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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귀한 친구

조회 수 1354 추천 수 0 2016.05.02 05:52:04

                                                                고귀한 친구

 

 

"사슴 한 마리가

내 앞에 서 있다.

부끄러움없이

그의 존재로 나에게 말을 걸며.

거기 그렇게 그의 존재로.

내가 했던 것들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구나.

내가 했던 것들이

진실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구나.

사슴은 움직이지 않는다.

무한히 긴 시간을

그저 거기 서 있다.

미동없이.

당당하게.

빛나는 그의 주변을 둘러싼

발아래 낙옆들은

마치 풍부한 흙빛의 카펫.

순간, 선물이 주어진 것을 깨닫는다.

........"

 

이 시는 어제 마음비추기 심화과정에서 읽은 켄트 오스본의 '사슴의 지혜'라는 시의 일부이다.

이 시가 내개 깊이 다가와 파문을 일으킨 것은 내 생의 전체를 관통하는 한 이미지와 만나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창 달리고 있는 사슴의 이미지로서 내 삶이 두려움과 불안이 끊임없이 폭풍우나 파도처럼 밀려오거나 그속에 파묻혀 질식될까봐 발버둥치거나 아니면 달려왔다는 자각이 날 사로잡았다.


그런 무의식적인 공포나 불안이 뒤따라오면서 청년과 장년시절을 해야하는 것부터 하지못한 것 사이에서 날 움츠려들게 만들어 왔다, 에고와 지성으로 무장한 채 영혼의 목소리를 잃어가는 줄도 모르고...


때로는 당위에 대한 미흡한 열정때문에 때로는 이미 저질러진 실책으로 수치심의 손가락에 몸을 사그리며, 그나마 고통스러워해야 하던가 아니면 최소한 부끄러워해야 내가 용서가 되거나 일어설 힘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러한 반응이 더욱 날 옭아맨다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다. 뭔가를 하는 것이 도움이 되지않을까라는 막연함으로 나는 두려움과 불안에 대해 맞서거나 도망가는 연습을 참으로 오랫동안 해왔다.

 

그런데 겨울과 어둠 그리고 폭풍우에 상관없이 햇살아래 흐드러지게 핀 철쭉, 그리고 바람에 흔들리며 찬연한 싸리꽃의 웃음이 가슴을 시리도록 흔들어 놓는다. 뭔지 두려움과 불안에 대해 맞서거나 도망가는 그 것이외에도 여리고도 오롯한 그 무언가의 실재가 현실로 다가와 손짓한다.

 

그리고 만나진 이 시. 겁장이로 보아왔던 사슴의 멈춤속에서 홀깃 나타난 고귀함의 자태로 눈부셔한 그 마음이 울린다.

 

"내가 했던 것들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구나.

내가 했던 것들이

진실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구나."

 

두려움과 불안의 허울속에 묻혀있던 내 영혼의 그 가냘픈 떨림을 이제야 주목하게 될 줄이야...

그동안 생존하기 위해 떨구거나 떨어져나간 내 생의 조각들인 "발아래 낙옆들"이 갑자기 환한 빛살에 작은 춤사위들로 일어난다. 그 쓸모없다 여긴 것들이 미치도록 가슴을 촉촉히 적시며 "카펫"이 되어 내 길을 열어 굿바이를 할 줄이야!

 

수많은 잘못과 실수들, 놓치고 만 기회들, 수치스러운 선택들, 용기를 내지 못하고 주저했던 순간들, 아니면 이솝우화의 신포도의 이야기처럼 내게 허락된 것이 아니라는 것으로 등돌리던 장면들이 낙옆처럼 떨어져나가 맨살, 맨몸뚱이로 시려하던 내 모습속에서 다시금 가슴아파지는 것은 그래도 그것들을 따사롭게 주목하며 눈길을 제대로 주지 못하고 떨어지도록 내버려 두었다는 사무치는 미안함과 뜻밖의 고마움이 교차한다. 그러한 이파리들로 인해 내가 성장해왔고 어느 덧 성장하고 있었다는 것이 그것이다.

 

두려움과 불안이 나에겐 힘든 것만의 것은 아니었구나. 그것이 내 성격의 유약함과 불안정성에 대한 공포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실상은 그 두려움과 불안이 오히려 내 내면의 간절한 진실과 환희에 대한 강렬한 열망이 꿈틀거리게 한 풀무였었구나. 생의 거칠음과 불친절함이라는 가시들에 대해 두려움과 놀라서 도망가던 것은 단순히 겁나서만 아니었다. 거기에는 간절히 만나고 싶은 실재가 내 가슴속에 있었던 것이다.

 

고귀한 친구가 다가온 것을.

그의 혈통은 순수하고 흠이 없다.

그리고 이해한다.

사슴의 지혜를.

내 존재의 고귀함을.

지금까지의 내가

앞으로 나에게 필요한 모든 것임을.

돌아보며

고요함으로 내 여정의 주인공을 일깨우리라.

내 모든 이야기

불완전한 그 모든 것에

소중한 것이 숨어있다는 것.

내일을 생각할 필요도

저기 바깥

다음 순간 큰 무엇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것.

내 안에 이미 있는 이 한 가지

나 자신과 하나됨.”

 

그리고 이해한다.’ 이 한마디 말이 가슴을 울린다. 이윽고 이해되는 지금. 내가 나 자신에 대해 이해가 안 되었으면서도 남들로 하여금 이해받으려고 애썼던 그 모든 노력들이 왜 어리석었는지를. 왜 남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중요했었는지 그토록 눈을 맞추려 애써왔는지 그런 모순을.


그리고 이해한다.’ 내가 할 수 있었던 그 모든 것들로 인해 두려워하고 몸사리고, 물러나고 도망치고, 달리고 비틀거리고, 헐떡거리며 목말라 갈증나는 그 모든 시늉과 몸짓들이 이제는 하나의 주인공을 확연히 지목하고 기다리고 있다. 그것은 바로 이제야 들리기 시작하는 내 영혼의 목소리.

 

그리고 이해한다.’ 내 인생 여정의 그 모든 불완전한 이야기들속에, 울고 웃고, 낙담하고 지루해하며, 슬퍼하고 노래하는 그 이야기 속에 그것을 말하는 스토리텔러, 내 영혼이 언제나 나와 함께 있었다는 것을. 행동의 세계속에 그 모든 행동에도 영향받지 않는 존재가 있었다. 악사는 음악을 연주하지만 그 음악이 악사는 아니다. 끊임없이 음악이 흘러나오고 변주곡이 나오고 그것으로 울고 웃지만- 그 울고 웃는 것이 리얼할지라도- 악사는 음악과 더불어 그리고 그 음악과 따로 홀로 존재한다.

 

그리고 이해한다.’ 나는 들리는 음악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삶의 신비와 모순 그 아름다움과 비참함을 듣고 있지만, 또한 그것은 악사의 레퍼토리이며 다른 레퍼토리도 연주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이제는 음악만 듣지 말고 악사에게도 말을 걸어 대화를 하면 전혀 다른 실재도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이제는 또한 즐길 수 있다. 슬프고 눈물짓는 멜랑콜리한 음악과 가끔은 경쾌한 리듬의 변주곡을 넘어, 침묵, 출현과 부재, 말하기, 듣기, 접촉, 동행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눈을 통해 나를 보는 것을


(20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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