서 그를 만났을 때 북산은 공동성서연구에 큰 열정을 쏟아 부었었다. 거기서 내가 성장한 셈이다. 그런데 귀국후 만났을 때, 돌연 그는 노년에 다시 공동성서연구에 불을 지피고 있었던 것이다. 거의 20년 가까이 중단되었던 공동성서연구를 자기 삶의 과제로 다시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말씀은 신실하신 주님의 약속이자 여기에 자신의 일생을 투신하며 살아온 인생이 함께 공유할 약속이라 나는 믿는다. 그가 다시 시작하여 얻게 될 갱생과 변화된 이야기로 인해 다시금 목마른 인생들을 일으켜내고 새로운 무리로 훨훨 춤을 추며 제 길을 가는 환상을 보게 된다.
엮인글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지적 정직성과 대화를 위한 순교자, 변선환 평화세상 2015-06-09 2494
11 어두운 심연위로 활화산이 되어 작열한 영혼, 키에르케고르 file 관리자 2009-11-22 2746
10 아씨시의 프란체스코-온유와 겸손으로 우애의 대안적인 세상을 꿈꾸던 신의 어릿광대 관리자 2009-07-09 2615
9 물질적 가난과 영혼의 가난으로 평화의 빛을 밝힌 마더 데레사 file 관리자 2009-03-07 2770
8 비폭력의 스승 간디 - 세계의 무장 해제와 가슴의 무장 해제는 같이 간다 file 관리자 2008-11-24 2732
7 허무와 무의미의 소용돌이 속에서 존재의 용기에로의 감행-폴 틸리히 file 관리자 2008-09-16 2913
6 행동하는 관상가 토마스 머튼 (머튼의 평화행동) file 관리자 2008-09-15 2696
5 시몬느 베이유, 고통과 박탈을 통해 빛나는 영혼의 진주를 만든 세속의 신비가 file 관리자 2008-05-10 3807
4 민족음악가 로광욱 선생님 방문기 관리자 2005-11-11 2707
3 어머니 칠순 이야기 관리자 2005-07-18 2830
2 대안교육에 대한 명상 관리자 2005-06-11 2779
» "뒤따름"에서 "우정"으로 -최완택목사님 회갑에 붙여 관리자 2005-06-03 2723
박성용박사 | ecopeace21@hanmail.net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