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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의 무장 해제와 가슴의 무장 해제는 같이 간다

     -사회정치적 영역에서 신의 얼굴을 대면하였던 비폭력의 스승, 모한다스 간디-


                                                                                               박 성 용
(법무사 저널 2008년 11월-12월 호 기고)


유엔은 간디의 생일인 10월 2일을 ‘세계비폭력의 날’로 정하고 21세기 첫 10년을 ‘평화와 비폭력 문화교육 10년’으로 정했다. 그만큼 폭력의 문제는 이제 지구공동체의 중요한 과제가 되었으며, 세계는 간디(1869.10.2~1948.1.30)의 비폭력 행동은 평화롭고 정의로운 사회를 구축하는 데 많은 통찰을 의존하고 있다. 간디는 대중에게 성인으로 혹은 계몽가로 존중을 받고 있었지만 이는 간디가 자신과 자신의 삶을 이해한 것과는 매우 거리가 있다. 그가 행한 정의와 자유를 향한 대중운동, 불가촉민과의 연대, 스스로 선택한 명상과 금욕, 가난, 시민불복종 그리고 공동체(아쉬람) 생활은 진리에 대한 그의 이해와 이에 대한 실천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것이 도로시 데이, 넬슨 만델라, 달라이 라마, 대주교 투투, 토마스 머튼을 비롯한 전 세계의 주요 영성가와 평화활동가들에게 파장을 준 근본 알짬이기도 하다. - 박성용 비폭력평화물결 공동대표



평화와 정의, 해방의 길은 우리의 가슴과 일상생활의 정화에서 시작된다.


상인 계급에서 태어난 간디의 어린 시절은 스스로의 고백에 따르면 구구단을 외우기 힘들 정도로 지능과 기억력이 낮았고 매우 수줍어해서 학교가 끝나면 누구와 이야기하는 것이 싫어서 달음질하여 집으로 올 정도였다. 이러한 수줍음은 어느 운동에도 끼어 놀지 못하고 오직 책만 보게 했으며, 겁이 많아 도둑, 유령, 뱀 그리고 어둠을 매우 무서워할 정도였다. 그러나 한 가지는 특이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거짓말에 대한 거부였다. 15살 때 형의 팔찌에서 금 한 조각 도둑질한 것에 대한 자백을 통해 아버지의 말없는 눈물을 통한 용서받음의 경험은 이후의 삶에서 거짓에 대한 민감성을 강화하였다.  


간디의 자서전 전반부를 보면 그가 채식에 일찍 눈을 떠서 이에 대한 책들을 섭렵하고 채식모임에서 활동했으며 생활의 간소화를 위한 여러 끈질긴 노력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수줍음은 청년기에 들어서도 지속되어 사교적 모임과 대학 수업에서는 벙어리가 되고 연설의 기회를 얻을 때는 몸이 떨려 읽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고 고백한다. 18세에 법학공부를 위해 영국유학을 떠났을 때는 영국문화에 맞게 서양인이 되기 위해, 처음에는 춤추는 법, 바이올린 연주법까지 배우려 했을 정도였다.


변호사자격을 따고 1891년 인도로 되돌아왔지만 그 자격증을 가지고 어떻게 변호사 일을 하는 지도 전연 알지 못했으며, 아주 단순한 작은 소송사건을 하나 맡았었지만 그나마 재판정에서 수줍음으로 말이 안 나와 실패하고 수임료를 되돌려 주기까지 했다. 일자리를 구할 수가 없어서 남아프리카에서 인도 사람들을 위해 변호사 일을 해보라는 친척들의 권유로 1893년 “절망 반 기대 반”으로 그는 남아프리카행 배에 몸을 실었다. 도착하자마자 여행중도의 열차에서 1등 칸에서 밖으로 내동쳐진 인종차별의 경험이 그의 삶을 전적으로 방향으로 인도하게 되었다. 자신의 개인적 고통의 경험을 공공의 차별에 대한 해결을 위한 봉사로 전환시키는 중대한 결정을 하게 된 것이다. 


추위 속에서 떨고 있는 나를 남겨둔 채로 기차는 사라졌다. 내 생명 자체에 위협을 느껴 나는 캄캄한 대합실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백인 한 사람이 있었다. 나는 그가 두려웠다. 내 사명은 무엇인가, 내 자신에게 물었다. 인도로 돌아가야 하는가, 아니면 나의 조력자 되시는 하느님과 함께 앞으로 나아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에 직면해야 하는가? 나는 남아서 고통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나의 적극적인 비폭력은 그날 시작되었다. 하느님은 그날 여행에서 그 시험을 선사하신 것이다. 그것은 내 일생에서 가장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또 하나의 9.11, 비폭력운동이 점화하다


남아프리카의 인도인의 생활 참상을 눈으로 보고 겪으면서 간디는 수백 명의 의뢰인을 변호하고 불의한 법률에 반대하는 기사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러던 중 남아공 트란스발 정부가 인도인 차별을 위한 새로운 법률제정을 준비하는 것을 알고 간디는 1906년 9월 11일 요하네스버그의 임페리얼 호텔 광장에서 3,000명이 이 법안을 반대하는 집회를 소집하였다. 무슨 말을 할지 모르고 있던 그에게 한 연설가가 죽을지라도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 법안을 반대한다는 말에 해답을 얻은 그는 참석한 모두와 함께 설사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고 고문을 당하고 죽는다 할지라도 비폭력 저항을 하기로 하느님께 서약하였다. 이렇게 하여 우연의 일치이지만 2001년 9.11사건(및 테러와의 전쟁)과는 전연 다른 사티아그라하(진리에 굳건히 섬; truth force) 운동이 같은 날에 일어나게 되었고 몇 달만에 1500명의 인도인이 체포되고 구금되었다.   

간디는 특히 러스킨이 쓴 “이 나중 온자에게도” 저서에 감명을 받고 또한 요하네스버그 외각에 있는 트라피스트 수도원의 방문 경험을 통하여 “친밀한 사귐, 기도, 청빈 그리고 노동의 삶”에 크게 감동을 받고 자신도 아쉬람을 설립하였고 이는 나중에 인도에서도 건립하여 거기서 살면서 사티아그라하를 실천하는 사람들을 훈련시키고 스와라지(자립자치; swaraj)를 실천할 통로가 된다. 여기서는 천민인 불가촉민도 받아들였고 진리, 비폭력, 금욕, 청빈, 두려움 없음, 육체노동, 모든 종교에 대한 관용, 자기 옷 만들어 입기 등 14가지 항목을 서약했다. 그들은 함께 기도하고 먹고 농사짓고 신문을 발행하여 대중을 훈련시켰고, 독립을 위한 비폭력 투쟁 중에 겪게 될 고통과 죽음마저도 함께 각오했다.


1914년 7월 결국 남아프리카 정부와의 협상을 성공적으로 마친 뒤 간디는 그 이듬해 초 영웅으로 환영받으며 인도로 돌아왔다. 한 해 동안 그는 열약한 3등간 열차를 타고 인도전지역을 돌아다니며 인도의 현실을 배웠다. 그리고 아메다바드에도 아쉬람을 세우고 거기서 250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티아그라하를 위한 공동체 생활방식을 살아갔다. 여기서 파괴적인 힘을 지닌 폭력에 영혼의 힘으로 저항할 수 있는 일편단심의 신념과 확고한 자기 위탁에 대한 영적 수련과 자기 절제 그리고 자치능력을 발전시키는 생활양식을 실험해 나갔다.


나에게 있어서 하느님을 아는 유일하고 확실한 수단은 비폭력 곧 사랑이다


인도에서 대중적인 사티아그라하의 본격적인 적용의 예로서는 1919년 1차 세계대전동안 독립운동을 차단하기 위해 인도에 가해졌던 억압조치의 유예-일명 롤레트(Rowlatt) 법안-에 대항하여 하르탈(hartal; 상점문을 닫음)을 실시하고 기도와 단식으로 보내는 간디의 호소였다. 4월 6일 가계와 공장이 문을 닫고 수백만 사람들이 거리 시위에 참여함으로써 영국뿐만 아니라 간디 자신도 그 결과에 놀랄 정도였다. 이듬해부터 영국통치에 반대하는 대대적인 불복종 운동을 호소함으로써 1922년 3월 간디가 선동죄로 재판에 회부되었을 때 그는 “악에 협조하지 않는 것은 선에 협조하는 것과 똑같은 의무가 있다”고 재판장에게 응답하여 6년의 최고형을 받았다.


4억이 되는 인도국민이 수만밖에 안 되는 영국군에 의해 지배되는 현실의 이유를 영국의 지배에 대한 인도의 협조에서 찾은 그는 악에 대한 비협조운동과 건설적인 프로그램의 실천운동으로서 차크라(물레) 돌리기를 실천하도록 하였다. 이 물레돌리기는 대중들에게 의식의 전환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각성을 인도국민들에게 가져왔다. 또한 1930년 3월에 소금 사티아그라하를 선언하면서 해안까지 약 400km를 걸음으로써 시민불복종운동을 점화시켰다. 그 결과로 5월에는 2,000명의 자원봉사자를 통해 다르사나 염전 산지로 행진하게 하였다. 20여 명씩 조를 짜서 소금공장 입구로 들어가면 영국 군인이 쇠곤봉으로 무자비하게 내리치는 일이 반복되면서, 저항자는 아무런 방어 없이 맞고 쓰러지면 다시 다른 조가 이어지는 이 광경이 전 세계에 기사화되면서 세계가 충격을 받게 되었다. 이 사건이후로 지속되는 시위로 10만 명이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대가 세상에서 보고자 하는 변화가 되어라


불가촉민과 관련된 한 사건이 촉발되어 간디는 수천 년간 지속해온 불가촉민 제도를 폐지시키기 위해 1932년 9월에 감방에서 목숨을 건 단식을 시도하면서 인도전역은 충격에 빠지게 되었다. 자살과 다름없는 행위여서 수많은 사람들이 말렸지만 결국 힌두교 지도자들은 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불가촉민을 사원에 받아들이도록 결정하였다. 이 사건이후 간디는 인도에서 가장 빈곤한 지역이자 불가촉민들의 지역인 와르다 지역으로 이사하여 남은 인생을 거기서 보내면서 독립이후의 인도를 위해 인도 촌락의 생활개혁운동에 착수하였다. 이는 사티아그라하가 단순히 저항만이 아니라 건설적인 프로그램을 통한 대안 모색(“선에 대한 협력”)에 더 중요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말년에 이슬람교도들과 힌두교도들 간의 분쟁과 폭동을 막기 위해 78세의 노년의 몸에도 불구하고 그는 평화의 순례자로서 가장 오지이자 절대빈곤층이 있는 노아칼리 지역을 다니며 일치와 화해를 호소하였다. 처음엔 간디를 잘 모르던 지역민들이 적개심을 버리고 돌아오게 되었다. 그는 핵무기 소유와 사용에 대해 끊임없이 반대했으며, 1947년 8월 15일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할독립이 선언되면서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들이 대량이주하면서 두 달 동안 수십만이 희생되는 사건을 목도하면서 병약한 그의 단식이 시작되었다. 이슬람과 힌두교 지도자들은 그의 단식을 끝내기 위해 폭력의 행위를 멈추었다.


간디는 이슬람과 힌두교사이의 분쟁에 대한 해결을 위하여 훈련받은 시민 평화군인 상티 세나(Shanti Shena)을 1948년 2월 초 전국에 소집하였으나 1월 30일 힌두교광신자에 의해 암살되고 말았다. 간디는 진훍과 대나무로 지어진 작은 움막과 물레, 짚으로 만든 돗자리, 앉은뱅이 책상 그리고 책 몇 권이 꽃힌 선반 두 개만을 남겨 놓았다. 그의 사티아그라하 및 시민평화군의 개념은 1999년 헤이그평화회의 이후 국제비폭력평화세력(nonviolent peaceforce)이름으로 다시 부활되어 분쟁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진리와 비폭력 그리고 자기 고통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사티아그라하는 물리적인 힘이 아니며 적의 파멸을 목표로 하지 않는 순수한 영혼의 힘이며 진리는 영혼의 알짬이다. 이는 언제나 악을 선으로, 분노를 사랑으로, 비진리를 진리로 폭력을 비폭력으로 극복하고자 한다. 이러한 실천에는 그의 진리에 대한 이해가 깔려있다. ‘사트(sat; 진리)’란 말은 또한 ‘있음’을 의미하며 따라서 진리이외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실해지면 진실해질수록 하느님에게 더 가까이 있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진실한 정도만큼만 존재합니다.” 이러한 이해에서 진리를 따르는 만큼 자기 자신을 찾게 되며, 진리이외는 없기에 그것을 막을 장애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간디는 확신한다.


간디는 더욱 대범하게 ‘하나님이 진리이다’라는 기존의 종교전통의 교리적 이해를 뒤바꾸어 ‘진리가 하나님이다’라는 윤리적 실천으로 바꾸어 놓았다. 따라서 생각, 말 그리고 행동에 진리가 있어야 하고, 진리가 우리의 생명의 호흡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진리의 추구는 타파스(tapas; 자기 고통)를 통해 상대의 선을 이룩하고, 자신의 정화를 통해 오류를 정정하게 된다. 진리는 여기서 진리를 실현하는 비폭력은 과정속의 목적이며, 단순히 죽이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죽어 사랑을 드러내는 적극적인 변화의 힘으로 이해된다. 비폭력은 인간의 가슴을 녹이는, ‘고통을 끌어안는 사랑법’이므로 언제나 효력을 발휘한다고 간디는 말했다.


자신의 삶의 유일한 목적을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는 것이며, 그 하나님은 우리 모두 안에 계시기 때문에 인간을 섬김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을 찾게 된다고 간디는 주장한다. 따라서 사회정치적 영역은 영적 수행의 영역이 된다. 그리고 보편적이며 어디에나 존재하는 진리를 맞대고 보려면 가장 보잘것없는 미물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해야 하고 삶의 어느 부분도 소홀히 여길 수 없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자기 정화를 통해 마음의 순수함을 지킴으로 선을 실현하게 된다. 이를 위해서는 군인이 훈련받는 것처럼 비폭력은 더 많은 훈련을 일생을 통해 요구되기에 이를 아쉬람을 통해 구현하고자 하였다. 마틴 루터 킹은 간디의 의미에 대해 이렇게 논평했다: “인류가 진보하려 한다면 간디를 피해 갈 수 없다. 우리가 그를 무시할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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