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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근원적인 덫으로부터 벗어나기<

 

 

도미니크 바터가 브라질의 슬럼가에서 청소년 마약갱단들과의 갈등작업을 통해 나온 통찰을 회복적 서클이라는 모델로 출산시켰을 때,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이른바 평화를 위한 씨앗질문이라는 것을 삶의 현장에 지속적인 물음을 던졌기 때문이다. 그 질문이란 다음의 세 가지이다:

 

- 갈등상황에 대응할 때, 어떤 것이 효과가 있었나요?

- 어떤 것이 효과가 없었나요?

- 갈등이 해결된 이상적인 공동체를 그려볼 때, 그것이 어떤 모습이 되길 원하나요?


사실, 나에게 다가오는 것은 이 질문이 갖는 질문 자체의 중요성만이 아니다. 오히려 더욱 의미있게 내게 다가온 것은 갈등과 폭력의 경험 그 자체에 대한 반응으로서 해결책의 모색이 아니라 성찰(feedback)의 메커니즘을 작동시키는 방법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수많은 갈등, 폭력을 경험하고 있다. 스마트폰을 위시한 수많은 인공지능화되어가는 통신기술의 발달로 초연결의 시대에 들어선 우리는 내가 타자, 외부 사건, 문제의 상황을 접하는 횟수가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고, 관점과 관점, 차이와 다양성, 가치와 목적의 어긋남과 충돌에 의해 발생되어지는 초스피드의 시대에서 그만큼 갈등과 폭력의 빈도수와 스트레스의 양이 최소한 한세대전과는 전혀 다르게 더 수시로 빠르게 경험하고 있다. 나의 말, 행동, 그리고 선택의 실수나 부족에서만이 아니다. 오히려 친척, 동료라는 가까운 타자를 넘어서 이제는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원격타자(distant Others)의 말, 행동, 선택으로 인한 영향력을 그 어떤 방어벽없이 직접적으로 그리고 시간의 차이도 별로 없이 받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면서 나아지는 점이 있다면 바로 폭력에 대한 민감도가 높아져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최근의 미투(me too)운동처럼 비공개적인 사적인 영역에서 숨겨져 있던 권력에 의한 성폭력의 고백에 대한 예가 그렇다. 혹은 전에는 별로 항변도 못하던 대한한공의 소유 재벌가가 벌린 이른바 갑질이 심각한 폭력의 사례로 공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사회분위기도 그렇다. 아마도 이들 사례의 행위 당사자들은 아직도 그게 뭐가 문제인지 심각성의 인식없이 재수없이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머무를 수도 있겠지만, 초연결의 시대에서 이제는 간과할 수 없는 위험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폭력이라는 문제상황 혹은 문제의 사람을 인식하게 될 때, 우리는 자동반응으로서 분노와 무력감의 느낌이 올라오고 불공정함, 불의, 옳지않음에 주목하기와 집중된 관심이 생긴다. 그리고 그러한 불공정함, 불의, 옳지않음에 대한 해결과 그 해결에 대한 의지가 중요해지게 된다. 이렇게 옳지않음에 대한 생각(머리), 분노와 무력감이라는 정서(가슴) 그리고 해결에 대한 의지(/단전)이 함께 작동하면서 나와 상대방은 온통 갈등과 폭력의 상황에 의해 각자의 존재가 에너자이징을 하게 된다. 그래서 결국은 삶이라는 공간이 저절로 갈등해결을 위한 무대로 전환이 되고, 그 무대에 올라오는 연기자들은 공격자(가해자, 약탈자), 희생자(피해자, 무력한 약자), 그리고 해결자(구조자, 심판자)로서 그 연기 역할을 부여받게 된다.

 

한 번의 갈등무대에서 연기자로의 역할을 경험하면 그 다음부터는 각종 유사한 갈등과 폭력들은 자동적으로 갈등무대가 만들어져 그위에서 펼쳐지게 되고 여기서 연기자의 역할은 점점 강화되고 자기에게 부여된 역할에 충실도가 높아지면서 이제는 연기자가 아닌 자기 정체성으로 주변으로부터 그리고 자기 내부에서도 부여하게 된다. 그리하여 공격자, 희생자, 해결자라는 딱지가 붙여지는 것이 자연스럽게 되고 그 역할에 아무런 의심이 일어나지 않고 거기에 충실해자는 경향성과 무대의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이에 대한 가장 비근한 예는 내가 어렸을 때 처음 흑백TV가 나올 때 상영된 뽀빠이라는 만화영화였다. 먼저 공격자인 부르투스가 흉측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의 출현을 목격하는 것만으로도 어린 나와 다른 아이들은 징벌의 아드레날린이 분출되고 흥분된다. 빨리 뽀빠이가 나오라고 외치며 심장박동수가 높아진다. 희생자인 올리브는 몸매가 가냘프고 목소리까지 그래서 부르투스의 공격과 괴롭힘에 전적으로 무력해서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도와주세요!라는 외침뿐이다. 전에 경험한 공격받음과 괴롭힘의 사건이 아무런 지혜나 방어의 방법도 생각해 내지 못한다. 왜 괴롭히는 지 부르투스에게 물을 용기도 없다.

 

결국 올리브가 부르투스의 린치에 거의 위태롭게 되었을 때 이때는 시청하는 애들이 뽀빠이 빨리 나오라고 외친지 이미 여러 차례 이후다- 뽀빠이가 등장하지만 시나리오는 단번에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악인의 힘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뽀빠이는 늘씬하게 처음에는 얻어맞다가 결국은 시금치를 먹고 한방에 부르투스를 우주공간 밖으로 날려버린다. 그러면 올리브의 웃음이 돌아오고, 시청하던 나와 아이들은 흥분이 가라앉는 안도의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올리브는 뽀빠이의 것이 된다. 올리브는 뽀빠이의 사랑의 구애에 저항할 수 없다. 자신을 구해준 사람에게 거부를 한다는 것은 도덕적인 배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뽀빠이가 자신에게 맞는 지, 자기가 원하는 스타일인지 확인하거나 의심하지 못한다.

 

내가 어렸을 때 그렇게 신나게 봤던 만화영화들이나 어린이 프로그램들인 황금박쥐, 600만불의 사나이, 원더우먼, 스파이더맨...등등은 등장인물들은 다 달라도 연기자의 역할은 다 같았다. 공격자(가해자), 희생자(피해자) 그리고 해결사(구조자)의 역할들이 존재하고 그 3 역할을 통해 그 외의 인물구성이 있다면 구경꾼들이거나 잠재적 희생자들 다수 혹은 잠재적 가해자 소수들이다 자신의 삶의 방향, 주요 관심, 언어, 행동, 그리고 심지어는 관계맺는 부류까지 정해지게 된다.

 

공격자(약탈자, 가해자)는 우선 모두로부터 그 존재의 출현 자체가 험악하고 위험하다는 인상(이미지)을 갖는다. 그의 언어와 행동은 공격하고, 비난하고, 괴롭히고, 분노하는 것이 그의 일과 역할로 보인다. 그가 왜 그런 행동을 보이는지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으며, 그 자신도 남들이 자신을 싫어하거나 피하는 것에 대해 화내고 공격하고 추격하는 것 이외에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자신도 모른다. 그에 대한 아이디어도 없고 그것에 대해 배우거나 경험한 적도 없다. 주변사람들은 그를 피하거나, 아부해서 복종하거나, 아니면 그 공격자를 무찌르거나 자신을 방어할 무기가 필요함을 그의 출현에 의해 더욱 긴장하며 깨닫게 된다.

 

희생자(피해자, 무력한 약자)는 자신의 불운한 상황, 그리고 자신을 괴롭히며 집요하게 따라오는 공격자에 의해 무력하고 절망하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다. 자신에게 조금이나마 여력이 있다면 피해서 도망가는 것뿐이다. 누군가 주변에서 뒤 돌아서서 맞서 보라고 해도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우선 상대방의 흉측함이 두려움을 자아내기 때문이고, 다가가지 못하는 것은 자신은 그런 이미지에 대해 전적으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내면의 자기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왜 그런 태도를 가졌는지 묻는다면 생각을 좀 해봐야 하겠지만 우선 내 확신에 의심을 난 가져본 적이 없다. 나는 내가 느끼고 보는 것이 사실이라 단정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내 판단을 의심해보지 않을 정당한 근거가 내게도 있다. 그가 공격적이고 쫓아오고 분노하고 험상궂게 생긴 것 등만 해도 너무나 객관적이지 않는가? 내 불행을 벗어날 방법은 누군가 나를 도와주는 것이다. 나는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믿고 있다.

 

해결사(구조자, 심판자)는 숭고한 이상과 책임이 자신에게 부어졌다는 소명감을 지닌 역할을 한다. 그것은 불의한 공격자를 무찌르고 약자를 위험에서 구해내는 것이다. 자신이 관심을 두고 삶을 주목하는 것은 누가 공격자이고 누가 희생자인가를 찾아내고 공격자를 막을 수 있는 능력과 수완을 기르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와 삶의 목적은 정해져 있다고 믿는다. 희생자를 구해내고 공격자를 무력하게 하는 것. 그래서 자신은 이를 위해 자기 사명을 다해야 하는 헌신과 책임이 주어져 있다고 자신의 정체성을 그렇게 생각한다. 자신이 그래서 주로 주목하는 것은 공격자의 출현에 대한 맞서기 대응행동이다. 그가 왜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지 말을 걸어 다른 식으로 행동할 수 있는지 물어보거나 타협해 본 적도 없다. 또한 희생자가 자기 도움이 필요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다. 그런 방식으로 공격자나 희생자에게 다가가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과 역할을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것이기에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그리고 자신이 그러한 노력과 수고를 하기 때문에 희생자(올리브)에게 사랑과 헌신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삶의 전체성이라는 공간이 갈등무대로 좁게 축소되고 가해자, 피해자, 해결자의 연기 역할로 자신의 삶이 단편화되어 규정되어질 때, 우리에게는 자신의 역할과 펼쳐지는 갈등 무대가 전부라는 신념을 갖게 되면서 폭력의 각본(script of violence)은 무의식적으로 강력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자신이 연기자로 각본대로 연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게 되면서 더욱 맡겨진 역할에 충실한 연기력을 보여주게 된다. 공격자는 해결자가 두려워지긴 하지만 해결자의 존재자체에 대한 의심은 할 수 없다. 오직 그의 눈과 손에 걸리지 않고 자기 욕망을 채우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다라는 생각뿐이다. 희생자는 해결자의 존재에 대한 의심커녕 그의 도움이 필수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그저 고마울 뿐이고, 그가 댓가로 뭘 요청하면 당연히 그리고 자발적으로 응하는 것이 도리이다. 내가 그를 선택하는 것의 정당성이 문제가 아니라 그가 날 선택해주는 것이 고마울 뿐이다. 그는 나를 위해 자신을 희생을 했고 나는 그에 대해 정당한 보상을 할 수 있다면 최소한 하는 것이 당연한 의무이다. 여기에는 추호의 의심이 없다.


우리는 이러한 갈등무대에서 펼쳐지는 연기자들의 역할 뒤에서 조종하는 폭력의 각본이 자연스럽고’ ‘당연하다는 인식을 갖게 되면서 폭력의 악순환을 영구화한다. 일단 혼란과 갈등이 생기면 폭력의 각본에 의해 사물, 사건, 관계, 상황을 인식하고 누가 가해자, 피해자인지를 판별한다. 우리의 의식과 집중이 갈등 무대 만들기로 좁아지고, 관심이 3 연기자인 피해자, 가해자 그리고 해결사에 집중하게 된다. 의식과 노력 그리고 대부분의 에너지가 심각하도록 진지하게 맞서서 싸우기, 도망가기, 얼어붙기의 방식에 매달리게 된다. 심지어 아직 정해지지 않고 성격이 불명확한 혼란의 상황도 미리 규정된 폭력의 각본이라는 렌즈를 통해 보게 된다. 그래서 옳고 그름에 대해 쏠려진 관심과 에너지가 집중되고, 해결책과 정답주기에 집중하며, 해결사의 도움과 그의 전문성에 충성하고 따르는 관습을 익히게 된다.

 

이렇게 폭력의 각본이 경직화되어 가는 상황 뒤에서 기대하지 못한 그러나 충분히 예상가능한- 다른 일이 발생한다. 두 가지 형태의 변질이 교묘하게 일어난다.

 

첫 번째는 해결사의 정체성과 역할의 한계가 확대되는 것이다. 위험한 갈등 무대에서 안전을 지키기 위해 그의 필요성이 증대되고 확대되어 비대해진다. 그가 하는 행동의 범위가 강화된다. 그는 단순히 자기 존재의 출현에 대해 자신을 과시하는 것만 아니다. 즉 원래 이 폭력의 각본에서는 갈등 무대에 약탈자가 나타났을 때만 그의 필요가 요청되었다. 그것은 올리브의 요청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해결사는 자기가 없을 때도 자기 존재의 필요성과 그 힘을 보여주기 위해 질서를 위한 규칙과 법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자신의 부재시에도 규칙과 법의 통제를 통해 자신의 존재의 필요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어떤 때는 희생자의 사랑을 소유하기 위해 다른 공격자를 만들어 내거나, 잠재적 공격자를 꼬드기거나, 혹은 공격자와 함께 공모하여 규칙을 만들어 희생자가 자신의 도움을 필요하도록 때때로 공격자가 출현하여 활동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사실을 희생자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는다.) 법과 규칙은 해결사가 졸거나 부재해도 언제나 그가 활동하고 있다는 강력한 상징이 되고 희생자를 안심시킨다.


두 번째는 해결자(구조자)의 권력 남용에 대한 것이다. 그에게는 겉으로는 선한 미션과 소명이 주어져 있다. 그러나 처음에 존재의 이유로 밑받침이 되었던 선한동기로서 숭고한 미션과 소명이 그의 존재와 힘의 커감에 따라 권력의 오용이 발생하게 된다. 그 권력의 오용은 먼저 공격자를 길들이거나 족쇄를 채우기 위해 공격자보다 더 큰 힘의 필요성을 스스로 소유한다는 이해에서 지배하는 (power-over)힘에 대한 중독을 갖게 된다는 점이다. 공격자의 힘을 거세하기 위해 아이러니하게도 공격자가 갖은 같은 부류의 공격의 힘을 더 소유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공격자보다 공의의 이름으로 더욱 무자비하고 강한 공격력을 행사한다. 투포환을 던지는 운동선수가 투포환을 던지기 위해 회전을 하면서 그 투포환의 무게로 인해 자기-중심을 잃는 꼴이 된다.

 

그리고 그러한 공격력의 중독으로 민감성이 떨어지면서 때로는 희생자를 공격자로 오인하는 경우도 생긴다. 그런 경우에도 변명할 충분한 정당한 이유가 발생한다. 망치를 들고 있으면 박을 못을 찾게 만들고, 못처럼 보이는 것은 무조건 망치로 먼저 내리쳐야 적성이 풀리는 법이다. 게다가 다른 권력남용은 더욱 심각하다. 그것은 희생자로부터 삥땅을 뜯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희생자를 안전으로 지켜준다는 명목에 의해 명령과 복종을 강요하게 되고 자발적인 헌신의 메카니즘을 만든다. 올리브는 해결자(구조자)가 또 다른 자신의 지배자 혹은 공격자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사랑을 자발적으로 주어야 된다는 도덕적 의무와 헌신을 암묵적으로 받게 된다. 그래서 구조자는 희생자에게 보이는 공격은 부르투스처럼 거칠게 하지는 않지만 암묵적이고 부드러운 지배-권력을 올리브에게 뽀빠이는 갖게 된다. 뽀빠이는 언제나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도덕적으로나 합법적으로 올리브의 사랑을 요구할 권리가 있게 된다.

 

이를 공공영역의 예로 들어보자. 처음에 공격자(약탈자)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생긴 군대로부터 시작해서 보호자는 공공의 질서 유지라는 숭고한 미션과 사명을 통해 자기 존재의 합목적성과 존재이유를 부여받는다. 그리고 그것의 확대를 위해 해결자는 자기 공간을 확대해 나간다. 경찰, 법원, 교도소를 통해, 심지어는 정보부까지 만들어 확대해 나가면서 비대해진다. 일단 공공영역에서 자기존재의 목적과 근거가 형성되면 그 존재근거를 확대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활동이 잘 하고 있거나, 정당하게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보여주기 위해 공격자와 희생자를 아이러니하게도 필요로 하게 된다. 그 조직의 필요와 확산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법과 규칙을 만들어 공격자에게 자신이 무서운 대상이라는 것을 그리고 희생자에게는 자신이 꼭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알려서 의존력을 높인다. 스스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전문성에 의존할 것을 강요하고 공공성의 이름으로 무력화시킨다. 그래서 희생자나 다른 가능성있는 조력자가 해결사 역할을 하려고 할 때는 불법혹은 비전문성의 딱지를 붙인다.

 

이러한 해결사의 변질과 권력남용은 사실상 교사에게도 유사하게 일어난다. 위험하고 통제 불가능한 세상이라는 공격자에게 미숙하고 훈련 안 된 무력한 약자인 학생들에게 자신의 가르침의 정당성과 권위가 강요되어진다. 무력하고 희생의 가능성이 높은 약자인 학생들에게 대답을 주고, 말해주며 말을 안들을 때는 강요하고 화내고 위협하고 고통을 부과하는 것은 정당해진다. 가르치는 자의 권위를 지킨다는 것은 더 많이 알고 있고, 더 많이 주어야 하는 역할이 당연해 지고 학생들은 그것에 의심을 품을 필요가 없어진다. 교사가 덜 가르치고 덜 말하되 단순히 경청하고 질문하여 스스로 진리를 찾아내게 한다는 것은 자신의 신분이 상실되는 윤리적 배신으로 여겨진다. 왜 내가 내 존재의 필요성을 줄이면서 상대방을 세울 수 있을까는 도덕적 모순이 되는 셈이다. 그래서 내가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으면 때때로 나의 행동유형이 맘에 안 들어도 그건 학습자들로부터 수용될 수 있는 여지의 것이고 믿는다.

 

우리는 흔히 언론에 출현하는 다양한 폭력의 현상들이 아니라 근원적인 폭력의 각본인 희생자, 약탈자, 구조자의 성격을 강화하는 이 폭력의 각본의 덫을 어떻게 해체할 수 있을까? 어떻게 희생자는 더 이상 구조자가 필요하지 않으며 스스로의 힘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고, 약탈자는 분노나 공격 대신에 자신의 필요를 상대방으로부터 선물로 받을 수 있으며, 구조자는 자신이 해결책을 굳이 주지 않아도 상대방들이 스스로 주체로 설 수 있는 신뢰와 협력의 관계를 어떻게 세울 수 있을까?

 

내게 신경이 쓰이는 폭력의 가장 근본적인 것은 다양한 폭력들의 현상의 만연이 아니다. 그것은 인류의 출현이래 언제나 만연해 왔고 언제나 있을 것이다. 나는 그것보다 더 심각하고 교묘한 그래서 의식이 안 되고 있는 것이 바로 폭력의 각본에 따른 각자의 정체성의 고정화이고 이것은 바로 폭력의 근본적인 형태인 영혼의 폭력이 가장 핵심이라는 점에 주목하기를 요청하는 것이다

 

원래 온전하고 거룩하며 자족적인 참자아로서 영혼이 풍성한 생이라는 공간의 여행자로서 살지 못하고 갈등무대의 좁은 공간을 만들어 놓고 가해자, 피해자, 해결자라는 도식에 의해 자신이 경험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축소해서 그 딱지로 자신의 역할과 활동을 한정시키는 이 중독된 게임(혹은 폭력의 근원적인 덫)으로부터 어떻게 우리는 벗어날 수 있을까?

 

원래 비폭력이란 말인 아힘사(ahimsa)해치지 않음이란 뜻이다. 상대방에게 무슨 도움을 주어 행복하게 만들기가 아니라 최소한 고통이나 해함을 보태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통찰을 우리에게 준다. 선을 행한다고 해결사처럼 나서서 남의 정체성의 경계선을 침해하는 영혼의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온전하고 진정한 자아는 이미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가해자, 피해자, 해결사의 도식에서 본래 있는 온전하고 진정한 자아의 잠재성과 삶의 풍성함을 경험하도록 갈등무대대신 다른 공간을 어떻게 삶에 가져올 수 있겠는가?

 

이것이 회복적 서클 진행자에게는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폭력사건의 현장에서 당사자들과 공동체 구성원들이 모여 앉아 그것을 다루고자 할 때, 서클 진행자는 어떻게 피해자의 자기 무력감과 운명의 광폭함에 대해 자기 선택을 강화하는 공간을 허용할 수 있는가? 어떻게 가해자에게 옳고그름의 정당성에서 비난이나 위협 그리고 자기 정당화가 아닌 자신에게 무엇이 소중하고 의미있는 것인지 행위에 대한 피드백을 통해 재성찰하는 공간을 허용할 수 있는가? 그리고 진행자는 해답을 주거나 권력을 행사하지 않으면서 단지 연결자로 있으면서, 가해자와 피해자, 방관자의 가면(persona)을 넘어서 본래의 온전한 진면목인 영혼의 목소리를 자신과 서로로부터 듣게 하여서 손상을 넘어 의미가 충만한 미래에로 나아가기를 촉발시킬 수 있을까

      

그러고 보니 한반도만 아니라 지구의 현대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북미회담이 사흘 앞으로 다가왔다. 해방이후 미국은 언제나 구조자라는 뽀빠이의 역할을, 북한은 추호의 의심없이 약탈자라는 부르투스의 역할을 그리고 남한은 거의 뽀빠이의 구조의 손에 있는 올리브의 역할속에 반세기 넘는 세월을 지내왔다. 똑같은 폭력의 각본이 어김없이 나라와 한반도의 상황에도 적용될 수 있는 셈이다. 이번 역사적인 6.22북미회담이후에 올리브인 남한은 무력감에서 벗어나 자기운명의 선택을 스스로 짊어지고 구조자의 손길에서 벗어나 부르투스와 평화와 번영의 꿈에 대해 함께 대화의 길을 걸어갈 수 있을까? 부르투스는 분노와 증오에서 벗어나 자신이 그동안 무엇이 오해받았고 서러웠는지 그리고 어떤 기여와 필요가 있는지를 당당히 뽀빠이인 미국과 당당히 협상해서 영구 평화체제를 마련할 수 있을까? 미국은 자신의 해결사 중독에서 깨어나서 그동안의 권력남용과 지배에 대해 다른 미래의 길을 향해 걸어나가면서 지배권력의 중독에서 벗어나 올리브와 특히 부르투스로부터 진정한 신뢰를 받은 새로운 길을 걸어갈 수 있을까?

 

폭력의 각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구조자의 역할 변경에 대한 것이다. 그가 공격자를 길들이고 희생자를 지배하는 가장 많은 힘의 남용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폭력의 각본의 시야에서 본다면, 이번 회담은 북한이라는 골치아픈 지구상의 로켓맨을 길들이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구조자의 역할을 자임하고 있는 미국의 권력남용의 해체와 자기 정체성의 수정에 대한 도전이 더욱 크다. 흥미로운 것은 미국의 변화가 자기만큼 힘이 있는 중국이나 러시아의 도전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약자라고 생각된 북한과의 관계재설정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아이러니이다. 그리고 약자였던 남한도 민족의 중대한 숙원을 향해 자기 일정을 부르투스와 맞추어 가고 있다는 점에서 미국이 힘들어지고 있다. 이번의 좋은 기회를 구조자인 미국이 놓친다면 북한과 남한만이 아니라 실제로 자신에게도 큰 부담과 손실이 아닐 수 없다.


(2018.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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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용박사 | ecopeace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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