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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로우와 자아의 성장

 


아이가 말하기를 배우는 것은 누군가에게 질문할 수 있다는 점이 즐겁기 때문이고, 걷기를 배우는 것은 가고 싶은 곳에 가기 위해서다. 배움은 재미있다. 어느 순간 자전거에서 넘어지지 않고 버틸 수 있게 된 아이나 난생 처음으로 소매치기를 성공한 비행 청소년의 환희는 플로우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다.

 

그리고 플로우 체험은 모두 자아의 성장에 기여한다. 플로우 상태에 들어가려면, 우선 의도를 정해야 하고 자신이 잘하고 있는지 평가할 방법이 있어야 한다. 자아는 주로 목표와 피드백에 관한 정보로 구성된다. 따라서 플로우가 개입하는 사건을 겪을 때마다 우리는 과거와 조금이나마 달라진다. 자신이 누구인지에 관한 정보가 개정되는 것이다. 일례로 자전거를 탈 줄 알게 된 아이는 자기가 두발 저전거를 정복했으니 어른에 더 가까워졌다는 생각으로 자부심을 느끼며, 소매치기를 한 아이는 드디어 이 되었다고 느낀다.

 

플로우가 자아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복합성이라는 개념을 되짚어보는 것도 좋다. 앞서 우리는 유기체의 복합성이 분화와 통합에 크게 의존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연체동물이나 컴퓨터나 마찬가지다. 심지어 자아도, 플로우는 자아의 이 두 측면과 모두 연관된다.


플로우를 경험하려면 일단 행동할 기회, 즉 도전을 인식해야 한다. 여기에는 주로 분화 과정이 개입한다. 도전 상황을 인식하려면 검증된 방법을 따라가기보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이고, 독창성을 추구하며, 호기심을 발휘하고, 위험을 감수하며, 실험정신에 따르는 법을 알아야 한다. 대게 우리는 자신의 기질이나 기술에 맞아 떨어지는 도전을 발견하게 마련이다. 운동신경이 좋은 아이는 신체적인 도전과 경쟁에 끌리고, 소리에 특히 민감한 아이는 악기에 매료된다. 각 사람은 서로 조금씩 다른 행동의 기회에 뛰어들게 되면서, 자신의 한계와 잠재력을 잘 알게 되고 더욱 독특한 인간이 된다.


복합성의 두 번째 측면은 기술 습득과 관련된다. 사람이 어떤 도전을 정복할 수 있게 되면 그 활동에 필요한 기술이 그 사람의 능력에 편입되는데, 이는 통합과 연관된다. 기술을 터득하려면 절제와 인내가 필요하고, 새로운 기술을 자아의 다른 특성과 우선순위의 일부로 만들려면 어느 정도의 지혜와 자각이 필요하다. 아이들은 거의 대부분 시기는 달라도 한번쯤은 음악에 매료되고, 악기 연주를 배우고 싶어 한다. 그러나 청중 앞에서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연주기술을 터득하는 아이는 비교적 소수이고, 일한 이이 중 일부는 소리의 물결에 온 인생이 휩쓸리게 된다. 가족, 친구, 인생의 다른 즐거움이 모두 무시되고 마침내 잊힌다 그런 경우 음악을 다른 폭표와 통합하지 못하여 자아가 복합성을 띄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정반대의 상황을 조화롭게 안배하는 사람이 바로 초월인이다. 이러한 사람은 독창적이면서도 체계적이고, 독립적이면서도 책임감 있으며, 대담하면서도 절제되어 있고, 직감적이면서도 합리적이다. 자신의 독자성에 건강한 자부심을 느끼면서 타인에게 깊은 관심과 흥미를 보인다. 사람은 이러한 양극단의 이쪽이나 저쪽으로 쏠리기가 쉬워서, 양극단에 동시에 존재하기란 훨씬 어럽다. 하지만 이러한 이율배반 같은 두 과정이 조화를 이룰 때만 진정으로 진화의 물결에 동참할 수 있다.

 

영성과 지혜

 

초월인이 되려고 한다면 먼저 기술을 쌓는 데 집중해야 할까 아니면 도전을 인식하는 능력을 기르는 데 집중해야 할까? 답은 이렇다.

유기체라면 반드시 동시에 모든 면을 개발해야 한다.”


먼저 빼대를 세우고 그런 디에 근육을 길러낼 수는 없으며 신체의 일부가 나머지 부분 없이 독자적으로 완벽해질 수도 없다. 다시 말해서 기술이 없는 사람은 도전을 인식할 수 엇고, 도전에 직면하지 않으면 자신의 기술을 알 수 없다. 현실에선2가지가 동시에 발전되지만 글쓰기는 선형으로 진행되므로 여기서는 한 번에 하나만 살펴보아야 한다. 먼저 초월로 이어지는 기술이 무엇인지 고려해 보자.


복합적인 문명에 도달한 대다수 문화권에서 가장 존중받는 자질은 특별한 정신 과정과 연관된다(여기서는 더 나은 표현이 없어 영적이라고 부른다). 영적 기술이란 사람들이 생각과 감정, 의지에 조화를 증진하는 밈을 조작하여 경험을 직접적으로 통제하는 능력과 연관된다. 이러한 기술을 활용하는 이들을 샤먼, 성직자, 철학자, 예술가, 다양한 종류의 지혜로운 사람이라 일컫는다. 이들은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기억에 남으며, 조언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그 존재 자체가 공동체에서 귀중하게 평가된다.


언뜻 보기에는 어째서 대다수 사회에서 영적인 공헌을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는지 이해하기가 어려울 rt이다. 진화의 관점에서 그들은 실제로 생존 가치가 없는 듯 보인다. 농부와 건축가와 상인과 정치가와 과학자와 노동자들의 노력은 분명히 눈에 보이는 이익을 생산하지만, 영적 활동이 달성하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온갖 종류의 영성에서 공통적인 요소는 인간 의식에서 엔트로피를 줄이려고 한다는 부분이다. 영적 활동은 충돌하는 욕구 사이에서 조화를 이루려 하고, 우연한 사건들에서 의미를 찾아내고, 인간의 목표와 그 목표에 작용하는 자연의 힘 사이에 화해를 추구한다. 개개인의 경험에서 선과 악, 사랑과 증오, 쾌락과 고통 같은 요소들을 구별하여 복합성을 증진시킨다. 영적 활동은 이러한 요소들을 만인이 접할 수 있는 밈에 표현하려는 것이고, 각 요소가 서로서로 그리고 외부 세상과 통합되도록 이끈다.


마음을 조화롭게 하려는 이러한 시도는 초자연적인 힘을 믿는 마음에 의존할 때가 많지만 늘 그렇지는 않다. 여러 동양종교나 서양 고대 스토아 철학은 지고의 존재에 의지하지 않으면서 복합적 의식을 개발하려고 시도했다. 힌두 요가나 도교와 같은 영적전통은 사회의 엔트로피를 경감하려는 데 관심도 보이지 않고 마음의 조호와 통제에만 집중한 반면, 후기 유교는 사회질서 추구에 일차적으로 관심을 두었다. 어떻든 간에 그러한 시도에 각 문화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보면 분명하다. 영적 수단이 없다면 사람들은 낙심하고 혼란스러워하고, 홉스가 말하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현상이 더욱 두드러진 특징이 될 것이다.


기술이 더더욱 발달하는 현대 사회에서 영성은 쇠퇴하고 있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영적인 이치를 떠받드는 밈이 시간에 따라 신뢰성을 잃어가는 성향이 있어서, 그것으 다시 또 새로운 형태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기독교의 기본 교리들 가운데 여러 가지가 거의 2,000년 동안 서양의 영적 가치관을 뒷받침하다가, 근래에 들어 과학이나 처학의 결론과 충돌하게 된 시긷. 종교는 그 힘을 상당히 잃어버렸으나 과학과 기술은 그 가치관을 대체할 설득력 있는 가치관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서양의 자유주의적 인본주의도, 동부 유럽과 구소련에서 극적으로 실패한 사적 유물론도 그것을 받아들인 사회에 영적인 양분을 제공해주지는 못했다. 전례 없던 물질적 풍요에 빠진 미국은 개인과 사회의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증상을 겪고 있다. 자살률, 폭력 범죄, 성병, 미혼임신 비율이 증가하고 있다. 정치가와 기업가의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행동으로 확산되는 경제적 불안정 증대는 말할 것도 없다. 이러한 문제를 잘 드러내 보여주는 것으로 지도자들, 이를테면 부시 대통령 같은 사람이 선거 때 가족의 가치와 애국주의에 호소하면서 사회 구성원 대다수와 연관도 없는 진부한 문구를 써먹은 방식이 있다. 본능적으로 우리는 대통령이 좋은 뜻으로 말했다는 것을 알고 또 그 말에 상당 부분 동의할지도 모르지만 그 말에는 그것을 뒷받침하는 지적인 신념이 없다.


과거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유물론적 이데올로기로 사람들이 호란과 냉소주의에 빠져 뭔가에 갈증을 느끼게 되었고 급기야는 과거에 이미 신뢰를 잃은 종교와 민족주의 사상을 다시 받아들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럴듯한 가치체계의 토대가 될 새로운 통합, 과거 종교의 지혜와 현재 지식을 결합할 통합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문화권을 마론하고 영성의 정수는 의식을 유전 명령의 속박에서 자유롭게 하려는 노력이다. 기독교의 십계명은 요가 수양이나 불교 의례나 실제로 알려진 거의 대다수 종교의 관습과 마찬가지로 의식이 자연적인통로에만 집중되지 않도록 보장하려는 시도다. 예컨대 전통적인 기독교의 칠대죄악에는 생물학적으로 말하자면 우리에게 이로운그러나 계속 진화하려면 그다지 좋지 않은 행동에 몰두하지 않게 막아주는 밈들이 있다.


우리 시대의 한 가지 문제는 자제력을 발휘하게 해주는 효과적인 밈이 거의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다수 사람에게 죄악이라는 개념은 무의미할 정도로 구 시대의 것이 되었고, 복합적인 목표(좋은 시민, 직업적 자긍심, 법률과 질서, 절제와 책임 등의 개념) 에 힘쓰게 하는 세속적인 방법역시 우리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개개인이 자기 수양의 필요성을 이해하도록 하는 일은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해졌다. 아마도 미래를 바꾸려면 주의력을 마지막 한 줌까지 모두 투자해야 한다는 점을 이해한다면, 우리도 좀 더 가까이 자연스러운 욕심을 절제하고 복합성에 응하려 할 것이다. 결국 그것은 그리 나쁜 거래는 아니다. 여분의 쾌락을 내주는 대신, 늘 흥미로운 영적 성장의 기쁨을 얻게 될 것이므로.


영성과 연관된 것으로 지혜가 있다. 지혜는 아마도 우리가 여기서 초월인이라 부른 사람과 가장 밀접하게 관련되는 자질이요, 복합적인 자아의 주요 특징이다. 성경에서도 이렇게 명했다.

지혜는 무엇보다 중요하니, 지혜를 얻으라.” (잠언 4:7)


하지만 지혜란 무엇인가? 지혜라는 개념은 역사적으로 문명을 막론하고 언제나 매력적인 것이었지만 과학은 그에 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세기 동안 서양에서 추구한 지식은 외부 사물과 사람을 통제하려는 데에 점점 집중되었다. 영성이나 지혜와 같은 미묘한 문젤다룰 여력은 거의 남지 않았다. 최근에 이르러서야 심리학자들이 거기에 주목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다시금 느끼게 되었다.


지혜에는 3가지 다른 측면이 있다. 첫째로 지혜란 앎의 방식, 인지 기술이다. 둘째로 지혜란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일, 덕을 행하는 특벼한 방법이다. 마지막으로 지혜란 개인적으로 좋은 것이다. 지혜를 실천하면 내적 평화와 즐거움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성’ ‘과학적 지식’ ‘천재적 재능이라 부르는 인지 과정과 지혜를 구별하게 해주는 특징이 3가지 있다. 첫째로 지혜란 경험의 변화무쌍하고 피상적인 외면을 다루지 않고 그 이면에 있는 지속적이고 보편적인 진시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모든 지식의 근본이 신이라고 간주되었기에 토마스 아퀴나스도 이렇게 적었다.

전 우주의 지고의 원인, 즉 신을 절대적으로 생각하는 이를 우리는 무엇보다 지혜롭다 한다.”


과학자들은 어느 정도의 나이가 되면 지혜로워져야한다고 느끼고, 전문 분야만 파고들기를 그만두고 우주의 본질에 관해 폭넓게 의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아인슈타인도 바로 그러한 시기에 양자역학을 거부했다. 신이 우주의 운명을 결정하려고 주사위를 굴리지는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전문 분야를 뛰어넘어 지혜를 추구하는 과학자는 동료들에게 금세 신뢰를 잃고 만다.


그러나 보편적 진실을 찾으려는 탐구는 분명 뛰어난 과학자나 철학자만의 영역이 아니다. ‘마야의 베일에 갇히지 않은 이라면, 외면을 꿰뚫어보고 본능과 사회의 명령에 저절로 따르지 않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느 정도는 지혜를 얻은 것이다. 지혜를 얻는 첫걸음은 자신의 감각과 믿음을 맹목적으로 신뢰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깨닫고도, 불완전한 인식 너머에 있는 진실을 이해하려고 하는 자세다. 그러한 태도는 대학에 간 사람에게만 제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어설픈 지식이 위험하다는 속담이 적용되는 사람 중에는 좁은 분야에서 대가가 디어 자신의 지식에 만족하고 자만하여 그것을 초월하는 데 아무런 관심도 없게 된 이도 많다. 그러나 지적인 으스댐은 진화로 이어지지 않는다. 소크라테스처럼 그 비차는 생애 내내 무지를 주장한 사람이어야 지식에 새로운 빛을 비출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은 아퀴나스가 했듯이 신을 묵상하기보다는 진실의 바탕이 되는 원인을, 우주에 존재하는 다양한 힘과 현상들 사이의 유기적인 관계를, 이를테면 인간마음을 이해하려고 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 모든 과정을 하나의 복합적인 직물로 짜낸 신비로운 힘을 신이라고 부르고 싶어 할 것이다. 각각의 믿음이 어떻든 간에, 시간에 따라 변하는 이 테피스트리tapestry에 우리 행동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이해해야 한다. 바로 그렇게 하려는 노력이 지혜의 첫 부분에 해당한다.


지혜의 두 번째 측면은 virtue'이다. 덕이라는 단어는 라틴어의 'vir'에서 왔는데 남자라는 뜻이다. 로마인들은 세상을 성차별적으로 인식하고, 사회적으로 중요한 행위란 남성다운 특징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보았다. 로마인들에게 덕이란 신체적인 용기, 시민으로서의 책임감, 금욕주의자처럼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이러한 특징이 다른 문화에서도 일반적으로 훌륭하다고 간주되기는 하지만, 사회는 각기 그 필요에 따라서 관대함이나 종교적 경건함 등 다른 자질을 강조할 수도 있다. 대체로 그런 자질은 내적 조화와 대인관계의 조화를 강조하기 때문에 영적인 가치라고 할 수 있다. 그중에 공통이 되는 요소는 지혜로운 사람이란 단순히 깊이 생각할 뿐 아니라 지식을 실천에 옮기는 존재라는 믿음이다. 그런 까닭에 플라톤은 이렇게 기록했다.

국가에서 발견되는 덕목 가운데 으뜸으로 지혜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아퀴나스, 칸트가 모두 동의했듯 지혜는 판사와 통치자에게 가장 중요한 필요조건이다.

지혜가 부족한 전문가들도 지식을 실천에 옮길지 모르지만, 그 행동은 그들의 제한된 관점 때문에 아마도 왜곡될 것이다. 그런 까닭에 지혜로운 사람의 행동이 좀 더 조화로울 확률이 높다. 그들은 편협한 관점을 토대로 하기보다 공익을 폭넓게 이해하며 행동한다. 이러한 면에서 어떤 사람의 지혜란 그 사람이 배려하는 집단의 크기와 직접적으로 비례한다. 다지 금전적인 결과만 생각하여 행동을 결정하는 사람은 미래를 고려하는 사람보다 덜 지혜롭고, 자신의 복지를 극대화하는 데만 관심있는 사람은 가족과 다른 사람의 복지를 고려하는 사람보다 덜 지혜롭다. 그리고 돈을 벌거나 건강하게 지내거나 공돛에의 안전을 개선하는 등의 한 가지 목표에 열심히 사람은, 돈과 건강과 안전이 서로 연관되어 있고 만족을 보장하기 위해 고려해야 할 몇 가지 조건 중 일부일 뿐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보다 덜 지혜롭다.


지혜의 세 번째 측면은 한마디로 말해 기분이 좋다는 것이다. 소포클래스가 말했듯 지혜는 행복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라고 믿은 ᄉᆞᆷ은 고대 그리스인뿐이 아니었다. 2,000년 뒤에 몽테뉴는 이렇게 썼다.

지혜의 가장 두드러진 징표는 끊이지 않는 명랑함이다.”


어느 문화에서나 현자는 고요한 행복을 누리는, 불운 위치에 도달한 사람으로 간주되었다. 현자들이 했듯이 매우 보편적인 목표에 정신 에너지를 투입하고, 사적인 이득을 위해 애쓰는 대신 더 큰 조화를 목표로 삼을 때, 사람은 자아가 확장되어 진화의 유산으로 물려받은 자기 중심적인 행동 방식을 초월한다. 그러한 자아는 육체라는 유한한 틀을 넘어서는 목표를 받아들이고, 따라서 다른 사람들이라면 불행해질 일에 덜 휩쓸린다.


지혜로운 이는 우주를 관통해 흐르는 강력한 힘, 우리가 잠시 빌려쓰는 육체에 일시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강력한 힘의 일부로 살아가는 것을 즐긴다. 자아가 환영이라는 점을 인식하기에, 이들은 자아를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고 여긴다. 그들은 사랑 있음에 기뻐하지만, 삶에는 우리가 드러난 작은 부분, 우리가 그토록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부분 외에 더 큰 부분이 있다는 점을 인식한다. 이들이 일반적으로 존재하는 상태가 플로우이니, 사람들이 이들의 행복을 부러워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부러움은 대개 경멸로 대체된다. 그리스 시대 천문 연구에 몰두하던 철학자가 자기 코앞에 있는 우물을 보지 못하여 빠진 것을 젖짜는 여자가 조롱한 이후, 현자들은 진실에 관심을 기울이느라 구체적인 것을 간과한다는 이유로 늘 웃음거리가 되었다. 물론 지혜를 얻으려면 대가는 치러야 한다. 평범한 생활에서 오는 보상과 안락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설적이게도 자아의 멍에에서 벗어나려면 상당한 자기 확신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을 해낸 사람은 후회하는 일이 거의 없다.

 

미래의 도전

 

어느 정도 연관된 기술을 습득한 상태가 아니면 도전이 찾아와도 인식할 수 없다. 줄지어 늘어선 수학 기호들은 초심자들에게는 무의미할지 모르지만 기본 개념을 이해한 사라들에게는 흥미진진한 지적 퍼즐로 느껴진다. 요세미티 국립공원의 깎아지른 절벽은 대부분의 방문객에게는 회색 바위들의 장엄한 연출이겠지만 전문 암벽 등반가에게는 즐겁게 몰입할 수 있는 놀이 무대다. 똑같은 상황에 처해도 할 일이 없어서 지루해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과도한 의무에 마비되어버리는 사람도 있고 능력에 맞는 일을 찾느라 즐거운 사람도 있다.

행동할 기회가 존재하는가 하지 않는가. 그것이 무서운 장애물인가 흥미로운 도전인가 하는 점은 객관적인 여건보다는 그것을 마주한 사람의 심리적인 준비 상태에 달려 있다. 예를 들어 수지 발데스는 시우다스 후아레스의 굶주린 개구쟁이들을 만났을 때 자신이 본 것을 무시하거나 부정하려 하지 않았고 비참함에 사로잡히지도 않았다. 오히려 수지는 그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자문한 뒤 우선은 매우 보잘것없은 자원이라도 이용해서 가난한 사람들의 여건을 손톱만큼이라도 개선할 길을 찾아냈다. 그 첫걸음 이후 수지는 자신감과 지식을 얻었고, 이전보다 약간 더 어려운 일을 시도했다. 한 걸음씩 점점 복합적인 일에 도전하면서 플로우도 깊어졌다.


한 사람이 자발적으로 인식하는 도전의 종류는 그 사람이 특히 어떤 면에 예민한가에 좌우된다. 어떤 아이는 빛의 미묘한 변화와 색조의 세세한 차이를 놓치지 않고, 어떤 아이는 벽을 볼 때마다 벽돌 숫자를 세지 않으면 견디지 못한다. 이러한 아이는 시각 예술이 가장 눈에 띄는 활동 기회가 된다. 어떤 사람은 소리에 민감하여 음악에 끌리는 반면 어떤 이는 신체가 대단히 조화로워서 운동이나 춤에 관심을 기울인다.


팔루디가 시인이 된 것은 그에게 남다른 언어 감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라이너스 폴링은 다섯 살 때 아버지의 약국에서 약 제조를 도왔고, 여러 성분이 혼합되면 왜 물질이 특성이 변하는지 이해하고 싶다는 열망을 키웠다. 이러한 어린 시절의 호기심이 노벨상으로 이어졌고, 아흔이 되어서도 그를 지탱하고 있다. 베라 루빈은 미국에서 가장 저명한 천문학자로 처음에 그가 별에 관심을 보이게 된 것은 다락방 창문으로 밤마다 별자리를 바라보던 시절이었다. 루빈은 이렇게 말한다.

한 마디로 상상이 되지 않았죠. 어떻게 사람이 천문학자가 되고 싶어하지 않을 수 있는지.”


물론 별은 누구나 볼 수 있지만, 루빈처럼 반응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안타깝게도 성장보다는 정체로 이끄는 목표로 자아를 개발하기가 더 쉽다.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은 사람들이 관심을 내부로 돌리고 주변의 가능성에 눈 감은 채 자기를 방어하려고 하는 가장 큰 이유다. 사랑받지 못하다고 느끼거나 자신이 무능력하다고 느끼거나 끊임없이 죄책감에 빠지거나 부모에게 조종당하거나 통제받는다고 느끼는 아이는 자신이 사랑과 인정을 받아 마땅하다는 점을 증명하려고 쉬지 않고 애쓰면서 힘을 소진한다. 이러니 별에 호기심을 느낄 에너지는 거의 남지 않는다.


그런 아이가 운 좋게도 타고난 재능이나 학습된 기술이 있다면 자신을 증명하려는 시도가 대단한 성취로 이어질 수도 있다. 뛰어난 인물들은 비참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례가 많고, 어른이 된 후의 야망에 자신을 증명하려는 욕구가 드러날 때도 많다. 이들은 행복하지 않을지도 모르고 사회에 질서보다는 엔트로피를 야기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복합적인 목표에 에너지를 집중해서 대다한 결과를 낼 수는 있다. 처칠이나 록펠러, 피카소, 아인슈타인이 그랬듯이.


반면에 아이가 상대적으로 기술도 부족하면서 의미 있는 도전을 이겨내는 일에서 즐거움을 찾아낼 기회도 누리지 못한다면, 자신의 중요성을 입증하고 싶은 욕구 때문에 폭력이나 반항으로 치우칠 소지도 있다. 복합성을 증진하는 것보다는 엔트로피를 키우는 방법이 주목을 끌기에는 늘 더 쉽다. 십대 소녀는 임신하는 것이 학교 성적이 괜찮은 것보다 부모에게 더 관심을 끌어낼 수 있다는 점을 안다. 게다가 임신은 부모의 뜻에 거스를 힘이 있다는 점을 보여주지만 좋은 성적은 그와 반대다.


마찬가지로 십대 청소년들은 폭력이나 위험한 행동이나 마약 혹은 무분별한 성행위가 남들의 통제에서 자유롭다는 점을 안다. 이들에게 도전이란 자립을 달성하고 어려운 일을 해낼 힘이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들에게 조화를 키우는 일에 에너지를 투자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최대 관심사는 조화를 확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보호하는 일이다.


수년 전 나는 뉴잉글랜드의 한 저명한 가문 출신의 제케라는 젊은이를 알게 되었다. 잘생기고 체격이 좋은 청년은 상류 사립고에서 배우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매우 불안정했다. 예의바르고 무표정한 얼굴 뒤에서 때때로 내적 공허, 무기력, 무감정, 무관심이 비쳤다. 여전히 나는 제케의 중심에 자리한 공허감의 운인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었기 때문에 추측해봐야 무의미했다. 사실 그는 2년동안 몽유병 환자처럼 대학에 다니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3학년 여름방학이 끝나고 가을에 다시 만났을 때 변화가 있었다. 자신 있게 걸었고, 눈을 하늘로 쳐다보았으며, 활기 있어 보였다.


무엇 때문에 태도가 변했는지 궁금해진 나는 제케에게 여름방학을 어떻게 보냈는지 물었다. 그는 봇물 터지듯 이야기했다. 제케는 알래스카의 한 증기선을 타고 거센 북극해에서 이 섬에서 저 섬으로 항해하면서 바다표범무리를 발견할 때마다 배를 멈추었다. 그러고는 몽둥이를 들고 해변으로 가 바다표범무리를 발겨할 때마다 배를 멈추었다. 그러고는 뭉둥이를 들고 해변으로 가 바다표범 새끼들을 최대한 빨리 때려죽였다. 제케는 바다표범 사냥꾼들이 얼마나 고되게 사는지 자랑스레 이야기하면서 무거운 몽둥이를 휘둘러 바다표범 새끼의 목에서 정확한 부위를 최대한 효과적으로 내리치는 기술에 관해 말하더니, 시체에서 가죽을 벗겨내는 섬세한 작업에 관해 들려주었다. 그를 앞서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제케는 파괴에서 일종의 성취감을 느낀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타인을 해치고도 법에 걸리지 않은 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많다. 럭비팀 노트르담의 풀백인 제롬 베티스는 풀백으로서 가장 중요한 일은 고통을 유발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베티스의 할머니에 따르면 그는 어릴 적에 울보였다. 형들과 친구들이 끝없이 베티스를 괴롭혔다. 그러나 110키로그램이 넘는 근육질 덩어리가 되자 이제는 베티스가 그 역할을 맡았다. 죄르지 팔루디는 시에서 젊은 간수들이 정치범들을 고문하면서 발기했다는 내용을 묘사했다. 다른 생명을 해치고 죽이는 것은 자아가 존재하고 또 강하다는 점을 증명하는 검증된 방법이며, 다른 플로우 기회가 차단되었을 때 즐기는 방식이기도 하다.


이러한 해결책은 자아를 강화하는 데는 효과적일지 모르지마, 인류가 더 조화로운 미래로 가게 해주는 데는 해결책이라고 할 수 없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주변에 엔트로피를 키울 놀라울 잠재력이 있지만, 그것을 실행에 옮긴다면 혼돈만 짙어갈 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서로 다른 목표를 어떻게 최적화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플로우를 경험하고 더 복합적인 자아를 형성하면서 동시에 진화에 공헌할 수 있는가? 이제 지금까지 전개해온 조각조각의 답을 통합하여 하나로 묶을 시점이다.


우선 무엇보다 인생을 즐기는 법을 배워야한다. 삶을 최대한 음미하지 않으면서 그저 마지못해 살아가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어떤 사람이 내적 불행 때문에 폭발할 듯한 상태라면, 비록 그가 정의롭다고 해도 그를 믿기란 어렵다. 그의 행동은 모범이 될지 모르지만 그 의식의 부조화는 위험하다. 플로우는 그 자체로 보상일 뿐 아니라 사회 질서를 바로잡는 최고이 비책이다.


그러나 자아의 지평을 넓혀주는 할동에서 플로우를 발견하지 않는 한, 즐거움만으로는 바람직한 방향으로 진화를 이끌어나가지 못한다. 따라서 복합성을 추구해야 한다. 지속적인 호기심과 관심, 늘 새로운 도전을 발견하려는 마음이 적절한 기술을 개발하겠다는 의지와 결합될 때 평생학습이 실현된다. 이러한 태도가 있으면 나이가 90이 되어도 싱싱하고 들떠서 살게 된다. 이러한 태도가 없으면 건강한 젊은이도 맥없고 따분해 보인다.


초월적 자아의 또 다른 특성은 영성과 지혜의 완성이다. 이것은 외면을 꿰뚫어보고, 미과 기생의 속임수를 간파하며, 의식에 침법하는 힘들 사이의 근본 관계를 파악하는 능력이 있다는 뜻이다. 또 내적으로는 유전자의 압박을, 외적으로는 밈의 유혹을 이겨내기 위해 자기를 수양하고 책임감을 배양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기술이 없으면 자신과 직업, 종교에 갇혀 삶이라는 커다란 태피스트리를, 우리 각자가 아주 작지만 무의미하지는 않은 일부에 불과한 큰 그림을 놓치게 된다.


마지막으로 진화가 조화롭게 진행되려면 정신 에너지를 미래에 투자할 수 있어야 한다. 당면한 일이나 다가올 위험에 대비하는 데 주의력을 다 써버리는 사람은 결국 진화의 물결에서 낙오되는 자아를 형성하게 된다. 그런 사람은 미래와 아무런 유대감도 없고 미래에 아무런 애착도 없으며 미래에 동참하지도 못할 것이다. 다가올 미래를 믿고 뜻밖의 기회에 자기 기술을 적용해보려고 열망하는 사람만이 미래를 품을 수 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미래에 영향을 미칠 때 엔트로피와 착취를 증가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콜럼버스는 포부는 대단한 사람이었으나 지혜는 별로 없었다. 그는 멀리 내다볼 수 있었으나 물질적 이득이라는 욕망의 편협함과 개인적인 힘이라는 충동의 옹색함 때문에 위대한 업적을 깎아먹고 말았다.


따라서 진화는 우리에게 조화로운 미래에 투자하라고 요청한다. 우리는 단지 자신이 현재 추구하는 사익이나 현재 중요하게 여기는 것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의 집단적인 복지를, 그것이 미래에 어떤 기이한 형태가 되더라도 기꺼이 지지해야 한다. 이렇게 불확실한 미래에 자기 생명의 일부를 나누어주는 사람은 만족을 느낀다. 이들은 진화의 물결에 녹아들었고 미래와 융합되었다. 그 개인의 몸과 마음에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들의 의식은 복합성 향상이라는 매트릭스에, 미래의 에너지에 영향을 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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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어 해설: , 복합성, 플로우>

 

(meme): 이는 리처드 도킨스가 사용한 용어로 인간이 만들어낸 것을 총칭하는 표현이다. 생각이나 사상이나 관념이든, 물건이든, 시스템이든, 인간이 어떤 의도로 만들어낸 것은 모두 밈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밈도 유전자와 마찬가지로 진화하고, 일단 존재하기 시작하면 자신의 생존을 위해 자신의 창조자인 인간을 희생시키기도 한다. 유전자가 서로 경쟁하듯이 밈도 서로 경쟁하면서 우리의 마음을 차지하려고 한다. 밈이 살아남으려면 결국 인간이라는 매개물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복합성: 분화와 통합의 함수이다. 인간의 예를 들어 쉽게 말하면 분화란 개성혹은 자기만의 능력이다. 통합이란 여러 능력의 조화혹은 다른 사람들과의 조화. 예컨대 주변 세상과 고립된 천재는 분화는 뛰어나지만 통합은 약하다. 따라서 복합성도 높지 않다. 진화의 방향은 복합성이 증진되는 쪽으로 이끌어 가야한다. 그럴 때 개인도 발전하고 사회도 나아지며 세상 전체도 더불어 살만한 곳이 되기 때문이다.

 

플로우(몰입): 어떤 일에 깊이 몰입하여 마치 시간을 잊은 듯한 느낌을 말한다. 가장 즐거운 일을 경험할 때 흐르는 듯하다는 비유처럼, 흘러가는 강물에 배를 띄워놓고 거기 앉아 둥실 떠내려가듯, 일이 저절로 되는 느낌 -‘물살에 휩쓸려가는 듯 자연스럽게 행동하게 되는 경험’-을 말한다. 어마어마한 파도의 물마루에 올라타거나, 아이에게 글자를 가르칠 때, 우리는 조화롭게 흐르는 에너지와 하나가 되어 일에 몰두하고 일상생활의 걱정과 지루함을 초월하게 된다. 집중, 몰두, 깊은 연대감, 기쁨, 성치감의 느낌이 플로우 경험이다.

 

이것의 첫 번째 징후는 명확하게 규정된 목표에 주의가 집중된다. 우리는 자신이 몰두하고 집중하며 열중한다고 느낀다.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잘하는지 아닌지 즉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상태에 이르면 마치 자아의 경계가 확장된 듯 느껴진다. 항해사는 배와 바람과 바다와 하나가 된 것처럼 느끼고, 가수는 신비로운 우주의 조화를 느낀다. 이것은 행복의 조건과 가장 가까운 상태에 있게 되는 외적인 조건을 준다: 거기에 구체적인 목표와 지키기 어렵지 않은 규칙이 있고 자신의 능력에 맞추어 난이도를 조절할 수 있고 자신이 제대로 하는지 명확하게 평가할 수 있는 수단이 있고 주의력을 흩어지게 하는 일을 차단하고 활동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임, 음악, 연주, 공연, 종교의식은 이러한 플로우 활동의 좋은 사례다.

 

플로우 상태에 들어가는 두 번째 조건은 개인의 내적인 부분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기술과 주변의 기회를 연결하는 불가사의한 능력이 있다. 이들은 할 일이 전혀 없는 듯 보이는 상황에서도 스스로 도전할만한 목표를 설정한다. 플로우 상태에 들어가면 완벽하게 몰두하여 행동할 수 있는 일시적인 세상을 창조함으로써 판에 박힌 일상의 혼돈에서 피신할 수 있다. 더 복합적인 차원으로 피신하여, 그곳에서 새로운 도전에 부딪히며 잠재력을 끌어올린다. 여기서 활동은 자기목적적으로 그 자체가 가치 있는 일이 된다.

 

플로우의 경험의 특징

- 명확한 목표, 즉 목적이 뚜렷이 정의된다. 즉각적인 의견(피드백) 즉 자시이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바로바로 알 수 있다.

- 단호하게 행동할 기회가 많고, 그렇게 할 기회와 자신의 능력이 맞아 떨어진다. 다시 말해, 도전해야 할 일에 필요한 능력과 그것에 도전하려는 개인의 기술이 잘 맞는다.

- 행동과 자각이 하나로 융홥되어 마음이 한 곳에 집중된다.

- 현재 하는 일에 집중한다. 하는 일과 무관한 자극들이 의식에서 사라지고, 걱정과 근심이 일시적으로 없어진다.

- 통제할 수 있다는 느낌이 든다.

- 자의식 상실, 자아 경계 초월, 성장하는 느낌, 더 큰 존재의 일부가 된다는 느낌이 든다.

- 시간관념이 바뀌어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

- 경험 자체가 목적이 된다. 활동 자체가 목적이 되거나 그 자체로 몰두할 가치가 있는 것이 된다.

 

이렇게 행위와 의식이 통합하는 플로우는 복합성을 이끌어내는 훌륭한 수단이다. 플로우를 경험하고 나면 우리는 이전과는 달라진다. 역설적이게도 플로우에 깊이 빠지면 자아를 잊어버리지만 일상으로 되돌아오면 자아가 성장해 있다. 이것이 무엇보다 매력적인 것은 즐겁다는 것이다. 이는 생산적이고 바람직한 방향만 아니라 파괴적인 일에서도 느낄 수 있다. 따라서 복합성이 증진되는 일에서 플로우를 발견할 필요가 있다. 플로우의 관점에서 존경할 수 있는 인물은 다음과 같다:

“(그들은) 삶 속에서 순간순간의 기쁨과 깊은 만족을 끌어내는 법을 터특한 사람이었다. 부나 명예를 얻는 것에서가 아니라 살아가는 과정 자체에서, 기술을 개발하고 도전을 극복하는 데서, 조화로운 복합성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진화 과정의 일부가 되는 데서.”

 

위의 경험이 증진되는 초월적 자아를 만들기 위해서는 5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삶을 즐겨야 한다. 이는 생산적인 플로우경험으로 달성할 수 있다.

둘째, 복합성을 더해야 한다. 자신을 개발하는 것과 주변과 나누는 것 이 두바퀴가 동시에 굴러가야 한다.

셋째, 지혜를 개발해야 한다. ‘내부의 장막외부의 위협에서 비롯되는 왜곡과 망상에서 벗어나려면 꿰뚫어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자기를 수양해야 한다.

넷째, 다지 현재 필요한 일에만 시간과 능력을 투자해서는 더 나은 미래를 건설할 수 없으므로 미래에 투자해야 한다.

다섯째,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조화로운 미래 건설에 힘을 쏟아야 한다. 이렇게 할 때라야 자신이 죽더라도 자신이 한 일들이 살아남아 미래와 함께하게 될 것이고, 자연스럽게 죽음의 두려움도 극복하게 된다.

 

일과 삶이 하나로 흐르면서 행위가 자기 목적적으로 최적의 내적 조화를 갖게 되면 이런 플로우의 상태에서는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를 펼쳐 보이는 것을 자연스럽게 즐기게 된다. 여기서 창의성, 절정의 성과, 재능개발, 생산성, 자긍심, 스트레스 감소, 심리치료의 임상적용과 같은 것들이 발생한다. 조화로운 의식, 내면의 에너지를 통제하는 자아가 개발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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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용박사 | ecopeace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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